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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참으로 가혹한 말이다. 철저히 자신의 욕구와 욕망에 충실해 사적 이익을 추구하라는 의미다. 굳이 이와 같은 정언 명령 형태로 지침(?)을 내리지 않더라도 이 시대의 사람들은 충분히 제 이익에 충실하고, 자기 이외에 남을 돌보지 않는다. 그러니 이 말은, 현실이 그렇지 않으니 앞으로 그리해라, 라는 의미가 아니라, 있는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동시에, 정반대의 정언 명령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봐야 한다. 혹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이 시대에 개인이 살아가야 할 철학을 제시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자기계발, 처세술의 차원에서 제목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래, 맞다. 이 책은 '이 시대에 개인이 살아가야 할 철학'에 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다만, 남을 돌보지 않고 제 이익을 추구함으로써가 아니라, 남을 돌보며 함께 살아가는 길을 모색한다는 차원에서 그러하다. 단지 '입으로'가 아닌 '행동으로' 그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신자유주의. 최근 몇년간 참 많이 들은 용어다. 정확히 뭘 의미하고, 어디서부터 기원했는지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사람들은 우리가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며, 이 책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이라면 신자유주의가 개인의 삶을 파탄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사실 또한 이미 알고 있다. 이 책 곳곳에는 몸으로 체험한 이들의 사례가 실려있다. 여학생들은 제 몸값이 가장 높은 나이에 성매매에 나서며, 일제고사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한 아이는 모든(?) 서민들의 꿈이자 희망인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린다. 지금은 또 달라졌지만, '교육인적자원부'로 명칭이 바뀌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교육을 받는 아이들은 국가에 경제적 부를 가져다 줄 미래의 인적 '자원'이며, 매달 꼬박꼬박(?) 월급 받으며 한달살이 하는 직장인들은 단지 회사의 부품일 뿐이다. 부품은 고장나거나 낡으면 버리고 다시 갈면 된다. 직장에서 생활하는 시간은 하루의 절반 이상이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의 부품으로서 존재한다. 그나마라도 이들이 노동자로 인정을 받으면 다행이다.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이들은 노동자인 동시에 자영업자다. "그전까지 노동자는 언제나 개별 노동자로서만이 아니라 집단으로 존재해 왔다. 노동자는 사용자와 개인적으로 계약을 맺지만, 그 노동 계약은 노동자 개인이 아니라 노동조합을 통하여 전체 노동자 집단이 책임지면서 보호해 왔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에서 노동이 자영업화하면서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질과 성과에 대해 혼자서 책임을 지게 된다. 집단으로 존재할 수 없는 노동자는 그저 자기 몸에 대한 자영업자일 뿐이다." 회사는 개인이 내는 성과에 주목하며, 성과를 내지 못한 직원은 쫓겨난다. 개인이 자영업자임을 알 수 있는 좋은(?) 사례가 '연봉제'이다. 개인은 제 몸을 자원으로 회사와 몸값을 책정하고 계약을 맺는 작은 경영자이며, 이들은 (나이들어서도) 회사와 계약을 맺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해야 한다. 직장에서 하루 절반(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보내고, 남은 시간엔 영어 공부를 하든, 컴퓨터 자격증을 따든, 뭐든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회사는 더이상 이들을 '써주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쓰임을 당하기 위해서는' 개인은 제 몸에 대한 '경영'을 체계적으로 잘 해줘야 한다. 일용직 노동자나 계약직 노동자나 정규직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계약을 할 수 있고,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얻었지만, 우리의 자유는 그들에게 종속되어 있다. 과거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한데 비해 지금은 개인의 자유가 널리 보장된다. 하지만, 우리의 자유는 '국가'에서 '기업'으로 주인을 바꾸었을 뿐이다. 국가가 우리를 기업에 팔아넘겼다. 겉으로 보기에 사람들은 억압과 통제로부터 해방됐지만, 국가에 의한 노예 상태에서 '기업을 향한 자발적 노예 상태'로 바뀌었을 뿐이다. 알아서 각자가 삶의 방식을 선택하라. 하지만, 그 책임은 너희들 몫이다. 국가는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단 하나의 선택지를 따르며, 그에 따른 결과를 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다. 선택할 자유는 있되, 선택지는 하나인 시대를 살고 있다. 물론 이러한 흐름을 피해 작은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국가와 사회에서 마이너리티로 간주된다. 그 또한 하나의 선택이지만, 장기적으로 나 이외의 대다수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워야 한다. 암울한 현실을 깨고 나오기 위한 방법은, 우리가 수없이 들어온 '연대'와 '투쟁'이다. 우석훈이 <88만원 세대>를 쓰고, 제일 많이 들은 질문이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텐데, 그 대답도 '연대'와 '투쟁'이었다. 우리의 현실이 앞이 깜깜하다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 여기까지 오는 것도 힘겹다 - 언제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원한다. 연대와 투쟁이라니까 그럼 어떻게 하냐고 묻는다. 그건 질문하고 고민하는 자들의 몫이다. 저자는 교육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앎을 추구하게 하고, 진리를 향해 나아가며,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도록 북돋우며, 질문하기를 그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저자와 독자는 이 책을 통해 교육에 동참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 대답은 간단하다.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정확히 그 반대로만 하면 된다.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며 방황하는 사람들이 읽어야 할 삶의 지침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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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엄기호 지금 이 순간 공기를 통해서 숨을 쉬고 있듯이, 신자유주의는 우리에게 자연스럽고 이상적인체제로 인식되었다. 이것을 개선시키거나 없애는 것은 상상해선 안 되는 거라고 여긴다. 분명 신자유주의는 과거 신분제 시대 보다 개인에게 많은 자유를 부과했다. 이 ‘자유’는 개인의 능력을 중요시 여기고, 그 능력에 따라 성공도 실패도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개인의 자유)에 따른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종합적으로 신자유주의가 가진 의미를 말하면 다음과 같다. ‘당신이 어떠한 것을 선택하든지 발생한 결과는 전적으로 당신 책임입니다. 당신이 지금 부자인 것은 (투기를 하든, 사기를 치든,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든)당신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당신이 가난하다는 것은 (갑작스런 명퇴, 사회적 구조로 인해서, 임금동결 등)당신의 능력이 부족한 거고, 게을러서 가난해진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 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우리가 통념적으로 갖고 있는 긍정적인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본 신자유주의를 보여 주었다. 또 그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삶의 자세(?)도 알려주고 있다. P115 아무도 믿지 마라. 누가 언제 사기를 칠지 모른다. 누군가가 그것이 사기임을 알기 전에 먼저 사기를 쳐라. 그러면 돈을 번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마지막 도덕이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아무에게도 의지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자기 몸은 자기가 돌보라!’는 명령에 따라야 한다. 누구에게도 위로를 기대하지 말고 너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고 살라는 명령이다. 나머지는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알아서 조화를 만들어 낼 테니 말이다. 자유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이 정글에서는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와 태도도, 인간과 삶에 대한 감수성도 통째로 바뀌었다. 삶을 길게 보고, 계획하지 못하게 되자, 인생이란 늘 불안정한 상태에서 단기적으로 그때그때를 버티고 견뎌 나가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이것이 바로 민철 동생이 조폭이 된 이우가 아니겠는가. 자신과 주변의 모든 것을 자본으로 여기고 경영자가 되기를 훈련받은 타짜의 자식과는 달리, 초짜의 자식은 내일이 없는 오늘 하루의 인생을 살거나 그 하루하루 속에서 ‘인생 한방’을 꿈꿀 뿐이다. 이들은 교육을 통해 내일을 꿈꾸는 어리석고 미친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민철 아버지가 늘 고민하고 아이들에게 미안해하는 이유도 바로 이처럼 자신의 아이들에게 미래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폭이 된 아들에게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워서이다. 우리는 신자유주의 속에서 제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받아들였고, 수많은 직장인은 회사에서 짤렸고, 일부 가정들은 집이 아닌 거리에서의 삶을 시작도 했다. 그런 모습들은 매스컴을 통해서 보여 주었고, 실제 주변에서도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때에 받은 학습효과는 ‘평생 언제나 누구나 망하리라’라는 공포심을 갖았다는 것 이다. 이 두려움은 사람들을 몸부림치게 만들었다. 즉 망하지 않으려고 중산층에서 상류층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하층민으로 전락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몸부림은 다양한 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살기 위해서 아이들은 하루 몇 시간씩 공부를 하며, 특정 명문에 진학하려고 몸부림을 친다. 그의 부모는 그 아이 주변의 상황을 헬리콥터처럼 돌아다니면서, 최적의 공부환경을 조성하도록 적절한 조치를 한다. 대학생들은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판다. 그것이 육체적 노동이든, 신약 인체 실험이든 간에 말이다. 미래에 대한 대비로써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사회구조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의 팔 것이 없으며, 자신의 몸이라도 상품화시켜서 팔아야 한다. 위의 모습들은 신자유주의 속에 살아가는 모습이다. 이전시대보다 개인에게 많은 자유를 부과함에 있어 가장 나은 인간사회에서 체제라고 명명하지만, 실상 현실에서는 계층 몰락의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가 옳지 않는 게 아닌가? 그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생각할 점은 신자쥬주의가 내포하는 ‘자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자신의 자유를 위해 타인을 배제하고 이기심을 유발시키는 것 ‘자유’가 아니라 ‘무엇이 진정한 자유인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P110 결국 신자유주의의 사회에서 베스킨라빈스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국가이고 시장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베스킨라빈스화 되어 가고 있다. 시장은 소비자에게 가능한 한 많은 선택의 여지를 제공하고 국가는 그것을 권장하고 보장한다. 소비자가 더 선호하는 것은 살아남고, 외면하는 것은 도태된다. 여기에는 소비자가 선택하는 것은 좋은 것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으며 그것은 의심받지 않는다. 따라서 중요한 일은 31가지 선택의 자유를 늘리는 것이다. 신 자유주의 사회에서 나쁜 정부는 그 아이스크림이 국민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를 따져서 통제하고 관리한다. 반면, 좋은 정부는 만일 아이스크림이 몸에 좋지 않다고 하면 다른 기업이 그 옆에 자연산 과일주스 가게를 내게 하는 방식을 취한다. 신자유주의의 ‘자유’란 이처럼 ‘선택의 자유’,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선택된 것은 좋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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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0일 쌍용자동차 희망퇴직자 김모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홀어머니 아래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군에 입대했다가 직업훈련원을 거쳐 2000년 쌍용차에 입사했다. 외아들을 홀로 키워내신 어머니는 ‘최고의 직장’에 들어간 아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그는 10년 동안 쌍용차 조립 공정 등에서 일하며 동료들과 어울리며 더 착하고 더 명랑한 사람이 되어갔다. 월급날이면 동료들에게 삼겹살에 소주 한잔을 사던 그는 그렇게 우리가 아는, 동네에서, 직장에서 마주칠 수 있는 보통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어머니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야만 했다. 2009년 여름, 77일에 걸친 정리해고 반대 파업에 참여한 것이 그의 유일한 ‘잘못’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노조 활동을 그렇게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50여 일을 동료들과 함께 공장에서 먹고 자다가, 경찰의 강제진압이 있기 전날 공장에서 나왔을 뿐이었다. 때문에 그가 참여한 날은 76일이다. 그는 지체 없이 희망퇴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그는 다시 동료들을 보고 싶었다. 말만 희망퇴직일 뿐 그가 10년을 일했던 그 일터에서 그 동료들과 함께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재취업이 이뤄지지 않았다. ‘쌍차 출신’이라는 족쇄가 그를 오도 가도 못하게 했다. 쌍용차에서 협력업체를 압박해 인근 지역에서는 취업이 안 된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이력서에 “쌍용차 이력을 지우라”는 충고도 들려왔다. 성실히 일한 10년이 오히려 그에게 족쇄가 됐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거나, 돌연히 세상을 떠난 동료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강제 진압의 끔찍했던 날의 기억, 그 기억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모든 것을 뒤바꿔버렸다. 2009년 여름 이후 지금까지 김씨와 같은 길을 떠난, 쌍차 노동자, 가족들은 17명에 달한다. 세상에 이런 무관심이 있을까. 전염병이 돌아 전국에서 17명이 죽었다고 해도 이렇게 무관심할까. 이렇게 나 몰라라 할 수 있을까. 자본과 기업의 악랄한 탄압,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 장장 77일 동안 ‘위대한’투쟁했던 그들에게, 고작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 배제와 무관심 그리고 죽음이란 선물을 줘야만 했을까. 얼마 전 부산에서 열린 국제영화제 기간 동안 부산시는 ‘희망버스’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국제적인 행사에 ‘창피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헛소리에 당연히 희망버스는 출발했고, 경찰은 물대포를 쏘아가며, 무차별 연행해갔다. 김진숙 동지가 크레인 위에서 외로운 투쟁을 한 지 얼마나 지났는지, 아는가? 그녀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그리고 이젠 다가가온 매서운 추위 속에서, 도대체 얼마나 더 싸워야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비로소 ‘상식’이 될 수 있을까. 국민들은 김진숙 동지가 심심해서 그 높은 크레인 위에서 생명을 걸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MB가 미국 가서 펜타곤 방문한 게 더 중요한가, 나경원의 외모가 더 중요한가. 《닥쳐라, 세계화!》를 통해 신자유주의의 전 지구적 공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던 저자가, 이번에도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정착 그리고 그 해법을 고민한다. 사는 게 더 이상 사는 게 아닌 세상. 오직 한 사람만 살아남을 때까지, 죽어라 탈락자를 양산해내는 지옥의 서바이벌 게임. 그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저자는 “현실은 이미 나의 문제로 바싹 다가와 있는데도 신자유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여전히 ‘나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교묘하게 자신을 속이도록 만들고 있다. 이 착각에 말려 버리면 우리는 세상을 보는 눈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경고한다. 금융자본주의라는 희대의 괴물을 탄생시킨 신자유주의는 이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오직 고객으로만 계산한다. 때문에 고객이 될 수 있는 경제력이 없으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사람도 그 무엇도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존엄성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다. 오직 자신의 더 높은 금액에 팔기 위해, 처절한 경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자신이 태어난 가정이 어떤 경제적 위치를 확보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된다. 우리는 과거 신분제도가 사라졌다고 믿지만, 정작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도의 카스트제도에 버금가는 돈의 신분제가 버젓이 살아있다. 성형수술을 제일 많이 하는 이들이 실업고 여학생들이라는 비참한 현실. 더 예뻐지겠다는 허영심, 사치가 아니라, “살기 위해”성형을 해야 하는 아이들. 그리고 그 돈을 벌기위해 원조교제까지 해야 하는 아이들. 가진 게 없으면 네 육체라도 팔라고 강요하는 사회. 예외가 규범이 되고, 규범이 예외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남을 돌볼 수 없다. 신자유주의는 남을 돌보지 말라고 충고한다. 오직 너의 소비자로서의 가치만 키우면 된다고 선언한다. 정부 역시 필요 없다. 정부가 괜시리 소비자의 세금을 뜯어내 비소비자들의 복지를 책임질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위대한 시장이 알아서 하모니를 맞출 것이다. 다만 정부는 강한 경찰력, 군사력으로 내외의 적을 탄압하기만 하면 된다. 사회의 불만을 가지고 있는 세력들을 응징하기 위함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알콩달콩 살아가는 소시민적 삶마저 허용하지 않는 사회, 사랑도, 섹스도 사치가 되어버린 사회. 위로마저 돈으로 환산하는 사회. 실업이 규범이고, 취업이 예외가 되어버린 사회. 신자유주의가 강요하는 공포로 인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사회. 더 이상 희망이 있을까. 아니 희망이란 것이 존재하기는 했을까. “기업이 주도하는 세계화 시대에 가난은 범죄이고, 더 가난해지는 데 항의하는 것은 테러”가 되어버린 사회, 신자유주의적 개발의 희생자가 “희생자로 남기를 거부할 때 그들은 곧 테러리스트”가 되어버리는 사회. 정부, 경찰특공대(경찰이 군대화 됐음을 의미한다. 경찰은 시민의 안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작전’을 통해 진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이 될 수 없다)에 의해 학살당한 용산 철거민들은 더 이상 희생자이길 거부했고, 그 대가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죽어서도 ‘도심 테러리스트’란 누명을 써야만 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신자유주의는 오로지 개인의 자유, 소유에 대한 자유로부터 출발한 근대 자유 개념의 극한이다. 때문에 그것이 틀렸다는 인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유는 개인이 소유하는 대상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존재라는 점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개인의 사변과 이념으로 고립되지 않고 세상으로 나오려는 치열한 협력적 운동. 사유의 운동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임을, 내 가족과 친구들의 일임을, 그래서 단순히 방관자의 위치에서 머물지 말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 그것이 저자의 마음이다. 이제 서울시장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평생 혼자만 잘 살아온 이와 30년 동안 남들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한 이의 대결이다. 말을 그럴듯하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전국을 누비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공부하고 그것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길을 찾아온 사람. 그리고 그냥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학벌을 가지고, 유창하게 언변을 구사하지만 거대한 사학재단의 그늘에서 자기들만 잘 사는 것에 익숙한 사람. 답은 나와 있다. 쌍용자동차는 17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아무 문제없다는 듯, 차 팔기에만 전념한다. “바로 서고, 함께 서고, 다시 서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말이다. 함께 선다는 것은 노동자와 국민이 아닌 자본과 권력, 신자유주의임을 말하고 있다. 선거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끊임없는 관심과 참여가 우선이다. 왜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와야만 하는지, 왜 물대포를 맞아가며 싸워야 하는지, 알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 물대포는 더 큰 재앙이 되어 우리를 겨눌 것이다. 지금의 물대포를 두려워하지 말고, 내 양심의 부패와 내 정신의 썩어감과 내 존재의 가치 상실을 먼저 두려워해야 한다. “태양을 한번 본 자는 눈이 멀겠지만, 그렇게 보지 않는 이상 태양은 그저 꿈꿀 수밖에 없는 대상일 뿐이다” 눈이 멀더라도 태양을 직시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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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뉴라이트]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것이 언제였을까. 일년 남짓 들어온 이 단어가 지겹도록 친숙해져버렸다. 학교는 뉴라이트 계열이 되었다고 말한다. 매년 해를 거듭할수록 등록금투쟁에 참여하는 학생이 줄고 학생회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은 느꼈다. 나 역시 학생회는 아니었으므로 그냥 그런 이야기가 술자리 안주였을 뿐이다. 주변친구들 중에는 소수의 잘나가는 아이들도 있지만 많은수가 취업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힘들게 들어간 회사도 인턴이나 계약직이다. 인턴제나 계약직이 미래로 가는 어쩔 수 없는 변화라고 하지만 막상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의 처지를 봤을 때는 서글퍼진다. 이것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 우리가 이런 대접 밖에 받을 수 없는 존재인가 삶 자체에 회의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누가 내게 [신자유주의]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몇 개의 단어를 열거할 수 있을까. 모안티카페에서 활동할때 나는 덮어두고 욕하고 싶지 않아 책을 몇 권 찾아읽고 모임에 가봤다. 가슴이 뜨거워졌지만 실천하지는 못했다. 그냥 인식하고 있는 것도 힘이다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나는 지금도 실천적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우선 내코가 석자다. 그렇지만 현실을 알고 누군가의 질문에 답이라도, 작은 도움이라도 되야겠다 싶어 오늘도 책을 읽는다.
엄기호의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의 제목은 극단적이었다. 이것은 다시보면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고, 나 역시 누구를 돌 볼 형편이 못되며, 누구도 내게 기대할 수 없고 나 역시 누구에게도 기대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말한다.
제목을 풀어쓰니 더 복잡한 이야기가 되버렸다. 하지만 내용은 명쾌하고 어렵지 않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눈치를 보고 발버둥치며 살아야한다. 우리는 자신의 장단점을 인지하기 전에 우리집의 형편부터 인지하게 된다. 친구와 우리집의 평수가 다르고 사는 동네가 다르면 위화감을 느낀다. 개천에서 용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그렇게 그럭저럭 공부를 했고 그저 소시민인 부모님은 우리자식들은 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대학 뒷바라지를 해준다. 하지만 우리는 최고의 명문대에는 가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등급이 맥여진다. 전체 수험생의 4%에 들어가지 못하면 우리는 밀려나고 삼류대생, 혹은 지방대생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대학의 낭만은 사라진지 오래다. 편입을 준비하고 고시를 준비하고 토익을 준비하며 계속 시험에 쫓긴다. 하지만 시험은 녹녹하지 않고, 좀 더 나은 대학에 편입을 성공하고 좀 더 나은 토익점수를 받는다고 해서 비정규직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게으르거나 혹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만 일어나는 상황이 아니다. 누구나 망할 수 있는 사회. 누구든 탈락해버리는 사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런 오금저린 세상에 대한 우리의 자세에 대해 되짚어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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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에서 이 책을 추천했을 때 제목이 눈에 띄었다. 2009년 5월 출판이니 1년이 지난 책인데 관심권에 든 것은 잡지 기자가 독자를 홀릴 만한 필력을 가졌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 제목은 반도덕적인 문구다. 어릴 때부터 남을 돌보는 것을 미덕으로 교육받았고 개인주의가 팽배하는 시대에 우리 나라 전통의 미덕이 서구의 것보다 훨씬 낫다는 민족의식차원에서라도 이 제목에 동의할 수는 없어서다. 그런데 저자는 국제질서와 경제현상을 설명하면서 철저히 개인에 충실하고 또한 개인보호란 미명하에 가진 자의 이익을 더 추구하게 하는 신자유주의를 실랄하게 비판한다. 남을 돌보는 거룩한 자비행위가 오히려 자신을 더 초라하게 만들고 국가가 요구하는 국민상을 만들어 기득권층을 유리하게 한다는 것이다. 가지지 못한 자, 억압받는 소수자는 영원히 팽 당하는 이 시대를 어떻게 바꿔야 할 지 그 스스로도 풀 수 없는 큰 주제이긴 하지만 저자는 '사유하는 인간'을 주장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도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당할 수밖에 없다. 다소 확대해석도 있지만 이런 주제로 차분히 쓴 글다운 맛은 있다. 다만 이런 책을 누가 읽느냐는데 문제가 있지 않겠는가. 저자의 주장이 더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려면 수많은 책 중에 깔려 비명횡사하는 책으로 사라질 뿐이니 말이다. 제목에 찔린다면 일독하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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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여러 모습들을 우리 주변의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할 때, 한마디로 이 책의 제목처럼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즉 모두가 경쟁자인 무한 경쟁의 시대인 것이다. 책에 소개되는 몇 가지의 경우를 보자. 공무원준비를 하고 있는 고시생의 경우에 공부하는 시간외에는 모두 사치이다. 즉 친구를 만나거나 사귀는 것이 모두 금지된다. 지방대생의 연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지방대생이 취업을 염두에 두고, 결국 수도권으로 이동을 하는 순간 지방대생의 연애는 깨진다. 즉 시한부 계약 연애인 셈이다. 초등학교, 중학생의 경우도 좋은 대학, 학벌을 얻기 위해, 특목고 준비를 하고, 또 그래서 학원으로 학원으로 다닌다. 그 학생들의 부모는 아이에게 출발을 좋게 하려고 막대한 교육비를 투자한다. 가장 성형을 많이 하는 사람이 실업계 여고생이라는 부분도 슬프다. 몸이 예뻐야 팔리고, 몸이 예쁘지 아니면 사생활이라도 팔아야 하고, 그마저도 팔 것이 없으면 이젠 탈락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서는 소비를 하지 못하면 잉여 인간이 되고 만다. 즉 소비를 하기 위해 뭔가를 팔아야 하는 아주 슬프고도 우울한 시대이다. 가장 큰 공포는, 경쟁이라는 것, 그리고 탈락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즉 끊임없는 경쟁을 하고, 그 경쟁에서 밀리는 순간 당신은 혹은 나는 아웃이다. 국가조차도 패자에 대해서 보호해주지 않고 있다. 팔 것이 있는 자, 혹은 소비를 할 수 있는 자만이 국민이란 말인가? 정말 우울하고 슬픈 시대, 신자유주의 시대이다. 이 책에서 희망을 가지는 것은 민철이의 한마디이다. 민철이의 가족은 IMF 경제위기에 아버지의 회사가 파산을 하고, 가족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을 하였다. 그리고 집은 지하방으로 이사를 하여, 민철이와 동생은 각자 따로 나와 살고 있으며, 새로 재혼한 아버지의 경우에도 새어머니와 살림을 합치지 못하고 있다. 동생은 폭력조직에 가담하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민철이의 한마디는 다르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에요. 우리 가운데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어요.” 이것이 인식의 시작일 것이다.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의 마지막 장 말대로 사유와 연대의 페다고지를 향하여가 나아가야할 방향으로 생각된다. 신자유주의의 모순이 점차 드러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의 끝이 곧 보인다는 느낌이다. 사유를 멈추지 말고 계속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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