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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괴한 일인칭시점의 간혹 신선한 형식 실험... <그러니 내가 어찌 나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해괴한 일인칭시점의 간혹 신선한 형식 실험... <그러니 내가 어찌 나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내용보기
『고양이의, 고양이에 의한, 고양이를 위한』이라는 작가의 다른 소설을 산 적이 있다. 순전히 고양이를 좋아하는 아내의 강권에 의한 것이었는데, 사실 아직까지도 그 책을 읽지 않고 있다. 그런데 덥석 또 이 작가의 책을 사다니... 하지만 후회는 이미 늦었다. 적당히 얇은 분량에 솔깃하여 읽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읽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머리가 지끈거린다. 자살을
"해괴한 일인칭시점의 간혹 신선한 형식 실험... <그러니 내가 어찌 나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내용보기
『고양이의, 고양이에 의한, 고양이를 위한』이라는 작가의 다른 소설을 산 적이 있다. 순전히 고양이를 좋아하는 아내의 강권에 의한 것이었는데, 사실 아직까지도 그 책을 읽지 않고 있다. 그런데 덥석 또 이 작가의 책을 사다니...

하지만 후회는 이미 늦었다. 적당히 얇은 분량에 솔깃하여 읽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읽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머리가 지끈거린다. 자살을 꿈꾸고 시도하는 한 남자와 이를 상담하는 나(너)의 전화, 그리고 이 남자가 보낸 소설초고가 소설의 전부이다.

해괴하게도 일인칭 시점인 나는 항상 (너)와 함께 한다. 여기에 눈코입 정확히 달린 등장인물 하나 변변치 않고, 그들이 걸어다니는 깨진 보도블럭이 발에 채이고 가로수가 연명하는 공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앗. 이건 나(너)의 얘기가 아니던가. 청자이자 독자이면서 화자이자 작가인 나(너)는 얼떨떨하다. 그가 무슨 권리로 나(너)의 신성한 권리와 정당한 생존 방식을 매도하려 하는 것인가...”

그래서 독자들은 책을 읽는 독자이면서 동시에 죽음을 꿈꾸는 이 남자를 상담하는 소설 속의 상담자가 되어야 하고, 그가 느끼는 죽음과 관련한 소설초고를 읽기까지 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 남자가 확 죽어버림으로써 글에 박진감을 불어 넣는 것도 아니다. 갖은 궤변을 일삼는 그는 결국 살아 남는다.

“...그는(뭉크는) 삶이 아닌 죽음을 그렸고, 마찬가지 방식으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죽음을 산 것처럼, ‘죽어도 살기 싫다’를 죽지 않고서 끝까지 구현한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글을 읽는 재미가 아예 없지는 않다. 형식실험에도 불구하고 문체는 간혹 신선하다. 프랑스 작가들의 그 관념과 사유, 그리고 객관적인 묘사를 통한 잡아 늘이기를 닮아 있기는 하지만 아예 못봐줄 정도는 아니다.

어찌되었든 결과는 이렇다. 죽음을 꿈꾸지만 우리는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냥 가만 내버려두면 된다. 죽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살아있다고 자부할 필요도 없다.

“...‘죽은 나’가 아내였으면 어떻고 남편이었으면 또 어떻습니까? 즉 ‘년’이면 어떻고 ‘놈’이면 어떻습니까? ‘죽은 나’는 이 모든 것이 다 될 수 있고, 마찬가지로, ‘그 죽은 나를 바라보는 나’ 역시도 이 모든 것이 다 될 수 있죠. 지금 저와 당신에게 중요한 건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었기에 자살을 하고자 했고 자살을 통해서 자신으로부터의 절대 자유를 획득하고자 했던 한 인간이 뜻밖에, 가장 평범한 인간사에서 ‘진리’(좀 신파적이긴 합니다만)를 발견했고, 이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자신이 일상사에 가장 지독하게 속박된 가운데 역설적으로 자신으로부터의 절대 자유를 획득했으나 미처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 그 와중에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서, 아니 잊고서 서서히, 역시 자기도 모르게 죽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아시겠습니까?”
YES마니아 : 플래티넘 k******i 2007.02.1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