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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나봐. 궁상맞기 그지 없었다. 토요일 오후 세 시에 혼자 멜로영화라니. 거실의 46인치 LCD에서 영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슬픔보다 더 슬프다니, 억울했다. 이 영화, 나는 전체가 슬펐다. 화면이 시종일관 울었다. 비현실 속에서는 어지간하면 울지 않는 나까지 울리지는 못했으나 아름다웠다. 삭막한 이기심 앞을 비추는 한 줄기 빛처럼 싱그러웠다. 그는 늘 시간이 멈췄으면 했을 것이다. 남자의 병과 마음을 몰라서 시종일관 본연의 발랄함을 유지할 수 있는 여자도, 그런 여자에게 나서지 못한 채 가족이 되어버린 남자도. 사랑하는 여자의 마지막 행복을 엮으려는 남자도. 아직은 남자만 울지만 곧 여자도 울게 되리란 걸 예감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이슬처럼 물기가 묻어있는 촉촉한 슬픔이었다. 남자가 자신의 병을 이토록 오랜 시간 함께한 여자에게 숨길 수 있었다는 사실은 빼고, 공감대가 높았다.
사랑하는 여자(크림)가 사랑하는 남자(주환)의 약혼녀(제나)에게 '파혼해 주세요. 제가 사랑하는 여자가 당신의 약혼자를 사랑해요'라는 편지를 보내는 케이. 영화는 크림과 케이의 '스토리'에서 시작된다. 그와 그녀의 과거, 시간, 친밀의 농도는 현재 함께 하고 있는 평범한 날들을 만들어낸 세월에 있을 수밖에 없다. 새로 찾아든 강렬한 사랑이 익숙한 사랑을 이길 수 없는 것도 진리지만, 어떠한 설렘도 친밀했던 견고한 과거를 모조리 상쇄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둘은 어느 쪽이 어느 쪽의 충분조건이래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둘 다 '고아'였다거나 '학교'를 탈출하고 싶어했다거나 하는 처음의 닮은 꼴이 이제와 중요하지는 않다. 두 사람은 함께 살았다.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주면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면서. 함께하는 시간이 오래 되면 될 수록 사랑이 깊어가거나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족애를 빙자한 익숙함과 친밀함이 겹겹이 쌓여간다.
오래된 연애. 친구처럼 편안한 연애를 해온 나는 같은 젓가락을 써도 아무렇지 않고, 밥 위에 반찬을 올려주고, 먹던 라면을 통째 빼앗아 먹고, 상추쌈은 내 입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안으로 들어가는 일련의 과정이 유별나다거나 일상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스킨십과 사랑은 가짜가 아니라 일상이었다. 일상이 지루한 이유는 서스펜스(의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 무엇이 아니라 현실인 것이다. 그녀와의 날들이 오로지 현실 속에만 존재하는 시간이어야 했다. 적어도 케이에게는.
그에게는 현재가 허락되지 않으므로 미래를 산다. 내가 떠나면 남겨진 그녀를 어쩔 것인가. 케이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자기는 연기처럼 사라질 꿈을 꾸면서, 자기를 대신할 누군가를 그녀에게 선물하려 한다. 두 사람의 미래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크림은 케이의 손을 잡은 채, 다른 남자(주환)에게 간다(보내진다). 일상을 버리고 꿈을 시작하는 일이 '결혼'이라면, 그녀는 행복해야만 한다. 한편, 그의 사랑은 비극이지만 한 편의 시(詩)다. 詩는 노래로 제 존재를 다한다. 그녀는 사라지고, 남자는 숨어버린다. 연인에게만 가능한 숨바꼭질. 쫓고 쫓길, 숨고 찾을 대상이 승천하는 이 순간에도 초침이 멈추지 않는다.
크림은 케이가 먹는 비타민 ABC의 정체를 언제 알아채려나. 다른 남자의 손을 덜컥 잡아버린 그녀가 조금은 야속하다 싶은 순간, 그녀가 내 심장 깊숙한 곳에 생채기 낸다. 나는 이길 수 없다. 그녀는 제가 행복해야 그가 행복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느 누가 반짝이처럼 뿌려지는 마음의 조각을 감히 막아낼 수 있을까.
그들이 행여 다시 태어난다면, 아프지 말고, 버려지지 말고, 서로의 슬픔을 알아채지 말고, 서로에게 반하지 말고, 함께 살지 말고, 그녀가 그의 병을 좀 더 늦게 알게 되기를 바란다.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들 중 단 하나만 아니었어도 그들은 서로를 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둘이 나눠먹는 뜨거운 라면과 식탁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진다. 죽어야 할 이유와 살아야 할 이유는 같다. 갈 수 있는 길은 늘 하나 뿐이다. 내 쪽에서 최선을 다하면 항상 괜찮은 것.
사랑은, 아프더라도 그들처럼 해야 한다는 것을 내 가슴이 깨닫고 있었다. 울지 않았으면서 보는 내내 가슴이 아련했던, 혼자만의 버둥거림이 이유가 있었다. 사랑이 부족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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