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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이 '러시아의 아들'을 부정했었다. 고대 가야사를 연구하고, 한국사를 가르치며, 철저히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그를 여전히 외국인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공전의 히트를 쳤을 때도 '외국인이 대한민국을 알면 얼마나 알겠어'라며 외면했었다. 그런 내게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는 한없는 무력감과 자기 점검을 통렬하게 요구하고 있다.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자는 과거로 되돌아간다'라는 부제를 달고.
그가 쏟아내는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 세계의 흐름 속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위치를 주워 섬기기에 바빴다. 홍세화 선생이 생활 속의 진보를 얘기한다면, 노회찬 대표가 미약한 진보의 힘을 정치적 세력으로 추동하는데 힘을 쏟는다면, 벽안의 학자는 좌익과 진보의 전방위적인 성찰과 담론을 담고 있다. 어떻게 외국인이 그 어떤 진보주의자보다 더 깊이 있는 논의와 연구를 할 수 있는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크게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대한민국의 진보가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MB정부가 몰아넣은 공포공화국을 작동시키는 다양한 톱니바퀴들을 파헤친다. 또한 정신의 거세에 맞서는 냉철한 시선을 곳곳에 담아내며, 진정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하게 한다. 분명한 점은 현재 MB정부가 취하고 있는 일련의 강폭한 권위주의 체제가 엄청난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삼성으로 대표되는 거대 자본이 어떻게 대한민국을 망치고 있는지에 대해 역설한다. 무엇보다 편향되지 않는(물론 혹자에 따라서는 좌편향이라 비판할 수 있겠지만), 균형 잡힌 현재적 인식을 바탕으로 막연한 비판과 투쟁 선동이 아닌 대안을 제시한다.
한국에 진보정당이 꼭 필요한 까닭이 책의 첫장을 장식한다. 이는 노회찬의 '진보의 재탄생', 홍세화의 '생각의 좌표', 한홍구의 '지금 이 순간의 역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논의되고, 그 필요성을 인식했던 부분이다. 무엇보다 타도 MB를 외치지만은 않는다. 무턱대고 정치인 노무현을 두둔하지 않는다. 다만 국가 권력의 평화적 탈환을 꿈꾸며, 계급적 투표가 절실하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진보정치, 젊은이들의 참여정치가 힘든 이유를 '생존 전투'에 포획되었다는 그의 진단은 정확하다.
'등록금을 마련하느라고, 없는 직장을 찾느라고, 결혼해서 살 집을 마련하느라고, 직장에서 안 잘리고 버티느라고, 저항이고 뭐고 신경쓸 틈이 없는 것이다. 그게 한국적 체제(일단 '딴 생각'을 할 만한 여유를 주지 않는 체제)의 최강의 무기 중의 하나다. 여름 휴가 5주의 나라와 기껏해봐야 4~5일을 쉬는 나라에서 '저항'에 나설만한 노동자의 여력은 다를 수밖에 없다.'
MB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봉건적 토건공화국 건설에 강한 제동을 걸고 있다. 독일에서 대운하를 배울 게 아니라, 독일의 식량자족율을 통한 농촌 지원책을 배우라고 말한다. 또한 우리들의 마음 관리자인 자본의 폭력에 직시한다. 모든 국가적 정책 기반이 '삼성경제연구원'에 있다는 사실, 각 대학교마다 삼성관이 들어서고,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 나머지 산업들을 사장시키는 작금의 시대를 통탄한다.
수많은 사건이, 담론이, 그동안 스스로 인식의 부재 상태였던 부분들이 아프게 다가왔다. KTX 여승무원들의 농성과 용산 참사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기업국가의 틀을 제대로 잡고 대한민국을 주무르는 삼성공화국의 참상을, 민족국가란 허명에 덧씌워진 대체복무제 논의를, 사교육에 등골 빠지며 결국 대한민국을 등지는 그들을 뼈아프게 담아낸다.
최근 명진 스님과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의 '좌익' 관련 공방전을 바라보며 종교의 정치 참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이 책에서는 '하나님 장사와 부처님 장사를 하는 이들에게'란 섹션으로 종교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등장한다. 단일교회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기네스북에 올라있는 순복음 교회를 비롯하여, 군부 세력에 편승했던 조용기 목사 등의 이야기가 나온다.
개인적으로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언론 마피아, 농민들을 등치는 농협 마피아, 헌금 장사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교회 마피아, 등록금으로 부동산 장사를 하는 대학 마피아를 4대 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마피아는 권력과 떼어내서는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여 이러한 마피아를 양산한 권력과 자본의 책임도 크다 하겠다. 한 가지 더 주목한 부분은 '자기 성찰'이다. 우리가 작금의 수구 보수를 언급할 때,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의 잔재라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에 우리 내부의 성찰과 갱신, 변화 또한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을 통해 다가올 6월 지방선거를 생각해본다. 이 땅에 진정한 좌익은 사라진 지 오래다. 노회찬과 심상정으로 대표되는 진보신당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미약한 실정이다. '4대강 사업'에 대한 심판으로 선거가 치뤄질 때, 난 어디를 선택해야 할까? 전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자가당착에 빠져있는 민주당에 투표할 마음은 절대 없다. 그게 요즘 고민의 일단이다.
그나마 긍정적인 변화라면, 적어도 지금의 상황에 귀막고, 눈감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거 때면 늘 외면했었다. 어떤 놈이 되든 별로 나아질 것 같지 않는 상황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잘못 뽑은 정권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을 폭압하는지를 온몸으로 분명히 알았기에, 이번 선거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투표에 참여할 것이다. 다시 대듦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박노자 선생의 글을 뒤로 하며,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나만의 방법을 고민해볼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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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를 처음 접했던 2002년. 그는 새로웠다. 한국사회의 패거리 문화가 지닌 배타성, 위로부터 강요된 민족주의, 이른바 '진보'사이에서도 만연한 권위주의 등 우리 사회 곳곳에 장착된 전근대성을 드러내며 우리가 얼마나 부조리한지를 느끼게 했다. 때마침 유행하던 '우리 안의 파시즘' 담론과 맞물려, 2000년대 초반 우리 스스로를 본격적으로 진단하는 시각이 자리잡는데 나름의 기여를 했었다.
내부자이면서 외부자. 러시아 출신이면서 우리 말을 겁나게 잘했던,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을 잘 안다다던 그의 견해는 신선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것들이, 우리가 그렇게 좇던 '선진국' 유럽의 기준으로는 얼마나 낯설고 비합리적인 것인지 드러났다. 이런 점에서는 홍세화가 수행했던 작업과 유사한 것이었다. 실제로 대학가에서 새내기가 들어왔을 때 사주는 책이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에서 「당신들의 대한민국」으로 대체되기도 하였다.
이후 박노자는 자신의 전공인 한국사 - 가장 눈에 띄는 작업은 식민지 시기 '사회진화론'에 대한 작업이었다. 대표적인 저서로 『우승과 열패의 역사』가 있다. - 에 매진하면서도 한국사회에 대한 발언을 계속해왔다. 하지만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그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가 구상하고 있는 '전체적인 그림'을 알기는 힘들었다. 내가 게을러서 그의 글들을 일일이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적어도 그의 단행본들 중에서는 명확히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자신의 '총론'을 드러낸다. 바로 이 책에서. 그리고 나는 그의 총론을 나름 요약해본다.
그는 자신의 총론을 위해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단어와 '복지국가'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조금은 어색한 이 조합을 활용해 문장을 구성해보자면, '사회주의와 혁명을 긍정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복지국가'가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정도가 되겠다. 그리고 이 말은 "국가권력의 평화적 탈환을 꿈꾼다"라고 표현되기도 하는데, '앞으로의 우리 사회가 필연적으로 국가 주도적 발전을 할 것이기 때문'이란다.
신자유주의로 일자리를 잃는 이들이 속출하고, 이들의 좌절이 사회적 불만으로 조직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가의 철권통치가 강화되든지, 일자리를 창출하고 안정된 생활을 가능케하는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게 되든지 국가의 역할이 커질 것이란 얘기다. 그리고 이 두가지 방향 중 국가가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는 국가운영의 주체에 달린 바,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다중(多衆)을 중시하는 자율주의적 분위기의 '신흥 좌파'들에게도 많은 걸 배우고 있지만, '국가권력의 평화적 탈환'을 꿈꾸는 '구식 좌파'로 남아 있다." 그렇다. 그는 국가를 '탈환'하고, 사회안전망이 강화된 '복지국가'를 향해 (왼쪽으로!) 핸들을 꺾고자 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국가를 탈환하여,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누가 국가운영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 박노자는 '자유주의 세력'은 그런 막중한 임무를 책임질 수 없음을 명백히 한다. 여기서 자유주의 세력이란 '민주당'과 다수의 시민단체를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아쉬워하는 분들이 많겠지만 얼마 전 서거한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도 예외일 수 없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기준이 민주당과 한나라당 정도로 여겨지는 오늘의 상황에서 민주당을 정말 '좌파 혹은 진보'라 생각하고 계신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민주당의 강령을 세계적인 기준에서 보자면 좌파는 커녕 다소 우익적인 자유주의로 분류하기 알맞을 것이다. 이정도로 한국의 정치지형은 우편향 되어있다. 실제로 박노자는 민주당을 '보수'로 규정한다. 그러니 그가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라는 구호를 선택한 것은 혁명적이라기보다는 최소한의 균형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복지국가라는 단어 정도를 혁명적이라 말한다면 민주당이 아닌 진짜 좌파들은 섭섭할 것이다)
자유주의 세력이 복지국가 프로젝트를 책임질 수 없다는 판단은 '노무현 정권 '에 대한 실망을 근거로 한다. 국가보안법 등 각종 악법을 폐지하고, 관료제를 보다 합리적으로 개선하고, 삼성 등 각종 대자본을 적절히 견제하고, 부동산 시장을 정상화 하는 등의 개혁 프로젝트들은 모두 좌초되었다. 박노자는 이를 한국사회의 '지배연합', '재벌의 지위' 등의 해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 자유주의의 태생적 한계로 규정하고 제2, 제3의 노무현이 나오더라도 해결불가능할 것이라 말한다. "개인 노무현은 최다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행복을 가져다주고 싶어하는 '착한사람'이었지만, 정치인 노무현은 그 수단으로 '시장'과 '경쟁'을 선택하는 최악의 오류를 범했다." 이 한마디가 모든 것을 잘 요약하는데, '시장' 또는 '경쟁'을 버리지 못하는 자유주의자들은 '개혁'이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을 넓게 남겨두고 있다는 것이고, 결국 '복지국가'라는 중차대한 프로젝트를 맡기에는 태생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박노자는 새로운 세력에 눈을 돌린다. 자유주의의 왼쪽에 있는 세력들. 바로 좌파. 좌파에도 무수히 많은 갈래들이 있지만 '국가권력의 평화적 탈환'을 꿈꾸는 그는 진보정당에 관심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정당은 국가운영 - 즉, 집권! - 을 염두에 두는 조직형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민들이 강부자 정권에 투표를 하는 대한민국의 정치지형에서 진보정당이 설 땅은 좁디 좁을 수 밖에 없다. 경기에 민감한(=생활이 안정적이지 않은) 자영업자들의 수가 많은터라 '분배'보다는 '성장'에 매력을 느끼기 쉽고, 토건적 경제성장 시스템으로 인해 서민들도 지역 경제에 콩고물을 떨어뜨려 줄 대형 건설사업을 물어올 능력이 있는 '가진자'에게 투표하기 때문이다. 또한 서구에서 자본주의의 가혹한 착취에 맞선 민중들이 저항으로 '복지'를 쟁취한 것과 달리, 압축성장한 한국에서는 '복지'라는 화두를 국가가 먼저 선점했다는 것도 이유로 거론된다. 한국인들은 스스로 권리를 쟁취한 경험이 거의 없는 '시민 아닌 시민'이라는 낯설지 않은 분석이 여기서도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 사회는 진보정당이 자리를 잡기에 너무 척박한 토양이다. 이같은 어려움 때문에, '국가운영'을 위해 진보정당을 얘기한 그가 역설적으로 "'진보 정당'의 집권 계획' 이야기는 당분간 하지 않는 게 현실적일 듯 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성패와 무관하게 의미있는 소수로 남는 것도 현재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한다. 결국 당장의 '탈환 가능성'은 없다는 말이다.
후퇴. 또 후퇴. 그는 끊임없이 미래로 과제를 넘긴다. 사회주의와 혁명에서 진보정당과 복지국가로. 그리고 진보정당과 복지국가라는 '현실적 과제'를 다시 미래의 일로.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진짜 시민사회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그가 본 한국의 시민사회는 저지와 반대는 잘 하지만, 명확한 프로젝트는 없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활동했던 시민운동가들은 모두 '한 운동' 했던 이들이지만, 정권교체가 되지 않았더라도 추진되었을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를 열심히 처리했다. 다른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정권에 합류하지 않은 민주화 운동세력-시민운동 세력은 반대와 저지 이상의 구호를 외치지 못했다. 박노자는 명확한 프로젝트 - 그의 경우에는 '복지국가' - 를 지니고, 굳이 시민운동이 정권과 관계맺을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진보정당이 집권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을 시민사회에 요청하는 것 같다. 그는 온 나라를 총파업과 데모로 마비시킬 만큼의 '비폭력적 실력 행사'가 가능할 수준의 사회적 연대가 가능한 시민사회를 얘기하고 있다. 국가를 탈환한다는 것이 단순히 정권만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프로젝트를 교체한다는 의미라면 이 수순은 당연한 것이다. 한 나라의 국민은 그 국민의 자질에 맞는 사회체제와 정부를 가진다는 말처럼, '복지국가' 프로젝트에 대한 대중적인 동의와 승인, 내면화가 없다면 국가 탈환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밑'으로부터의 투쟁을 '진짜 시민사회'라는 단어로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시민사회는 단순히 '시민단체'가 아닌 것이 된다. 국가 외부의 모든 영역을 말하는 것이며, 그 영역을 '복지국가'라는 큰 그림에 동의하는 시민들-민중들의 힘으로 가득차게 해보자는 말이다. 그래서 국가의 움직임을 강제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같은 구상이 단지 몇몇 단체의 역할로 가능할 리가 없다. 그는 지금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라는 큰 프로젝트에 (몇몇 단체가 아닌) 다수의 시민들이 동의했던 것처럼, 그동안 소실되었던 프로젝트를 '복지국가'라는 이름으로 부활시켜 보자는 것이다.
그의 총론은 이처럼 명확하고 매끄럽다. '복지국가'라는 선명한 방향성, 자유주의자가 아닌 좌파라는 추진주체, 진짜 시민사회의 형성이라는 방법론까지. 하지만 본인도 예상하다시피 좌파를 자임하면서 '혁명'을 기각했다는 것은 비판의 화살과 마주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그는 혁명을 현실적인 방안으로 보지 않는 이유를 몇가지 제시하는데, 가장 근본적인 것은 박노자가 혁명을 대하는 관점이다.
그는 혁명이란 - 그 의도와는 무관하게 - 목적을 위해서는 젖먹이라도 죽일 수 있는 상황이며, 혁명군이든 반혁명군이든 도살, 겁탈, 강간 등이 뒤따르게 되는 혼돈의 상황이라 규정한다. 때문에 가급적이면 혁명과 같은 상황이 오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민중의 삶을 지키고, 복지수준과 제 권리를 신장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같은 그의 입장은 혁명이라는 사태가 오지 못하도록 대중을 달래서 미연에 방지하자는 지배계급의 낡은 구상과는 다른 것이다. 그는 올바른 길을 위한 혁명이라는 것도 "민중들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과정이기에, 그 길을 피하면서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가급적 피하자는 것이다. 때문에 '혁명을 피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가 실패했을 때 결국 혁명적인 사태가 도래하게 된다면 혁명을 부정해선 안된다고 말한다.(내겐 혁명의 편에 서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즉, 그에게 혁명이란 민중들을 가혹하게 눌렀을 때 발생하는 자연현상(끔직한 재난!)과도 같은 것이고, 가급적 사전에 문제를 해결하는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혁명을 꿈꾸는 이들에게 말한다. 당신들의 이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혁명이라는 과정이 너무나 끔찍한 과정이라고.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이는데, 지금은 - 특히 서구나 대한민국에서는 - 혁명의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낮다고 말한다. 그는 이미 복지수준이 높은 서구민중들과 반주변부(대한민국을 포함)에서는 체제가 어느 수준 이상으로 동의를 얻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제국가('차르'체제)가 농민들을 가혹하게 눌렀던 러시아 혁명 시기에 비해 오늘날의 자본주의 중심부-반주변부에서는 혁명이 동의를 얻기가 힘들다는 것이다.(대중없는 혁명은 쿠데타다!) 때문에 이같은 상황에서는 혁명보다는 급진적 개혁이 현실적이며, 때문에 '복지국가'라는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이라 그는 설명한다.
나는 지금 느낀다. 박노자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새로웠던 기분. 그가 던진 생소한 질문들. 그 느낌을 나는 이 책을 읽고 다시 받았다. '좌파'와 '복지국가 프로젝트'. 복지국가란 '개량'이라 일컬어지는 사민주의자들의 단골메뉴가 아니었던가. 박노자가 북유럽의 예를 많이 들기는 하지만 사민주의자로 분류해 본 적은 없었기에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솔직히 그의 총론은 충분히 합리적이며, 조금 솔깃하기도 하다. 무엇보다 사실 나도 '혁명'이 두렵다. '목적을 위해서는 젖먹이라도 죽일 수 있는 상황이며, 혁명군이든 반혁명군이든 도살, 겁탈, 강간 등이 뒤따르는' 상황을 맞고 싶지도 않다. 아무래도 집회때 피켓을 드는 것과 혁명에 나서 총을 드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가능하다면' 혁명이 오기 전에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을 나도 바란다. 가능하다면!
그렇다. 과연 그것은 가능한가. 현재의 체제를 완전히 리셋하지 않고도 모든 이들의 행복한 삶은 가능한 것인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복지국가라는 이름으로 보장할 수 있는 공공성은 과연 어디까지인가? '자본주의의 최종적 국면'인 신자유주의 하에서 북유럽도 복지의 해체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자본주의 하에서의 복지국가란 기업 혹은 국민경제의 이윤율 저하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아닌가? 세계경제가 - 서브프라임 사태만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 침체를 겪어왔고, 선진국과 후진국의 격차가 양극화되는 상황에서, 세계경제의 상위권 국가들이 복지국가를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하위권 국가들을 착취한 댓가로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혁명 외에도 우리에게 훌륭한 수단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의 총론이 옳다면 좋겠지만. 나는 아직 그에게 묻고픈 너무나 많은 질문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혁명을 가급적 피하고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박노자의 총론에 호감이 가지만 내겐 아직 그의 총론이 믿음직스럽진 못하다. 하지만, 그래도 관심을 두고 지켜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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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자기 자신조차 속이고 기만함으로써, 자신의 행동과 업적을 정당화 시키려 하는 속성이 인간에게 존재한다. 우리를 우리가 아닌 남들은 어떻게 보고 있는가... 작가는 현실태에서 드러나고 있는 MB정권의 무리수들과, 민주주의 후퇴들이 극우적이고 무소통적인 대통령 1인의 행동을 바꿈으로, 혹은 정치적교체를 통해서 바꿀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사회 전체의 지나치게 극우적이고, 사회복지와 서민층이나 하층민을 지원하는 정책이 무시되고, 외국인들에게 차별적,배타적이며.. 일제 압제와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뽑히는 민주주의에서는 업적보다 치적이 많은 군부의 박정희대통령--전두환--노태우 대통령들의 이어진 수많은 세월 속에서, 사회 기득권층에 의해 입력된 색깔논쟁과 잠재적인 군사적 위계질서와 문화... 무소통적이며 암묵적인 침묵과 맹종을 강요하는 시스템 전체의 그림자들을 걷어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인이 아닌 사람의 객관적인 시각으로, 지금 우리 사회의 실태에 경종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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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문제의 해답을 찾아가는 것이 삶이 아닐까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이 세상 사람 수만큼이나 천차만별입니다. 그중에 저는 어떤 것을 취하고 버려야 할지 참 고민이 많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나름 하나둘씩 원칙이 생깁니다. 박노자의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그 원칙에 몇 가지 더 포함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이 엿 같은 세상에 제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부단히 지키려고 노력할 생각입니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행해지는 모든 선거에는 철저히 계급 투표하기, 조선일보(니가 짱이니 이해하길) 멀리하기, 무의미한 기득권에 대들기, 모든 사람을 진정으로 대하기, 무한 경쟁으로 아들을 키우기보다는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인간의 존엄성을 알도록 도와주기, 무뇌아처럼 물질적 풍족보다는 좀 불편해도 그 불편함을 당당하게 받아들이기. 이 외에도 많이 있지만, 워낙에 부족한 인간이고 보니 하나하나 노력하면서 살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이지 지금 같은 세상을 도저히 제 아들에게 살라고 하지 못하겠습니다. 제 아들은 저처럼 힘들게 양육과 교육, 의료를 걱정하지 않는 아름답고 행복한 대한민국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미친 이데올로기에 빠진 제 삶을 반성해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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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박노자 씨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첫 번째 이야기를 읽고 내부와 외부의 경계선에 선 사람 눈에선 우리나라 현실은 이렇게 보이는구나라는 걸 깨닫고 내 안에 있는 많은 편견들과 어떻게 싸워나갈지 막막했었는데, 어느샌가 그때 느꼈던 것들을 다 까먹어버리고 나는 한동안 현실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에 대한 관심을 끊는 동시에 그의 저작들에 대한 관심도 끊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당시보다 더 막막한 어둠 속에 묻혀 있는 듯한 지금 나는 그의 책을 다시 손에 잡게 되었다.
인상깊은 구절 그런데 문제는, 오리엔탈리즘을 예컨대 `자본주의 지상주의`로 본다면 그 시각은 이미 동아시아 토착 학자들에게 상당히 내면화돼 있다는 것이다. 요즘 국내 일각에서 유행하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보자. 일제가 자본주의 발전에 유리한 법 제도 등 환경을 가져다주었으니 긍정적이었다는 식의 논리야말로 오리엔탈리즘의 `토착화`의 결과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동아시아만큼 성공적이지 못한-그리고 서구 학자들을 제압하고 매수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타지역에 대한 동아시아인들의 시각이다. `가난하면서도 행복한 저 인도인 들의 고대적인 영성`을 논하는 한국 신문기자들이야말로 동시대의 위대한(?) 오리엔탈리즘의 전도사들이다. "가난하면서도 행복한"이라는 표현은, 가난을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소리다. 아마도 앞으로 한국에서의 `오리엔탈리즘과의 투쟁`의 중심은 이슬람권과 동아시아, 남아시아에 대한 `시각 교정`일 듯하다.
본문 251~25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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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책을 읽고 내 나름대로의 리뷰를 써서 올리고, 그 다음 다른 사람의 리뷰를 확인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사람의 리뷰를 먼저 보았는데, 솔직히 다른 사람들처럼 우파,좌파,사회주의,복지 등의 단어를 사용해서 훌륭하게 리뷰를 쓸 자신이 없다.
그저 생각 나는 몇 개의 단어들과 어떤 이미지들이 오락 가락 하며, 이런 저런 사례를 바탕으로 하여 비판해 놓은 것에 대해서 적절히 공감을 느낀다. 사실 전혀 관심도 없던 분야의 책을 몇 권 읽고 나서, 갑자기 정신 세계가 확~ 바뀔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이런 류의 책을 읽다보니, 예전에는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을 볼 때, 아주 자극적인 뉴스가 아니면 그렇게 집중해서 보지도 않았고, 아나운서들이 떠들거나 말거나 그냥 심드렁하게 시청했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조금 다르게...비판(?)적으로 혹은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하는 변화를 주었다.
꼭 이 책이 아니더라도...인문 사회 관련 도서는 정말 많이 팔려서 읽혔으면 좋겠다. 이런 책들이 보여주는, 현실 비판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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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운동으로 널리 알려진 간디는『마을이 세계를 구한다』에서 ‘수탁자 이론’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만일 내가 유산을 받거나 장사나 일을 해서 상당한 돈을 갖게 된다면 나는 그 모든 돈이 내게 속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된다. 내게 속한 것은 대다수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것보다 나을 것 없는 명예로운 생계수단의 권리이다. 내 재산의 나머지는 공동체에 속하고 공동체의 복지를 위해 쓰여야 한다. 오늘날 산업 자본주의 위기 속에 ‘복지’는 제국을 넘어서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용하고 있다. 적어도 인간의 생존권을 억압하는 방식에 맞서는 진보적인 가능성이라고 해도 좋다. 그래서 인지 우리 사회의 민감한 부위를 적나라하게 자극해왔던 박노자는『왼쪽으로, 더 왼쪽으로』에서 미래사회를 ‘복지 자본주의’라고 역설했는데 결코 우연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러면 그의 ‘왼쪽으로’는 혁명인가? 아니면 급진적 개혁주의인가? 이 책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급진적 개혁이 최선(最善)이고 혁명은 차선(次善)이라는 구분이 명확해진다. 그가 말하는 급진적 개혁은 피를 흘려 이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고 쟁취할 수 있는 최대한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령, 대형 기업의 국유화, 토건 국가 예산을 교육, 복지 예산으로 전환, 부유층을 집중 겨냥하는 각종 부유세, 대학 평준화와 명문대 개념의 불식, 국방 예산 감축 등이다. 이를 위해서는 촛불집회나 총파업 같은 밑으로부터의 직접적 압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국민의 면도날은 날카롭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어느 때보다 후퇴하고 있는 탓에 “모든 게 이명박 탓”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그래서 촛불집회는 국가권력에 맞서는 대중들의 건전한 참여 방법이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권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더구나 좌파적으로 오도하고 그것도 모자라 토끼몰이 식으로 인권을 탄압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인권위원회를 대통령 직속으로 개편하려고 했던 것이 단순한 해프닝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명박 정권이 녹색성장이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는 ‘4대강 살리기’는 정말로 우리의 경제를 살리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4대강 살리기는 시대착오적이며 권위적이다. 저자 말대로 세계는 이미 수출국이 선진국이 되는 시대는 과거에 불과하다. 그 보다는 식량 위기 시대에서 식량 자급률을 높이는 것이 대세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경제 살리기’라는 구호아래 삽질 공화국으로 억척스럽게 땜질하고만 있다. 결과적으로 4대강 살리기에는 천문학적 예산을 집행하면서도 초등생 무료급식은 완전 삭감이라는 불균형 발전의 안타까운 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이명박만 당선되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낙관했다. 자영업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한국에서 경제 대통령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경제 대통령에 잠재된 박정희 시대에 성공주의 이데올로기 및 죽은 독재자의 망령이라는 모순을 비판하는데 우리는 실패했다. 이로 인해 ‘식민지근대화론’을 긍정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현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부작용이 가속화되는 현실에서 저자는 ‘왼쪽으로’ 저항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왼쪽이 지금의 ‘자본주의적 위계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왼쪽이라는 ‘대듦’의 대중적 반란을 생각해보라고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다. 즉 대중들이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제대로 인식하면서 자신감을 가질 때 비로소 다양한 방식의 저항과 비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순이 반복되는 한국 사회를 향하여 거침없이 쓴 소리를 쏘아대는 박노자의 진실은 불편했다. 하지만 저자 말대로 한국 사회가 미래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왼쪽으로 행진해야 한다는 각성은 의미심장했다. 더불어 왼쪽으로의 방향이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좀 더 정밀하게 다듬어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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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 내부적으로 잉태되고 있는 모순 덩어리들을 치유할 그 무언가는 정녕 없는 것일까? 최근 우리 사회를 보면 들여다 볼수록 갑갑증은 도를 더한다.어디 돌파구라도 있긴 한가 싶다. 이 책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는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시리즈의 세번째 책이다. 오해는 하지 말아야겠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다소 예의를 갖추지 못한 시리즈의 제목은 박노자 자신의 의지는 아니라고 한다. 그를 잘 모르는 이들은 그가 귀화한 외국인이라 그에게 진정성이 없다거나 한국 사회를 잘 모른다고 비난할 지 모르나 그는 우리 대부분의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역사학자다. 그는 글의 첫머리에서 자신은 과거를 다루는 역사학자라 현재 시사를 평론하는 것이 월권이 아닌지 하는 겸손함으로 입을 뗀다. 하지만 그의 어투,화법으로 진단하는 한국 사회 문제점은 자못 신랄하다. 진보정당 부재,국가의 폭력, 인권의식 부재, 기업화 및 보수화에 기여하는 종교계, 뉴라이트의 균형 잃은 역사관, 우리와 남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배타성, 그리고 한반도에 드리워진 전쟁의 그림자 등등 그의 펜 끝에서 이러한 우리들의 문제점들은 하나씩 해부되고 파헤쳐진다. 박노자 교수는 진보의 목소리를 내는 역사학자이며 굳이 우리 구분법을 따르자면 그는 왼쪽에서도 많이 왼쪽으로 치우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가령 현재 민주당도 그의 관점에서는 보수당 다름 아니다. 민주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이나 변할 것이 없다고 일갈한다. 그는 한국사회의 강한 보수적 색채에 진보정당의 토양이 척박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대중적 진보 정당을 키우지 않으면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 원자화, 개체화 되어가는 민중의 삶의 개선은 요원하다고 말한다. 그가 거주하는 유럽의 정치문화를 소개하면서 연대의식을 가지고 끊임없이 대오를 정비하자고 독려한다. 물론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대중적 진보 정당의 존재자체에 대한 ‘의미있는 소수’로 자리매김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지만 현실 정치가 그런 자리매김하는 것만으로 나아질 것이 있는가. 진보정당의 중간 단계인 온건한 자유주의 개혁세력의 존재에 대한 지나친 평가 절하하는 오류는 자칫 극우들의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 비친 남북한의 모습은 어떨까? 병영국가를 고수하는 북한의 기득권층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남한의 기득권층도 토건국가, 안보국가 모델을 완고하게 고집하고 있다. 기층민의 고통과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위한 안보 상품은 여전히 계속 생산하고 있다. 그는 좌파 민족주의에 대한 환상에도 일침을 가한다. 남북한의 화해협력이라는 틀도 어찌보면 남한의 자본이 북한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형태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삶을 위안해 줄 수 있는 종교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기독교적 평화주의를 포기하고 야수와 같은 정권에 빌붙었던 지난 시기. 그 시기에 대한 반성 한 번 없는 우리의 거대 교회들이 과연 우리의 영혼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자격이나 있는가. 국가 권력 밑에 기거하면서 그 권력의 논리를 답습하는 교회에게는 ‘하느님 장사’한다고 밖에는… 그렇다고 별반 다를게 없는 부처님 장사도 있지 않은가… 기독교와 불교가 주는 가르침을 왜곡하고 평화를 깨는데 앞장서는 종교인들에게 나 또한 심한 욕지기가 앞선다. 이러한 문제점의 끝에 그는 다시 ‘대듦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한다. 일찌기 함석헌 선생은 대듦이 곧 생명이라면서 절대순응이란 양심과 이성이 있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행위라고 했다. 박노자는 그 대듦을 통하여 양심을 갖춘 인간이 되기를 권고한다. 진보라고 하면서 자신의 생활에서는 권위주의적이고 위계적인 삶을 고치지 못한 많은 얼치기 진보인들도 스스로 깨어나야 할 것이다. 박노자에 의하면 역사에서의 진보와 모순의 심화는 궤를 같이 한다고 한다. 한국 내의 모순의 심화는 이미 턱 밑에 까지 차오르고 있다. 과거 10년 자유주의 개혁의 실패 (물론 기득권층의 거센 저항과 치사하리만치 집요했던 공격의 문제는 차치하고)로 집권한 보수정권은 이 모순의 정상화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 하다. 오히려 심화시키고 상처를 덧내지 않으면 다행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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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피해서 도저히 남들 앞에서 말하지 못하는 것, 내가 입 밖에 내는 순간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나나 같이 민망해져 버릴 것 같은 대화의 주제, 나는 알고 있지만 당신은 알지 못해서 꽁꽁 감추고 싶었던 비밀, 알지만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불공정함과 부족함, 불편함 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학연, 지연, 혈연을 중요시하고 이의 ‘구속’을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는 개인으로서 누구과 어떻게든 연결될지 모르거나, 연결이 되어 있는 단체와 소속 인사들을 비판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죠. 그렇다고 하면 개선의 여지는 없습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어떤 방향으로 나아져야 할지에 대한 논의나 토론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립니다.
그저 살아온 대로 관행과 관습, 관례를 중시 여기다 보면 인간관계도 원만하고 자신의 비즈니스도 평탄하게 나아갈 것이 뻔 한데 누가 위험을 무릅쓰고 ‘내부 고발자’가 되겠냐구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은 이 사회에서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인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곳저곳 부딪히거나 남들이 겪는 고통과 아픔을 보고 자연스럽게 온몸으로 습득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사회입니다.
예컨대, 비록 다른 사람이 ‘부정’이나 ‘비리’로 걸려서 패가망신까지 가는 일이 생겨도 그가 그저 재수가 없었을 뿐, 내가 그가 받은 ‘심판’을 똑같이 받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자녀나 남편을 취직시키기 위해 ‘높은 분’에게 돈봉투나 선물박스를 안기고, 심지어 몸을 바쳐야 하는 전근대적인 사회구조, 남을 죽음으로 몰수도 있는 음주운전을 하다가 걸린 것을 무용담처럼 이야기하고 군대에서 폭력을 가하거나 당한 경험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이사회는 불법과 비리, 폭력이 이미 생활화 되어 있으며, 오히려 부정을 통해야 스스로가 성장하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성공’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대중의 마음에 확고하게 박히게 된지 오랩니다.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근원적인 가치인 ‘자유’와 ‘평등’은 그냥 여름 복날 탕으로 끓여질 개에게나 던져줘야 할 것들이고, 비록 자유롭지 못하거나 평등하지 못해도 ‘돈’을 섬기면 나와 내 가족에 복이 올 것이라는 사회적 믿음만이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돈’이 가장 중요하며 나와 내 가족의 영달을 위해서만 몸 바치며 이를 지켜주고 북돋아주는 일을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내가 잘 살게 됨으로서 누군가가 다치게 되거나 망하는 것에 대한 것을 정당한 희생으로 치부하는 법을 배워갑니다. 공평하게 잘 사는 것이 선(善)이라는 이야기는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말이 되버립니다.
교회나 절, 성당에서도 모두가 자신과 가족의 부와 행복, 성공을 기도하고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나라의 평안과 진보, 세계평화와 남북의 화해와 협력에 대한 내용으로 기도하는 일은 ‘행사’때나 가능한 것이지요. 그러니 그 전지전능한 신조차도 밀려드는 개인적 소원을 어떻게 들어주어야 할지 의문스럽습니다.
수천 년 역사라고 일컫는 ‘우리민족’은 ‘단일민족’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습니다. 그것이 가진 영역과 가치는 누구도 건드려서 흔들 수 없는 성역의 것이 되어서 예컨대 누가 ‘독도’만 외쳐도 ‘쪽발이‘하며 일본을 향해 으르렁 거리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한민족‘이라는 불안하고 배타적인 논리로 우리보다 약자의 위치에 있는 외국동포와 외국인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반말‘정도는 아주 일상화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고, 흰얼굴의 외국인에게는 꼼짝못하고 살살거리고 함께 어울리는 것을 ’자랑‘으로 삼을수 있으면서 검은 얼굴의 외국인은 경멸과 무시, 조소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대다수의 국민들입니다. 길을 물어보는 외국인에 대한 반응의 비교, 이에 대한 실험을 한 모방송국의 다큐도 충격을 주었습니다.
조작된 ’정보‘와 이의 일방적 유통이 원인이겠지만 대한민국의 ’건국‘과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굳건하게 다져온 이승만, 박정희가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대접받는 것을 보면 구지 역사적 진실을 알지 못하는 ’무식함’만이 지탄받을 일이 아니라 오늘의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가치를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의 평등과 자유를 갈망하기 보다는 나, 내 마음의 고요와 평안을 찾는 데에 힘쓰다 보니 느슨한 ‘연대’와 함께 걷기는 커녕 눈을 맞추기조차 힘이 들고, 올해의 가계를 고민하고 집구하기, 투자, 주식, 부동산, 예금은 얼마 하는 것들로도 충분히 힘든데다가 결혼과 아이 갖기, 아이 기르기와 교육 등에 ‘투자’해야 할 금전적 정신적인 부분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공동의 가치는 ‘사치’에 가까워져 버립니다. 앞에서는 조아리고 등 돌리면 까는(?)것이 당연한 계급관계에서 욕하면서도 상층을 동경하는 하층민들은 어떻게 하든 한 계단이라도 오르기 위해 상처투성이인 온 몸을 바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오르면 자연스럽게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굳어지는 이 땅의 계급구조에서 평등과 자유가 설 자리는 없나봅니다.
자본주의를 뒤집어 쓴 ‘시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이곳에서 ‘복지’가 설 자리는 없습니다. 기업이 늘리면 늘리는 데로 자르면 자르는 대로 노동자는 자신의 생계를 맏긴 채 눈감고 기도나 할 뿐입니다. 정부가 주도한다고 해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4대강을 ‘죽이는’ 토목공사에 30조원이 들어가는 동안 방학 때에도 문제풀기에 열중해야만 하는 학생들과 등록금을 내지 못해서 배움을 그만두거나 심지어 자살하는 학생들의 문제, 박사가 되어서도 월 백만원의 시간강사 자리를 근근이 유지하며 불안에 떠는 지식인들, 뉴타운이 들어서는 곳에서 쫓겨나서 살 곳을 잃어버린 도시 난민들, 늘어가고 갈 곳 없고 할 일 없는 노인들의 문제는 등한시 되고 가치 절하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그들과 손잡아야 할 ‘나’ 역시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생각들은 아등바등 ‘돈’과 ‘이윤’, ‘효율’로 채워야 할 머리만 복잡하게 할 뿐입니다.
또, ‘양심’의 사전적인 의미도 모르고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우리는 모든 남성 젊은이가 총을 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심지어 군대를 가지 않았던 사람들까지도 이에 편승해 이 땅에 소수 ‘양심’들을 범죄자로 만드는 데에 일조합니다. 과연 ‘평화’의 가치를 실현해야 할 이곳에 60만 대군이, 정작 그들조차 있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 오로지 ‘적’으로 정해놓은 우리 동포를 향해 총부리를 겨눌 것을 강요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즐기는 것에만 빠져있어도 아까운 시기의 젊음을 폭력과 강요에 의한 무조건적인 복종의 규율만을 온 몸으로 습득하는 곳에서 2년을 보내는 것이 온전한 인격과 자아형성에 도움이 된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기업이 돈으로 사회전반을 널리 주무르고 있으며 배움의 성전이 되어야 할 대학은 이미 돈 놀음에 맛이 들어서 등록금을 차곡차곡 모으고 투기하는데 에만 혈안입니다. 소위 명문대라고 하는 것들은 기업에 충성하느라 서로 바쁩니다. 노조가 없음을 세계에 자랑하는 기업의 기부금으로 지은 건물이 버젓이 들어선 캠퍼스엔 비리로 구속된 기업 인사의 이름을 딴 강의실과 현재 하한가를 거듭하는 행보를 하고 있는 대통령의 이름을 딴 라운지를 자랑스럽게 내어 놓고 있습니다. 그들의 명예를 드높이지도 못할 국회의원배출을 ‘서울대 합격’처럼 홍보하는 대학 관계자의 머릿속에는 이미 대학이 ‘상아탑’으로서의 기능은 끝났음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성공’을 위해, 좀 더 벌고 서울의 좋은 아파트를 장만하기 위해 ‘명문대’가 필요한 것이라면 순수와 알맹이는 가버린 껍데기가 바로 대한민국인 것입니다.
생각하고 움직이며 달라져야 할 ‘당신들의 대한민국’의 저자는 너무나 오른쪽으로만 치우친 사회를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움직이길 기대합니다. 한국인 박노자가 바라보는 슬픈 대한민국의 자화상은 여태 나열한 것들 보다 훨씬 더 불행하게도 어둠과 암울함으로 칠해집니다. 과연 빠져나올 구멍이나 있을까 의심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는 ‘촛불’든 이들 덕분에, 혹은 기어코 지금 가지고 있는 ‘시스템’이 가진 치명적 문제 때문에 바뀌어갈 기회가 올 것이라고 위로합니다.
러시아 태생의 귀화 한국인일 뿐이라고, 그는 우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를 잘 알지 못한다고 애써 무시하려 해도 정작 그가 말하는 폭넓고 깊이 있는 ‘현상’에 대한 이해의 수준은 ‘토종’ 학자의 그것보다 훨씬 더 세련된 분석과 전망을 내어 놓습니다.
‘병’이 깊은 환자에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조곤조곤 병의 원인과 진행을 설명하지만 정작 처방을 하지 못하는 의사도 있고, 병의 유래와 관계없이 직관적인 처방을 행사하는 의사도 있습니다. 어떤 의사이던 간에 환자가 스스로의 병을 인정하는 것이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야 병이 낫던지 병세가 호전되어 나을 기미를 보이던지 할 것이지요.
모쪼록 이 나라보다 좀 더 편안하고 자유로운 탐구의 분위기가 주어지는 노르웨이의 오슬로발 ‘편지’로 좀 더 세심하고 깊이 있는 ‘처방’을 ‘우리 대한민국‘의 여럿과 공유할 수 있기를 앞으로도 기대해 봅니다. 저자는 자신이 던지는 토론의 거리가 토론과 학습이 활발해져서 공감과 공유가 곧 연대로 이어지고, 힘찬 발걸음의 ’움직임‘으로 나아가길 기대합니다.
그가 ‘우리’를 향해 던지는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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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좌파하기는 매우 힘들다고 한다. 좌파라고 하는 비율도 워낙 적은데다가 빨갱이라는 낙인찍여있는 나쁜 이미지이다. 그래서 좌파보다는 진보라는 다소 좋은 이미지의 단어를 사용하기를 좋아한다. 이런 대한민국인데, 저자는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가라고 한다. 한국인이 정말로 보수적일까? 한국인은 살인적인 노동 시간과 경쟁에 휘둘리고 있어서 여유가 없다. 즉 정치 자체를 접할 기회가 없는 것이다. 또 진보 정당에 대한 지지율은 20%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기성 정당에 대한 불신이 많으며, 소위 조중동에 대한 신뢰도는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어떻게 청사진을 제시하느냐에 따라 보수적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복지가 빈약한 우리나라에서 복지 문제는 왼쪽으로 갈수록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에서 진보 정당을 하기 힘든 이유는 많다. 아마도 남북 대결구도하에서의 진보의 가치를 내 세우기 힘든 부분도 있었을 것이고, 압축 성장을 통한 고도의 경제 성장과정에이 그런 의제를 못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성장 일변도의 시절이 끝난 것이 확실하다.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는 시기이며, 이 상황에 맞게 진보 정당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직 진보 정당을 믿기에는 진보 정당의 힘이 너무 약하고, 수권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스럽다. 박노자는 여전히 한국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한국사회는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연대 의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사회이다. 무엇보다도 부족한 것은 계급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가난한 계층이 부자 정당에 가장 많은 지지율을 주고 있으며, 소수자인 여성,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이런 문제점에 대해서 알리는 것은 저자의 일관된 태도이다. 한국사회의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에 대해서도 기독교, 불교 균등하게 비판하고 있다. 종교가 인권과 생명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평화를 추구해야 하는데, 국가주의에 매몰되어 이런 종교 본연의 내용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는 비판이다. 또한 인권에 있어서 지난 10년간의 자유주의 정권에서 조금 나아갔던 것들이 후퇴하고 있다. 저자가 문제제기를 해서 공론화 시켰던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인 대체복무제는 이명박 정권들어와서 무효가 되고 말았다. 또한 공권력에 의한 법집행도 도를 넘는 것으로 보인다. 권위주의와 패거리에 대한 비판도 여전한다. 한국에서 특히 대학에서 스승의 권위를 넘어서지 못하고 스승이 제시한 가설을 넘어서지 못한 상태인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만해 한용운 선생님의 말처럼 “이놈들아, 나를 매장시켜봐라.” 권위 안에서 안주하여 권위를 즐기는 퇴행보다는 권위를 뛰어 넘는 것이 우리 사회에 전반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대듦의 시대이다. 80년대의 대듦의 시대가 다시 오기를 바란다. 한반도 주위로 국제 정세가 변하고 있다. 언론에서도 공공연히 G2(미중)의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사이에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점점 미국에서 중국영향으로 가는 구조일 것이다. 이러한 현상 가운데 저자는 권위주의가 더욱 강화될까 걱정을 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과 한국사이에 있는 북한 왕조가 어떻게 될 것인가도 문제이다. 하지만 현 정부는 점점 북한과의 관계를 악화시켜 점점 중국으로 보내고 있다. 이런 경향이 계속되면 북한의 선택이 어떨지는 짐작되지 않나! 이 책의 부제인 당신들의 대한민국 세번째 이야기는 기존 1과 2와는 좀 다르다는 느낌이다. 우선 한국의 민족주의에 빠진 비판, 병영 국가인 우리나라의 징병제와 사회의 일반적인 폭력 구조에 비판, 대학의 권위 주의에 대한 비판은 좀 줄어 든 느낌이다. 그리고 좀더 큰 범위로 대한민국을 논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1,2권이 내부 문제에 대한 비판이었다면, 이번 책은 국제적인 시각으로 볼 때의 한국의 문제에 대한 비판이 강하다. 그리고 이제 거의 10년이 되어간다는 오슬로인 노르웨이와 유럽에 대한 장단점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었다. 여러 번 이야기 하는 것이지만 박노자는 우리 사회의 소금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를 가장 객관적으로 타자화해서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 너무 깊게 물들어 있어서, 문제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는 것을 박노자는 잘 표현하여, 이것이 문제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