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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이란 시간동안 나를 괴롭혔던(!) 한유주의 '얼음의 책' 이다. 보통 책을 들고 자리에 앉으면 한번에 다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 책만큼은 나에게 그런 행동들을 허락하지 않았다. 생각없이 책을 읽다가 다시 뒤로가서 다시 읽는 것이 부지기수 였고, 과연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내가 알고있는 정상적인 소설의 범주에서 다소 벗어나 있었고. 마치 노트에 자신의 생각들을 적어내려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주어를 빼고 써 내려간 문장, 부정문만 이용해서 써 내려간 문장. 모든 것들이 독특하면서도, 새롭게 느껴진 동시에. 식상하게 느껴졌다. 9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작품을 한 마디로 난해함의 극치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의 리뷰를 쓰면서. 책을 뒤적거리는 것 조차 거부감이 들면서. 리뷰를 쓴다는 것 조차 쉽지 않을 것 같다.
사실 이 책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서 그 분들의 감상평을 읽어봤는데. 역시나 그 분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리뷰의 제목을 '얼음의 책 - 두통이 멈추지 않는다.'라고 쓰신 분도 계셨고, 내가 가졌던 생각과 같이 리뷰를 쓰다 그만둔 적이 있었던 경험을 쓰신 분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평론가는 그녀의 작품을 보고 '생각의 찌꺼기를 써내려간 것만 같다.'고도 표현했다.
(1) 언어의 경계를 탐구하는 그녀의 모험은 물론 의미있지만 그런 언어유희를 소설 읽는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은 많지 않다. 종종 그녀는 이 책은 어디에도 봉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혹은 그 누구도 이 책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마치 모래의 책처럼, 한유주는 덧없이 사라지는 이야기를 고안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안배한 글의 미로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는 것은 참이다. "얼음의 책"은 참으로 읽기 힘든 책이었다. 한유주를 설명하는 언어가 필요 이상으로 어려워지는 것은, 그녀에 대한 인상이 결국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렸다.
(2) 읽는 내내 책은 속도가 나지 않았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기에는 책 안에는 부정문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상을 하고 있는 것들이 차차 막히면서 책의 속도는 차라리 글자 하나하나를 읽는 게 더 빠를 정도였습니다. 왜냐면 책 속의 쉼표와 마침표에서 브레이크가 걸렸기 때문입니다. 이해하려고 하면 할수록 정이 떨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중략) 도대체 이 책은 뭘까요? 어떤 것이든 의미가 있다지만, 이 책이 지니는 의미는 아직도 알 수가 없습니다. 두통이 멈춰지면 다시 책을 읽어볼 생각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제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그들의 언어, 그리고 멀미’라는 단어 외에는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니, 그 말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평가에도 나는 그녀의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심지어 몇번이나 다시 본 이유는. 내용이 재미있어서도 아니고. 어떠한 감동 따위의 것들이 주어져서도 아니었다. 그녀만의 언어에 매력을 느꼇고. 그 자체가 바로 그녀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것들에서 그녀에 대해 깊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는 지 모른다. 글 이라는 것을 쓰면서. 어떠한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그녀만의 솔직한 생각들. 약간은 그녀 혼자만의 세계 속에서 써 내려간 단어라 할지라도. 나는 그 자체에 매력을 느꼈다. 특히 어떤 것에 대한 비유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을까. 하는 생각마져 남겼다. 페이지 마다 밑줄을 긋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나 많았다. 책을 읽다가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단어까지 생각했으니. 할 말은 다한게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이 책을 덮는 그 순간. 나는 바로 다른 책을 집었다. 이 책을 보면서조차 읽고 싶었던 너무 많은 책들. 드디어 그 책들을 볼 수 있다는 희열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누구의 말처럼 한유주 씨의 소설은 도전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공감한다. 그럼에도 언젠간 다시 한번 그녀의 작품을 볼 수 있는 나날들도 꿈꾸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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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의 책』은 나와 한유주 사이, 일종의 수인사 같은 책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한유주를 처음 접했고, 그녀의 소설들을 핥았다. 눈처럼 깨끗한 책 표지를 봤을 때, 첫 느낌은 '정말 반갑다'였다. 그러나 첫 느낌이란 얼마나 간교한가! 『얼음의 책』의 반갑던 첫 느낌은 이내 여름 햇볕을 쬐고 있는 얼음처럼 녹아버리고 말았다.
책은 세 챕터 -나, 너, 당신-으로 구성돼 있다. '나' 부분의 <허구 0>은 신선했다. 마치 일기같은 이 작품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작가의 숨결을 느끼려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허구 0>은 신선한만큼 불편했다. 이 단편에 사용된 지나친 의식의 흐름 기법은 곧 미간을 찌푸리게 만든 뒤, 가슴 저 밑바닥까지 낱낱이 긁는 답답증을 불러 일으켰다.
'너' 부분의 <K에게>는 서간체 소설로, 'K가 도대체 누굴까?' 하는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역시 답답했다. 백과사전에 나오는 사물의 명칭처럼 인명도 그렇게, -W로 시작하는 성을 지닌 오스트레일리아인이 말하길, 같은 것 말이다.- 작가만의 방식으로 독특하게 부른다는 건 책의 맨 뒷장 '작가의 말'을 읽고 나서였다.
<흑백사진사>는 흥미진진했다. 10억의 돈과 '손가락'을 맞바꿀 위기에 처해 있는 한 아이의 이야기는 돈과 맞바뀔 대상이 '목숨'이 아니라 '손가락'이라는 데에 포커스를 맞추고 읽어야 한다. 게다 심히 독특하게도 이 작품은 1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다. 1인칭 전지적 시점이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인가 싶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갇혀 있는 한 아이가 자신을 가둔 이의일거수 일투족을 다 꿰고 있는 걸 이 이상 어찌 설명한단 말인가? 심지어 아이는 제 부모 마음 의 결 하나하나까지 다 읽어내는 걸. -여기서 잠깐! 아이는 결코 초능력자는 아니다!- 그러나 역시 결말에 이르고 나면 나도 모르게 '아-'하는 탄식을 내지르고 만다.
믿어도 되고 믿지 않아도 되는 이 소설집의 모든 소설들은 얼음 같다. 『얼음의 벽』이란 이 책제목은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가히 '노벨제목상' 감이다. 얼음처럼 곧 녹아 없어지고 말 이야기들, 얼음의 벽처럼 견고하면서도 또 그렇게, 곧, 사라질. 읽어도 읽히지 않는 글자들이 있다. 한유주의 『얼음의 책』은 꼭, 홧병이 없는 독자들에게만 권하고 싶다.
ⓒ Hyang 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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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달로' 라는 작품을 통해 한유주를 접했다. 그 작품에서 한유주가 하고자 했던 소통은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치 달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녀의 문체는 지금까지 내가 겪어왔던 평범한 수사와는 분명히 달랐고 그것의 호불호를 말하기 전에 난 그녀의 글에 강하게 집착하고 빠져드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한유주의 두 번째 작품인 '얼음의 책'은 첫 번째 책인 '달로'만큼이나 제목을 잘 지은 책이다. '얼음의 책'은 마치 얼음으로 만들어진 책 처럼 읽고 있으면 점차 손 안에서 녹아내리는 듯한 환상을 만들어낸다. 책 안에 존재하는 언어는 종이로 이루어진 책과 다르고, 그 언어들을 읽어내다 보면 그 언어를 이해하기 전에 글자가 녹아서 흘러내리는 듯한 착각을 준다. 그리고 얼음의 책은 첫 번째 소설인 '달로'에 이어서 한유주 특유의 기법으로 우리의 소통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유주의 책은 일단 어렵다. 어떤 독자의 말마따나 한유주의 글을 읽을 수 있는 것은 화병이라고는 경험한 적 없는 세상에서 제일 느긋한 사람일 뿐일 것이다. 그 정도로 한유주의 글은 독자에게서 멀어져 있다. 왜냐고? 그녀의 독특한 수사법을 경험한다면, 책을 10페이지도 읽기 전에 내팽겨칠 것이 분명하니까. 사실 한유주 소설의 독특함은 그 서사적 면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실 서사적 면에서 한유주의 소설은 그다지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유주가 독특한 작가로 손 꼽히는 것은 '얼음의 책'에서 보여주는 1인칭 전지적 시점만큼이나 독특한 그녀의 수사법 때문이다. 1인칭 전지적 시점이라니. 이 작품에서 소년은 갇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가둔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한다. 그리고 자신이 알지 못해야 할 다른 사람의 심리마저 읽어내는 그의 시점은 평범한 수사법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 혼란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한유주의 수사법은 읽는 사람을 혼란스럽게(화나게) 한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책으로 만들고자 했다는 작가의 말 만큼이나 얼음의 책은 독특한 수사법으로 독자들을 휘두른다. 그녀의 책에는 질서가 없다. 뚜렷히 명시되어야 할 주인공이나 배경 따위는 묘사되지 않고 심지어 사건조차 불명확하다. 그렇게 이야기가 없는 소설이 한유주가 말하는 '얼음의 책'이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책. '얼음의 책'은 그렇게 그려진다. 이야기를 포기한 몽상. 그것이 한유주를 관통하는 근원적 시도이다. 그리고 '달로'에서 치밀하게 시도되고 '얼음의 책'에서 완성된 모습을 꿈꾼 한유주의 시도는 지금까지의 소설을 '파시즘'적이라고 주장하며 기존의 소설적 장치를 정면에서 부정한다. 그렇기에 그녀의 언어에는 질서가 없다. 말 그대로 머리 속에 떠오르는 몽상을 그대로 글로 옮겨놓은 듯한 그녀의 글은 그녀와 호흡을 맞추려는 엄청난 노력 없이는 절대로 읽어낼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글을 통하여 그녀는 묻는다. 과연 소설이란 무엇인가. 왜 소설은 반드시 '지금까지의 소설'과 같아야 하는가. 라고. 그렇기에 한유주의 책은 어렵다. 그녀가 만드는 이야기의 내용적인 문제가 아니라 읽는 것 자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책은 일종의 마력을 가진다. 지금까지의 수사법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소통의 체계를 만들고자 하는 것은 어찌보면 반사회적이지만 우리에게 강요되는 '무엇인가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일종의 동지의식을 느끼는 것은 개인적인 경험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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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대 초반의 여성입니다만, 싸이월드를 잘 하지 않습니다. 팔을 늘려 자신의 얼굴을 찍는 셀카라는 걸 전혀 못하고, 허세와 쓸모없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신비주의의 다이어리 글을 이해하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직도 싸이월드를 놔두는 건, 전혀 셀카나 자신의 이쁜 척이나 가련한 척을 하기 위한 사진을 올리기 위해서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괜히 있어보이게 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단지, 주변 이들이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 남겨둘 뿐입니다. ‘얼음의 책’을 읽는 동안, 두통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는 확고히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심지어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의 오픈 엔딩을 싫어합니다. 새드엔딩도 좋아하지 않지만, 오픈엔딩 역시 좋아하지 않습니다. 보통은 픽션류에서는 생활에서 벗어난 희망 혹은 위로를 받고 싶지, 그것을 들어다보면서 ‘자, 이걸 봐봐’라고 하는 건 싫습니다. 두통은 책의 글자들로부터 눈을 떼면 괜찮아졌습니다. 저는 작가처럼 ‘그것을 있거나, 있지 않는다’식의 말투를 쓰지 않습니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더는 부정형도 이제는 화가 나려고 합니다. 그래요, 싫어합니다. 싫습니다. 읽는 내내 책은 속도가 나지 않았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기에는 책 안에는 부정문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상을 하고 있는 것들이 차차 막히면서 책의 속도는 차라리 글자 하나하나를 읽는 게 더 빠를 정도였습니다. 왜냐면 책 속의 쉼표와 마침표에서 브레이크가 걸렸기 때문입니다. 이해하려고 하면 할수록 정이 떨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게 작가가 원하는 글일까요? 정확히는 제가 원하는 글을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좋은 버릇인지 나쁜 버릇인지 모르겠지만, ‘책을 끝까지 읽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저는 책을 274페이지에서 멈췄고, 뒤로 넘어가서 작가의 글을 읽고, 그 앞의 해설부분을 읽다가 멈췄습니다. 제게 이 책은 ‘그들의 언어’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제가 모르는 기존의 이야기들(보통은 예술이나 학술적)을 빌러 가치를 찾으려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해하지 못 하겠습니다. 최근에 듣고 있는 예술관련 강의에서 예술이 점점 피상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말에 이 책을 그런 시선으로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좀 나아질 뻔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전혀 없는 한달의 한 번 육체적으로 오는 고통으로 인해서 구토까지 일어났습니다. 진통제를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주는 두통은 소용이 없었습니다. 책을 읽다가 구토 증세를 느꼈습니다. 정확히는 멀미였습니다. 저는 흐르는 글을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책을 결국 끝까지 읽지 못 했고, 글을 쓰게 되었지만, 지금 저에게는 차라리 안도감이 듭니다. 이런 책이 있다는 것과 왜 처음 페이지를 읽고도 계속 책을 읽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더 이상 부정문 투성이의 문장과 표현을 머릿속에서 그릴 수 없는 글을 멈췄습니다. 저에게는 이 책을 싸이월드의 자신의 셀카와 자신의 신비주의 글을 올리는 것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그들(혹은 그)의 언어로 말했기에 소용이 없었습니다. 멀미가 일어납니다. 아직도 멈추지 않습니다. 두통이 멈추지 않습니다. 아직 책에는 책갈피가 꽂혀있습니다. 그 탓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친구에게 책 이야기를 했더니 자신은 그런 식의 책을 좋아한다는 말에 경악했습니다. 도대체 이 책은 뭘까요? 어떤 것이든 의미가 있다지만, 이 책이 지니는 의미는 아직도 알 수가 없습니다. 두통이 멈춰지면 다시 책을 읽어볼 생각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제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그들의 언어, 그리고 멀미’라는 단어 외에는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니, 그 말만 얻을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