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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입은 용들의 노래:노자시화/장석주/뿌리와이파리 노.장 사상에 대한 또 다른 해설서이겠거니 하였는데 생각과 달리 평론가로서의 지난 30년을 자축하는 시 평론집이었다. 장석주 선생은 내가 사숙으로 생각하는 분이다. 때문에 그 분의 책에 감히 서평이랍시고 쓰는 자체가 두렵다. 블로그의 서평을 평가하던 어느 인문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모든 서평들은 거의가 ‘주례사 비평’에 다름 아니라고. 내가 쓰고 있는 민망한 글 역시 경탄과 찬사의 느낌표로 얼룩져 있다. 『상처 입은 용들의 노래』라는 제목과 부제로 붙인 노자시화는, 험한 세상 속에서도 무욕하고 해맑은 삶을 살다가 간 천상병 시인의 삶을 소개하는 글에서 내력을 알 수 있었다. 천상병은 그 어떤 시인보다 노장사상을 체화한 시인이다. (중략) “나는 낮잠자기에 일심이다./꿈에서 메시지를 번역하고,/용이 한 마리, 나비가 된다”「수락산 하변」를 보면 낮잠을 자다가 꾼 꿈에서 나비로 변신한다는 이 구절은 분명 장자의 호접몽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 틀림없다. 시인은 꿈에서 용으로, 용에서 다시 나비로 변신한다. (중략) 그렇게 천상병은 「수락산 하변」을 통해 꿈속에서 종의 경계를 넘나들며 향유하는 기쁨을 노래한다. -432p 짧은 머리와 우둔함으로 오랜 시간과 다리품을 팔고 나서야 겨우 글을 따라잡고 일독할 수 있었던 책이었다. 나는 길을 찾고자 그 많은 시를 읽고 책의 숲을 헤맨다. (중략) 시와 책들은 실은 수고의 연속으로 이루어지고 세계의 무뚝뚝함 속에 내던져진 이 ‘있음’을 ‘잘-있음’으로 바꾸려는 기획이다. 그 길은 멀고 험하다. (중략) 하늘은 나를 낳고 땅은 나를 길렀지만 ‘잘-있음’의 길은 나 스스로 찾아야만 한다. -498p 환희로 넘치는 저 찬연한 빛의 세상, 그 ‘자유’와 ‘즐거움’을 나는 얻었는가? 그걸 다시 얻었다면 시와 책은 다 태워 없애버려도 좋을 터지만 그 날은 아득하다. (중략) “아침에 도를 들은 사람은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한 바로 그날이 아니겠는가! -499p 평론 30년의 노정을 돌아보는 회고의 말에서 느껴지는 무게와 깊이는 현대 시단의 남, 녀를 불문한 다양한 시인이 소개되고 있다. 언급된 시집만 해도 50권이 넘고 인용된 시는 수 백편에 달하는 시인으로도 활발히 활동하는 분이라 작품을 보는 또 다른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모름지기 좋은 시란 고요하고 강렬하고 천진난만하고 투명해야 한다는 선생의 말씀에 합당한 시가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신현정의 시들이 그렇다. 오늘따라 나팔꽃이 줄 지어 핀 마당 수돗가에 수건을 걸치고 나와 이 닦고 목 안 저 속까지 양치질을 하고서 늘 하던 대로 물 한 대야 받아놓고 세수를 했던 것인데 그만 모가지를 올려 씻다가 하늘 저 켠까지 보고 말았다 이때 담장을 튕겨져 나온 보랏빛 나팔꽃 한 개가 내 눈을 가렸기 망정이지 하늘 저 켠을 공연스레 다 볼 뻔하였다. - 신현정, 「일진日辰」
타성의 완고함에 빠져 있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쓸 시다. 시에 대한 선생의 철학은 나의 뇌리에 죽비로 다가온다. 목구멍으로 삐져나오려는 잡된 어휘들을 맑고 명징한 책들로 꾹꾹 눌러 내 시가 세상에 다시 나오는 날은, 뱃속과 내장을 가득 채운 책들이 곰삭아져 시는 언어를 쓰되 궁극에서는 그 언어를 줄여야 한다. 시가 항상 최소의 언어로 최대의 의미를 끌어내려는 것, 압축파일을 지향하는 게 그 증거다. 시는 언어의 방법적 도구로 쓰되 언어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영원한 모순명제를 산다. -40p 좋은 글은 쓰는 것은 잘못된 글을 줄여가는 것이라는 누군가의 경고가 늘어지고 수식으로 얼룩지는 글은 고치고 버려야 할 악습이지만 오랜 숙제이다. 선생의 다음 한마디를 내 글 삶의 좌표로 삼고자 한다. 읽지 않고는 쓸 수 없다. 널리 찾아 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