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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총독 문학상, 의회 예술상 수상작, 캐나다 국민 베스트셀러 1위, 캐나다 전역에 독서열풍을 몰고 올 정도로 이 책은 16살 소녀 노미는 아빠와 함께 메노파 마을이라는 곳에서 살고있다. 이책은 프로테스탄트 근본주의자들의 위선과 종교적인 믿음의 폐해를 폭로하고, 끈끈했던 가족과의 유대가 어떻게 해체되는 지를 이 책은 어느부분을 보나 여러가지로 신선함 그 자체였다. 어느 소설에서도 쉽게 접할 수 없는 종교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특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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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 고른 3권의 책이 연달아 실망을 안겨준다. 디자인의 경이를 시작으로, 드림 셀러를 거쳐, 여기 야릇한 진실... 책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내 기대와 다른 내용 전개가 당황스러울 뿐.
야릇한 친절. 캐나다 총독문학상, 의회예술상 수상작이란 머릿말이 달려 있다. 도발적인 주인공의 눈빛에 선언하듯 내리꽂는 제목, 야.릇.한..친.절. 400여 페이지라는 꽤 긴 분량. 책을 덮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메노파'라는 종교 집단을 검색하는 일이었다. 사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공의 종교집단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나 실제 존재하는 종교. 쿵! 가슴이 내려앉는다.
세상에나 이런 종교집단이 아직도 존재한단 말인가? 현재가 없는 삶, 세상은 천국을 가기 위해 고행을 거치는 중간 기착점? 이 소설은 종교에 의한 가족의 해체라는 큰 틀 속에서 주인공 노미를 앞세운 성장소설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뭔가를 기대하고 읽기에는 깊이가 떨어진다.
나의 버릇처럼, 옮긴이(황소연 님)의 글을 꼼꼼히 읽어봤다. '불행한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법'이란 제목이 붙어있다. 기대만큼 작품에 대한 통찰력을 엿볼수는 없었다.
'미래가 없는 현재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지독한 쾌락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있고, 현재가 없는 미래에만 중점을 둔다면 그야말로 돈만 많은 거지로 살다가 죽을 수도 있다. 하여 각자 그 중간 어디쯤에서 제 처지에 맞는 접함점을 찾아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나 싶다' 그러니까 적당히 세상에 타협해서 살라는 얘긴가? 딴에는 중용을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또 하나, '이 땅위에서 숨쉬며 살아가는 동안에는 기도와 더불어 반드시 현실에서 문제의 해법을 찾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니까 왕따 시키지 말고 서로 보듬고 사는 것이 불행한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제시한다.
메노파를 통해 왜곡된 종교가 삶을 지배하고, 일상을 파괴하고, 개인의 영혼을 좀먹는다고 생각한다. 세속적 쾌락을 곧 죄악으로 보는 마을에서, '진짜' 세상으로 향한 노미 가족에게 따뜻한 희망이 함께 하기를 기원해본다. 덧붙여 초보 운전자 16살 노미의 새로운 세상을 향한 발걸음에 담뿍 미소를 담아 보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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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야릇한 매력이 넘치는 소설이다. 재미있고 슬프면서 또 아름답기까지 하다. 여름휴가를 같이 보낼 책을 찾다가 살짝 옆으로 쳐다보는 듯한 수줍은 얼굴을 한 책표지에 끌려 집어 들게 되었는데,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뭔가 씁쓸하면서도 웃음이 튀어나오는 말투와 매력 넘치는 개성을 가진 문체, 또 미워할 수 없는 사랑스런 주인공 노미를 만난 것이 올 휴가의 최대 즐거움이었다.
책 두께에 비해서 너무 빨리 읽어버리는 바람에 아쉬움까지 있다. 중간 중간 위트 넘치는 노미의 농담에 독서를 하면서 그만 푸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린 게 몇 번인지 모른다. 어쩜 이렇게 재치 있고 재미있게 글을 쓸 수가 있을까. 그렇다고 주제가 유쾌한 것도 아니다. 사이비 같은 종교 때문에 가족이 흩어져 살게 되는 불행한 주제를 가지고 유쾌하면서 고독하고, 즐거우면서 외롭고, 웃으면서도 눈물을 흘리게 썼다.
주위에 사람들을 보면, 슬플 때 슬픈 기색을 마구 내뿜는 사람이 있다. 나 지금 힘들어 라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것처럼, 인상을 쓰고 일기장에 힘들다고 적고, 메신저나 미니홈피에 온통 눈물 흘리는 이모티콘으로 가득하다. 반면 슬퍼도 유머로 슬픔을 날리고, 외롭거나 괴로운 힘든 일도 웃음으로 이겨내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을 지켜보는 듯하다. 그래서 주인공 노미를 지켜보는 독자의 시선은 불행한 현실이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우울하진 않다. 이게 포인트다. 전혀 우울하지 않다는 게 중요한 포인트다.
주인공 노미의 가족은 메노파라는 종교를 믿는 마을에 산다. 현실보다 미래의 영원한 삶을 더 귀하게 여기며, 금욕과 절제된 생활을 강요하는 종교에 의지해 산다. 그러다 결국 엄마와 언니가 집을 나가고, 노미는 아빠와 단둘이 집에 남게 된다. 이런 상황이 어찌 우울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의심하겠지만, 책은 시종일관 즐겁고 유쾌하면서 희망을 담고 있다.
“창살은 없지만, 보이는 출구도 없다”라고 표현하는 주인공의 말처럼, 벗어날 수도, 그렇다고 벗어나지 않을 수도 없는 현실을 이겨내는 노미의 노력은 눈물 나도록 슬프지만 즐겁다.
그러면서 노미를 따라 줄 곳 달리다보면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이루지 못한 것들, 아름다운 거짓말, 시간이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고 어떻게 운명을 지으며 결국 어떻게 파괴하는가에 대한 생각, 현실과 미래와 약속에 대한 생각들을 끊임없이 하게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가는 우리에게 인생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 책 덕분에 즐거운 휴가를 보낼수 있어서 감사하다. 내년 여름휴가땐 또 어떤 책을 만나게 될까. 기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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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끝임없는 교육을 받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그 곳에 몰입하고 어느 때는 세뇌라는 단어에 갇혀 더이상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 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인간이 어떤 일에 세뇌되어 그것이 아니면 않되는 상황이 될 때. 인간은 참으로 냉소적이 된다. 표지의 표정처럼, 눈빛처럼 별반의 반응없이 그저 그저 친절에도 그리고 마음에서 울어 나는 친절에도 냉소적으로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인간의 이념을 고정관념처럼 갖게 하는 것도 힘들지만 사회와 나의 생활이 변화하느데 이념을 지켜가기 또한 힘든것 같다. 자신의 세계가 전부인양 한마을에서 태어나 나의 선택이 없이 부모의 선택 때문에 살아야 했던 생활. 그곳에서 벌어지는 다른 세계로의 발견. 그로부터 오는 충격을 감당하기란 사춘기 소녀가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저 타인처럼 가족의 해체에도 서로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지켜봐야 했을 것이다. 인간의 본능마저 용납될 수 없는 곳, 그리고 미래를 꿈꿀 수 없는 곳. 그런 곳에서 하루 하루 버티고 살아가기란 나또한 숨이 막힐것 같다. 자신의 경험적 산물이라는 '야릇한 친절', 사람들은 다른이들에게 필요없는 친절을 베풀때가 있고 지니치다 싶을 정도로 관심을 갖을 때가 있다. 그럴때면 '왜?'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 그런것이 아마도 야릇하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족간의 관계에서 언니가 떠나고, 다시 엄마가 떠나고 그렇게 지난날을 되새기며 아빠와 함께 생활하는 노미. 그녀는 사회의 모든 악들이 일시적으로 몰려왔다 사라지는 공원을 보면서 그것이 진정한 종교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천천히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무너져가는 노미의 생활을 보면서 아빠 또한 그를 떠나지만 과연 가족이 서로을 위하여 떠난다는 것은 옳을 일이었을까? 자신의 성장과정이 고스란이 남아 있는 곳. 그곳에 대한 옛기억을 더듬어 보며 노미는 다시 언니와 엄마를 만날 생각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올바른 종교라면 내세를 생각하고 현재를 소중히 생각하며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도록 독려하고 격려하고 있다. 종교가 이단으로 몰리는 경우는 현세의 생활보다는 내세 사후의 세계를 강조하면 현재의 생활에 소홀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며 지금은 생활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노미가 생활하던 종교의 집단도 사회로부터 이단으로 지목받았던 종교의 집단이었다. 그런 곳에서의 탈출. 그것이 가족의 해체로 이어진다는 것이 마음아프게 다가왔으며 사춘기 소녀들이 갖어야 하는 아름다운 꿈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을 파괴하는 형식으로의 탈출이 이루어 진다는것이 마음아리게 다가온다. 작가의 경험에 비추어 쓰여진 작품이라서 더 그럴지도 모른다. 그리고 노미가 세상을 보는 눈빛이 냉소적이어서 더 그런지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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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고발 소설로 읽어야 할까? 상징성으로 읽어야 할까? 둘 다 해당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시니컬한 유머가 압권이다! ’감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농담처럼 툭툭 내뱉듯 이야기하는 십대 소녀가 주변을 관찰하는 눈빛이 매섭다. 작정하고 관찰하려는 의도도 보이지 않는데, 오히려 그 무심한 듯한 시선이 더 오싹하고 무섭게 느껴진다. 사라진 엄마와 언니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는 미스테리한 전개가 강한 흡입력으로 독자를 빨아들이는데, 그저 재밌게만 읽히지 않는 것은 ’고발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야릇한 친절>은 종교적인 위선이 이야기의 중심축이다.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종교인들의 위선을 그려낸 작품을 만나면 진땀이 흐른다. 도려낸 한쪽면만을 전부인 것처럼 보여주고 있다며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만, ’누구든 자신의 입장에서 이해받기를 바라는 것처럼’ 주변인의 시선도 그대로 인정하고 주변인의 시각에서 나를 바라보는 일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 여겨진다. 종교인 스스로도 위선과 가식의 문제를 경계하고 있으니 말이다. 언젠가 케이블 TV에서 채널을 돌리다가 종교방송에서 나오는 ’예배장면’을 보았는데, 다른 채널과 확연히 구별된 종교적 언어와 의상과 행위가 얼마나 생소해 보이던지, 당황했던 적이 있다. ’믿음의 내용과 의미’를 제거하고 ’행위’만을 본다면, 주변인들에게는 ’그들만의 세상’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야룻한 친절>에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주인공이 속한 종교 공동체는 기독교 내에서도 ’이단으로 규정된 바 있으며’,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는 소수 종파라는 것이다. "메노파는 오늘날 주로 미국과 캐나다에 농업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기독교의 한 종파인데, 종교와 세상을 엄격하게 분리하는 것이 특징이다. 외적으로는 은둔을, 내적으로는 엄격한 집단 규율을 통해 강한 문화적 연대감을 형성한다"(388). 주인공 ’노미’는 스스로 종교를 선택하지 않았다. 노미는 종교집단 안에서 출생했고, 운명처럼 그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다. 문제는 신앙을 유산처럼 물려준 노미의 부모도 신앙이 그렇게 견고해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미의 부모님은 어떻게 해서 재세례파 신앙을 갖게 되었을까? 아빠는 수동적이고, 엄마는 반항적이다. 결국, 노미의 가족은 각자의 해법대로 문제를 풀어가다 해체되고 만다. "성(聖)과 속(俗)을 구분하는 메노파의 폐단은 노미 가족의 해체라는 비극적 파국을 야기했다. 세속의 쾌락을 곧 죄악으로 보는 마을에서, 노미의 가족들은 질식당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은 하나 둘씩 마을을 떠난다"(388). 요즘 종교인을 더 위선적으로 보는 시각에는, 자신들만의 구별된 동네에서 담장 높은 집에 살면서 선거 때마다 시장을 찾아 서민과 악수하는 정치인을 보는 것만큼이나 대중적인 적개심이 가득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행위 없는 믿음’이 실망과 함께 역겨움을 양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역겨움이 비단 종교인이나 정치인만의 것은 아니겠지만, 문제는 특정 집단이 개인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억압적 사회 ’권력’으로 작동할 때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믿음’을 기반으로 살아간다. 사후 세계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 종교적 믿음이라면, 미래보다 현재의 삶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쾌락’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믿음 체계이다. ’노미’가 운명처럼 속한 공동체에 거부감을 느끼고 그곳에서 탈출하여 ’비교’ 가능했던 세상을 향해 떠나지만, 위선과 가식이 완전히 배제된 공동체를 찾을 수 있을까? 숨겨진 야릇한 친절이 더 나쁠까? 아니면, 대놓고 불친절한 것이 더 나쁠까? 나도 종교인이지만, 종교인들이 한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이중메시지가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 심리학적 보고이다. 불친절은 그저 불친절의 문제로 끝날 수 있지만, 종교인의 ’야릇한 친절’은 세상 사람을 미치게 할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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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부터 묘한 향기를 뿜어내는 이 소설, 시니컬한 매력이 펄펄 넘치고 이상하게 우울한 분위기면서도 생기를 느낄 수 있어서 꽤 두꺼웠지만 단숨에 읽어낼 수 있다. 절망스러울 것 같은 주인공 노미지만 왜 그렇게 그녀에게서 희망을 놓치기 싫었던지...암튼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고등학생인 노미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메노파 마을에 살고 있다. 엄격한 규율 아래 강제된 종교생활로 자유로운 영혼들은 이미 피폐해졌고 견디다 못한 언니의 가출과 뒤를 이은 엄마의 파문으로 결국 아버지와 단 둘이 남게 되었다. 영혼에 그어진 스크래치를 극복하려는 소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닌 이 외로운 아가씨의 소소한 일상에 가슴이 저려왔다. 남자친구와 어울리며 잠시나마 자유를 꿈꾸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열정적인 그녀의 청춘과 아버지를 생각하는 깊은 속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소설 내내 빛을 발한다. 언니와 엄마를 잃은 그녀가 받은 상처와 현실은 너무 잔인하고 냉혹하지만 그녀를 위로해주는 사람은 없다. 남아 있는 아버지조차도 그 마을에서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쓰고 버티느라 삶이 버겁다.
노미의 소중한 사람들은 결국 하나씩 하나씩 그녀 곁을 떠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노미와 아버지는 그제서야 새로운 삶의 희망을 품고 낯선 곳에서의 생활을 꿈꾸게 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노미...네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데..희망을 잃지말라고 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노미의 정신세계는 참으로 요상한 품위가 느껴진다. 반항마저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몸부림이라고 느껴진 노미가 기성 세대의 위선에 흔들리지 말고 지독하게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기를...소망했다.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강제된 행위와 인간이 만들어놓은 법칙 아래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하는데 참으로 교묘하게도 종교적인 감정을 작품 속에 녹여 냈다. 안티도 용납이 되는 안티가 있다. 하지만 메노파의 세상과 단절된 삶을 그려낸 소설이 주는 파장은 엄청나다. 많은 사람들이 메노파같은 지구상의 몇 안돼는 허울뿐인 모습을 보고 기독교를 오해할까봐 걱정도 된다. 지상에서의 천국이 진짜 구원이다. 메노파처럼 천국이라는 미래를 위해 오늘의 행복을 억지로 희생시키고 놓치는 것을 신이 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노미가 앞으로 그녀에게 주어질 행복을 아팠던 과거로 발판을 삼아 두 배로 누렸으면 하는 응원의 목소리를 보내고 싶어졌다. 가볍게 날아갈 노미가 그려졌다. 나도 모르게 노미와 함께 우울하고 안타까워했던 소설을 읽는 서너 시간이 보상받아서 다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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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저마다 다 다르다. 세상사람들과 동떨어져 아주 옛날식으로 사는사람들.. 자신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한 그들의눈빛.. 참 이상야릇하다. 누구를 위한것인지 어쩌다 보니 집 나간 언니와 엄마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버린 노미.. 노미가 13살 되던해 언니와 엄마가 집을 나갔다. 이 책 야릇한 친절은 현재를 부정하고 '사후의 천국'이라는 미래를 꿈꾸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메노파는 네덜란드의 종교 개혁자 메노 시몬스가 설립한 재세례파로 오늘날 주로 미국과 캐나다에 농업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기독교의 한 종파이다. 한 마을 전체가 가족이며 이 메노파 종파이고 한사람의 엄격한 통제아래 규율을 지키며 살아간다. 현재는 전혀 상관없는곳이고 미래의 어떤 세상을 위해 잠깐 머물고 있는곳일 뿐이다. 자신들의 생활도 없고 그래서 어떻게 살아가든 크게 상관이 없다고 하지만.. 세상과의 단절을 위해 너무나 많은것들을 요구한다. 그 사이 엄마도 떠나버리고 언니도 떠나버린다. 아빠는 엄마를 너무나 사랑했고 엄마의 뜻을 따랐다. 가끔 그런 아빠에게 화를 내곤 하던 엄마이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노미는 다시 만날날을 꿈꾼다. 노미의 시선으로 바라본 동네는 그저 평화롭기만 하다. 사람들을 야릇하게 보고 동네를 떠나기위해 준비하지만 그 모든것들을 수긍하는 듯한 태도이다. 과연 이 글이 노미의 엄마와 언니의 눈으로 이어진 책이라면 어떨까? 아마 우리가 바라보는 이단의 광신도 집단으로 치를 떨정도로 자신의 생활이 없고 화가 나지 않았을가 싶다. 노미는 그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코믹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블랙코미디 종류에 익숙한건 아니지만.. 그리고 그다지 많이 웃긴 이야기는 아니지만 중간중간 미소가 지어지는 부분이있다. 노미의 엉뚱한 부분이 보였기 때문일까? 약간 두꺼운 책에 과거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약간 지루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아마도 내가 성격이 급해서일것이라고 얘기해본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언니와 엄마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이 물씬 묻어나는 글이었다. 야릇한 친절.. 제목만큼이나 정말이지 야릇한 이야기이다. 모든걸 강요하는 동네에서 그리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사람들로.. 현재를 너무나 모르고 살아가는것.. 아마 그렇게 살면 힘들지 않을까?? 소재도 독특하고. 진짜 이런 동네가 있을까 싶을정도로 신기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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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는 각자 사는 방식이 다 다르다. 그래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거니와 자신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긍정적일 수도 있을 것이고 부정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처럼 궁금증이 생기는 책을 만났다. 「야릇한 친절」 이라는 제목이었다. 제목이 독특했기에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야릇함 속에 친절이 있다는 뜻인지 궁금했다.
그런 궁금증을 뒤로하고 책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주인공 ‘노미’는 열세 살이 되어서 어머니와 언니가 집을 나가 버린다. ‘노미’의 꿈은 가족 모두가 함께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모르고 떠나버린 어머니와 언니. 그렇게 두 사람이 떠나고 난 후 ‘노미’는 아버지와 함께 산다. ‘노미’가 사는 마을에 마을 사람들은 ‘메노파’를 믿는다. 물론 ‘노미’의 가족 또한 믿었다. ‘메노파’는 세상을 등지고 사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과 종교를 분리하며 살고 매우 엄격하다. 그렇기에 ‘메노파’라는 집단에서 요구하는 것들과 엄격한 규율로 말미암아 어머니와 언니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둘은 자유를 찾아서 떠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헤어진 어머니와 언니를 다시 만날 날을 꿈꾸며 ‘노미’는 긍정적인 생각과 마음을 잃지 않고 지낸다.
어떻게 그 상황을 ‘노미’는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와 언니가 떠나고 난 빈자리 크기도 하겠지만, 다시 돌아올 거라는 그리고 다시 만날 날을 꿈꾸며 기다리는 ‘노마’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때론 미소를 짓게 하였다. 모든 것이 자유롭지 않은 동네에서 긍정적인 태도와 생각은 한 줄기 빛처럼 느껴졌다.
내가 만약 ‘노미’였다면 어떤 태도를 보였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강압적인 마을에서 어떻게 버텨냈을지도 궁금해졌다. ‘메노파’라는 종교에 대해서도 처음 알게 되었다. 얼핏 들은 기억이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몰랐던 종교에 대해서 알 수 있었고 ‘노미’가 안타깝기도 하였다. 내가 ‘노미’였다면 아마 함께 떠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등지고 단지 종교와 세상을 분리하며 살아가는 그들을 보며 답답한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노미’가 그리워하는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고 집을 떠난 어머니와 언니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모습도 보았기에 씁쓸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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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마을 사람들은 친절하다. 친철하긴 한데, 그게 좀 이상야릇하다. 가끔 마음 사람들의 눈동자 속에서 그런 야릇한 친절함을 발견할 때면 할 말을 잃게 된다. 예를 들어 "아빠는 어떻게 지내시느냐" "엄마 없이 너는 어떻게 지내느냐"고 사람들이 물을 때가 그렇다.]
열여섯 살에 우상인 언니가 가출을 하여 집을 떠나고, 얼마 후 엄마는 마을에서 파문을 당해 집을 떠나게 되었다면 그 기분은 어떨까? 사랑하는 사람을 짧은 간격을 두고 잃었을 때의 슬픔은 어떤 색일까?
주인공 노미가 사는 마을 이스트 빌리지는 메노 시몬스가 시조인 재세례파, 메노파의 농업공동체이다. 메노파는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살아가는데 그들에게 현실은 구세주가 재림할 때가지 고행하는 시기이다.
(메노파; 네덜란드의 종교개혁에 의해 생겨난 기독교 재세례파 중 최대의 교파이며 전세계에 퍼져 있으나 대부분 미국과 캐나다에 집중되어 있다.)
본문은 총386쪽으로 내용은 떠나간 엄마와 언니에 대한 추억과 마을에 남아서 그 상실감을 견디어 내는 주인공 노미와 아빠의 생활이다. 이제는 곁에 없는 사람, 열여섯 해를 살면서 그 사람들과 엮어내었던 기억들을 그리움과 슬픔을 재치있게 혹은 냉소적으로 그려내었다.
열여섯 소녀 노미는 계속 묻고 반항한다. 왜 태쉬언니와 엄마는 이 마을의 정서에 순응하지 못했을까? 부모님은 태쉬언니를 좀 더 엄격하게 잡아두지 않은걸까. 어쩌자고 메노 시몬스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 휴거를 기다리며 자신들을 관광화하여 먹고 사는 집단을 만들어 놓은 것일까?
이 마을의 목사인 아가리는 주인공의 외삼촌이기도 한데, 마을 전체를 대대적으로 개조한다. 술집, 버스 터미널, 당구장, 수영장을 폐쇄 시키고 자신의 입 맛에 맞는 교과과정을 가르치도록 학교에 지시한다. 배트맨은 시청이 가능하고, 그녀는 요술쟁이는 사탄 숭배라며 시청을 금지시킨다!
규칙에 일관성이 없는 마을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제각기 나름대로 적응을 하며 삶을 이어간다. 노미의 언니인 태쉬같은 부류의 사람들만이 마을을 탈출한다.
이 마을에서의 파문이란 한 사람 왕따 시키기를 말한다. 그 사람이 존재하는데도 투명인간 취급을 하며 교리 안으로 끌어들이는 대신 죄를 물어 배척 한다.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대신 인간들의 새디즘을 교리 존중이라는 위선으로 덮어서 정당화시킨다. 마을은 천국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옥같은 집단 거주지이다.
소설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저자가 슬픔과 그리움에 유머를 섞어서 읽는 내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 그래도 간혹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현실, 인간들이 만들어낸 교리와 이상, 하느님의 세상에 커다란 괴리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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