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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가 현실정치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개입할 수 있을까? 혹여나 그 학자가 자기의 이론적인 테두리 안에만 갇혀서 현실정치의 수많은 굴곡과 불연속점을 간과한다면, 그의 개입은 탁상공론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현실정치, 특히 국제정치에 개입하여 자신의 견해를 유감없이 말하는 학자가 있다. 아마도 20세기 후반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 및 사회학자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위르겐 하버마스가 바로 그다. 이 책에서 하버마스는 2001년 9.11테러에 대한 부시 정부의 대응을 맹렬히 비판한다. 유럽의 거대한 실험인 유럽연합 문제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제시한다. 여기서 좀 더 거시적으로 나아가서 국제정치에서 평화를 모색하는 차원으로 칸트의 영원한 평화론을 검토하여 '국제법의 입헌화' 테제를 제안하기에 이른다.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은 많겠으나, 한국인으로서 특히 와 닿는 논의는 바로 헌법애국주의(constitutional patritotism)에 관한 논의다. 하버마스는 유럽통합의 맥락에서 민족주의적 편협함을 극복하고, 그 대안으로 헌법애국주의를 제시한다. 헌법애국주의란, 민족의식이 아니라 시민적 연대성에 호소하는 애국을 옹호하는 견해로, 민주적 헌법이 내재한 가치와 규범 및 제도를 시민적 연대성의 기초와 토대로 삼고자 하는 정치 사상을 말한다. 25개국의 서로 다른 민족적 정체성을 가진 유럽 국가들이 '유럽연합'이라는 공동체 속에서 화합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민족적 정체성으로 경도될 게 아니라 민주적 헌법이 내재한 가치와 규범 및 제도에 기초하여 국가 간의 연대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헌법애국주의의 표어는 '국가에 대한 동일시에서 헌법에 대한 지향'으로가 된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구상은 나날이 민족주의가 심화되고 있는 한국과 동북아시아의 정치현실에 교훈을 주는 듯하다. 내가 대한민국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한민족을 사랑해야 하는가? 아니면 대한민국 헌법이 구현하는 가치와 규범 및 제도를 사랑해야 하는가? 혹은 둘다인가? 도대체 '애국'이란 무엇인가? 지구 반대편에서 유럽의 문제를 고민한 하버마스에게서 한국의 문제를 고민하는 우리가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하나의 답으로서 헌법애국주의가 아닐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