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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은 현덕 탄생 100주년이었다. 월북 작가인 현덕은 십대 청소년이 자주 부딪치는 문제들을 다루었다. 양심, 우정, 오해, 의심, 어려운 집안 형편과 진로 고민 등이 그의 작품 속에 녹아있다. 월북했던 현덕. 그래서 그의 작품들이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그의 소년소설을 빠짐없이 수록한 작품집이 없었기에 이번에 수많은 노력 끝에 청소년용으로 이 책이 발간되었다. 초등학교 교과서 수록 도서이기도 한 이 책에는 현덕의 독자 대상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져 있다. 유독 소년소설을 고집했던 그는 소년소설의 개척자로 주목받고 있다. '어린이'라는 호칭을 받아들이기 꺼려하는 나이, 곧 상급 학교에 막 들어간 연령대의 소년 세계를 현덕만큼 잘 그려낸 경우는 보기 드물다는 것이다. 이 책속에는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현 문단 최고 수준'이라는 <남생이>가 2부에 실려 있으며, 1부에는 <집을 나간 소년>으로 현덕의 독특한 문체를 맛 볼 수 있다. 이 작품집으로 인해 현덕의 소년소설이 우리 청소년 문학의 고전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거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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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를 잡는 아버지 현덕 지음 / 원종찬 엮음
<집을 나간 소년>, 그 중에서 <하늘을 맑건만>을 읽고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문제를 풀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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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이 잘 보존되어 있는 시골을 여행할 때 우리의 마음은 순연해진다. 자연과 어울려 사는 순박한 그이들의 모습이 우리 마음을 정화시켜주기 때문일 것이다. 꼼꼼하게 살펴보면 사람 살던 모습에서 재미와 감동도 받는다. 현덕 소설집을 읽으면서 그랬다. 마음이 순연해지고, 재미와 감동을 받았다. 현덕 소설집을 읽으면서 마음이 순연해지는 것은 아이의 마음을 발견해서일 것이다. 이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의 나이는 유아부터 청소년까지 두루 걸쳐 있다. 현덕은 유아는 유아대로 청소년은 청소년대로 그들 심리를 잘 그려내어 공감하게 한다. 그러한 아이 마음은 우리가 한때 간직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빛이 바랬거나 가슴 깊숙한 곳에 있어 평소에 발견하기 어렵다. 그런데 현덕 소설집을 읽으면서 우리는 아이 마음을 읽고 마음이 순연해지는 것이다. 재미와 감동은 분명한 서사에서 비롯한다. 분명한 서사라 함은 이야기가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거니와 그 가운데서도 가슴 졸이는 갈등이 부풀어 나가다가 깨끗하게 해결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군밤장수」에서 기수는 삼촌과 대결한다. 재능 있는 초등학교 동창 성만을 도와주기 위해 기수는 삼촌과의 대결을 자청한다. 거기에 기수와 인환의 갈등도 한몫을 한다. 성만을 도와주려는 기수를 인환은 외면하는 것이다. 이러한 복합 갈등은 점점 고조되어 독자로 하여금 가슴 졸이게 하는데 한껏 갈등이 고조되었을 때 삼촌이 마음을 바꿔 상만을 돕기로 한다. 독자는 기수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안도하게 되며 기수의 우정에 감동한다. 이러한 갈등 구조와 감동적인 해결은 「고구마」「월사금과 스케이트」「집을 나간 소년」등의 작품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난다. 정통 소설 작법을 따르면서 재미와 감동을 주는 것이다. 이들 작품들에 나오는 인물 이름 중 기수와 인환은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이와 같이 것도 재미를 더해준다. 엮은이 원종찬에 의하면 1부는 『집을 나온 소년』(아문각, 1946년)에서 9편을 뽑아 원래 작품 차례대로 실었고, 2부는 『남생이』(아문각, 1947년)에서 ‘노마’가 등장하는 단편소설 3편을 뽑아 역시 원래 작품집 차례대로 실었단다. 내용을 간단히 요약한다. 제 1부 -「하늘은 맑건만」: 문기는 심부름으로 고기를 사러 갔는데 고깃간 주인이 일 원을 십 원으로 알고 거슬러 준다. 문기는 동무 수만이와 그 돈을 써버리고, 붙장 안에 있던 돈까지 훔친다. 죄가 죄를 부른 것이다. 문기는 자신의 허물을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숨김없이 자백을 하여 어둠에서 벗어난다. 문기의 괴로워하는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 -「잃었던 우정」: 백화점에서 승강기를 모는 명희는 고등여학교에 진학한 동무가 찾아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하여 절교까지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나비를 잡는 아버지」: 서울로 진학한 경환이가 나비를 잡는다고 바우 참외밭을 결딴낸다. 그러자 바우는 경환이를 밀어 넘어뜨린다. 경환네는 바우가 나비를 잡아 오지 않으면 소작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위협한다. 바우는 버팅기지만 나비 잡는 아버지를 보고 마음을 바꾼다. -「군밤장수」: 공부 잘하고 그림 잘 그리는 초등학교 동창 성만이 군밤장수를 하는 모습을 보자 중학생 동무 기수는 삼촌에게 말해 취직을 하게 한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도록 한 것이다. -「고구마」: 농촌 실습으로 심은 고구마를 캐갔다고 의심이 가는 수만이 점심을 낚아채 보니 눌은밥이다. -「월사금과 스케이트」: 스케이트를 사려고 돈을 모은 기수와 인환은 월사금이 없어 졸업도 하기 어려운 동훈을 도와주기로 한다. -「집을 나간 소년」: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해 가출하려는 인환을 만난 기수는 설득하여 가출을 하지 않도록 한다. -「모자」: 가난하지만 공부를 잘 하는 성만을 시기하는 갑동이가 성만의 모자를 전봇대 위에 걸어놓아 교장선생님에게 꾸중을 듣게 한다. 갑동이가 그랬다는 것을 발설하지 않자 갑동이는 성만에게 용서를 구한다. -「권구 시합」: 연필 한 다스를 걸고 하던 야구 경기에서 떳떳하지 못했던 일성은 결국 고백을 하고 떳떳한 마음이 된다. 제 2부 -「경칩」: 노마 아버지와 기동이 아버지는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로되 노마 아버지가 병들어 눕자 기동 아버지는 노마 아버지가 짓던 논을 농사짓게 된다. 그렇지만 기동이 아버지 마음은 편하지 못하다. -「남생이」: 아버지는 병들어 눕고 어머니는 들병장수로 나선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의심하지만 남생이랑 놀 수밖에 없는 처지다.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노마는 도시 울음이 나지 않는다. -「두꺼비가 먹은 돈」: 노마는 열밖에 더는 셀 줄 모르는 어린 아이다. 기동 아저씨가 준 구멍 꿇린 새 은돈을 잃어버리고 사방팔방 찾아다닌다. 돈을 잃어버리지 않은 척하면서 꼭 돈을 찾겠다는 집념으로 행동한다. 노마의 마음과 행동이 따로 또는 같이 노는 불일치와 일치가 웃음을 자아낸다.
노마는 마침내 집 밖으로 나왔다. 여기는 보는 사람이 없으니까 노마는 흉증을 피우지 않는다. 두 손을 무릎에 붙이고 궁둥이를 번쩍 든다. 그리고 얼굴을 땅 가까이 가져다 대고 구석구석 눈을 밝힌다. 기동네 강아지 같다.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 냄새도 맡아본다. 그렇게 강아지는 먼 데 있는 것까지 잘 알아내니까. 사실 잃어버린 돈을 찾게만 된다면 노마는 잠시 강아지쯤 되어도 좋다. (24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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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이라는 작가를 어린이 도서연구회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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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 생각에 아이들이 읽고 이해 해주었으면 하는 책이지만 정작 청소년들은 이해하기가 힘든 책이다.
특히 2부의 노마 3부작은 어른들의 눈에 매우 뛰어난 단편 소설이지만 이 책을 읽는 아이들은 힘들어 하는 것 같다.
일단 소설의 배경이 일제 시대이며 서민들의 생활을 묘사한 것인데 시대적 공간적 배경을 잘 알지 못하면 짧게 축약된 대사의 의미를 잡아채기가 힘든 것 같다.
또한 단어도 어른인 나조차 생소한 것들이 많이 있다. 또한 작가의 시점도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라 관찰자 시점이라 청소년들에게는 약간의 해설이 필요할 듯 하다.
시대적 배경이 비슷한 기나긴 소설 '토지'를 완독했던 나도 조금은 분위기에 녹아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어른들 소설로 본다면 뛰어난 소설이다.
오랫만에 '생존'에 몸부림쳤던 시대를 되새기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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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내가 교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뭘 해먹고 살았을지 생각해볼 때가 있다. 은근히 낯도 가리고 입 터는 것 말고는 딱히 특기나 일머리도 없고. 덩치는 큰데 은근 잔병이 많아서 써먹을 데가 별로 없다. 군대에 말뚝을 박았거나 동네 보습학원 강사를 했거나, 알바를 전전하면서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은 나라에서 수급비(이거 할 말 많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지도)도 주고 특별한 기술 없이도 할 수 있는 알바 자리도 잘 찾아보면 꽤나 있어서 굶어 죽었을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삶의 질은 별개로 치고 말이다. 그런데 한 7, 80년 전만 하더라도 농사밖에 할 것 없는 농촌에서 살았더라면, 게다가 내 땅 한 뼘 없어서 남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면 그 '남'은 그야말로 우리 식구들의 목숨을 좌우할 수 있는 하느님급 되는 사람이래도 과언이 아니겠다. 요즘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데 그 건물주보다 더한 게 지주겠다.
조선 시대, 지방에 대토지를 소유한 양반 지주들은 in서울 해서 살고 지방의 토지 관리는 '마름'이라 불리는 중간 관리인에게 맡겼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법이고, 지주는 마름이 무슨 짓거리를 하든 도지(땅 대여료)만 제때 탁탁 들어오면 그만이다. 즉 호랑이 없는 골에 여우가 왕이라, 소작인들에게 가해지는 마름의 횡포는 실로 다양했고 그 부조리한 모습은 김유정의 <동백꽃>을 비롯한 여러 문학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한다.
현덕의 '나비를 잡는 아버지'도 이러한 사실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 바우는 같은 소학교를 졸업한 경철이보다 그림도 잘 그리고 공부도 잘 했다. 하지만 바우네는 가난한 소작인 집안이고 경철이네는 그 집 마름댁이다. 그래서 경철이는 서울로 진학을 한 반면 바우는 고향에 남아 농사일을 한다. 여름 방학을 맞아 경철이가 고향에 내려왔는데, 이녀석이 동네 아이들에게 유행가를 가르치질 않나, 방학 숙제라며 온 동네에 나비를 잡노라고 뛰어다니는 꼴이 영 마땅찮다. 티격태격하다가 둘 사이의 갈등이 점점 깊어지는데, 바우네 참외밭 덩굴을 경철이가 나비를 잡는답시고 온통 못쓰게 만든데 격분해 둘은 주먹다짐을 하게 된다. 짱돌까지 집어들었지만 정황상 택도 없이 패배하고 만 경철이는 '두고 보자.'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남기고 사라진다.
역시, 경철이는 부모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바우네 아버지, 어머니가 각각 경철네 부모에게 불려갔다 온 후 '나비를 잡아와서 사과하지 않으면 내년에 소작을 주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았다며 바우를 혼낸다. 바우는 자존심이 상한다. 어서 가서 사과하라는 아버지의 엄명에도 나비는 커녕 하루종일 밖에 쏘다니다가 해질무렵 하릴없이 집으로 간다. 그런데 집 근처 들판에서 어둠 속에서 휘적거리는 형체가 보인다. 똑똑지 못한 걸음걸이로 나비를 잡으려고 허우적대는 아버지. 아.... 아버지....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 실린 작품들을 모은 <국어시간, 소설에 빠지다>라는 책 가운데 '사랑에 빠지다'라는 단원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위에 펼쳐놓은 과정을 읽으면서 아버지의 깊은 사랑에 공감해보라는 취지로 해제가 되어 있다. 물론 마지막에 바우는 "지금까지 잠기어 있던 어두운 마음에서 벗어나, 그 아버지가 무척 불쌍하고 정답고 그리고 그 아버지를 위하여서는 어떠한 어려운 일이든지 못할 것이 없을 것 같고, 바우는 울음이 되어 터져 나오려는 마음을 가슴 가득히 참으며" 아버지를 향해 소리친다고는 되어 있다.
물론, 내가 한 일을 수습하고자 대신 고생하시는 아버지를 보면 미안함에 눈물이 날 법도 하다. 나도 아홉 살땐가 외갓댁에 가서 곤충 채집을 했는데 나는 손도 못대는 벌레를 외할머니가 한 통 가득 잡아다 주셨던 기억이 있다. 할머니도 벌레를 무서워하셔서 그때가 곤충을 잡아본 첫 경험이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런데 '나비를 읽는 아버지'를 거기까지만 읽는 것이 적당할지는 모르겠다. 바우네 참외 밭은 '장차 햇곡식 나기 전까지의 바우 집 식구들의 식량을 거기다 예산하고 있는 것이요, 바우 자기도 잘 열면 책 한 권쯤 사 달래려고 벼르고 있던 터'인 것이다. 온 식구 한철 양식을 결딴내고 있는 꼴을 보고 화가 안 날 사람이 어디 있으며 싸움이 났어도 짱돌 들고 덤빈 건 경철이 쪽이다.(물론, 선빵은 바우가 쳤다.) 게다가 애들 싸움에 어른들이 끼어들어 협박을 하는 것도 영 어른스럽지 못하다. 아니, 지위를 이용해 훈계질을 한 정도가 아니라 생계를 가지고 위협한 거니까 갑질 중의 상 갑질이다.
신분은 어차피 다 평민으로 같다. 양반이고 뭐고 없어진 지 오래 됐으니까. 거기에 바우는 경철이보다 공부도 잘 하고 힘도 세다. 그런데 우리 부모는 저집 부모에게 저항할 수조차 없고 해 다진 저녁 논두렁에서 하루종일 농사일로 지친 몸을 끌고 나비를 휘적휘적 잡고 있다. 부모와 자신의 사회적 계층을 확인한 바우는 그날 아버지의 사랑만을 가슴 가득 느꼈을지, 아니면 경철이에 대한 분노, 억울함, 소작인 처지의 서글픔 같은 걸 느꼈을지. 좀 더 머리가 깨인 녀석이었다면 이런 불합리한 제도, 사회 구조에도 불만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바우를 보는 내게는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이라는 이성부의 시 구절 하나가 퍼뜩 떠올랐다. 글쓴이 현덕은 우리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좀 생소한 이름일지 모르겠다. 한국전쟁 중 월북한 작가라 오랫동안 언급이 안 되기도 했고 발표된 작품 자체도 많지는 않다. 말 나온 김에 간단히 소개해본다. 월북했다는 간단한 사실만 가지고 전부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지금보다 나은 사회를 꿈꿨을 것이고 그 실현을 위해 소설을 방법으로 선택했다는 것은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겠다.
아이의 눈을 통해 당대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은 현대 우리 단편 소설에서 흔히 쓰는 수법 중 하나다. 아버지는 나비를 잡는 게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던 거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리라 본다.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부당하게 차별하고 억압하지 않는 세상. 이번 대선이 그 세상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되어 주길 바란다.
덧붙임) 그래도 순수한 맛이 있는 소설이지만 좀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제목을 '나비를 잡는 아버지'말고 다른 걸로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본문을 보지 않고 제목만 본 상태라면 마름과 소작인 사이의 관계는 전혀 떠올릴 수가 없고, 왜 아버지가 곤충 채집을? 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소설을 좀 읽어본 독자들은 마지막에 바우가 어둑어둑한 메밀밭에서 사람을 발견했을 때 '어? 누구지?'라는 궁금증 대신 제목과 연결지어 '에이~ 아빠가 잡고 있네 이거.'하고 쉬이 예상해 버릴 것 같다. 반전의 묘미를 떨어트리는 것이다. 당시에는 꽤나 혁신적인 기법이었을지 모르나.... 너무 많은 텍스트를 접해 본 독자들이 읽기에는 다소 싱거운 반전이랄까. 그래서 그냥 '나비' 정도로 해 버리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