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1)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0%
  • 리뷰 총점8 100%
  • 리뷰 총점6 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0.0
  • 50대 7.0
리뷰 총점 종이책
사랑 이야기....
"사랑 이야기...." 내용보기
어쩌다 잠으로 걸어 들어갈 시간을 놓쳤나보다. 골몰하여 있다가 매킨토시의 조그만 시계를 보니 2시가 넘었다. 이미 성문은 닫히고 신데렐로는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차가운 바람이 조그만 창을 통해 음악이 공허하게 퍼지고 있는 공간을 서성인다.   이제 가을이 시작되는 것인가 보다. 이런 밤 무엇을 하면 보람차게(!) 긴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귀뚜라미라도
"사랑 이야기...." 내용보기

 

어쩌다 잠으로 걸어 들어갈 시간을 놓쳤나보다.

골몰하여 있다가 매킨토시의 조그만 시계를 보니 2시가 넘었다.

이미 성문은 닫히고 신데렐로는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차가운 바람이 조그만 창을 통해 음악이 공허하게 퍼지고 있는 공간을 서성인다.

 

이제 가을이 시작되는 것인가 보다.

이런 밤 무엇을 하면 보람차게(!) 긴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귀뚜라미라도 훈련시킬까?

언젠가 그대의 창 아래에서 세레나데를 연주할 수 있도록 말이지...

" Bach는 오늘밤 너무 우울하군... Sergei Rachmaninoff는 좀 더 나을까?

 

얼마 전, 또 어떤 일로, 우리가 늘 신발처럼 가까이 대면하는 우연으로,

예전에 당신이 살던 신사동을 지나게 되었다.

기업은행 옆 골목길의 샤론로즈...

길을 걷다가 여전히 그 둥글게 휜 유리 창 안에서 꽃다발을 만드시는

주인 아주머니를 보았다. 나는 이미 시간이 제법 쌓인 오래 전 단골이었고,

이젠 타인이 되어 불꺼진 Bar에 켜져 있는 T.V.라도 보듯 지나치며

그 아주머니의 익숙하고 섬세한 동작을 잠깐 창 너머로 지켜 볼 뿐이다.

 

"저어기... 이 엽서는 얼마지요?"

"아. 네 그건 그냥 써서 넣으세요... 지난번에도 오셨었지요?"

"네. 얼마 전에 이사왔어요."

"늘 깔끔한 수트에 주말이면 꽃다발까지...

오늘 이 꽃을 받으시는 분은 너무 좋으시겠어요."

"받는 사람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네요."

 

"이건 은방울꽃을 중심으로 해서 만들었어요.

주로 프로포즈를 할 때 많이 만들어 드리지요. 아마 좋아하실 거예요."

"네, 정말 멋진 꽃다발이네요. 솜씨가 좋으세요.

지난번 노란 장미는 그녀가 너무 좋아했어요.

창가에 걸어 놓고 말리고 있어요."

 

"오늘은 장미 말고 조금 다른 것으로 해주세요..."

"이게 좋겠어요. 튤립이 방금 도착했어요. 색깔이 좋죠? 향도 싱싱하고..."

갖가지 색종이와 비닐로 꽃다발을 포장하고 리본을 가위로 잘라 예쁘게

마무리를 하는 손길은 언제 보아도 늘 신기하기만 하다.

 

꼭 두 종류 이상의 리본을 함께 사용하여 분위기를 더하신다.

조그만 분무기로 꽃 위에 물을 뿌려 마무리를 해 주시면,

꽃잎 사이로 이슬 같은 물방울이 또르르 구른다.

"가시는 동안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지 마세요. 꽃이 마를 수 있으니까요."

"네... 가까우니까요."

 

그러나 아름다운 물방울은 늘 마음을 초조하게 한다.

물방울이 마르기 전에 나는 당신에게 꽃을 전달해야 한다.

당신이 꽃다발에 얼굴을 묻은 채,

향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는 것을 보고 싶으니까.

 

"오늘은 어떤 것으로?"

"아주머니가 골라주세요. 언제나 너무나 멋진 꽃다발이었어요."

"네. 감사합니다. 오늘은 아이리스가 싸고 좋아요. 이걸로 하세요."

"지난번에 보니까, 그녀의 집 테라스쪽 창이 이젠 마른 꽃다발로 가득해요.

꼭 장미 정원에 있는 것 같아요. 이번에 새로 커튼을 달았답니다.

 

흰색에 가까운 아이보리요. 그 색을 그녀가 가장 좋아하거든요."

"커튼과도 잘 어울렸으면 좋겠어요."

"분명히 잘 어울릴 겁니다. 아주머니 솜씨라면..."

그리고 그 아이리스 꽃다발 역시 그 하얀 테라스의 격자 무늬 창에 달렸다.

 

당신과 나는 그 창가에 2인용 식탁을 놓고 블루마운틴을 마시는 것을 아주 좋아했지.

혹시 비라도 내리면 창가에 얼룩지고, 나지막하게 거리를 적시는 빗방울 속에서,

우리는 땅콩 껍질 안에 들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즐거웠다.

 

"안녕하세요? 이젠 표시가 좀 나는군요. 아기가 아주 잘 자라나 봐요."

"예 6개월이나 되었으니까요..."

"아기가 예쁘겠어요. 이렇게 멋진 꽃밭에서 자라고 있으니까..."

"고맙습니다. 매주 오시니까,

토요일 오후에 가끔 안보이시면 무슨 일이라도 있나 궁금해져요..."

 

"아. 네... 아주머니는 서울에서 가장 예쁜 꽃다발을 만드시고요.

저는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 熱愛(열애)중이지요.

이런~ 팔불출 같이 뵈나요?" "아니요. 그럴리가..."

꽃다발을 만들던 손을 놓고 입을 가볍게 막으며 조용히 웃으시는

아주머니의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음에 분명하다.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당신과의 약속시간을 10분 남겨두고,

당신의 학교 앞 꽃집에 들렀다.

하지만 그 화원은 그날 그 시간이 처음으로 오픈하는 것이었고,

배달 되어온 꽃들도 아직 정돈해 놓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서툰 손놀림이라니...

 

"그럼 10분 더 있다가 올 테니 그때까지 만들어 주세요."

그래서 당신과의 첫 만남엔 장미를 가져가지 못하였다.

그리고 당신을 만나 함께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 꽃가게에 들렀지.

그때까지도 꽃다발은 완성되지 못했다.

 

하지만 실내에 가득한 장미향. 여름의 햇살이 쏟아지는 유리 문밖의 거리.

길 건너 차안에서 나를 기다리는 당신의 모습은,

꽃다발이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짧을 정도로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서투르게 만들어진 꽃다발을 들고 영원히 기억에 남을 그 길을 가로질러

당신에게 다가갔다.

 

"많이 기다렸지요?"

"아니에요. 와아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운 좋게, 당신이 이사를 한 집 앞 골목의 꽃집은 서울에서 가장 꽃을 잘 만드는 집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분명히 그랬다.

"이대 앞에서 독수리 다방 쪽으로 가는 골목길 입구에도 작은 꽃집이 있어요.

그 집은 번개같이 빠르게 만들면서도 잘 만들지만,

적어도 아름답기로는 이곳이 내가 아는 한 서울에서 최고예요."

"어쩌나... 고민하게 하시네요..."

만삭이 되어 가는지, 배가 많이 부른 아주머니는,

"지금 가게를 그만둘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갈등하게 만드시네요..."

"제가 말씀드릴 일은 아니지만 그만두시면 안됩니다.

서울에서 제일 예쁘게 꽃다발을 잘 만드는 집이 사라지는 것은 너무 아까운 일이잖아요..."

"손님 같으신 분들 때문에 힘을 얻기는 하지만..."

그리고 아주머니는 그날 따라 조금 어두운 그늘이 번지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백합만큼이나 창백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주에도, 또 그 다음주에도,

나는 아주머니가 만들어 주신 꽃다발을 들고 당신의 집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다.

 

그 해 겨울 The Christmas Song (Chestnuts Roasting On An Open Fire)을 들으며 장미의 향기,

그리고 차게 얼려둔 와인 미쉘의 향기...

당신이 만든 필렛미뇽의 먹음직스런 향기,

아직도 눈만 감으면 느껴지는 당신의 향기와 창 밖을 지나던 매운 겨울바람의

소리 속에 당신과 둘만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노랗게 주차장을 밝혀주던 외로운 가로등 아래 쏟아지는 하얀 눈송이를 보며,

우리는 그 테라스, 그 커튼, 그 창가, 그 말린 꽃다발들의 정원에서,

따스한 크리스마스를 함께 했다. 네. 우주에서 가장 따듯했었다.

 

"저기 오늘은 좀 더 크게 만들어 주세요."

"무슨 일이 있나요?"

"네 오늘 만들어 주시는 꽃다발로 제 운명을 결정 지으려고 해요..."

"어머, 좋은 일이 있으신가 보네요."

내 얼굴에 배어든 슬픔을 꽃집 아주머니는 알아채지 못하신 모양이다. 다행이다.

당신과의 만남은 이미 이별을 향해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우리는 그때 늘 슬픔의 深淵(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오늘 서울에서 가장 멋진 꽃다발을, 마음을 다하여 전하는 내 사랑을 받고도

당신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정도로 해 두어야 하는 일이겠지.

당신도 나도 너무나 지쳐 있었고,

이제는 운명이 제 갈 길을 가게 놓아주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신을 더 이상 울도록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자아 여기요. 늘 행복하세요."

그것이 그 아주머니와의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그날 당신은 처음으로 내게 꽃다발 받기를 주저했다.

색종이와 리본까지 깔끔하고 단아하게 정돈 된, 예술이라고 해도 아깝지 않은

너무나 멋진 장미꽃다발이었다.

 

당신은 초점이 없는 눈으로 한동안 나와 꽃다발을 바라보았지만,

끝내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순간 공간이 흐릿하게 녹아 내렸다.

"우리가 그냥 아는 선후배나 친구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해요."

"그럼 이젠 친구 할까?"

"하지만 당신과 가까이 있으면 견딜 수 없게 되요. 나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없어요.

내가 해야 할 일, 나의 꿈, 그런 것들이 너무 작게만 느껴져요.

모두 당신에게 흡수되고 마는 것 같아요. 미안해요."

 

"그래도 그것이 결별의 이유라면 나는 납득하지 못하겠어.

내게 지나치게 집중되므로 헤어져야 한다니..."

나는 그때까지도 언어라는 불확실한 수단이 남기는,

표면과 내면의 원리를 알지 못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샤론로즈... 였나요?"

"음... 애를 써 주셨지... 아주머니가 늘 행복 하라고 하시더군.

이제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카페 드 플로라의 검은 유리벽 앞에서, 검은색 수트를 입은 당신의 햐얀 얼굴과

긴 목은 그대로 모딜리아니의 쓸쓸한 그림이 되었다.

꽃다발이 놓인, 움직임 없는 정물화였다.

당신의 앞에 놓여있던 찻잔도, 내 앞에 있던 찻잔도 손대는 사람 없이 식어버렸다.

유리창 밖 조그만 테라스 아래로 발렛 파킹을 맡겼던 차가

천천히 정지하는 것이 보였다.

 

"우리 이만 가요."

[우리]라는 단어가 그처럼 메마르게 느껴진 적은,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다시는 없었다.

"꼭 그래야 하나?"

"가야해요..."

나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도 따라 일어섰다.

비가 제법 많이 내리고 있었다.

 

그 마지막 꽃다발은 그대로 나의 오피스텔로 가지고 와서, 주방 벽에 걸어 놓았다.

시간이 흐르고, 꽃은 조금씩 생기를 잃고, 빛을 잃고, 향기를 잃어 갔다.

그리고 나 역시 조금씩 지닌 열정과 에너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들에겐, 당신이 주인공이지만,

당신은 절대로 알지 못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아직도 많이 있었다.

 

h*****k 2012.09.16. 신고 공감 1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