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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독자가 말했던 김이설의 지지리 궁상 시리즈. 지난번에 읽었던 “환영”전에 읽었더라면 답답함에 가슴을 칠까? 사실 “환영”이란 책보다는 덜 지지리 궁상이라 조금 덜... 가슴이 답답했다고나 할까?
그래도 한때는 잘 나갔던(?) 고물상. 지금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황폐해진 곳. 고물상이 즐비했던 동네에 알코올 중독자 할머니와 함께 사는 화숙. 그녀는 폭력이 생활인 외삼촌, 그 외삼촌에 의해서 죽어간 장애인 엄마, 장애인 엄마에게 가해진 성폭력을 보면서 자랐다. 외삼촌의 딸인 수연에게 모질게 굴었던 화숙은 어느 날 도박에 미친 남편과 별거한 수연이 옛사랑과 모습을 감춘 뒤 수연의 딸 혜주를 키우며 살게 된다. 화숙은 자신을 둘러싼 일들에 고통을 느끼는 한편 이웃 친구 진순은 혜주를 키우는 조건으로 외삼촌과 살림을 합친다.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나타난 수연을 보며 분노를 참지 못한 화숙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게 되는데...
왜 이렇게 궁상이고 왜 이렇게 너절한 이야기냐고 반문해도 할 말이 없다. 내가 살고 있는 어딘가 에선 이것보다 더한 삶도 있을 테니까... 태어날 때부터 불행을 몰고 오는 삶이 있을까? 그래서 우린 그런 사람에게 나쁜 피를 이어 받았다고 말하는 것일까? 장애인 엄마를 둔 화숙은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나쁜 피를 이어 받은 재수 없는 아이였다. 아빠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장애인 엄마에게 동네 아저씨들은 괴물이고 야차였다. 딸인 화숙이 밖에 있는데도 장애인 엄마에게 달려드는 사람들. 그런 엄마를 지켜주지 못하고 때리는 외삼촌과 할머니. 그녀에겐 그들 모두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좋을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외삼촌이 엄마를 때리면 때릴수록 화숙은 수연을 괴롭힌다. 또한 그게 당연하다는 듯 수연은 그 괴롭힘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그 고만고만한 일이 나에게는 힘들게 애쓴 후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는 쉬운 일이 누구에게는 치열하게 노력해도 얻지 못할 것들이었다. (119) 남들에게는 평범한 이야기. 집을 넓혀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아이들과 가난하지만 단란하게 사는 사람들, 때론 싸우기도 하지만 그래도 웃고 바라보는 사람들, 작은 반찬이지만 같이 나누고 먹는 사람들. 그게 고만고만한 일이고 평범한 일이지만 화숙에겐 노력해도 얻지 못한 것들이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시간이지만, 시간은 그 주인에 따라 각자의 몫으로 소멸되었을 것이다. 같은 10년을 보내는 동안 누군가는 학부형이 되고, 빚쟁이가 되기도 하고 생을 끝내기도 한다. 어떤 이는 과거에 매몰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앞만 보며 뛰어갔을 것이다. (122) 나는 그녀를 통해 내 삶에 감사함을 느꼈다. 화숙에겐 너무도 미안한 이야기지만 내 삶에 만족하게 되었다. 평범한 삶마저도 그들에겐 노력해도 안 되는 삶이라니, 얻지 못하는 삶이라니...
많은 각기 다른 삶이 있다. 다 나와 같을 거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매일 똑같은 평범한 삶이 싫다고 외쳤던 적도 있었다. 삶의 중심에서 나를 돋보이게 하고 싶었던 적도 있다. 왜 다른 이들에게 빛나는 삶이 나에게는 늘 어둠인지 원망했던 적도 있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들, 나보다 더 괜찮은 삶을 사는 사람들, 나보다 더 높은 위치의 사람들을 부러워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본다. 다른 한 곳에선 이렇게 평범한 우리의 삶을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미안하기까지 하다.
나쁜피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는 그 환경에 함몰되고 누군가는 보기 좋게 벗어나기도 한다. 누구를 탓하기 전에 다시 나를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환경이나, 부모를 탓하기 전에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한다면 더 나은 삶이 나를 기다리지 않을까? 한 바탕 폭풍우 같은 사건들이 사라지고 나면 또 나는, 우리는 삶을 이어가야 한다. 내일을 위해. 그리고 나와 같은 삶을 우리 아이들에게 주지 않기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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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만에 다 읽은 책이다. 글의 흡인력 때문인지 아니면 분량이 적어서인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수월하게 마침표를 찍었다. 그런데 책장을 덮고 난후 솔직한 심정이 이랬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 책을 낸 거지?' 글은 재미 있었고 이야기를 끌고가는 작가의 힘도 대단했다. 선택하기 쉽지않은 소재를 정해 접근하는 작가의 용기와 솔직하고 거침없는 표현도 꽤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렇게 솔직해도 되나?' 싶을 만큼 작가는 인간의 본성을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게다가 완급을 조절하는 능력과 이야기들의 적절한 분산과 배치는 군더더기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깔끔했다. 그런데도 읽는 내내 목에 뭔가 걸린 것 같은 이물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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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네 일상과 가장 근접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여류 작가를 특히 선호하는 것은 여자로써의 삶에 대해 좀 더 깊게 파고든 그들의 소설과 공감할 수 있어서다. 지극히 권태롭고 불순해 보이는 제목과 표지를 누구라도 이 소설을 지나칠 수 없게 한다. 작가의 등단작 <열 세살>과 <엄마들>을 읽었을 때 그 기대감을 기억하기에 주목받는 신예라는 문구가 내게는 당연한 것이다. 엄마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아빠의 존재를 모르며 태어남과 동시에 나쁜 피라고 낙인찍힌 여자, 화숙이 있다. 두 모녀를 당연히돌바줘야 할 가족인 할머니와 외삼촌 조차 냉대와 폭력을 일삼았다. 그런 엄마에게 화숙도 연민보다는 증오와 분노가 있었다. 천변에서 고물상을 하던 외삼촌의 폭력에 쓰러진 엄마가 죽음에 이르렀지만 모른 척 외면했다. 모든 게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일들로 화숙이 비툴어진 심성을 갖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든 화를 동갑내기 사촌 수연에게 뒤집어 씌워 자신의 존재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거짓말로 수연을 난처하게 했고, 외숙모의 외도를 외삼촌에게 고했다. 수연은 언제나 화숙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연약했고, 여대생이 되었고, 결혼을 했다. 심지어 사랑했던 옛 남자 재현과 다시 살림을 차린다. 화숙은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토록 원했던 평범한 삶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늙은 할머니를 부양했고, 삼촌에 대한 분노도 여전했다. 화숙에게 남은 것은 악의뿐이었다. 못생기고 살집 많던 여고생은 뚱뚱하고 키 작은 노처녀가 되었다. 손톱은 언제나 뭉뚝했고, 찬 바람이 불면 손등이 트기 시작했다. 겨울이 되면 붉게 변해 피가 났다. 발뒤굼치도 언제나 허옇게 들뜨고 굳은 살점이 갈라졌다. 그렇게 나이를 먹었는데도 부자가 되지 못했다. p 53 어린 혜주를 살뜰하게 돌보는 옆집 여자 진순을 이해할 수 없다. 딸까지 버려가며 사랑을 선택했지만 수연의 마지막은 자살이었다. 재현을 찾으러 간 외삼촌은 실종되고 결국 시신으로 돌아왔다. 화숙에서 가족이란 이름으로 남은 이는 없다. 지겹도록 끔찍했던 외삼촌의 고물상이 새로운 일터가 되었고, 엄마도 외삼촌도 그 누구도 아닌 혜주와 진순만이 화숙을 기다렸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천변과 고물상은 누구도 원하지 않는, 더럽고 피하고 싶은 곳이지만, 삶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 버려진 것들로 이뤄진 고물상이 누군가에게는 절대적인 삶의 근원지가 된다. 그 안의 사람들, 화숙을 비롯해 모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다. 우울증으로 아이마저 외면하고 도망쳐야 했던 진순, 장애인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을 할머니가 술꾼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족이기, 벗어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반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아니었다면 쉽게 천변을 떠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혜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 화숙의 진심은 아니었을까. 하여,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가족을 만들고 지키고 싶은 욕망이 살아났는지도 모른다. “다녀오셨어요.” 안채로 들어서자 혜주가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색연필을 쥐고 있던 혜주가 다시 바닥에 엎드려 발을 까닥거리며 그림을 그렸다. 여자 셋이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림의 구석에는 세모 지붕의 집 한 채, 하늘에는 노란 해가 떠 있었다. p 178 혜주가 그린 그림 속 여자들은 더이상 나쁜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닌, 새롭게 태어난 가족이다. 혜주가 화숙과 수연처럼 성장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적어도 화숙과 진순은 혜주에게 자신의 분노와 피해의식을 표출하지 않을 것이며 가족이라는 이유로 어떤 희생도 강요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편한 소설이나 외면할 수 없는 소설이다. 내가 만든 인물들이 당신을 대신해 앓았으면 좋겠다, 라는 작가의 바람처럼 고통스러운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그들이 몹시 안쓰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소설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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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피>에서도 김이설의 이전 작품에서처럼 불행과 고통에 방치된 여성 인물들이 자신의 주변과 싸우며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서로를 핍박하고 착취하는 관계 이상이 되지 못하는 가족들, 도덕성은 물론 생존까지 위협하는 극단적 가난, 인간적 위엄을 조금도 챙겨주지 않는 척박한 사회생활 등이 주로 그의 인물들이 경험하는 환경적 요건이다(185쪽). 그의 다스려지지 않는 분노는 폭발 직전처럼 장전되어 할머니, 수연이, 외삼촌 등 혈연들에게는 물론이고 옆집 여자 진순이나 같은 상가 사람들, 오랜 친구이자 애인처럼 지내는 ‘아저씨’에 이르기까지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공격적인 태도로 발현된다(193쪽). 그 고만고만한 일이 나에게는 힘들게 애쓴 후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는 쉬운 일이 누구에게는 치열하게 노력해도 얻지 못할 것들이었다. 그 사실이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119).
엄마는 정신지체였다. 말이 어눌하고 시선을 집중하지 못했다. 간질도 있어 아무 데서나 픽픽 쓰러지곤 했다(44). 학교가 파하고 집에 가면 방에서는 신음 소리가 들렸다. 개새끼! 하고 고함치며 세숫대야를 발로 차거나 방문에 돌을 던지곤 했다. 할머니마저 고물상에서 작업을 했던 탓에 누구든지 예사로 들락거릴 수 있는 집이었다. 사내들은 내가 잠잠해져야 기어 나왔다. 나는 담벼락에 기대 그들의 면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웃 고물상 김 씨, 박 씨 아저씨들이 바지춤을 추스르며 나왔다. 먼 친척뻘인 종수 아저씨, 윤 씨 할아비가 나오기도 했고 근우, 용재 같은 동네 청년들도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들도 심심치 않게 들락거렸다. 내 아비도 저런 놈들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속이 메슥거렸다. 분을 어떻게 삭혀야 하는지 몰라 천변 둑에 올라가 고함을 질러 댔다(47). 엄마는 가끔 마당 복판에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나를 보면 배시시 웃었다. 앞섶이 풀어져 젖꼭지가 드러나 있거나, 치마가 뒤집어져 검은 터럭이 훤히 보였다. 찬물을 들입다 퍼부었다. 놀란 엄마는 벌떡 일어났지만, 내 얼굴을 보고 다시 배시시 웃었다. 그런 엄마를 목도하는 일이 힘겨웠다. 제일 불쌍한 건 엄마 자신이었다. 하지만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평생 이런 엄마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 억울했다. 너무 가혹한 짐이었다. 엄마가 죽어 버렸으면 했다. 살아 있을 필요가 없는 인간이엇다. 살아서 폐만 되는 인간이라면 없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엄마를 죽이고 싶었다. 내 손으로 죽일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었다(48). “너희 엄마는 아주 착했거든? 너도 얌전히만 있어. 알았지?” 사내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비명을 질렀지만 소용없었다. 내 힘으로 어른 남자를 막아낼 수 없었다. 머리채가 잡힌 채 사내의 아래에 깔렸다. 엄마 닮아서 젖 큰 거 봐라. 사내가 킬킬 댔다. 또다시 방문이 열렸다. 외삼촌이었다. 사내는 외삼촌에게 죽도록 맞고 쫓겨났다. “네 몸뚱이는 네가 지켜.” (중략) 천변의 사내들은 병신 딸도 병신일거라 생각하곤 했다. 나는 늘상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특히나 불룩한 가슴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고물상 사내들 앞에서는 이를 드러내며 살기를 보였다. 외삼촌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건드리기만 해 봐, 다 죽이겠어! 누가 손끝 하나라도 댈라치면 그렇게 외치려고 작정했다. 집에 돌아오면 방문을 걸어 잠그고 크게 숨을 내뱉었다. 그제야 턱이 아픈 걸 느낄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이를 앙다물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나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내가 엄마의 딸이었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 나는 제일 두려웠다. 나에게 가장 위험한 곳은 집과 동네였다. 나는 밖으로 맴돌기 시작했다(50-51).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여기를 떠날 수 있는 길이었다. 나는 시급 1000원을 넘지 못하는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했다. 커피숍에서 잔을 나르고, 패스트푸드점에서 감자를 튀기고, 식당에서 설거지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는 여관에서 시트를 걷어내는 일, 그 뒤로는 세탁 공장에서 빨래 분리 작업을 했고, 새벽 시장을 들락거리며 보따리 옷 장사를 했다. 10년이란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못생기고 살집 많던 여고생은 뚱뚱하고 키 작은 노처녀가 되었다. 손톱은 언제나 뭉뚝했고, 찬 바람이 불면 손등이 트기 시작했다. 겨울이 되면 붉게 변해 피가 났다. 발뒤꿈치도 언제나 허옇게 들뜨고 굳은 살점이 갈라졌다. 그렇게 나이를 먹었는데도 부자가 되지 못했다(52-53).
“넌, 괜찮아?” 난, 괜찮은 걸까.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외삼촌이 죽여야 할 사람은 재현이 아니다.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나는 또 거짓말을 하게 될 것이다. 나의 가장 큰 잘못은 거짓말을 했다는 걸 잊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었다(174). 나를 거짓말쟁이에 가해자로 만든 외사촌 수연 외삼촌에게 맞고 자란 수연은 늘 주눅 든 표정이었다 . 어깨를 똑바로 펴지 못해 늘 등이 구부정했다. 무슨 일이든 제가 먼저 잘못했다고 빌어서 상대방을 민망하게 만드는 애였다. 눈물도 흔한 데다가, 별일 아닌 일에도 주저앉아 무섭다고 벌벌 떨곤 했다. 수연은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곤 했는데, 희한하게도 그게 더 화를 돋우었다. 때려서 미안한 게 아니라, 더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나게 했다(76-77).내 성장기에 수연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미쳤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외삼촌에게 맞거나, 사내들에게 유린당하는 걸 목도할 때마다 나는 당당하게 수연을 괴롭혔다. 그것으로 분을 풀었다. 때리고 밟아도 성에 차지 않았다. 엄마를 생각하면 더 모질어도 될 것 같았다(77).
늘 저렇게 금방 체념해 버려 통쾌한 승리감을 가지지 못하게 했다. 처음부터 나와는 상대가 안 된다는 수연의 자포자기가 오히려 내 부아를 돋웠다. 내가 부당하다는 걸 적나라하게 깨닫게 해서 불쾌했다(161).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이명처럼 들렸다. 나는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파트 입구 지붕에 머리를 맞고 떨어진 수연의 몸이 화단에 있었다. 그때, 그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을 괴롭히는 게 옳았다. 처음으로 수연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 발짝도 뗄 수가 없었다(167). 나의 증오의 대상인 외할머니 나에게 매운 걸 먹게 한 사람이 바로 할머니였다. 엄마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챘을 무렵이었으니 혜주 나이 정도 되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입을 벌리라하고 고추 끝을 들이밀었다. 매큼한 첫맛에 진저리를 쳤지만, 헐머니는 지치지도 않고 끼니때마다 고추를 먹였다. 고추장도 찍어 주고, 된장도 찍어 줬다. 생양파도, 생마늘도 먹였다. 세끼 밥과 매운 반찬, 그것이 할머니가 나를 키운 방법이었다(114). 할머니에게 욕을 하거나, 할머니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으로, 때로는 할머니를 때리는 것으로 화풀이를 했다. 병신 엄마를 만든 것이 할머니고, 그 병신 엄마가 나를 세상에 낳았으니, 나의 기원이 바로 당신의 실수다. 당신이 책임지지도 못할 일을 만들었으니, 이런 것쯤은 참아 내라는 화풀이였다(130). 수음은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는 남편의 태도를 극복하는 동안, 남편이 소아를 탐하는 사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조금만 관심을 두고 지켜보면 금세 드러나는 일이었다. 내가 할 일은 소문이 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즐기기 위해, 화장품과 새 옷으로 나를 감추기 위해, 그걸 가능하게 하는 돈을 주는 남편과 키즈스타플레이타운이 건재하기 위해서 함묵하면 되었다(186).
공사장에서 일을 마치고 왔다는 재현의 운동화에는 검은 흙이 묻어 있었다. 외삼촌에게 함묵해달라고 누누이 당부를 했다(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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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량 있는 신인 작가의 가장 큰 단점은 작품이 몇 개 없다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아주아주 뿅가는 실력을 가진 작가라면 더 그렇습니다. 기다리기 참 거시기 하지요. 김이설 작가 역시 다르지 않더군요. 그녀 또한 경장편 두 개, 그리고 소설집 하나가 전부니까요. 말이 세 권이지 분량으로 치면 왠만한 영미 소설 한 권 정도도 되지 않으니 갈증이 좀 나는구만요.
김이설 작가에게 뿅간 건 그녀의 최근작 <환영>을 읽고 나서였지요. 그 한 편으로 그녀의 공력이 딱 느껴지드만요. 그리고 작품이 별로 없어 남은 건 좀 뒀다 아껴 읽고 싶었는데 그게 그렇게 안 됩디다. 다른 책을 보다가도 문득 문득 눈길이 가니 이런 젠장, 그냥 보고 말지 해서 또 한 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남은 건 소설집 한 권인지라 잠시 입맛을 다시며 아따 참, 하고 중얼거려 봅니다. 거 좀, 하고 덧붙여보기도 하고 말이죠.
일단 이 작가 선생의 경장편 두 권은 아주 같은 스타일입니다. 매우 음침하고 처절하며 독하게 징한 밑바닥 인생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지독한 중독성을 가졌습니다. 김이설 씨는 아마 그렇게 그런 이야기만 할거야, 하고 딱 방향을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거 참 괜찮다고 저 역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라도 말이지요, 어떤 실력을 가진 이가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격과 질이 달라지는데 김이설 작가 선생이 풀어나가는 이야기들은 정말이지 김이설 씨만이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닐까 싶은 겁니다. 김일설 씨나 김삼설 씨가 해서는 그저 60년대 한국 소설의 답습처럼만 보일 확률이 대단히 높은데 그것을 김사설 씨나 김오설 씨도 아닌 이설 씨가 했기 때문에 정말이지 대단한 작품이 된 것 같단 말입니다. 남의 이름으로 적당히 하라고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라고 말하고 다음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참 처절한 삶에 관한 이야기들인데요, 그게 그렇게 짜증나는 분위기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왜 그럴까, 하고 잠시 생각해보았지요. 환영도 그렇고 이 작품도 그렇고 정말이지 몸서리처질만큼 지독한 인생들을 그리고 있는데도 그들의 삶에서 눈길을 돌리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 2설씨의 문장력 때문이 아닌가 일단 추측해봅니다. 이름 가지고 장난하지 말랬잖냐구요? 아, 알겠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그녀의 문장은 매우 간결한 단문입니다. 사실 단문으로 문장을 쓰는 것이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이 장문보다는 단문으로 더 많이 승부를 하는 듯 싶고 말이죠. 들인 노력에 비해 가독성의 효율이 더 높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말이죠, 그게 그냥 짧게 끊은 어색한 단문과, 짧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가 리드미컬하게 치고 받는 느낌이 드는 문장이 있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전자에 머물러 있고요, 후자의 단문을 구사하는 작가는 그리 흔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후자의 단문을 구사하는 게 정말 어려운 거죠. 김이설 씨의 문장은 그걸 해냅니다. 짧게 끊는다고 되는 게 아닌 이런 단문을 구사하려면 일단 문장 리듬감이 좋아야 하고요,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건 통찰력입니다. 문장과 통찰력이 무슨 상관이냐고 의문을 드시기도 하겠지만 상관이 아주 많습니다. 가령, 박완서 선생님이나 양귀자 선생님의 문장들을 봐도 그렇지요. 어떤 현상을 표현하는데 냉소적이면서도 적확하기 이를 데 없어, 짧게 끊어 말해도 그 단문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이 대단히 날카로운 겁니다. 그래서 읽는 이가 시원시원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리드미컬하게 문장이 흘러가면서도 그 내용에 거침이 없어 독자의 호흡과 눈이 시원시원한 겁니다. 그러다 보니 이 지치도록 극악한 삶의 환경을 이야기하면서도 조금의 늘어짐이 없이 팽팽하게 전개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놀라운 흡인력의 일차적인 원동력이고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님 마는 거구요.
둘째는 말이죠, 김이설 작가가 창조해 낸 인물들의 생동감입니다.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강렬하게 살아있는 캐릭터들이어서 이런 경우를 두고 흔히들 정말 날 것의 느낌으로 차갑게 살갗에 와 닿는 것 같다고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그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말이지요, 마치 지면에서 일어나서 입체적인 형상으로 독자에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그들의 대사 하나하나, 동작 하나하나의 리얼리티가 실로 장난이 아닌 것이지요. 이것은 그려지듯 묘사해 나가는 작품을 두고 흔히 말하는 영상적이다, 라는 차원을 한단계 넘어, 피부에 와닿는 촉각적인 느낌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지요. 발로 툭툭, 차는 터치의 느낌은 물론이고 그들 중 누군가 욕을 내뱉으면 그 욕 마저도 제 피부 어딘가에 날아와 찰싹 달라 붙는 느낌입니다. 대단하지요? 정말 대단합니다.
끝으로 분량에 관한 통제입니다. 이 작품도 그렇고 <환영>도, 짧아 아쉬운 면이 있지만 더 길어 좋은 건 없다고 생각됩니다. 뭐랄까, 딱 아쉬울 때 이야기가 막을 내려서 정말이지 대단히 아쉬운 것은 물론이고 그전에 풀어놓은 이야기들의 임팩트 또한 상당히 강렬하게 상승시켜 놓습니다. 큰 내용이 아님에도 이야기의 밀도가 매우 높아 조금도 늘어지는 부분이 없는데요, 이것을 괜히 늘이고자 불필요하게 더 깊이 들어간다거나, 혹은 같은 밀도로 분량을 잡아 째면 긴장감을 잃거나 혹은 지쳐버릴 우려가 생기거든요. 그러니까 뭐랄까, 처음 먹은 초코파이는 대단히 맛있지만 그렇다고 열 개를 연거푸 먹으면 너 토한다. 그래서 군대에서도 딱 두 개씩만 준다. 요즘도 그러냐? 그래야 초코파이 힘으로 훈련하게 된다니까. 어쨌거나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작가의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마법의 장문의 구사하는 구병모 씨와 스타카토 같은 단문을 구사하는 김이설 씨를 스트리트 오브 파이터의 새 캐릭터로 만들어 글을 쓰며 싸우는 걸로 프로그래밍 해주면 그 오락 내가 한다. 여하튼 차세대 레벨이 다른 선두 작가 대열에 두 냥반을 나란히 꽂아 넣게 되었네요. 어쩐지 기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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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가족에 대한 생각을 한번쯤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가족'... 그 이름은 어쩌면 우리에게 무한한 자기편과 함께 울타리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존재이지만, 반면 누구에게는 굴레가 될 수도 있는 이름이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 만날 수록 호불호가 확실해 진다. 좋던 사람이 어떤 일을 계기로 싫어지기도 하고, 싫던 사람이 좋아지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이 사람이 과연 내 사람인가?, 평생 함께 가야할 사람인가?, 아님 멀리해야할 사람인가를 말이다. 그런 많은 일들을 통해 우리는 어떤 사람과는 관계를 지속하지만, 어떤 사람과는 인연을 끊기도 한다. 그것이 아무리 좋다한들 남인 것이다. 하지만, 가족간에는 이런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다. "천륜"이란 이름아래 같은 핏줄로 이루어진 가족은 모든 사람들에게,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에게 가족은 싸우고, 미워하고, 싫어하면서도 또 다시 보고 끝까지 그 관계를 이어나가는 존재이다. 우리 나라사람들에게 핏줄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끈끈한 존재인 것이다. 이 소설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러하다. 밉다밉다, 세상에서 제일 경멸하고 싫다, 항상 멀리 달아나고 싶다, 하지만 결국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주인공 화숙이 돈을 많이 가진 존재였다면, 외삼촌에게서 멀리 달아났을지도 모를일이다. 그렇다고 그 관계가 끊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남보다도 못한 사람, 남보다도 상처주는 가족, 불행만이 남아있는 관계인데 무엇이 그들은 갈라놓지 못하는 것일까? 소설의 화자는 서른다섯 살 노처녀 화숙. 정신지체자로 동네 사내들에게 성적으로 유린당하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엄마를 둔, 그녀는 엄마를 그 지경이 되도록 방치해둔 외삼촌의 딸 수연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다. 외삼촌과 화숙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수연이 택하는 방식은 '모성'의 포기다. 서로를 상처주지 못해 안달하고, 힘든 불행의 굴레를 알면서도 결국 거기로 되돌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 김이설은 세상의 약자, 여자이면서 궁핍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네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장애를 가진 가정에서 자엄마와 누군지도 모르는 아빠를 부모로 둔 화숙, 폭력으로 점철되는 아버지와 도망간 엄마를 가진 수연, 또 평범하고 화목한 랐지만 가끔은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나도 모두 가족이라는 존재 속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면서도 가장 서늘할 수 있는 존재인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모순되고 무조건적인 사랑과 미움으로 뭉쳐 서로의 몸속에 뜨끈한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 가족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과연 '가족'이라는 존재, 같은 피를 가진 존재에 대해 어떤 느낌일까? 그건 아마 하나로 딱 정의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떨 떄는 아주 차갑고 시린, 또 어떨 떄는 뜨겁고 끈끈함이 느껴지는,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가족이라는 존재가 어쩌면 무모할정도로 무조건적인 감정을 솟아나게하는 존재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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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책 한권으로 이렇게 내 기분이 만신창이가 될 수 있을까? 온통 암울하고 음습한 기운이 도는 책 <나쁜피>. 김이설 작가의 최근작 <환영>을 읽은 많은 독자들의 호평이 있었기에, 또다른 호평이 이어졌던 이 책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왜 작가는 이토록 등장인물에게 많은 짐을 지우고 힘든 삶을 살 게 했을까. "내가 만든 인물들이 당신을 대신해 앓았으면 좋겠다. 더 호되게 앓는 인물을 만들도록 노력하겠다." 라고 작가의 말에서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위로가 안된다. 오히려 나조차 더 아파지는것 같다. 내가 좀더 아팠어야 위로가 되었을까? <나쁜피>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우울하고 힘겨운 삶을 살고 있었다.
화자인 화숙은 한때 그녀의 외삼촌이 가장 큰 고물상을 했던 동네에서 이제는 황폐해진 고물상 동네가 되어버린 곳에서 알코올 중독자인 할머니와 살고 있다. 재계발의 바람을 타고 고물상동네를 제외한 건너편 동네는 화려하게 변해가는 '뉴스트리트'가 되었지만, 아직도 이곳은 소외받고 힘없는 사람들이 안쓰럽게 살고있었다. 그녀의 엄마는 정신박약이었고, 그런 엄마를 외삼촌은 쉴새 없이 구타했다. 고물상에서 일하던 남정네들은 엄마가 있는 방을 쉴새없이 들락거렸고 그런 모습을 화숙은 고스란히 보고 자랐다. 외삼촌이 엄마를 구타할 때 마다 화숙은 외삼촌의 딸이자 그녀와 동갑인 수연을 찾아가 모질게 꼭 그만큼 때렸다. 이렇게 화숙의 가슴속엔 악다구니 밖에 남지 않은듯, 할머니를 향해, 외삼촌을 향해, 엄마를 향해, 수연을 향해, 그리고 세상을 향해 울분을 토했다.
내 성장기에 수연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미쳤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외삼촌에게 맞거나, 사내들에게 유린당하는걸 목도할 때마다 나는 당당하게 수연을 괴롭혔다. 그것으로 분을 풀었다. 때리고 밟아도 성에 차지 않았다. 엄마를 생각하면 더 모질어도 될 것 같았다. (77쪽)
물론, 그냥 떠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나는 할머니를 부양하는 것으로 내 안의 화를 쏟아 냈다. 할머니에게 욕을 하거나, 할머니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으로, 때로는 할머니를 때리는 것으로 화풀이를 했다. 병신 엄마를 만든것이 할머니고, 그 병신 엄마가 나를 세상에 낳았으니, 나의 기원이 바로 당신의 실수다. 당신이 책임지지도 못할 일을 만들었으니, 이런 것쯤은 참아 내라는 화풀이였다. (130쪽)
그녀는 정상인과 다른 엄마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구타와 시기,질투로 암울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어쩌면 이렇게 행복할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모든 불행을 안고 태어날 수 있는지. 소설속에서 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저변에는 화숙같은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이 있을지...수연의 투신자살과 외삼촌의 죽음으로 모든 악의 고리를 끊게 된 화숙. 수연의 딸을 성심으로 키우고 있었던 화숙의 친구 진순과 화숙은 그렇게 새로운 가족으로 거듭나게 된다. 책을 읽는 내내 작가의 문체가 참 냉랭하고 메말랐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런 내용이니 메마를 수 밖에 없지만, 그 냉랭한 문체로 인해 독자에게 다가오는 싸늘함은 더욱 크리라. 그녀의 최근작 <환영>도 읽어보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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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덮으면서 뭔지 모를 기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책 표지의 주목받는 신예 김이설이 그려 내는 21세기의 가족이라는 문구에 뭔지 모를 슬픈 감정까지 뒤 섞이게 되었다. 인간에게 나쁜피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살아가는 환경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 될 뿐 책속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아픔을 가지고 살아간다. 마치 운명이라는 굴레에 묶여있어 도저히 벗어 날 수 없는 죄을 짓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져 만들어내는 이야기이다. 엄마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처음 들었던 건 언제였을까. 어쩌면 엄마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바로 그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외삼촌이 쓰러진 엄마를 방치하는 걸 목도한 순간이 바로 내가 엄마를 죽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안의 진실을 은폐하고 싶었다. 엄마를 죽인 건 엄마를 거쳐 간 무수한 사내들이고, 병신으로 만든 할머니고, 엄마를 짓이긴 외삼촌이어야 했다. 나의 사소한 악의는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칼은 눈에 보이지 않아 더 두련운 것일지도 몰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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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소설을 읽었다. 오랫만에 소설다운 소설"을 읽은 것 같았다. 현실의 한 켠을 잘 담아내고 있는, 매우 적나라하게 담아내고 있는, 그리하여 마음 한 구석 편치 않고, 묵직한 느낌을 접을 수 없으나, 나의 삶을 우리의 삶을,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그런 소설.
아름답지 않지만 외면할 수 없는 우리 삶, 이 한자락을 꽉 부여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작가 김이설"은 말이다.
김이설의 다음작품도 기대해보고 싶다. 그리고 함께 우리 삶의 한 자락을 잘 잡아보고 싶어진다. 아름답게, 정말로 아름다워졌으면 하는 바램을 담아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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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 만약 우리의 삶이 소설과 닮아 있다면... 섬뜩하다. 채워지지 않은 욕망과 부족한 운명을 탓하며 하루 하루 남에게 기대어 상처주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비록 세상이 각박해지고, 비루해지며 따뜻함을 잃어간다고 하지만 화숙이나 수연이처럼 사는 게 전부라면, 정말 살 맛 안난다. 내 아픔을 남의 탓으로 돌려 그 화를 밖으로 풀어버리는 습성을 누가 죄라고 탓하랴. 그래도 후회가 밀려온다면 분명 그건 잘못 산 삶일지도 모른다.
꼬여도 이렇게 심하게 엉킬 수가 있는지. 가족이라는 이름만 남아 있을 뿐, 그들은 서로 할퀴고 헤집고 상처준다. 의무를 떠넘기고 책임을 회피하면서도 몰래 곁눈질로 자신의 핏줄을 챙긴다. 역겹다. 피로 맺어진 관계는 이처럼 마음 따로 몸 따로 엮어진다. 몸은 멀리 떠나고 싶은데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매여져 꽁꽁 묶인 상태로 말이다.
내가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남을 짓밟고, 고통을 주는 일들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별 자책감도 못 느끼고 끊임없이 살길을 향해 몸부림친다. 동시에 내 살에도 상처를 쭉쭉 긋는다. 안 되는 것에 매달려 보기도 하고, 믿었던 일들에 배신당하며, 그래도 살아야겠다며 밥을 찾아 먹는다. 키 작고 못생기고 뚱뚱한 노처녀에게 미래는 없다? 설마... 화숙이 살고자 했던 인생은 어쩌면 남들과 비슷한 모습의 삶이었을 것이다. 누구에게 쉽게 다가오는 인생이 그녀에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얻지 못할 것들이었다.
죽음이 또 다른 삶의 시작이 될 수 있었다. 핏줄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작은 후회만 지나갔을 뿐이다. 서늘해진다. 매운 걸 먹으며 힘을 내는 모습에서 연민이 느껴진다. 얼마나 기댈 곳이 없었으면 매운 것이 주는 고통과 시원함을 위로삼아 즐긴 것인지. 어쩌면 그녀의 말처럼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이기는 자와 지는 자만 존재할 뿐이고... 그리고 세상은 이기는 사람들을 위해 돌아가고 있을 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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