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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무에서 '무'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사실
"존재와 무에서 '무'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사실" 내용보기
머리글 : 존재의 탐구 이원론을 지양하고 일원론(?)이라고 할까? 애매한 구석이 많다. 이원론은 현상과 본질을 구분한다. 그래서 이해가 쉽다. 그러나 일원론은 그렇지 못하다. 적어도 절대자, 혹은 신을 믿는 사람에게 일원론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과감하게 샤르트르는 일원론을 지향한다. '존재'는 그 자체로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런데, 이 존재의 생성은 머리글
"존재와 무에서 '무'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사실" 내용보기

머리글 : 존재의 탐구

이원론을 지양하고 일원론(?)이라고 할까? 애매한 구석이 많다. 이원론은 현상과 본질을 구분한다. 그래서 이해가 쉽다. 그러나 일원론은 그렇지 못하다. 적어도 절대자, 혹은 신을 믿는 사람에게 일원론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과감하게 샤르트르는 일원론을 지향한다. '존재'는 그 자체로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런데, 이 존재의 생성은 머리글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태초부터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존재'가 세상을 만든 것인지는 알 수 가 없다. 데카르트는 의식이 있기에 존재한다고 이야기 하는데, 샤르트르는 존재가 있어야 의식이 있다고 이야기 한다. 데카르트의 동시성을 샤르트르는 부인한다. 사실, 데카르트의 의식은 선험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샤르트르는 그러한 선험성을 존재에 부요하는 듯 하면서도 설명하지 않는다. 어쨌든 의식은 존재에 대한 것이지 동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 샤르트르의 분명한 생각이다. 이원론에서 객관과 주관은 그 관계에 있어서 객관이 진리이다. 그러나 샤르트르는 객관화 시킬 수 없다고 이야기 한다. 그저 주관이 있다라는 것이다. 이원론 속에서 객관과 주관을 나누어 본질을 추구하는 반성적 자태를 부인하고 주관만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절대성을 지워버린다. 존재는 절대적인 것이다. 존재 자체로 절대적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절대는 '옳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는 어쨌든 답이다. 그러나 시비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 자체가 인정 될 뿐 이다. 그래서 남는 의문은 이러한 존재의 범위가 생물학적으로 어디까지 인정 될 수 있는가? 이다. 의식이 모든 동물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체계화 시킨 동물이 인간에 불과하다면, 존재 또한 인간이라 지칭 되는 존재에 제한 될 것이다. 인간의 유한성, 물론 샤르트르는 무한성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인간이라 지칭한다면, 그저 인간일 뿐 이다. '존재'로서 인간일 뿐 이다. 진화론이 제시 되지 않았기에 존재의 출현에 대한 의문은 더욱 커진다. 앞으로의 서술이 더 기다려 진다.

 

1 부 무의 문제

1장 부정의 기원

존재의 부정은 비존재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존재는 존재가 있어야 성립할 수 있는 것이어서, 원래 존재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원론적인 체계에서는 비존재가 위의 방식을 따른다. 샤르트르는 이러한 방식을 극복하고자 노력한 것 같다. 이원론을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전개 되어야 하기에, 또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무'의 문제를 다루면서 과연 존재가 있어야 가능한 비존재, 그리고 '있다'라는 것에 대한 '없다'라는 것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이원론의 체계에서는 간단하다. 초월적인 존재가 부여한 본질(진리)만이 참다운 존재이고 나머지는 그저 진리로 향하는 허상일 뿐 이다. 그러나 이원론의 체계를 배격한 샤르트르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자유'를 가져 온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는 가능성이 되고 이러한 가능성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차원에서 불안의 요소가 된다. 샤르트르에게 불안은 변증법적일 수도 있다. 물론, 그는 그렇게 주장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불안을 통한 존재의 '무화'에 긍정이든 부정을 입히면 어쨌든 변증법적인 체계를 가져 온다. 도식화가 가능한 것이다. 적어도 본 장에서는 그렇게 읽힌다. 아직 이루어진 것 없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차원에서의 '무화'는 단순히 부정을 넘어선, 가능성이라는 차원에서 말 그대로 자유롭게 보인다. 이러한 자유를 통해서 샤르트르는 본질을 고정화 시키지 않는다. 즉, 본질이 변화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진화라는 표현으로 쓰이진 않았지만, 베르그손의 '지속'이라는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하다. 
샤르트르의 자유, 가능성, 무화 등의 개념은 사실, 억지스럽다. 자유라는 것 자체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고, 작동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모색이 생략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거를 존재 속에서 찾고 있지만, 그 존재 자체가 어디서 기원 된것인지를 증명하지 못하면 샤르트르는 모래 위에 서있는 것일 뿐 이다. 인간에 대한 기대는 인간의 기원이 명확하게 될때 존재하기 쉬운 법이다.

 

2장 자기기만

쉽게 이야기 해서 자기기만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자기기만은 일상적이다. 샤르트르는 예로 신앙을 들었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진실로 믿는 것이 기만이라는 것이다. 신을 믿지 않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사고이다. 부정할 수 없다. 스스로 신앙 앞에 자신을 맞추는 인간은 신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다양한 신앙인들의 모습 속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원론적으로 신이 없다고 한다면 신앙은 그저 믿을 대상이 없는 데도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니, 기만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 믿고 싶어서 기만이 되는 것이고, 스스로 진리를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기만이다. 샤르트르에게 고정된 것은 없다. 의식은 변화하고 기만의 가능성을 늘 지닌다. 무화는 고정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가능성이라고 열어 놨을 때 실상, 존재 보다 무가 중심에 있다. 왜냐하면 고정된 본질이 없다고 했을 때, 진보하든지 퇴보하든지 방향이 정해지고 진행되기 때문이다. 물론, 더 다양하게 논의 해 볼 문제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기만의 존재는 '인간' 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샤르트르는 실존주의자이다. 세계에 대한 것 보다 인간의 의식을 더 따지는 그에게 인간은 확립된 주체를 가질 수 없다. 주체를 설정하는 순간 기만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르트르는 이전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 신앙이 기만이라는 것은 절대자의 부재 상황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샤르트르는 절대자 부정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것이 논의의 한계가 되고 비판의 핵심이 된다.

 

2부 대자존재

1장 대자의 직접적 구조

'즉자'가 등장했고, 이제 '대자'가 나온다. '대자'는 전체를 대신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 상대적이지만, 결여된 각 부분을 표상하기에 절대적일 수 있다. 어차피 샤르트르에게 절대적인 것은 없다. '가능'은 열린 것이고, 넘어서는 것이 된다.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기에 '무'이기도 하지만, 샤르트르의 무는 부정이지만, 반드시 부정은 아니다. 가능성, 오히려 긍정을 넘어서는 가능성이다. 물론, 그에게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여겨지는 것 같은데, 실상 그 무한한 가능성을 아무도 겪어 보지 않았다는 차원에서 샤르트르는 시작부터 한계에 직면한다. 인간의 유한성을 그는 왜 생각하지 못했는가? 수많은 '대자'를 만들지만, 이 '대자'가 본질은 아니다. 본질 자체가 긍정되기 보다는 무화된다고 여기는 그에게 '신'의 부정은 곧 또 다른 신을 만들어야만 했다. 신이 아닌 존재. 그가 인간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에게 무한성을 공급했는가? 인간의 한계의 선을 왜 그는 긋지 못했는가? 결국, 또 다른 신으로서 인간을 상정한 것에 다름 아니다.

 

2장 시간성

샤르트르는 시간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고, 정적이고 동적인 시간 등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샤르트르에게 있어서 시간은 '현재'에 촛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미래 역시 크게 주목할 것이 못된다. 과거는 대자지만, 과거에서 대자는 즉자가 된다. 왜냐하면 이미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현재라는 시간은 존재하는 것 같지만, 순간적인 시간의 연속이라는 차원에서 실제로 존재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적어도 정적인 순간으로 나누지 않으면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베르그송이 이야기 한 부분과 일맥상통한다. '지속'이라는 개념은 어느 정도 이해되지만, 분할 된 시간을 뚝뚝 떼어 놓고 생각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것은 의도적인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솔직히, 샤르트르의 시간성은 난해하다. 억지처럼 보이기도 하다. 시간 속에서 이를 인식하면서 살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만이 시간 이라는 개념을 가질 수 있다. 동물들도 시간 속에 살아가긴 하지만, 시간을 계획하지는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샤르트르의 시간성은 인간의 전유물이 된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볼 것은 현재에 대한 것이다. 현재의 '무화'는 불안하지만, 자유롭고 그 자유로움으로 인해 '가능성'이 생긴다. 그 가능성이 다른 말로 긍정적인 의미에서 발전이라고 하기에 미래는 있을 수 있다. 단, 불안한 현재가 가능성으로 있기에 미래가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샤르트르에게 현재는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면서 긍정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파생되는 것이다.

 

3장 초월성

초월성에 대한 정의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의식의 기원도 이야기 하지 않는 것 처럼. 의식과 초월성은 다르지만, 현실적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의식의 기원을 따져보기 힘들고, 혹 따진다 하면 절대자로 귀환된다. 그렇게 되면 이를 거부하는 샤르트르에게 난감하게 된다. 초월성도 마찬가지다. '대자'를 놓고 가능성이라는 언어를 가지고 초월성을 따져 보기에는 대자라는 저자의 상상물이 구체화 되지 않는다. 자신을 자각하고 대립하는 '대자' 스스로를 인식하고 반성하면서 보다 발전적인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대자', 역시 가공의 개념이다. 의식을 규명하지 못하기에 과거에 귀착된다. 왜냐하면, 과거라는 시간으로부터 근거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초월성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샤르트르는 구체적인 초월성 언급을 피하면서, 이런저런 초월성을 이야기 하는데,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초월성과는 다르다. 인간을 넘어서는 것, 자신을 넘어서는 것, 세계를 넘어서는 것, 초월성을 지니기 위해서 '무'가 필요한데, 이 '무'는 가능성이라는 문자적 해석은 되지만, 직접적으로 규명될 수 없다. 그저 샤르트르의 사고 속에서 초월이 가능한 절대자를 애써 부인한 댓가의 십자가라고 여겨질 뿐 이다. 존재는 있으나, 기원을 따져 볼 수도 없고 초월성을 언급하나 역시 구체적으로 어떤 식의 초월성인지를 제시하기는 힘들다. 관념론을 부인한 것까지는 좋으나, 차라리 유물론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은 대구라도 될 것인데 샤르트르는 그러한 대구를 찾지 않는다. 또 다른 방안, 신도 아닌, 물질도 아닌, 인간 자체의 분석을 통한 가능성을 모색할 뿐 이다.

 

3부 대타존재

1장 타자의 존재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이제 타자로 넘어간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 타자에 관련한 것이다. 철학이 대체로 자신의 사유 속에서 이루어지기에 타자의 존재는 늘 무시되거나 과소 평가되기 마련이다. 긴 지면을 할애해서 샤르트르는 타자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나와 타자를 엮어주는 것은 '시선'이다. 주로 타인의 시선을 가지고 그는 생각을 전개하지만, 엄격히 따지면 서로의 시선의 가능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타자의 시선은 나를 바라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타인을 바라보지 못할 경우가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가 타인에 의해 평가 되고, 나는 부끄러움, 혹은 당당함 등의 태도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전제 되는 것을 샤트트르는 놓치고 있다. 부끄러움, 당당함 등에 대한 나의 태도가 있기 위해서는 타인의 시선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매겨야 하는 것이다. 타인, 나와 동등성을 가진 타인이라고 할 때, 나보다 상위인 타인이라고 할 때, 나보다 하위인 타인이라고 할 때 등으로 구분 한다면, 솔직히 타인의 시선은 곧 나로 인해 그 시선의 위치가 달라지는 것이다. 선험성을 무시했지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만큼의 선험성이 존재한다는 것도 샤르트르는 간과 하고 있다. 물론, 세상을 '유아론'적으로 보는 오류를 지적한 것은 당연하며 샤르트르의 뛰어남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를 구성하고 '대자'와 같은 '대타자'를 구성한 것은 복잡하기는 하지만, 충분히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고 여기서 파생되는 경우가 훨씬 복잡하기에 명확하게 증명하기도 힘들 것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타자' 둘 만을 가지고 전개하는 흐름과  '나', '대자', '타자', '대타자'를 놓고 전개되는 사고의 흐름은 그 변화의 폭과 설명의 폭이 상당히 힘들다. 이런 난점 때문에 샤르트르는 쌍방의 시선을 고려할 수 없게 된다. 물론, 무한한 가능성의 '무'를 등장 시키지만 이러한 노력은 솔직히 애써 신을 지우기 위한 고달픈 여정일 뿐 이다. 
여전히 샤르트르의 의식과 초월성은 등장하지만, 근거는 없다. 혹, 굳이 있다고 한다면 '우연성'이다. 진화 자체가 '우연성'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샤르트르의 생각은 우연의 연속이다. 우연에 있어서 목적은 명확하지 않다. 도달점이 없다. 시비가 존재할 수 없다. 존재는 무화 되고 이러한 무를 통해 발전한다고 생각하는 샤르트르의 발전은 도대체 무슨 발전인가? 아마도 그에게 발전과 퇴보는 기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샤르트르의 사고의 흐름은 과거의 철학을 비판하면서 진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철학도 깨질 준비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아니 깨져야 더 나아 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철학인 것이다. 남는 존재는 없다. 그냥 무화 되어 발전의 가능성이 있는 것만이 있을 뿐 이다. 혹, 이 것이 초월이라면 이 초월은 더 이상 긍정적인 초월이 아니다. 부정의 이미지도 샤르트르에게 더욱 의미가 지어진다. 초월자의 부정이 초월성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 종점은 어디인가? 결국 종점은 없다. 무한한 부정의 부정만이 존재해 진행 될 뿐 이다.

 

2장 몸

철학에서 몸은 형이하하적인 것으로 형이상학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할 때 이원론적으로 보면, 그저 아랫도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형이상학적인 관념론, 혹은 절대성을 부정하는 샤르트르에게 몸은 그저 물질을 넘어서서 세계의 전체가 된다.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을 부정하기에 몸에 대한 가치는 상당히 커지게 된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몸이다. 샤르트르의 한계는 인간 각각의 우주적 구조와 의식이 중요한 것이었지, 다른 사물에대한 가치는 크게 평가되지 않는다. 주로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인간은 세계의 전부가 되고 그 모든 행동들이 우연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적이 없는 것이 아니다. 도달해야 하는 꼭대기는 아니지만, 인간 자체가 목적인 셈이다. 인간존중이라는 차원에서 샤르트르의 실존주의는 다른 사상의 것보다 탁월하다. 그래서 복잡하다. 몸은 단순히 육체가 아니라 세계가 된다. 그리고 우주를 담고 있다. 정신이라는 언어를 피하고 있기에 몸이 짊어지고 가야하는 부담이 더 크다. '대자의 몸', '대타의 몸',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보여지는 또 다른 제3원리의 몸. 복잡하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 문제는 대자의 몸과 대타의 몸에서 샤르트르는 후자의 몸에 좀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내 몸을 내 스스로 보기 힘들다는 것인데, 그에게 '거울'은 생각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보고 싶다. 내 몸을 규명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대타'를 통해서 이다. 결국, 관계라는 개념을 가져 올 수밖에 없다. 혼자서 스스로 설 수 없는 인간인 것이다. 자신만의 우주를 상정하지만, 이것도 관계 속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홀로서기를 샤르트르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몸'에 강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샤르트르의 한계라고 생각되고, 그렇기 때문에 복잡하게 이를 설명해야 하는 짐을 그는 복잡한 설명을 통해 해결해야만 했다. 그런데, 결론은 복잡하기에 비판 거리가 너무 많아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판에 대한 답을 일일이 할 수 없는 것도 그의 한계라고 봐야 할 것이다. 

 

3장 타자와의 구체적인 관계

타자와의 구체적인 관계를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 타인의 시선과 관련한 것으로 둘의 관계에 있어서 주도권을 타인이 가지고 있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내가 어느 정도 규정 된다. 이런 개념으로 사랑, 언어, 마조히즘을 이야기 한다. 둘째, 반대로 내 시선으로 타인을 보는 것이다. 이럴 경우 내가 주도적 위치가 된다. 무관심, 욕망, 증오, 사디즘이 샤르트르가 생각해 낸 개념이다. 마지막으로 공동존재라는 개념의 '우리'이다. '우리'역시 대상으로서의 '우리'와 주관으로서의 '우리'로 구분된다. 타자를 규정하고 그 가운데서 발생할 수 있는 관계를 그대로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마땅히 답은 없다. 이 모든 것이 복잡하게 섞여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샤르트로 역시 이 부분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도식화를 시킨 것이다. 샤르트르의 개념은 일원론을 지향하기에 절대자는 부인하지만, 새로운 절대자로서 인간을 만들어 내고 있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샤르트르의 실존주의는 그가 만든 '신'을 구상하고 세우는 작업이다. 그렇다고 제대로 수립하지도 못했다. 복잡한 가운데, 그가 외쳐대는 초월성이라는 개념은 너무 추상적이고 무화의 가능성이라는 부분도 그저 허탈할 뿐 이다. 보이는 것은 인간이고, 인간의 의식은 보이지 않아도 있다고 가정하는 것인데, 가정이 아니라 현실화 시켜 버렸는데, 이 현실화 근거는 진화론도 아니고, 창조론도 아니다. 타자와 관계 속에서 그는 프로이드의 리비도의 개념을 가지고 설명하기도 한다. 성욕에 대한 그의 해석은 새로울 것도 없고, 그렇다고 철학적이지도 않다. 그저 프로이드의 리비보를 해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굳이 마조히즘과 사디즘을 타인을 설명하는 하나의 개념으로 쓸 이유가 있었을까? 샤르트르는 많은 내용을 거인들에게 신세지고 있다. 물론, 그 거인들은 그 전의 거인들에게 빚지고 있다. 이러한 근원을 정리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샤르트르의 실존 논의는 지금 당장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 적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코 근본적인 것을 따지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4부 '가짐', '함', '있음'

1장 '있음'과 '함' - 자유

4부는 개별적인 설명이기도 하겠지만, 3부까지와는 다르게 적용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함'이라는 행동(행위)가 보다 더 길게 설명되고 있다. 즉, 행동하지 않는 것은 즉자에 해당하는 것이고, 대자는 행동하면서 선택한다. 이때 반드시 같이 동반하는 것이 '자유'이다. 샤르트르에게 행동은 제한 되지 않는다. 행동이 없는 것은 자유가 없는 것이고 대자로서의 위치를 고수할 수 없게 된다. 대자가 아닌 것이다. 즉자라는 고정된 실체는 과거의 그대로 있는 것으로 대자로 살아가는 인류는 행동을 끊임없이 한다. 적어도 선택의 행위를 지속해 간다. 물론, 이 부분에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 선택이 필요 없는 경우도 있다. 샤르트르에게는 태어남 조차 선택의 과정이라고 보는 듯 하다. 그러나 태어남 자체는 주어질 수밖에 없다. 자살하지 않았기에 선택했다는 표현은 맞지 않다. 왜냐하면 샤르트르가 생각하는 선택이라는 개념은 태아가 인식할 수 도 없고, 자살이라는 것도 실행할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즉, 이후에 그 삶을 선택한다고 한다면 이해할 수 있으나, 태어남 자체에 능동성을 부여하는 것은 비약이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가 아무리 죽음을 타자를 통해 인식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나에게 자유는 없다. 끝난 것이다. 이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샤르트르의 한계는 시작을 규명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시작이 명확하게 존재하지 않기에 그가 이야기 하는 수준은 과정이다. 그래서 과정이라는 선택,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목적이 정해져서 가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선택, 그리고 정해지지 않은 목적을 지향하는 수준이라는 그의 철학은 애매모호해 질 수밖에 없다. 존재 보다 '무'에 방점을 찍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명확한 시작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샤르트르는 자유에 대한 책임을 인간에게 돌린다. 이 부분은 대부분 옳다. 시작점을 신이라고 하고 그러면서 자신의 성과를 신에게 돌리는 인간의 프로그로데크스식의 짜 맞추기는 지양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질 수 있는 책임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규명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 샤르트르의 책임론은 한계를 갖는다. 전쟁에 동참하기로 동의했다라고 해서 그것을 온전히 그의 자유라고 볼 수는 없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까지도 샤르트르는 염두해 두고 있으나, 인간의 세뇌라는 부분, 관습이라는 부분을 너무 취약하게 인식하고 있다. 내가 참전하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참전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도피하면 된다? 내가 도피했을 경우 내 가족이 죽는다고 한다면 이 역시 이러한 상황을 고려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사회구조가 아닌 개인에게 책임을 부여해야 옳은가? 샤르트르의 인간은 거의 초인에 가깝다. 실제로 존재하기 힘든 인간인 것이다. '발전 가능한 인간'이라는 생각은 동의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으로 '퇴보 가능한 인간'도 인정되어야 한다. 진보와 퇴보가 정리 되어 있지 않다는 차원에서 샤르트르는 일방성만을 고려하고 있다. 아니면 인간의 판단력을 너무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은 샤르트르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로이 선택을 할 수 있는 대자들의 모임이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인간에게 무거운 책임을 지워주게 되면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발생한다는 것을 그가 몰랐을까? '존재와 무'가 1943년에 나왔다는 것을 고려할 때 그랬을 수도 있다.

 

2장 함과 가짐

본문의 마지막이다. 샤르트는 여기서 소유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 소유를 부정하고 있지 않다. 소유에 의미를 두고 있다. 가지고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고 해서 물질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객체로 인정 받을만한 물질에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고, 이것은 곧 이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과 관련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행동하는 것, 가진다는 것, 모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신을 탄생시키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한에서는 자기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의 관념은 모순되어 있다. 우리는 헛되이 자기를 잃어버린다. 인간은 하나의 이로울 것이 없는 수난이다."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하는 모든 사고는 신의 부정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마지막까지도 인간은 신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어려운 과정이 지속될 뿐 인 것이다.

 

결론

즉자와 대자의 모색은 새로운 시도였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파헤치고 책임을 부여한 것 또한,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질 수 있는 책임의 한계를 샤르트르는 생각지 못했고, 대 사회적인 인간을 구상하기 보다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구상한 것은 앞으로 그 사상 발전의 계기가 됨과 동시에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YES마니아 : 로얄 b*****c 2016.01.12. 신고 공감 8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