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음반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정도가 될게다. "장중하며 묵직하다. 그래서, 지독히 리히테르스럽다" 리히테르의 연주에서 느껴지는 가장 큰 특징은 뭐니뭐니해도 그 가공할만한 전달력이다.우악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묵직한 소리가 광란이라고밖에 표한할 수 없는 속도로 쏟아져내려 정신을 잡아챌 때도 있고,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여린 소리로 느즈막한 발걸음을 천. 천. 히. 내딛어 그 소리와 소리 사이의 공간에 듣는 이를 빠뜨릴 때도 있다. 이 양 극단이 모두 강력한 설득력과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음은 재차 말할 필요도 없을 게다. 이 음반의 두 협주곡과 하나의 독주곡이 이를 극단적으로 구현한다. 순서대로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먼저 들어보자. 예상한대로 도입부에서 더없이 묵직한 소리가 정적을 깨뜨린다. 하지만 그다지 속도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미켈란젤리가 극단적으로 만들어냈던, 거칠 것 없이 시원시원하다 못해 냉혹하고 강렬한 소리와 지향점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리히테르는 느리고 묵직한 소리로 해넘어가는 북구의 멜랑콜리한 정서를 표현하는데 방향을 잡고 있다. 1, 3악장에서 미켈란젤리가 빙하 무너져내리고 냉혹한 삭풍이 불어닥치는 북구의 힘을 묘사하내는데 주안점을 두었다면 리히테르는 해넘이때 빛이 빙벽을 말갛게 물들이는 모습을 그려낸다. 전자는 그 힘으로 듣는 이를 매혹시키고 후자는 그 멜랑콜리한 분위기로 마음을 들썩이게한다. 이 시도, 성공적일까? 문제는 리히테르의 묵직한 발걸음에, 그리그의 멜랑콜리하고 서정적인 멜로디가 압사당하는 느낌이 든다는 데 있다. "나 우울해"되뇌이는 사람이라면 그려지는 모습, 쳐진 어깨에 발 질질 끄는 모습이라기보다는 어깨 당당히 펴고 뚜벅뚜벅 걷는 느낌이 난다고 할까. 미켈란젤리의 경우, 1, 3악장에서는 이 곡이 지닌 멜랑콜리한 요소를 걷어내고 자연의 힘을 상찬하는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이런 엇박자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리히테르의 발걸음은 멜랑콜리를 노래한다고 보기엔 발걸음이 너무 당당하다. 그게 리히테르의 개성과 의도인 데 고개를 끄덕이긴 하겠지만 이런 어정쩡한 느낌으로 난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을 즐기고 싶지는 않다. 이 엇박자가 좀 더 심하게 느껴지는 연주는 슈만 피아노 협주곡이다. 내게 슈만 피아노 협주곡은 그 어떤 피아노 협주곡보다 젊게 느껴진다. 도입부의 불안정한 화음이 던지는 강렬한 느낌도 그렇고 어딘가 모르게 불규칙하면서도 불안한 곡 전개, 그러면서도 패기 만만한 강렬함이 그렇다. 그런데 리히테르의 발걸음은 너무 무겁고 심각하고 안정감있다. 방황하는 젊은이의 주체못할 힘과 정열이라고 보기엔 그의 발걸음은 너무도 장중하고 무게감있으며 안정적이다. 그런 젊음을 직접적으로 그려냈다고 하기 보다는 머리 희끗희끗한 사오십대 신사가 지긋이 눈을 감고 자신이 한때 지나쳤던 질풍 노도의 시절을, 위험하지 않게 추억하는 느낌이 든다. 안정감이란 건 분명 어느 연주나 추구해야할 보편적인 가치겠지만 이곡처럼 불안과 주체못할 열정을 표현해야 할 곡에 짙게 드리워야 할 정서는 아니지 싶다. 리히테르의 슈만은 모두 다 최고를 외친다고 하며 나역시 환상곡과 교향적 연습곡 등 일련의 독주곡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편이긴 하지만 난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을 이런 방식으로 즐기고 싶은 마음은 없다. 두 협주곡 모두 내 마음에 쏙 드는 연주는 아니지만 리히테르만의 강렬한 개성을 표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 트렉의 슈만 피아노 독주곡 '나비'의 압도적인 강렬함 때문에 이 음반 전체에 대해서는 나쁜 평을 할 수가 없다. 마지막 트렉 '나비'를 들어보면 리히테르가 어떠한 정서로 슈만을 표현하고자 하는지 느낄 수 있다. 군더더기없이 명징한 소리, 더없이 나긋나긋하다가도 숨이 막힐 정도로 강렬한 극과 극의 큰 낙차와 대비가 그것이다. 이것이 리히테르의 슈만이다를 강변하고 있는 십사분짜리 소품 하나만으로도 별 다섯개를 주기 충분하다. 그러고보면 이 엘범의 커플링이 내겐 좀 애매하다. 두 곡의 피아노 협주곡은, 결코 리히테르의 방식으로 즐기고 싶진 않다(이 얼마나 흔치 않은 경우인가!). 하지만 '나비'만은 두손두발 다 들고 만세를 부르고 싶어진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구? 이 리뷰 쓰고 있는 거 보면 모르겠나. '내 돈 주고 사서'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