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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이 돌보던 장애인 자매를 상습적으로 성폭행해온 인면수심의 장애인시설 원장과 사무국장이 경찰에 붙잡혔다. (...) 이 장애인 시설에선 20명 가량의 정신지체 장애인들이 생활하고 있으며, '우수 장애인시설'로 TV에도 자주 소개된 것으로 알려졌다.
작가 공지영으로 하여금, 『도가니』를 쓰게 했던 그 신문기사가 아니다. 오늘로부터 불과 6일 전인 8월 14일, 연합뉴스 기사다. 소설이 소설이 아닌 현실, 심지어 되풀이되고 있는 우리의 현주소.
사실 처음엔 이 리뷰를 쓰지 않으려고 했다. 작가가 소설을 쓰면서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소설을 읽으면서 아팠다. 하고 싶은 말들이 꾸역꾸역 올라왔지만 내 짧은 필력이 못 미더웠고, 무엇보다, 난 이 소설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것이 두려웠다.
그렇게 『도가니』을 읽은지 한 달이 흘렀을까, 나는 윗 기사를 무방비의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맞닥뜨렸다. ‘눌러두면 안되겠구나. 한 번 더 읽고, 리뷰를 써야겠다’ 이렇게 마음 먹은지 6일, 이제야 글을 마무리 짓는다.
그렇다, 현실이 아무리 ‘개’같다 해도 외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냥 묵인해 버리는 것이 이런 거지같은 현실을 더욱 공고화 시킨다는 것, 『도가니』를 읽고 난 후 가장 많이 생각한 점이다.
소설은 주인공 강인호의 무진(霧津) 입성과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한 소년이 철길을 위태롭게 걷고 있는 모습이 서로 교차되며 시작한다. 사건의 구체적 배경이 되는 무진(霧津)은 이미 패색을 감지한 병사들처럼 음습해보여 기괴한 느낌마저 준다. 다리를 저는 작은 소년은 기차에 치어 미소인지 가벼운 찡그림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안개 속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목숨을 잃는다. 작가 공지영의 큰 장점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흡인력’이 이 소설에서도 십분 발휘된다. 독자의 단순한 ‘호기심’과 근원적 ‘두려움’을 동시에 자극하며 책장은 훅훅, 넘어간다.
사업실패 이후 아내의 연줄을 타고 특수학교의 기간제 교사로 일하게 된 강인호. 그가 무진에 진입하였을 때 느낀 공포에 가까운 불길함은 사건의 전조에 불과했으며, 안개 속의 자리 잡은 자애학원의 거대함은 그가 곧 부딪힐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처럼 견고했다. 강인호가 무진 도착 첫날 만난 아이(유리)의 두려움에 찬 비명소리는 약자 중의 약자로 대표되는 장애인들의 울부짖음처럼 느껴졌다. 누가, 무엇이 그 작은 여자아이를 비현실적으로 공포스럽게 하는 걸까.
작품 안에서 직접적 피의자로서 절대악으로 등장하는 교장 이강석, 행정실장 이강복, 교사 박보현. 그리고 나는 작품 초반부터 등장하는 ‘장경사’와 ‘박경철교사’에게도 특별히 주목한다. 상식을 뛰어넘는 ‘악행’을 직접적으로 저지르지는 않지만, 용인하거나 방조함으로써 ‘진실을 개들에게 던져’준다. 진실이 거짓이 되고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현실에 ‘기여’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루되어 있는 그 카르텔.
장경사는 한마디로 지긋지긋한 안개를 요긴하게 사용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세상이 늘 투명하고 맑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행동에 제약이 없다. 자신의 이속만을 위해 살면 그만이다. 어디가 이기는 쪽인지 직감적으로 간파하고 거기에 영합한다. 소설의 중반 이후, 교장 등을 체포 할 때 그의 영악함은 더욱 돋보인다. 대세의 흐름에 맞게 그들을 체포하나 장경사는 ‘곧 다시 돌아올’ 그들을 위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그는 조만간 다시 이런 처지가 역전되리라는 것을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경사는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아 평생을 소왕국의 왕자처럼 살아온 이런 교장 형제와 같은 부류들을 ‘내심 경멸’하고, 한편으로는 서유진에 대해 알 수 없는 연민마저 느낀다. 십일년째 자애학원에 근무하고 있던 박경철 교사는 어떠한가. 부임 첫날 “학교가 너무 조용하다”라고 말하는 강인호에게 노골적인 경멸과 함께 연민을 보냈던 박선생은 과거에도 지금도 자애학원이 아니면 특별히 갈 곳이 없다.
이처럼 먹고 사는 것에 있어서 일종의 약점을 가진 박교사와 더 공부하고 싶었으나 주정뱅이 아버지에게 매만 맞던 장경사, 그래서 그들은 ‘보통의 우리들’마저 (어떻게 보면, 충분히) 이해 가능한 영역에 있다. 이처럼 이강석, 이강복, 박보현을 제외하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이해하려 맘만 먹으면 이해가 되는 ‘입체적’ 캐릭터이며, 그래서 더욱 현실적이다. 그들의 생각의 흐름과 거기서 파생되어 나오는 행동들은 우리가 흔히 봐 온(혹은 해 온) 것이기에 더욱 잔인하고 무섭다. 자본을 쥔 권력자들, 경찰, 검찰, 교육청, 시청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침묵해 왔던 우리 모두가 만든 카르텔, 이것이 바로 이 사건의 피할 수 없는 진실이자 요체인 것이다.
하여, 소년의 죽음과 여자아이의 공포는 ‘이제까지 그래 왔듯이’ 골치 아프지 않게 ‘잘’ 처리되는 듯 싶었다. 강인호가 아이들의 노기를 감지하기 전까진, 그들이 서로 ‘소통’하려 하기 전까진. 그들의 진심이 통해, 강인호가 알기 원했지만, 그만큼 알기 두려웠던 ‘진실’이 드러난다. 장애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고문, 성추행, 성폭력, 지속적인 성폭력.... 이 미친…… 광란의 도가니는 무엇인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21세기 한국에서 ‘자행’되고, 경찰, 검찰, 학원 등으로 대표되는 권력자들의 카르텔 안에서 ‘합법적’으로 ‘보호’받는다. 그리고 연두를 최초로 도와줬던 장애인 생활지도교사는 ‘합법적’으로 ‘해고’된다. 교육청과 시청은 자신들에게 아무 이득이 되지 않는 않는 이 골치 아픈 사안을 서로의 소관으로 미룰 뿐이고, 더군다나 최수희 장학관은 교장 형제가 장로로 있는 교회의 ‘식구’ 다. 이러한 무진이 악몽보다 섬뜩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의 자화상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과 강인호, 서유진 등으로 대표되는 약자들에게 마지막 희망은 미디어였다. (때문에, 미디어법은 더욱 더 철회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처한 무자비한 폭력의 상황을 폭로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 그들의 입장을 담은 프로그램이 외압을 이기고 방영된 이후, 세상은 들썩거렸다. 정의가 실현되어 세상은 그래도 살만 하다는 것을 확신시켜주는 듯 했다. 방송의 파장은 컸고, 증언들이 쏟아져 나와 피의자들의 처벌은 당연한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끝을 맺었다면, 이 소설은 이토록 독자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극적 소재를 담은 영웅 소설 정도로 멈추었을 것이다.
이강석, 이강복이 장로로 있는 무진 영광제일교회를 중심으로 그들을 옹호하는 논리 역시 퍼져나갔다. 왜냐하면 그 논리는 상식적이었고, 보통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강인호의 비합법 전교조 전력, 서유진과의 관계와 과거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이의 자살에 대한 의혹까지 겹치면서 사건의 본질과는 달리 여론은 더욱 이상한 방향으로 호도된다. 또한 유리 할머니와 글도 모르는 민수 부모님은 평생을 괴롭혀온 가난과 병 때문에 찢어 버리고 싶은 그 천하의 나쁜 놈들에게 합의를 해 주며, 사건을 ‘묵과’하는데 본의 아니게 ‘일조’한다.
누가 봐도 거짓임이 느껴지는 피의자들의 말들, 허점을 드러낸 피의자 편의 증인들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의 진심어린 증언들에도 불구하고 교장 형제는 집행유예로 석방된다. 소설은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현실적’이다. 돈과 빽이 있는 교장 형제는 좋은 변호사를 선임하고 실형을 벗어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할 수 없는 박보현은 징역 6개월을(물론 그것도 죄질에 비해 터무니없이 짧지만) 선고 받는다.
이렇듯,『도가니』의 미덕의 커다란 뿌리는 현실성에서 기인한다. 외면하고 싶지만, 그것이 현실이기에 직면해야 하고 응시해야 하는 부조리에 대한 투철한 해부. 작품 안의 절대악에 대항하는 주인공들 역시 현실 안의 인물이다.
이혼한 후 애 둘을 혼자 키우며 사는 인권운동센터 상근 간사 서유진. 항상 옳아보이고 강해보이지만, 그녀 역시 갈등하며 눈물을 흘리는 한 영혼이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을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운다는 그녀 역시 가끔은 뻔히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그것과 타협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싸우기로 결심한다. 악에 맞서기(Anti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서, 자신이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
반면, 늘 옳은 것은 자신이 없었던 강인호는 처음부터 영웅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는 보통의 인물이었다. 전형적인 영웅의 모습이 아닌 주인공은 오히려 독자의 마음에 깊게 닿아 함께 공명한다. 결코 배신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을 결국은 배신한 (형국을 취한) 것이다. 그가 처절한 고민 끝에 다시 아내의 품으로 돌아오는 결정은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읽는 이들의 고개를 끄떡이게 하고, 그래서 더 아프게 가슴을 흔든다. 서유진 역시 무진을 말없이 떠난 강인호를 전혀 탓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작가가, 나에게, 우리들에게, 또 작가 스스로에게, 그러니깐 영웅이 아닌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도가니』는 여기서 멈추지 말자고 말한다.
설사 닥친 현실의 문제로 강인호와 같은 선택을 했을지라도, 당장은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있지 못할지라도, 진실을 결코 잊지 말자고 말한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 흔들리며 살아가는 우리네 보통 사람들이 기억하고 되새기는 행위, 타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마음과 행동인 것이다. 여전히 타인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놓고 시야를 흐리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희망은 존재하는 것이다.
지구가 멸망해도 바퀴벌레와 함께 끝까지 살아남을 것만 같은 타락한 기득권층, 그들을 교묘하고 당당하게 ‘서포트’해주고 있는 사회 시스템,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 속수무책으로 최소한의 방어조차 할 수 없는 이들에게 그들이 가하는 폭력의 잔악함, 태어날 때부터 약자였던 수많은 이들. 이 모든 게 불편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들이다. 소설의 후반부, 교장실에 찾아가 이강석과 윤자애에게 분노했던 삼십여명의 학생들 역시. 그 결과 비록 그 아이들은 폭행죄로 고소되고 여론은 순간 등을 돌려(나는 왜 노조의 파업 쟁의가 떠올랐을까) 싸움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지만, 아무리 연약한 아이들일지라도 힘을 합쳐 '연대'하고 전진하니, 부조리한 권력자로 대표되는 교장의 얼굴이 일순 해쓱해지고 두려움에 책상 밑으로 피신한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스스로 그리고 함께, 홀로 서고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
작가와 글이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들이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은 곧 ‘권력’이다. 사르트르가 작가는 소통 불가능한 것의 소통을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고 말했듯이, 소설가는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 세계를 전달해야 하는 책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미친 듯이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그들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독자를 불편하게 하면서, 동시에 독자의 마음을 공명시켜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감추어있던, 혹은 간과하고 있던 현실을 직시하거나, 문제의식을 제기하거나, 공감하게 하여, 더 많은 이들이 주목하게 하는 것. 무엇이 진정 옳은 것인가, 자연스레 생각하게 하고 기억하게 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도가니』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공지영 소설의 진보를, 한국 문학의 발전을 감히 말하고 싶다. 그간 공지영 작품에 대해 상대적으로 옹호적이지 않았던 이들이라도 읽어보길 권한다.
공지영 작가가 자신의 인터뷰집 『괜찮다, 다 괜찮다』에서 공선옥의 『명랑한 밤길』을 읽곤 ‘졌다’ 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책을 덮으며 생각 했다.
'『도가니』를 읽은 꽤 많은 작가들이 내가 졌다, 라고 느끼지 않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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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강산만 변화시키는 게 아니었다. 작가 처음 <도가니>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난 책 제목치고는 너무 우스꽝스럽지 않나 생각을 했었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아직도 이런 제목을 붙임으로써 작가가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허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못지 않은 문제의식을 우리 사회에 일으킬 수 있는 글이라는 확신만은 분명히 갖게 되었다. 최근에는 많이 나아진 듯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장애를 가진 이들을 만나는 경험에 우리는 익숙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장애인들이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소설을 읽고 무기력감을 느끼는 건 좋다고 볼 수 없다. 그런데 주인공의 선택에, 허무하다 할 수도 있는 결말에 나는 기운이 빠졌다. 이 책에는 너무도 많은 악이 등장했다. 강자는 장애라는 약점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마침내 한 인간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수년 동안 그러한 부당함이 반복되었음에도 가해자는 오히려 장애인을 위한 성스러운 자선사업을 하고 있는 것마냥 세상에 비추어진다. 무진의 세력가들은 학연, 지연 등 온갖 연줄의 힘을 빌어 제 편 보호하기에 급급하다. 국선 변호사는 만사를 귀찮아하고 같은 죄를 지었음에도 돈이 없는 그렇지만 이내 촉촉히 젖어든 눈가로 인해 나의 시야는 마치 무진에 가득 찬 안개마냥 뿌옇게 돌변했다. 패배가 서러워서는 물론 아니었다. 지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포기치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 걸음 하나하나가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죗값을 충분히 치르지 않은 채 학교를 다시금 장악한 이들을 향해 그들은 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희생을 감내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는 부당함을 알아도 으레 침묵해야만 한다고 배워온 이들이 자신들도 남들과 똑같이 소중한 존재임에 눈을 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투쟁은 이기기 위함보다 우리 자신을 단련시키기 위함이 더 크다고, 내가 아는 누군가는 누차 강조했었다. 때론 그 단련이 자신을 해칠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주인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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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난 뒤 가슴이 먹먹하다. 무엇부터 다시 되돌아보아야할 것인가 이성적으로 다가가기 전에 감정이 먼저 불길처럼 솟아오른다. 금수만도 못한 인간들이라고 칭해도 될 존재들에 대한 그 사회의 진실 감추기가 인간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지역 사회가 모두 한통속이 되어 인권을 말살해 나가는 현장을 보는 일은 거대한 악취 나는 웅덩이 같은 인상을 받았다. 오물로 가득 찬 웅덩이, 그 속에 빠지면 도저히 헤어날 길 없을 듯한 아픈 현실을 만났다. 글은 자애학원으로 이름 지어진 농아들의 교육 현장에서 일어난 사실을 알아가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교사(강인호)가 부임을 하게 되고, 학교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상황에 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그 사실의 진실을 듣게 된다. 이 이야기는 지역 사회의 인권운동 센터와 연결이 되어 그 진상을 파악하게 된다. 아이들은 그 학교의 교장, 행정실장, 그리고 지도 교사에게 수시로 성폭행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이들은 고통을 당하면서 울부짖지만 아무도 들어줄 사람도 없다. 그리고 그 소리를 농아들이기에 같이 기숙하고 있는 다른 아이들도 듣지 못한다. 그렇기에 쉽게 범죄가 가능했던 것이다. 심지어 아이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서로 손목을 줄로 연결해 놓기도 하지만 아침이 되면 그 줄은 잘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의 어른들에 대한 아픔과 불신은 지속적으로 전개된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다가간 교사가 그들에게 따뜻하게 대하게 되고, 아이들이 마음을 열어, 그들을 통해 사회에 그 진실이 알려지는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강인호가 부임하던 날, 그 학교의 한 아이가 철길에서 죽는다. 강인호는 맡은 교실에 들어가 한 남자 아이가 울고 있고, 그 주변에 아이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 울고 있는 아이가 왜 우는 지 이유를 묻는다. 처음에는 아무도 교사에게 선의의 눈을 주지 않는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교사의 진정성을 느낀 한 똑똑한 아이가 그 이유를 수화로 전해 준다. 철길에서 죽은 아이의 오빠라고, 그리고 왜 죽었는지 우리는 안다고. 그러나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교사는 자신의 삶과 아이들의 진실 사이에서 방황을 하지만 아이들의 아픔을 인지하면서 용단을 내린다. 이 사실을 바르게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권운동 센터와 힘을 모아 아이들을 통해 증언을 하게하고, 사실을 밝혀 경찰에 신고하고, 교육청에도 사실을 알린다. 그러나 경찰은, 교육청은 그 일에 대해 미적거리며 빠른 해결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지역사회가 공히 부조리를 방조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무진이라는 지역 사회에서 진실을 알리기에 어려움을 느낀 인권운동 센터에서는 아이들의 증언을 영상으로 만들어 곳곳에 보내게 된다. 그것이 서울의 방송에서 관심을 가지고 취재를 하겠다고 전해 온다. 그래서 그들의 취재에 응하게 되게, 자애학원의 진실이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전국에 방송된다. 물론 방송이 이루어지기 전에 많은 압력이 들어온다. 기자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그 방송을 약속 시간에 내어 보낸다. 그로인해 인터넷이 들끓고, 전국이 이 인면수심의 교육자들에게 눈길을 보낸다. 그리하여 무진의 파출소에서도 그들을 체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하여 그들은 법정에 서게 되는데 이 법정에서의 사건을 재판해 나가는 과정이 자세히 그려진다. 이 소설은 진실이 외면당하는 내용을 표현하면서 실제의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 무진이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그 지역 유지로 활동하고 있는 쌍둥이 교육자들의 파렴치한 행위를 들춰내고 있는, 가슴 아픈 이야기다. 그들이 법정에 서서 재판에 회부 되었을 때, 많은 지역 사람들을 움직이고 약하고 상처 입은 아이들의 무지한 부모들을 금전으로 매수해 풀려나는 이야기다. 이런 문제는 인권의 측면으로 교육의 측면으로 다가가야 하는데, 힘의 논리로 다가간 듯한 재판의 모습을 본다. 아이들이 증언대에 서서 수화를 통해서 놀랍고 안타까운 증언을 하는데, 그것이 지역 사회의 안정과 타성에 젖은 무사인일의 태도에 의해 묻히고 마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이 재판의 실질적인 원고로 활동을 한 인권운동 센터와 교사는 낙담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진실에 대한 나름의 문제를 거론해 본다. 진실이 가지는 유일한 단점은 그것이 몹시 게으르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자신만이 진실이라는 교만 때문에 날 것 그대로의 몸뚱이를 내놓고 어떤 치장도 설득도 하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자주 불편하다. 진실 아닌 것들이 부단히 노력하며 모순된 점을 가리고 분을 바르며 부지런을 떠는 동안 진실은 누워서 감이 입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 세상 도처에서 진실이라는 것이 외면당하는 데도 실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면 있는 것이다. 진실이 당연히 밝혀질 줄을 믿고 그 당연성에 결과까지 속단해 버린 그들의 아픈 자성이 어린 소리다. 이 말은 다음 그들의 활동의 멘토가 된다. 하여 끝까지 진실 밝히기에 앞장서게 되고 이러한 책이 나오게 된 이유도 될 것이다. 이 책이 그 후 영화로 만들어 졌다. 그 영화는 많은 관객들을 울리면서 이 진실을 참으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이 책이 세인들에게 열광적으로 읽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진실을 향한 세상 사람들의 분노는 전국적으로 들끓게 되고, 결국은 죄인이 단죄 당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글 속의 주인공 중의 한 명인 인권센터 간사 서유진이 말한다. 부정이 정당화 되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울부짖는 그녀의 절규는 가슴 아프게 우리들에게 다가든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뭐지? 하고 누군가가 물으면 그녀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거짓말. 누군가 거짓말을 하면 세상이라는 호수에 검은 잉크가 떨어져 내린 것처럼 그 주변이 물들어 버린다. 그것이 다시 본래의 맑음을 찾을 때까지 그 거짓말의 만 배쯤의 순결한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그녀의 이 말이, 순결한 에너지가 되어 그들의 투쟁을 이어나갈 수가 있었고, 지속적으로 장애아들을 위한 활동을 할 수가 있었으며, 그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에서 문제가 되었던 농아, 지적 장애아들은 인권운동 센터에서 마련한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야학으로 배워나간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말이 이야기 마지막에 눈물로 얼룩져 우리들에게 다가든다. 이 곳 생활을 하면서 나라는 존재가 중요한 줄을 알았다고. 그들은 자애학원이란 공간에서 그들의 가치를 느끼지 못한, 도구처럼 살았던 삶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삶이 바탕이 되어 많은 깨어있는 의식이 만들어 지고 그것이 발판이 되어 진실이 결국 승리하는 세상이 되어간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사씨남정기’를 생각했다. 사씨의 삶을 통해서 인현왕후의 진실을 넌지시 일깨워 진실을 밝혀낸, 하여 사실을 바른 길로 돌려놓은 책의 힘을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감동으로 읽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꼭 읽어야할 책이 아닌가 여겨진다.
(나는 리뷰어이다 이벤트 참여 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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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흥분이나 감격 따위로 들끓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네이버 국어사전) 광란의 도가니를 보았다. 가장 신성했어야 할 곳이 가장 더럽혀져 있었고 그 신성을 방패 삼아 진실을 막아 내려 했다. 애당초 이길 수 없는 힘의 구조였는지 모른다. 객관적 구도상으로는 그랬다. 학교와 교회의 힘을 빌어 만든 무기로 가장 여린 곳을 공격하는 치졸함에 우리는 “상식”이라는 잣대로 오히려 상식선에서 생각했을 때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라 여기며 차라리 그 사건이 묻혀 지길 원했다. 그 영역만큼은 무진시에서 지켜야할 마지막 보루로써 결코 깨어져서도, 까발려서도 안된다는 무언의 힘들이 이 도시에서 얽히고 얽혀버린 권력의 그물망으로 촘촘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교육의 대상이자 보호의 대상인 아이들을 어른의 손으로 유린했고 그것을 뛰어넘어 정치적인 힘과 종교적인 힘으로 또다시 유린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아이들이어서 힘이 없기도 했지만 장애인이었기에 더더욱 힘이 없었다. 그들이 더 비겁했던 핵심적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사회적 약자 중의 약자인 장애를 가진 아이들에게 가한 폭력이었기 때문에.
공지영은 또다른 문제를 화두로 이 책을 써냈다. 그녀의 힘은 이 부분에서 항상 가장 큰 힘을 발한다. 그녀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하나같이 사회 전체를 조망하고 그 안에서 낚시하듯 한 개씩 끌어올려 그것을 膾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착한여자』에서 보여준 가부장 구조에서의 여성의 지위와 가정 폭력 문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보여준 사형제도 존폐 문제, 『즐거운 나의 집』에서는 새로운 가족 형태와 싱글맘 문제 등을 다루었다. 이제는 성폭력과 장애인의 인권 문제까지 끄집어냈다. 어쩌면 그 부분들만 잘 감추면 우리 사회는 잘 발전하고 있고 선진국 대열에 충분히 설 수 있는 질적인 부분까지 갖추었다고 평가받을 수 있을진대 “툭!” 건드려 부스럼을 남겨주는 공지영만의 이 센스! 언제 터질 줄 모르는 화산 분화구에 강력한 시멘트를 부어대며 막는다고 그 속에 곪은 열기가 언젠가는 터지지 않으리까만은, 공지영은 그 시멘트를 걷어내고 되려 분화구 속을 헤집어 더 빨리 시원하게 터지게 만들어버린다. 여드름 난 얼굴을 화장으로 억지로 감춘다고 다 가려질 수도 없고 부득이한 상황에 맨얼굴을 공개했을 때의 경악과 추함을 한 방에 맞는 것보다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함께 고민하는 장을 만들어 오래 걸리더라고 근본적인 체질개선으로 해결해나가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그것을 문학이라는 장르를 이용해서 제기하여 주는 것이다. 심각함에만 머무를 수 있는 소재를 감동과 사유를 함께 이끌어 내었다는 것에서 그저 공지영 작가에게 박수쳐 주고 싶다.
공지영의 작품은 겉보기에는 인간 내면에 집중하기보다 사회 구조 속에 곪아 있는 여러 문제들의 고름을 한 번씩 짜주는 작품을 많이 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크게 보면 그것이 바로 인간 내부의 선악의 싸움이 만들어 낸 결과이고 그 결과가 사회 현상화․사회 문제화 되었고 이를 좀 더 쉽게 알릴 수 있는 수단인 소설로써 승화시켜 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 항상 공지영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순수 문학을 추구하는 부류에서는 공지영을 흥미위주의 이야깃거리로 자신의 상품(?)을 대중에게 많이 팔아내는 얼굴 예쁜 이야기꾼으로 묘사하지 않는진 모르겠다. 그러나 문학도 하나의 “힘”, 권력이라고 보았을 때 그 힘으로 적절하게 대중의 지성을 깨워주고 사회적 가치에 대해 고민하게 해주는 기회를 열어주는 것은 그래도 공지영 작가만이 할 수 있는 나눔이 아닐까.
『도가니』도 한 줄의 신문기사에서 모티브를 얻고 글 쓰기 시작했다는 그녀의 예리한 관찰력은 그냥 지나쳐버렸을 우리 보다는 확실히 덜 이기적인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그녀의 성격이나 뇌구조 자체가 개인 내면의 성찰과 분석보다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와 공동체의 연대 쪽에 더 끌리도록 되어 있는 것 같다. 감히 건드리기 쉽지 않은 사립 재단이나 복지재단, 종교, 법조계, 기득권층에 얽힌 타래를 풀어헤치려 든 그 용기부터가, 과감하고 직설적인 공지영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이기에 더 진실성이 있고 가슴을 아프게 때린다.
청각 장애인 학교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부조리, 그리고 성폭력, 권력의 상하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폭력성, 거기에서 기생할 수밖에 없는 가진 것 없는 자들의 또다른 폭력과 거짓의 이중성, 그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만들어 낸 무진시 전체의 구조적 모순까지. 전체를 아우르는 거짓의 성벽을 낱낱이 해체한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던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한 심장 깊숙이 숨어 있던 뜨거움이, 코너에 몰렸을 때 북받쳐 올라온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것을 우리는 ‘정의’라고 부른다. 또는 ‘사랑’ 일런지도. 시공을 초월해서 가장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이자 가치가 바로 정의와 사랑이기에 그 근본의 原石만큼은 훼손될 수 없으리라는 희망을 준다. 지금 예수가 존재한다면 여전히 예수는 인간의 죄악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힐 사회이지만 그래도 예수 같은 사람, 그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무진시의 안개같이 희뿌연 강인호의 우유부단한 성격도 눈 앞에서 직접적으로 전개되는 불합리함, 비이성적 행태, 교육이 아닌 폭력이 난무하는 학교, 그것도 특수학교에서 일어나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이 결국 강인호를 진실의 열쇠를 진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도록 만들어버린다. 자신의 가족과 자신의 감정 외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고, 어느 한 군데라도 열정적으로 달려드는 스타일도 아니다. 그런 그에게도 진실의 힘은 컸다. 진실만이 사람의 심장을 들끓게 하고 정의를 부르짖게 할 수 있고 뜨거운 사랑의 실체를 체감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겹겹이 쌓여있는 거짓의 관문을 뚫기 위해서는 작은 힘을 가진 진실의 알갱이들이 모여 단단한 돌맹이, 더 큰 바위로 만들어야 했기에 그는 딸 새미를 생각하며 유리와 연두와 민수를 끌어안고 그들의 방패가 되어보려 하는 것이다. 안개에 휩싸인 진실의 실체를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는 맑은 하늘과 태양의 빛만이 안개를 몰아낼 수 있듯이 순수한 에너지의 결정체들이 그 거짓과 폭력을 몰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수와 진심을 혼탁하게 하는 것은 사회에서 인정하는 권력의 에너지였고 종교의 권력, 교육의 권력, 법의 권력, 지역 사회의 권력 등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은 돈의 권력이었던 것이다. 자본의 힘에 가장 쉽게 무너지는 것이 바로 돈의 위력을 가장 잘 아는 돈 맛을 본 사람들일 것이다. 무진시의 얽히고 얽혔던 타래의 뿌리는 돈의 힘에 굴욕한 그릇된 관계에서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밥줄을 쥐고 있는 교장과 행정실장에 굽신대는 생활지도교사 박보현, 수화도 할 줄 모르지만 청각장애인 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들, 사건 무마의 대가로 향응과 뇌물을 받은 지역 경찰, 청렴함으로 명예를 쌓았지만 강남의 사무실을 약속 받은 판사 출신 변호사, 심지어 피해자 부모들마저 돈에 매수되어 고소를 취하하는 모습까지 보고 있으면, 그 돈이라는 것은 그것을 가진 자에게 가장 비참하게 굴복하는 권력 구조를 낳는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깨닫게 해준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불의이고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만 깨끗한 척 할 수 없다는 핑계로 결국 우리들도 그 돈의 권력에 협조하고 있다.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그러한 자본의 힘을 능수능란하게 이용하는 어른들이다. 순수한 아이들마저 과자 하나에, 1000원짜리 한 장의 유혹에 더 쉽게 넘어가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어릴 때부터 돈의 힘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의 결말부가 현실의 모습을 말 그대로 현실적으로 마무리해준다. 정의에 불타 당장 뛰쳐나갈 것 같던 강인호의 내적 갈등 묘사와 결국은 자신은 원래 정의로운 사람도 아니었고 그러기에 더더욱 정의를 외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 번도 어긴 적 없던 자신만의 규칙 ‘늦더라도 결국 간다’를 어기게 된다. 찰나의 영웅 심리일 뿐이라는 자신의 모습을 오랜만에 일상을 그대로 느끼게 해 준 그의 아내와 딸 새미 덕분에 확인하게 된 것이 결정적이었고 자신의 반 아이들의 고통을 딸 새미로 투영해서 고통을 느꼈던 그는 그저 새미라는 한 아이의 아빠일 뿐 반 아이들을 끌어안아 보듬고 가는 모두의 아빠는 될 수 없다고 뒤돌아 서버린다. 그런데 그것이 결코 비열하게 보이진 않는다. 어쩌면 독자들로 하여금 안도의 한숨을 쉬게 한다. ‘소설이니까, 드라마니까, 영화니까 가능한거야’하는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저런 상황이었다면 내가 궂이 짊지 않아도 되는 짐은 내려놓고 싶었을 것이다. 모르는 척 하고 속으로만 응원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일상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과거의 고리들을 모두 끊어버림으로써 그의 몸 구석구석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무진시의 안개 같은 끈질긴 인연들을 잊어본다. 그래야 덜 미안하고 지금의 삶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은 말이야, 그걸 지키려고 누군가 몸을 던질 때 비로소 일어나 제 힘을 내는거야. 우리가 그걸 하찮게 여기고 힘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정말 힘을 잃어.”(211p) 진실의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진실의 힘은 강하다. 진실의 힘 앞에서는 누구도 이길 수 없다. 단지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다는 약점 때문에 우리의 인내력이 그 사이에 다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강인호에게 그랬듯이, 지금의 나에게도 그렇듯이 말이다. 우리에게 부재한 인내력과 용기, 정의로움, 진실에 대한 믿음, 사랑에 대한 확신. 그러나 그것들은 언젠가는 메아리로라도 돌아온다.
그것을 우리는 ‘희망’이라 부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희망의 도가니를 꿈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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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광란의 도가니.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발정 난 나라'에서 벌어진 광란의 도가니다. 진실. 불편한 진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상식이 통하고 정의는 살아있는 사회라고 믿었던 믿음을 흔드는 불편한 진실이다. 먹먹하고 답답하다. 소설 속에 나오는 청각 장애우가 되어버린 듯 읽는 내내 가슴 속 답답함을 지울 수가 없다. 두터운 안개가 짙게 드리운 무진이라는 도시처럼 마음에도 어두운 검은 안개가 드리워 사라지지 않았다. 소설이지만 실제 2005년 한 청각장애 학원에서 벌어진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자 공지영 작가가 쓴 실화를 모티브로 하다 보니 이런 일이 실제 있었다는 사실에 한번 놀라고 이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고 유야무야 넘어간 정의를 믿을 수가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과연 우리는 상식이 통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었던 걸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존중 받으며, 힘없는 이들의 인권이 인정받는 그런 곳에서 살고 있기는 한 것인가라는 답이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쏟아 낼 뿐이다. 비겁한 방관자처럼, 진실을 모른 채 눈감은 동조자가 된 것처럼 부끄러움과 알 수 없는 분노에 몸을 치 떨게 만든 그날의 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남겼고 공지영 작가는 어떤 말을 하려고 한 걸까... 그날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작가는 강인호라는 한 교사를 등장시킨다.약간은 무능력한 남자. 아내의 힘으로 어렵사리 얻은 교사로 등교하는 첫날부터 무진의 자애학원에서 그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다. 짙게 드리운 안개가 시야를 흐리듯 학원은 비밀스런 사실을 숨기고 다들 모른체하는 그런 곳이었다. 동료 교사들도 진실을 구태여 알려 하지 말라는 듯 그를 무시했다. 마치 넌 너의 능력이 아닌 아내의 힘으로 온 걸 다 안다는 듯 그를 비웃는 것 같았다. 그런 그곳에 대학 선배인 서유진이 등장한다. 남편 없이 혼자 어렵게 살아가지만 아이들에게 사는 곳에 대한 희망을 주기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여자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접한 사건에 그들은 진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려 다짐한다. 작은 힘이지만 가려진 해서는 안될 난잡한 성폭행을 세상에 알려 잘못된 정의를 바로 잡으려 일어선다. 그러나 힘과 권력은 그들을 비웃듯 사건을 은폐시키고 거짓으로 포장시킨다. 힘없는 이들에게 난 상처는 모두를 위한 희생이라는 듯 아무일 아닌 듯 그렇게 덮어 버리려 한다. 정상인들도 아닌 장애아이들을 무참히 짓밟은 교장 이하 몇몇 선생들의 만행은 사랑이라는 위선으로 자신들의 죄를 포장했고 그들 주변에서 함께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에 급급한 기득권층은 진실을 알면서도 덮어버리자 회유한다. 분노가 끓는다. 발정 난 나라에서 그런 동물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같은 동성이란 것이 부끄럽고 그런 진실을 모르고 지금껏 지냈던 자신에게 화가 난다. 이제 초등학교에 다니는 소설 속의 장애우와 같은 나이에 어린 딸을 키우는 아비로서 이런 세상이 무섭고 두렵다. 힘이 없기에 힘이 있는 그들이 저지른 죄는 내게 일어났어도 마찬가지였을 거란 사실에 치가 떨린다. 지난 과거의 오점이라 말할 수 있을까?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 지나간 부끄러운 한때의 사건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공지영 작가는 힘을 앞세운 권력 집단이 저지른 만행을 낱낱이 알렸다. 그리고 그 진실 어떻게 묻혀 갔고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를 들려줬다. 진실은 분명히 있지만 보려 하지 않기에 보이지 않고, 자신의 것을 지키고 세상의 변화를 피하게 하도록 모두들 침묵하는 참상을 글로 전했다. 아무리 소설이지만 미화하여 영웅을 만들지 않았다. 김인호가 보여주는 행동은 지극히 현실적이기 때문에 난 그의 행동을 비난하지 못한다. 그것이 <도가니>가 전하는 진짜 무섭고 두려운 불편한 진실로 다가왔다. 그래도 분명 우리 사회는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라고 믿는다. 죄 값을 치르도록 법은 단죄를 내려지지 않았음에도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는 공지영 작가의 노력처럼, 그들의 노력을 모른 척 외면하지 않고 글을 읽고 주위를 다시 한 번 돌아보며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는 것 만으로 세상은 분명 살기 좋은 곳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믿는다. 공지영 작가에게 감사한다. <도가니>에서 최대한 자신의 글 솜씨를 자제하고 사실을 표현해 줘 읽는 것에 몰두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건이 어떻게 되가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인 내게 공지영 작가의 선처(?)가 더할 나위 없이 고마웠다. 책장을 열고 쉴 세 없이 책장을 넘기며 진실이 드러나고 정의가 이기기를 바란 내 소망은 비록 이뤄지지 않았고 그렇게 되도록 더 이상 넘길 페이지는 없었지만 희망의 바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진실은 보려 하는 이가 있는 한 언젠가는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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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책을 보다가, 영화를 보다가, 드라마를 보다가 작은 장면들에 펑펑 울어버린다. 가족들은 눈이 새빨갛게 변해가며 울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가끔은 가벼운 핀잔을 하기도 하고, 가끔은 감정이 풍부해 좋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도가니'를 읽으면서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분명 뭉클했다. 울음이 터질것 같았다. 그런데 눈물이 말라버렸다. 가슴깊은 언저리에서 뿜어져나오는 분노의 기운은 눈물을 말려버렸다. 뜨거운 분노가 증발시킨 눈물은 탄식이라는 이름으로 변해 입밖으로 터져나왔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하고 싶었다. "아니야, 이건 우리 이야기가 아닐거야." "단지 소설일 뿐인걸, 소설이야, 픽션이라고..." 분노에 가득차서 손이 부들부들 떨리면서도 이렇게 말하며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중얼거림과 동시에 가슴속 언저리에서는 어딘가에서 불의의 현장속에서 그것이 불의인지 모른채 억압과 고난속에서 살고 있는 제 2의 유리, 연두, 민수가 눈에 보이는것 같아 괴로웠다.
책을 읽다가 수없이 많이 덮었다. 도저히 정상적인 기분으로 이 책을 연달아 읽을 수가 없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이 세상에 '상식'이라는게 없는채로... 누가 이런 세상을 만들었는가 묻고 또 물었다. 아무리 물어도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던게 생각이 났다. 실험자를 대상으로 실험실 안에 버튼 하나를 만들어 놓고, 방 안에는 학생을 가두어두고 문제를 풀게 하고, 문제를 틀릴때마다 버튼을 눌러 전기충격을 가하는 실험을 했다고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실험을 대체 왜 하는거죠?"라고 따져물었지만, 계속 버튼을 누를것을 강요했다고 한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며, 당연히 실험을 안하겠다고 하고 박차고 나오면 되는것인데 왜 저러는거지? 라고 묻는순간 충격적인 자막이 내 눈앞에 아른거렸다. 실험대상의 65%가 지속적인 전기충격을 가했고, 이 사람들에게 묻자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다큐멘터리의 결론은 이게 바로 '복종'의 힘 이라고 밝혔다.
복종, 우리는 복종속에서 살고 있다. 자연스럽게 학습된 복종이라는 이름하에 당연한 상식을 무시하고, 상식이 흔들린 토대위에서 아슬아슬한 파도타기를 계속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던져진 '농아'들이다. 귀로는 세상의 더러운 소리들이 들려온다. 눈으로 세상의 더러운 부분들이 마구마구 보인다. 머리로는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혐오한다. 그러나 입밖으로, 손끝으로, 발끝으로 움직이는 것은 없다. 그냥 그렇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 지나쳐버린다.
'도가니'가 끓어 올랐다. 지금도 눈은 멍하고, 가슴은 뜨겁다. 분노로 가득찬 가슴이 식으면, 눈물이 흘러 내릴것 같다. 머리는 두려움에 가득찼다. 나라면 이 상황에 어떤 방법을 선택할까를 고민하는 순간, 또 숨이 턱 막혔다. 나도 역시 그들과 다를바가 없구나,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는 것 자체가 나 역시 물들어 있는 '눈 뜬 장님'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말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다. 더럽고 추악했던 시대가 지나가고 나면 새로운 시대가 찾아와야 하고 그 시대가 계속되면 좋겠는데, 새로운 시대 역시 더럽고 추악했던 시대의 잔해속에서 싹이 트고, 잔해속에 있던 더러운 양분은 새 시대를 더럽게 만든다. 그렇게 '역사는 반복된다.' 지금, 어쩌면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 역시, 이러한 '반복'일지도 모른다.
속이 울렁거린다. 아주 매운 음식을 먹었을 때보다 더 울렁거린다. 속에서 욕지기가 끓어 오른다. 그리고 무섭다. 내 눈을 가린, 내 귀를 막은, 내 입을 움켜쥔 그 안개같은 존재들이 무섭다. 지금 이 분노, 적어도 분노라는 감정만큼은 놓지 않는 '눈 뜬 장님'이고 싶다. 분노마저 없다면 나는 살아도 사는게 아니리라... 다시 책장을 열어 한 번 더 보고 싶지만 힘겹다. 다시 유리를, 연두를, 민수를 바라보는게 힘에 겨워 당분간 멀리하고 싶다. 이 부끄러운 현주소를 담고 있는 이 책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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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굴곡진 갈림길에서 공지영이『도가니』에서 선택한 무진시(霧津市)는 암담했다. 무진 즉 안개가 1차적인 이유였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안개 탓이다.’라는 일종의 위선에 찬 인간들의 끔직한 현실이 유독 눈에 띄었다. 이것은 정말이지 감추고 싶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추한 안개였다. 공지영 말대로 광란의 도가니였다. 남들과 달리 몸을 불편한 장애아에게 자의반 타의반 장애시설로 수용되는 것은 단지 그들만의 행복은 아니었다. 장애아를 보살펴야 하는 부모들, 더 나아가 이들 모두들 책임져야 할 자애(慈愛)학원에게도 행복이었다.
하지만 자애학원에서 잘 먹고 잘 놀아야 할 장애아들에게 행복은 멀리 있었다. 장애아들에게는 당장의 배고픔과 외로움이 눈앞에 있었다. 그래서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하는 선생들 앞에서 장애아들은 눈치를 봐야 했다. 이와는 달리 장애아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그들의 성(性)을 장난감마냥 가지고 놀았던 학원 이사장 앞에서 그들은 눈치를 볼 수 없었다. 눈치를 버려야 할 만큼 장애아들의 마음은 이미 병들어 있었다. 성폭행을 당한 장애아 중에서 한명은 절벽에서 떨어졌고 또 한명은 기찻길에서 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장애아들의 절박한 입장은 철저하게 가려졌다. 이 모두가 “안개 탓”이었다.
『도가니』를 통해 자애학원의 더러운 현실이 생생하게 드러났다. 장애아들을 성폭행한 짐승같은 학원 이사장 때문에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하게 물컹거렸다. 그리고 이내 분노의 도가니가 되었다. 왜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불행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성폭행을 당했던 장애아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를 냉정하게 심판해야 할 법(法)은 전혀 119 구조대 같지 않았다. 오히려 가해자인 학원 이사장의 잘못을 한 순간의 불장난이라고 하면서 물러서고 말았다. 법마저 걷잡을 수 없는 양심이 시커멓게 타들어갈 지경이니 굳이 다른 사람들을 몹쓸 인간이라고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라는 자괴감이 맴돌았다. 정말이지 “학원 이사장과 장애아의 인권이 같은 줄 알아요?”라는 뜨끔한 질문에 “예‘라고 답하지 못했다. 학원 이사장의 잘못은 분명한데 재판 결과 놀랍게도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오히려 꼼짝 못하고 갇혀버리는 것은 정의(正義)였다.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은 몇 번이나 벼락을 치면서 꽝꽝 울렸다. 맞딱드리고 싶지 않은 현실에 불편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재판장 당신을 고소합니다. 당신은 죽은 거나 마찬가집니다.”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법정에서 소란을 일으켜야 했던 것은 작가 말대로 진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단점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진실이 게으르다는 것’이었다. 즉 ‘진실 아닌 것들이 부단히 노력하며 모순된 점을 자고 분을 바르며 부지런을 떠는 동안 진실은 그저 누워서 감이 입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절망때문이었다.
진실의 경계(境界)! 지금 이 말이 대수롭지 않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기간제 교사로 일했던 강인호가 자애학원의 비리에 맞서 싸우다가 끝내는 패배한 짐승이 되어 도망간 것을 굳이 탓할 까닭이 없어보였다. 만약 강인호같은 막막한 상황이었다면 나또한 그랬을 것이다. 눈 한번 감으라는 아내의 바람을 외면하고 남을 위해 그토록 자신있게 할 수는 있어도 부끄러운 자신의 결점이 드러날 때 설령 어렵게 진실을 얻었다고 해도 진실을 지켜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세상은 동화도 환상도 아니었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소설을 헤아려보면 그 안에는 공지영 만의 뜨거운 것이 담겨져 있었다. 작가의 전작을 읽어본 사람이 아니더라도 책을 읽고 이렇게까지 불편해지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더 깊게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공지영에게는 인생의 절박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도가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덕적 폐허 시대에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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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단에서 공지영은 아이러니한 존재다. 대극적인 사랑과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는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국에서 공지영 만큼 많은 독자들과 호흡하는 작가는 없다. 가장 많이 읽히고, 가장 많이 피드백되며, 가장 많이 평가받는 작가이다. 관심의 대상이란 얘기다.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작가임에는 분명한데 아직도 적지 않은 평단과 대중은 그녀에게 시원한 박수를 거부하고 있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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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으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