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에 이 책을 읽게 되었을 때, 그냥 나쁜 남자가 소녀를 감금하고 뭐... 그런 얘기인줄 알았다. |
|
1958년 여름, 사고로 부모를 잃은 10대 소녀 맥 로린은 여동생 수전과 함께 소도시 로럴 애버뉴의 루스 챈들러 아줌마 집에 머물게 됩니다. 루스의 옆집에 사는 12살 데이비드는 맥에게 특별한 호감을 갖습니다. 계곡에서 함께 가재를 잡는가 하면, 카니발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 데이비드는 루스가 맥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친절한 아줌마였던 루스의 폭력은 데이비드에게 큰 충격을 안깁니다. 루스의 폭력은 점차 강도가 심해졌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들과 로럴 애버뉴의 10대들까지 끌어들이며 위험수위를 넘나듭니다. 데이비드는 지하 방공호에 감금된 채 끔찍한 고문과 폭력에 노출된 맥을 보며 그녀를 구하고 싶다는 욕망과 그녀를 만져보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을 겪습니다. 루스의 폭력은 아무런 제약 없이 폭주를 거듭하지만 폐쇄적인 소도시의 사람들은 마치 공범인 양 무관심과 불간섭으로 일관합니다. 경찰마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듯 무시하거나 외면할 따름입니다. 한편 무력감과 성적 호기심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던 데이비드는 맥을 위해 위험한 선택을 감행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불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고 맙니다. ![]()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친밀하지만, 동시에 무관심과 불간섭이 공존했던 1950년대 미국의 소도시에서 벌어진 한 소녀에 대한 끔찍한 폭력일지를 지켜보는 일은 정말 고통스럽고 참담한 경험이며 심지어 역겨움까지 느낄 정도였습니다. 당시 미국 사회는 억압과 히스테리라는 정치적 분위기와 함께 보수적인 가족주의가 만연했고, 계층과 종교와 지식의 수준에 관계없이 아이들에 체벌은 당연히 여겨졌습니다. 그런 경향이 한층 두터웠던 소도시 로럴 애버뉴는 루스와 그녀를 따르는 ‘어린 악마들’, 그리고 맥 같은 희생자를 낳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전성기를 코앞에 둔 맥에 대한 루스의 폭력은 여성으로서 늙고 초라해진 자신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했습니다. 없는 살림에 조카들을 떠맡게 된 짜증과 한탄도 한몫 거들긴 했지만 분노의 본질은 자신에게 쏟아지던 관심을 빼앗아간 것은 물론 거역과 저항을 일삼는 ‘아름답고 못된 맥’을 향한 참을 수 없는 증오심입니다. 그 증오심은 (루스 본인이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본성’을 공격하는 기형적인 형태로 발현됩니다. 구체적으로는 “맥 로린은 창녀!”라는 일관된 신념이 루스의 의식을 지배합니다. “너도 우리 엄마나 내가 했던 짓거리를 그대로 하게 될 거야. 이브의 저주, 그게 바로 여자의 약점이고, 여자는 다 매춘부나 짐승에 지나지 않아. 아랫도리에 구멍을 가진 멍청하고 패배의식에 젖은 창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너의 그 더러운 천성을 태워 없애버리는 거지.” 맥에 대한 최악의 폭력을 앞두고 루스가 질러댄 악마의 일성은 그녀가 맥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선을 잘 설명해줍니다. 한마디로, 반사회적 인격 장애 중에서도 극단적인 사례인 셈입니다. 루스만큼이나 (아니면 훨씬 더) 독자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고문과 폭행에 가담한 ‘잡티 하나 없는 순수 악’으로서의 10대 아이들의 집단 광기입니다. 애초 아름다운 이방인 맥에 대해 품었던 선하고 순수했던 호기심은 루스의 지원 하에 순식간에 아무런 죄의식 없는 폭력성으로 전화됐고, 맥의 육체를 마음껏 유린하고 짓밟은 두 달간의 ‘지하실의 카니발’로 이어집니다. 특히 만 10살 밖에 안 된 루스의 막내아들 우퍼의 잔혹한 행위는 ‘폭력에 대한 원시적이고 끝없는 갈망’ 그 자체라서 가장 충격적이었습니다. 화자로 등장하는 나, 데이비드의 무력한 태도는 시종 독자의 분노를 자아내지만, 극도의 폭력 앞에 노출된 12살 소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밀고자나 배신자가 되지 못한 것을 무턱대고 비난할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두려움이나 호기심이 뒤엉킨 그 또래의 혼란이 안타깝게 여겨질 뿐입니다. 엔딩에서 그가 선택한 마지막 저항이 앞서 무력했던 태도를 상쇄해주긴 하지만, 그는 결코 맥을 만나기 전의 데이비드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독자는 읽는 내내 ‘잘못을 저지른 자와 이를 묵인한 자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나쁜가?’라는 행간에 숨은 질문을 받곤 어느 쪽도 정답이 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 번역 전에 이 작품을 읽은 뒤 “처음엔 작가를 미친놈이거나 성도착증 환자거나 반사회적 이상 성격자로 예단했다.”라는 번역자의 고백처럼 저 역시 작가에 대한 분노와 함께 ‘왜 이런 작품을 썼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는데, 작가는 인터뷰를 통해, “반사회적 이상성격자들은 언제나 나를 두렵고 분노하게 한다. 오래전부터 이런 몹쓸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라고 밝힙니다. 하지만 이런 의도와 달리 다른 인터뷰에서는 이 작품을 ‘스너프 소설’이라고 밝히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의도’와 ‘결과’가 조금은 엇나간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웃집 소녀’는 1965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인사건 - 한 30대 여자가 “올바른 여성이 되는 법을 가르친다”며 16살 소녀를 고문하다가 살해한 실화에 근거한 작품입니다. 작가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이 소설의 가치는 폄하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번역자 역시 ‘실화’라는 점을 들어 ‘미친놈’이라고 예단했던 작가에게 면죄부를 내줬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도 한참이나 착잡함을 피할 수 없었던 독자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변명처럼 들렸습니다. 어지간히 잔혹한 이야기들을 많이 봐왔지만, 10대 소녀에게 가해진 가장 순수한 형태의 악마적 폭력을 지켜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출판사의 홍보 카피 - “당신은 악의 심연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 가 이 작품처럼 피부에 와 닿은 적도 없던 것 같습니다. 공포 그 자체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모르겠지만 평범한 장르물 독자에게 추천했다간 ‘이상한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오해받기 딱 좋은 작품입니다. 물론 그런 쪽의 취향을 가진 독자에게는 거꾸로 강추하고 싶은 작품인 것도 사실입니다. 호기심만으로 이 책을 집어 들었다면 나름 단단한 각오가 필요할 것입니다. |
|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며, 두 번이나 영화화 될만큼 유명한 이야기이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로, 실제 사건이 너무 잔혹하기 때문에 소설에서는 사건을 걸러줄 관찰자가 주인공이 되어 서술한다.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게 된 자매가 친척집으로 오게 된다. 이들의 생활은 처음부터 삐걱거리는데, 점점 폭력의 강도를 더해가다 자매 중 언니가 사망하게 된다. 한 소녀가 죽어서야 끝나게 된 이 사건은, 이들의 이웃집에 사는 또래 소년의 눈을 통해 보게 된다.
소년은 소녀에게 가해지는 부당함을 목격하지만, 처음부터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어진다. 이제 와 신고를 하게 되더라도 '그럼 왜 지금까지 신고하지 않았니?'라는 말을 듣게 될까 무섭다.
이 사건에 개입한 유일한 어른인 루스는 이 사건을 폭력과 성적인 면에서 통제한다. 단순 폭력만 지속되었다면 아이들도 이상한 점을 알았을 텐데, 성적인 면이 더해지면서 아이들은 호기심으로 달려든다.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매달아 고문하고, 뜨거운 물에 집어던져 화상을 입히고,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는다. 그리고 종래엔 문신까지 생긴다. "나는 매춘부예요. 날 먹어요." 실제 사건에서는 "나는 매춘부이고, 그것이 자랑스럽다'라는 문장이 소녀의 배에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주목받는 것은 사건의 잔인함과 함께, 사건이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제목인 이웃집 소녀처럼, 바로 옆집에서, 같은 마을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과연 아무도 몰랐을까?
불의를 말하지 못했던 어린 소년의 가족은 이혼가정이 되고, 어른이 되어 자신도 두 번의 이혼을 겪게 된다. 옆집에서 일어났던 일을 잊지 못해 아이를 가지지 않으려하고, 아직도 악몽을 꾼다. 직접 가해에 참가했던 아이는 또 다른 살인자가 되어 신문에 실린다. 이 사건이 어떤 것을 남겼는 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후일담이 아닐까? |
|
인간은 어디까지 잔혹해 질 수 있을까? 인간은 악마가 될 수 있는가?
이 책을 읽고 있자면, 인간은 무한대로 잔혹해 질 수 있으며 악마보다 더한 악마가 될 수 있는 존재이다. <이웃집 소녀> 라는 제목처럼 이 책은 처음에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한 소녀' 맥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맥과 그녀의 여린 동생은 여의치 않은 상황으로 챈들러 가족에게 맡겨지게 되면서부터 비극이 조금씩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비위가 약한 사람이나, 잔인한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이 책에 손을 대는 것도 말리고 싶다.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잔혹함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볍게 호러나 스릴러물로 이 책을 읽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도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다. 그냥 그런 것들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이 책이 담고 있는 것이 단순히 소설이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이다. 책의 초반부를 지나면서부터 나타나는 챈들러 가족의 광기가 그녀에게 닿기 시작할 때, 나는 왜 이 책의 저자가 '맥'을 짝사랑하는 친구이자 그녀를 방관한 가해자를 서술자로 선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저자의 가장 철저한 장치라고 생각했다.
맥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소녀이고, 그녀의 친구들 또한 그랬다. 그러나 챈들러 가족이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것에 대한 입막음으로 책 속의 '나'를 관람자로 참가시킬 때, 책 속의 '나'가 책을 읽고 있는 '나'와 점점 일치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소름끼치는 장치>가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책을 읽는 사람 또한 '맥'의 보이지 않는, 그런 챈들러 가족의 행동과 함께하는 행동하지 않는 방관자가 되는 것이다. '맥'을 짝사랑하는 내가 그러는 것처럼.
히틀러의 명령을 받고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군들이 하나같이 한 말이 '명령때문이었다'라고 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실험실을 만들어 놓고, 실험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2파트로 나눠서, 한쪽의 실험자들이 답을 틀릴 때마다 전기신호를 강력히 주도록 했던 실험이 떠오른다. 거기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고, 크게 반발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없었다. 실제로 전기고통은 없었지만,전류가 흐르는 버튼을 누르는 임무를 받았던 실험자들은 그 사실을 몰랐고 그들은 매우 고통을 느끼는 다른 파트의 실험자들을 보았음에도 계속 버튼을 눌렀다.
챈들러 부인이 말한 잔혹한 일들을 그들은 그렇게 저지르고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부모님에게 말하지도 않았다. 결국 내가 한 작은 일은 '맥'이 도망을 갈 수 있도록 문을 몰래 열어준 것 뿐이었다.
가장 큰 충격은, 이 책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이다. |
|
서점에서 아무 생각 없이 고른 책이었습니다. 학교 동아리 연습을 가다가 그 당시 책을 너무나도 사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 서점에 가서는 이 책과 렛미인 1,2를 샀더랬지요. 왠지 끔찍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표지가 강렬해서였을까요, 제 손이 이 책을 피해가질 못하더군요. 사놓고 이래저래 서평책들이 밀려서 보질 못하고 있다가 추석 연휴가 되어서야 집에 고이 모셔져 있던 이 녀석을 집어들 수 있었습니다. 손에 얼굴을 파묻은 소녀, 그리고 빨간색 글씨. 이미 동기 언니에게서 "난 이 책이 날 너무 불쾌하게 만드는 책인거 같아서 도중에 읽다가 그만뒀어." 라고 하는 걸 들은 적이 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짧게 말하면, 이 책은 싸이코패스인 엄마 아래서 자란 세 아이들, 그리고 방관자적인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 자행되는 무자비하고도 끔찍한 폭력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뭐 끔찍해봤자 얼마나 끔찍하겠어, 어차피 인간이 저지른 일인데 라고 말할지도 모르시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네요.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이 제일 무서운 거구나 느꼈습니다.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 무서운건 귀신도, 야수도 아닌 사람이라지 않습니까. 이웃집 소녀에서 피해자는 맥과 수전입니다. 이들은 끔찍한 사고로 부모를 잃고 먼 친척인 루스와 그 아이들이 사는 집으로 옵니다. 맥은 아주 매력적인 아이였어요. 건강미가 넘치고 쾌활하고 발랄했죠. 수전은 사고로 인해 뼈가 많이 부러져서 몸이 많이 허약한 상태였습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했구요. 맥은 동생을 끔찍이도 위했고 아주 보기 좋은 자매 였습니다.
그런데 루스는 맥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겁니다. 질투, 모든건 거기에서 시작된 것 같습니다. 세 아들들의 관심이 더이상 엄마인 자신에게 있지 않고 새로 들어온 맥이라는 소녀에게 집중되자 루스는 그게 싫었던 겁니다. 아마도 정신병자였겠지요 그는. 처음에는 신데렐라에 나오는 계모처럼 맥을 부려먹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손찌검을 하기 시작하지요. 손으로 때리고 발로 차는 것이 아프긴 하겠지만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을 겁니다. 부당한 대우였지만 그래도 이 집밖에 머물 곳이 없었기에 맥은 이 악물고 참아요. 하지만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을 알았더라면 맥은 동생을 데리고 이 마을을 떠나 차라리 길거리에서 살아가는 것을 택했을 겁니다.
점점 폭력의 정도가 심해지면서 나중에는 맥을 지하실에 가둬놓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세 아들들과 자신들의 노리개로 삼아 그녀를 묶어놓고 밥은 커녕 물도 안주면서 괴롭힙니다. 저항하겠다면 네 동생 수전을 생각하라는 협박과 함께요. 괴롭고 수치스러웠겠지만 동생 수전을 생각하며 여기에서도 맥은 참습니다. 그녀는 이들도 사람이니까 나를 괴롭히다가 재미가 시들해지면 놓아주겠지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 학대의 정도는 제가 여기 차마 적어놓지 못할 정도로 끔찍하고 징그럽습니다. 과연 인간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죠. 나중에는 책을 읽던 저도 맥처럼 자포자기 한 상태로 대체 이 사람들이 어디까지 갈건지, 끝이 있기는 한건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제가 그랬는데 이 책에서 직접 당하고 있던 맥은 어땠겠어요?
이 책의 주인공은 데이비드라는 옆집 소년입니다. 데이비드는 루스네 세 아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루스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아이지요. 그리고 루스가 맥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학대를 가할 때 옆에서 보고있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루스가 자기와 친하게 지냈던 마을 아이들을 불러다가 함께 맥을 괴롭히기에 이르거든요. 맥을 좋아하면서도 맥이 당하고 있었던 것을 누군가에게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맥이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직접 경관에게 말한 적이 있는데 그가 믿지 않았습니다. 그걸 보고 아이들은 어른들은 아이들의 말을 믿지 않을거라고, 루스의 말을 믿을 거라고 그리고 그녀는 거짓말을 해서 피해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냥 루스의 행동을 지켜만 보고 있죠. 데이비드는 루스의 편도 아니고 맥의 편도 아닌 그저 그 자리에 있는 방관자였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냥 남의 집 일이려니 보고만 있는 데이비드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점점 강도가 심해지는 학대와 폭력에 데이비드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내가 다 공범자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데이비드는 왜 거기에 서서 맥이 당하는 걸 구경만 하고 있는건지 답답했습니다.
방관자로서의 데이비드에게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차라리 이편이 나은 거였죠. 데이비드는 그 일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지나치게 잔인한(!?)장면은 책에서 우리에게 이야기하지 않거나 자신이 보지 못한 일을 생생하게 전달하지는 못했거든요. 책 339p에서는 데이비드가 이 장면은 절대 내가 죽는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책에 기술된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한데 이게 그나마 완화시키고 필터링 시킨 정도라니.. 이 책은 실화에 기초한 작품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가지고 잭 케첨씨가 소설적으로 재구성을 해서 낸 책이었지요. 실화의 경우는 도대체 얼마나 끔찍했길래... 저는 사실 상상도 가지 않았습니다.
맥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녀는 사실 여름방학에 이런 일을 당한 것이었고 정상적으로 가을부터는 학교를 다닐 아이였습니다. 맥 자신도 학교에 가게 될 가을이 되면 이런 일이 멈출거라고 생각하며 이 모든 것을 참아낸 거였지요. 하지만 그렇게 참고 참고 참은 결과가 죽음이라니, 허무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맥과 수전에게 무한한 동정을 느꼈어요. 그리고 세상이 아직 살만한 곳이라면 맥이 죽어서는 안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녀의 부재를 조금이라도 눈치채고 그녀의 안전을 궁금해했다면 더 빨리 발견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지하실에서 끔찍한 몰골의 시체로 발견되지는 않았으 겁니다. 저는 그녀가 이렇게 무관심하고 무자비한 세상이지만 여기에서 탈출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실화에 충실하게도 맥은 죽었고 저는 루스를 저주했죠.
책을 다 읽고 난 후 무기력하고 비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공부를 해보려고 했지만 손에 잡히지 않아 그만두었죠. 울고싶었습니다. 세상을 이렇게 비참하게 살다가 간 인생이 있었다는 것, 인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이 아닌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 슬프고 화가났어요. "나는 대체 뭘 할 수 있는가?" 계속 제 자신을 향해 질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데이비드를 보면서 답답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리고 힘없는 내가 방관하지 않고 맥을 구해낼 수 있었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어요. 어느새인지 뒤늦게라도 맥을 탈출시키려고 계획을 세워서 실행에 옮긴 그가 용감하다고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데이비드였어도 그렇게 위험 천만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나 역시 손 놓고 그저 관여하지 않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마지막에 지하실로 데이비드의 아빠와 경찰관들이 내려와 모든 것을 보고 사람들을 연행해 갈 때, 지하실에서 나오는 계단에서 데이비드는 루스를 계단에서 밀쳤습니다. 그리고는 웃고 싶었다고 말하지요. 루스는 계단에서 떨어져 즉사했습니다. 데이비드가 죽인거에요. 하지만 사람을 죽이고도 웃고싶어하는 데이비드를 보며 이 사건이 맥과 수전, 이 집의 세 아들들 뿐 아니라 데이비드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좋은 쪽은 아니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 책을 통해 사람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악이 사람들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피부로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다만 마음이 약하신 분들은 지나친 불쾌감으로 견디지 못하실 수도 있으니까 차라리 읽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
|
데이비드는 마흔한 살로 월스트리트에서 일하고 연봉 15만 달러를 받는다. 두번 결혼, 두번 이혼하고 세번째 결혼을 하려고 하는 이때, 데이비드는 자신이 열두 살 때 만난 이웃집 소녀 맥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옛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때 정말 그런 일이 있었나 하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은 아닐까 싶다. 데이비드는 아주 오랫동안 그 일에서 눈을 돌리고 있었나 보다. 비극으로 끝났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되돌릴 수 없기는 하다.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맥과 여동생 수전은 먼 친척인 루시 챈들러 씨 집에서 살게 된다. 바로 이웃집에 데이비드가 살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아주 예쁘게 생긴 맥을 처음봤을 때문터 관심을 가졌다. 맥이 바로 이웃집에 살게 됐다는 것을 알고는 조금 기뻐하기도 했다. 그런데 자주 맥을 볼 수는 없었다. 또한 잠깐 보는 맥은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이 보였다. |
|
잘못을 저지른 자와 이를 묵인한 자 중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악의 심연. 위험하지만 결말이 궁금했던 거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나쁘지만 그것을 방관하는 것은 무섭다.
실제 사건에서 실제로 학대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묵인한 채 방관한 이웃이 있었다는 사실. 이는 영화 '아메리칸 크라임'에서도 한 컷 정도 표현이 되었지만 97분의 상영시간 중 그 잠깐의 한 컷이 내겐 가장 절망적으로 다가왔다.
|
|
아날로그 적인 공포를 접하고 싶은 자 이 소설을 읽어 보기 바란다. |
|
3.0 사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소설이랍니다. 장소, 인물 등이 교체되었고 내용도 일부 바뀌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웃집 소년'의 시점에서 진행됩니다. 따라서 타인의 심리를 알 수 없고, 제한적으로 관찰된 사실만 보여집니다. 물론 이를 보강하기 위하여 직접 목격자가 전해주는 말이 끊어진 고리를 완성시키는 구조죠. 줄거리를 보자면 데이비드는 어느 날 개울가에서 아름다운 소녀를 하나 만납니다. 동네에서 처음 보는 아이니 다른 데서 왔겠죠. 이름은 맥(매간) 로닌이고 동생 수전과 함께 친척인 챈들러 씨댁에 머물러 온 것입니다.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수전도 크게 다친 뒤입니다. 챈들러 씨는 (루스 아주머니의 말에 의하면) 달아났고 아들 윌리(윌리엄), 도니(도날드), 우퍼(랄프)가 루스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도니와 윌리는 쌍둥이이고 데이비드는 도니와 아주 친하기 때문에 자주 들낙거리던 집입니다. 데이비드는 루스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죠. 도니의 엄마이기도 하고. 하지만 맥은 루스에 대해 '특이하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좋은 의도로 그러는 것이겠지만' 이란 말도 뒤따르고요. 좁은 동네이다 보니 또래들끼리 장난을 치는 것은 예사이고 가끔 여자애들도 골탕 먹이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루스는 데이비드가 있는 중에도 맥에게 험한 소리로 야단을 칩니다. 우퍼는 첫 소개가 개미들에게 지렁이를 던져주고 관찰하는 것이니 성향을 미리 보여주는 작가의 친절을 볼 수 있습니다. 루스의 권위에 기대 아이들은 나이가 더 많은 맥에게 감히 할 수 없었던 행동들을 차차 하게 됩니다. 루스가 몸에 손을 대는 것은 금지한 상태였지만 의도적인지 또는 방치한 것인지 모르지만 점점 육체적인 고통이 가해집니다. 결국 손을 묶어 매달기와 그 상태에서 옷을 벗기기, 뜨거운 물로 샤워시키기, 부정하다고 불로 태우기, 칼로 찌르거나 긋기, 소독한다는 이유로 담배불로 지지기 등을 거칩니다. 그 사이 맥은 경찰관에게 이야기를 하지만 무시당하고 평소 듣던 말 '경찰은 말뿐이지 절대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아'를 재확인하게 됩니다. 데이비드는 탈출시키려다 실패하고 탈출에 실패한 맥은 강간당하고 가슴에 낙인(문신)까지 찍히게 됩니다. 그리고 불확실하지만 음부를 불로 지짐을 당하는 것 같습니다. 데이비드는 이런 행동에 반항하다 같이 갖힙니다. 그리고 맥이 죽은 다음 어른들이 경찰과 함께 나타납니다. 데이비드는 루스의 손가락에서 맥이 갖고 있던 맥의 엄마 반지를 발견하고 루스를 떠밀어 죽게 합니다. 경찰관 제닝스는 다 보았지만 전에 맥이 자신에게 루스의 만행을 말했을 때 무시한 죄가 있기 때문에 '애가 갖혀있느라 힘이 없어 비틀거려 발을 헛디딘 것 같다'고 말하여 제2의 살인 사건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훗날 데이비드는 우퍼가 다른 애와 함께 소녀 둘을 강간하고 방화하여 죽인 사건에 대한 기사를 어머니의 유류품에서 발견합니다. 권위 있는 사람의 힘을 빌릴 경우 사람은 죄책감 없이 잔인해질 수 있습니다. 이는 심리학자들이 여러 번 실험한 바 있습니다. 이른바 '회색 코트의 사나이' 이론입니다. 원 사건에서 또는 이 소설에서 범죄에 동참한 아이들이 그런 상황에 있는 셈이죠.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정신병이 있다는 이유로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사실 따지고 들면 '일종의 정신병'이 없다면 어떻게 사람이 잔인하게 변하겠습니까? 그 '정신병'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모든 범죄자가 다 그 '병'에 걸린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니까요. 연약한 상대에 대한 심술도 일종의 정신작용에 의한 것인데 그게 조금 더 커지면, 정말로 '조금' 더 커지면 다치게도 하고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칼을 피부에 대는 것이 미약한 이상이라고 한다면 피부를 관통하는 것은 약간 이상한 것이고, 근육이나 그 이상 들어가는 것은 '이상한' 것이잖습니까? 생각만 하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닙니까? 어느 순간부터 '정신병'으로 공인하고 그 이전엔 '통제가 안된 상태이다'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루스에 대한 묘사는 아이들이 맥을 고문하는 도중에 그것을 구경하면서 자신의 가슴이나 회음부를 더듬고 문지르는 것 정도만 (데이비드의 눈을 통해) 보입니다. 동시에 주변에 대한 통제(청소 등)가 느슨해지는 것도 있고요. 루스가 정신병 환자일까요? 자기 통제가 조금 안된 사람일까요? 특이한 생각을 하는 사람일까요? 100923/10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