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radbury의 Fahrenheit 451을 처음 읽은 것은 1989년 화창한 5월의 어느 날이었다. 금색의 가장자리에 검은 색 커버, 그리고 커버 중간쯤에서는 타다 남은 낡은 책이 그려진 Ballantine에서 나왔던 그 문고판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당시 이 작품을 읽고 든 감상은 시적인 언어와 날카로운 감수성이 한꺼번에 어우러진 향수어린 걸작이 아닌가하는 놀라움이었다. 이보다 몇 년 전에 읽었던 그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The Martian Chronicles보다 더 깊은 인상이 남을 만큼 나는 F451가 너무 좋았다. 멋진 표현은 사라지고 가슴을 찌르는 통찰의 묘사도 잊혀지기 마련이라지만 그 당시에는 기억뿐만 아니라 감성의 인화지에까지 F451은 깊이 새겨져 있었다. 시험공부 한답시고, 원문과 번역본을 나란히 놓고 설쳐대던 영문학 전공의 친구들 손에서 뺏어 읽었던 Sherwood Anderson의 Weinsberg, Ohio의 매력이 과학소설의 모습으로 성큼 다가서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10년도 넘게 흐른 뒤, 다시 떠올려보는 F451은 그 순진무구함 때문에 오히려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Bradbury의 시적인 스타일은 이제 아마추어 문학교실의 진부한 습작처럼 읽히고, 그의 목가적이던 분위기는 H. D. Thoreau의 Walden처럼 심오한 듯 유치하다. 이 작품은 원래 1951년 SF 매거진 Galaxy에 "소방수(The Fireman)"라는 제목으로 처음 실렸던 것을 1953년 단편 두 편과 합쳐서 장편으로 낸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대개 읽는 판본은 단편을 빼고 1979년에 종결부(Coda) 그리고 다시 한 번 1982년에 후기를 덧붙인 형태이다. 그는 한 번도 SF작가였던 적이 없다. The Martian Chronicles에 등장하는 화성의 개척마을이나 우주선들 모두가 클리셰에 가까운 자화상인 것처럼, 그래서 그가 내놓는 비전이 너무도 간명하게 목가적인 삶에 그치듯이, F451는 분명 도시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여전히 '목가적'인 태도를 견고하게 유지한다. 주인공 Montag가 사는 도회지의 삶은 생리적으로 더럽고, 도덕적으로 추악하며, 정서적으로 메말랐다. 당연히 범죄가 횡행하고, 사람들은 대중매체의 노예로 전락한 채 집안에 틀어박혀 있다. 아내까지 속물로 나오는 것은 당연한 셋업이다. 그리고 17살 짜리 소녀와의 우연한 조우. 공교롭게도 그 애는 Montag의 정서를 적시는 단비가 된다. 거기에 몰래 손에 넣은 책은 그의 정서에 불을 지피고, 불타오르던 그의 갈증은 분노로 폭발한다. 그가 지하저항세력과 접촉고, 적으로부터 도주하여, 전원에 파묻혀 책을 암송하는 무리들에 섞이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결말이리라. 오히려 Francois Truffaut 감독이 영화 맨 마지막 장면을, 그러니까 모두가 눈 덮인 숲 속을 거닐며 중얼중얼 명작들을 외우던 마지막 장면을 마치 화석화된 지식과 문화의 송장처럼 싸늘한 현시로 섬뜩하게 처리한 것이 천재적이라면 천재적인 해석일 것이다. F451은 그 때문에 자주 정부의 검열에 반대하고 (물론 소방대장의 입을 빌어 Bradbury는 분서(焚書)행위가 정부가 시작한 것이 아님을 언급하지만),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올바름을 따지는 일(political correctness)에 반대하며, 대중매체의 현대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에 경종을 울리는 동시에, 나아가서는 개인주의적 자유의 확대를 적극 옹호하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열렬한 평가는 상당부분 옳기도 하다. Bradbury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밀어닥치기 시작한 조직화된 미국, 전쟁 이후의 폭발적인 도시화 및 인구증가, 60년대까지 연장될 소비사회, 대중문화의 문턱에서 뭔가 심대한 결함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낀 것이 분명하다. 이를 작품화하기 위해서 그가 미국인답게 개인의 억눌린 자기표현을 선택했고, 이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소설 속에서는 가장 개인적인 보폭으로 이루어지는 문화행위에 해당하는 독서가 금지된 사회, 책을 불태우는 행위로 표현한 것은 논리적인 선택이며 칭찬할 만한 통찰력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통찰력은 그의 시적인 언어 감각, 몽환적일 만큼 유려한 문체를 통하여 강력한 마법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문제는 그 향기가 약간 싸구려 냄새가 난다는 데 있다. 즉 지나친 감상벽에 빠진 나머지, 주제가 갖는 진지함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브래드버리가 인지하고 있던 50년대 초의 미국사회가 당면한 제반 문제들을 그는 너무 쉽게 재단하고, 단순하게 이해하며, 경쾌하게 해결하려고 한다. 처음에는 충격적이었던 억압의 양식이 오히려 순진해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F451이 장편치고는 상당히 짧고, 중편이라기에는 약간 긴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상당히 심오한 주제를 풀어나가는 작가의 뒷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The Martian Chronicles에서처럼 같은 주제를 탐구하는 이야기들을 연결시키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Bradbury리가 인류의 타락과 사회의 퇴보에 대한 주범이라고 지목하는 사회병리학적인 요인들을 화자와 시점을 달리해서 하나씩 다루는 식로 말이다. 이런 방식은 사실 1972년 334를 통해 Thomas M. Disch가 잘 보여주고 있다. 334에서 Disch는 과학이 개인에게 미치는 심대한 타격이라는 공통주제를 보여주기 위해서 5편의 단편을 끌어 모아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그러나 F451이 나온 시기가 The Martian Chronicles와 너무 붙어있었다는 점이 작가에게 부담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14년 전 나의 경우에도 그랬듯이, F451은 젊음이 주는 애잔한 슬픔을 쓰다듬고 다스리는데 무척이나 효과적인 것도 사실이다. 꼭 찝어낼 수 없지만 뭔가 자신을 억누르는 것만 같은 불만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형태의 제도, 형식, 규율 등에서 느끼던 억압에 대한 반항의식이 F451에는 고스란히 들어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고전을 암송하는 고귀한 지적인 속물근성까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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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연수 1개월을 갔을때 추운 날씨를 뚫고 매디슨 거리를 걷다가 발견한 캠퍼스 공식 책방, 거기 지하에 있던 헌책 취급점에서 발견한 책이다. 이전에는 Ray Bradbury에 대해 알지도 못했건만... 뭔가 책 표지가 주는 느낌이 독특했고, 그 이후 민들레와인이란 책을 구해 본 적은 있다. 요람기... 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았는데, 한참 있다가 이번 출장 기간에 얘를 잡아봤다.
달랑 두 작품만을 보고 문체를 설명하기는 좀 어렵지만, 꽤나 서정적인 느낌은 남는다. 르귄의 서정적인 문체가 냉정한 관조적인 느낌을 준다면, 브래드버리의 문체는 뭔가 방황하고 분노하는 젊음이 느껴진다. 민들레와인의 요람기적 느낌이 약간 성숙해졌다고 할까?
이야기는 단순하고, 뭐 이런 디스토피아적인 이야기를 여러번 접해본 지금의 입장에선 뭐 새로울 것도 없다. 책 말미에 저자와의 인터뷰에서도 언급되듯이, 1984와 같은 작품과 비교될만하다는 정도? 현대 미디어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풍자했다고 할 순 있겠지만, 동시에 문자매체에 대해 자본이 발견한 가능성과 그 실현에 대해선 예견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킨들이나 비스킷, 아이패드등을 생각하면 그렇단 말이다. 게다가 그런 작품들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상징자본의 역할에 대해선 별로 생각하지 못했던 듯하다.
어쨌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쯤은 생각해 볼만한 주제를 던진 것이고, 미국 청소년들이 이런 이야기를 어릴때 교과서 같은 곳에서 접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지적 힘을 유지하는 토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저자의 논평(coda) 언급된 인상깊은 내용이 미국에서도 학생을 대상으로 400편의 소설을 간추린(요약해놓은) 책들이 출판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와 같은 현실을 개탄하는 부분이다. 수험생을 위한 한국 단편소설 요약집.. 뭐 그런 걸 보고 놀랐던 적이 있었는데, 참.. 저자는 '검열의 방법도 가지가지다'란 표현을 하고 있다.
SF적인 이야기에 인문/교양의 기본적인 필요성에 대한 저자의 시각... 한계는 있지만, 그래도 꽤나 두고두고 생각해볼만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