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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이희호 여사의 일대기를 따라가며 불의와 탄압에 화가 나기도 했고 결국에는 승리하는 모습에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모든 사람의 인생사를 이야기할 때 시대적 상황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희호 여사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더불어 이희호 여사를 이야기할 때 그녀의 남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인생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김대중과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희호는 원수도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이들이었다. 김대중은 놀랍게도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부부를 청와대로 초대하여 교제의 시간을 갖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다. 또한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베트남을 방문하여 베트남 파병에 대해 사과했다.
김대중과 이희호는 박정희와 전두환 시절에 받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주택 가금은 기본이고 이들의 자녀들도 고문을 당하거나 옥살이를 해야 했다.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충분히 그들의 죄를 묻고 처벌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청와대로 불러서 품어주었다.
책에는 이희호의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하며 그녀의 사진을 함께 보여 준다. 앳된 소녀의 모습부터 성숙한 여인, 그리고 노숙한 모습까지 사진과 글을 통하여 그녀의 삶을 엿보게 된다. 이희호 여사의 인생을 보며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지금의 젊은 나날이 영원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언젠가는 나이를 먹고 중년을 거쳐 노년에 이르게 된다.
이희호가 김대중과 결혼할 때 대부분의 사람이 이희호를 말렸다. 그녀는 유학을 다녀온 촉망 받는 여성 지도자로 YWCA연합회 총무였기 때문이다. 반면, 김대중은 아내를 여의고 자녀를 둔 홀아비로 빈털터리 상태였고 직업도 없었다. 데이트 비용도 이희호가 다 지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희호는 김대중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에 이르게 된다. 이희호는 결혼한 이유 중 하나는 김대중이 잘생겼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더불어 그들은 이상하리만큼 말이 잘 통하는 관계였다. 또한 이희호는 김대중의 해박한 지식에도 놀랐다. 결혼하고 열흘 뒤 이희호는 남편 김대중이 '반혁명'이라는 죄목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이었다.
"이희호가 김대중과 결혼하겠다고 결심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요약하자면 김대중은 '도와야겠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었다. 민주주의와 조국 통일에 대한 큰 꿈을 품었으나 모든 것을 잃고 나락에 떨어진 사람이 그때의 김대중이었다. 이희호는 이 남자의 꿈이 꿈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김대중은 1963년 11월 26일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목포에서 출마하여 당선된다. 김대중은 개원 후 6개월 동안 13번이나 본 회의에서 발언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된다. 민주당 대변인으로 그의 최대 장점은 말이었다. 국회도서관에서 살다시피하며 자료를 찾고 연구하여 구체적인 수치와 사례, 그리고 논리를 기반으로 그의 말은 강한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아내 이희호도 신문과 영자신문을 샅샅이 읽고 스크랩하며 의정 활동을 도왔다.
김대중은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한 번 목포에서 출마하게 된다. 이때 박정희는 김대중 당선을 막기 위하여 두 번이나 목포를 방문하며 여당 후보 지원유세를 한다. 박정희가 직접 목포 지역의 선거를 지휘하며 돈다발을 쏟아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의 대중 연설과 이희호의 골목 유세로 당선에 성공한다. 반대 세력은 개표 부정을 위하여 선거장 전기를 여러 번 나가게 하지만 이에 대한 철저한 준비로 개표 부정을 막게 된다.
1971년 4월 27일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서 박정희와 맞선다. 결과는 박정희 634만 표, 김대중 539만 표로 95만 표 차이로 박정희가 승리했다고 정부가 공식 발표한다. 투표와 개표 과정에서 어떤 부정이 있었는지는 당사자들만 알 것이다.
김대중은 수차례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대선이 끝나고 얼마 뒤 차를 타고 이동 중에 맞은편에서 14톤 트럭이 덮치는 사고가 발생한다. 김대중이 탄 차량은 트럭을 가까스로 피하게 되지만 이 사고로 김대중은 평생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된다. 뒤따라오던 택시는 트럭과 정면충돌하여 3명이 즉사한다. 문제는 대통령 후보까지 지낸 유력 정치인이 이렇게 죽을 뻔한 사고를 당했는데도 언론 보도는 <경향신문> 1단 기사가 전부였다는 점이다. 당시 언론 통제가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조사해보니 트럭의 소유자는 공화당 국회의원 아들이었다.
중앙정보부는 국민의 뇌리에서 김대중을 지우기 위하여 철저하게 언론 통제를 한다.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에서 김대중 이름을 지우기 시작한 것이다. 김대중은 이어 일본에 갔다가 납치되어 6일 만에 겨우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는 일도 경험한다. 이때도 김대중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다. 이 모든 고난과 고통의 순간을 이희호는 함께 견디며 인내해야 했다.
이희호도 중앙정보부에 잡혀가기도 했다. 이희호는 "고문당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과 비교하면 내가 당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하고 스스로 위로하며 괴로운 밤을 기도로 보냈다고 책에서 이야기한다. 이어 김대중이 구속되자 남편 옥바라지와 석방운동에 뛰어든다. 공판 날 검정 테이프로 십자가를 만들어 입에 붙이고 침묵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김대중은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진주교도소에 수감된다. 그는 감옥에서 독서와 공부에 모든 시간을 바친다. 시간표를 짜놓고 매일 여러 권의 책을 20~30쪽씩 번갈아가며 읽었다. 2년 10개월 뒤 동교동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박정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이희호는 박정희의 공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보릿고개를 이겨내고 경제발전을 이끌었다는 공적이 있어요. 하지만 장기 독재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인권을 유린한 것은 공보다 훨씬 큰 허물입니다." 김대중도 비슷한 평가를 내린 바 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우리나라가 어느 정도 경제발전을 이룬 것은 사실이다.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 준 것도 공적이다. 그러나 독재 정권이어야만 경제를 잘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견해에는 동의할 수 없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되고 전두환이 전두지휘하게 된다. 이 시기에도 김대중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잡혀가 1980년 8월 14일 공판을 비공개로 받게 된다. 김대중이 평생을 통하여 외친 민주화에 반하는 세력들은 시도 때도 없이 김대중과 그의 가족을 탄압하고 핍박하였다. 1심 재판에서 군검찰은 김대중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그는 1심 최후진술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는 아마도 사형 판결을 받고 또 틀림없이 처형당하겠지만 내가 처형당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는 일입니다. 나는 여기 이 기회를 빌려 공동피고인 여러분께 유언을 남기고 싶습니다. 내 판단으로 머지않아 1980년대에는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입니다. 나는 그걸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든, 또 다른 누구를 위해서든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내 마지막 남은 소망이기도 하고 또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는 내 마지막 유언입니다."
그는 언제나 민주화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니, 이미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국제사회는 김대중 구명 운동에 나선다. 미국이 구명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김대중은 마침내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책에는 헌정 사상 최초로 이루어진 여야 간 평화적, 수평적 정권교체였다고 평가한다. 죽음의 고비를 몇 차례나 넘기면 이룬 승리였다. 2000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어떤 외신은 노벨평화상 절반은 부인의 몫이라고 논평하기도 할 만큼 이희호 여사의 역할은 컸다. 이후 이희호 여사는 여성 최초로 UN 아동총회 임시의장으로 회의 주재 및 기조 연설을 한다.
"집필을 맡은 고명섭 한겨레 논설위원은 '이희호가 살아온 지난 한 세기의 역사는 해방, 통일, 인권, 민주주의를 향한 길고도 힘든 격투의 시간'이었다며, 그 역사를 만든 민중의 노고와 그 민중 열망의 물결을 타고 절망의 최저점과 희망의 최고점을 함께 오간 이희호와 김대중의 삶을 온전히 그려내려고 노력했다고 전한다."
리뷰어 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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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0일 이희호 여사께서 향년 97세로 별세하셨다. 그리고, 너무나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 영면하셨다. 이러한 슬픈 상황 속에서 정작 그분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는 점이 오히려 안타깝게 느껴진다. 1970년대 후반에 태어나서 대학 시절에 비로소 마주한 여사의 모습은 야당 당수 및 대통령의 아내로서의 이미지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조용하면서도 자애스러운 그 모습은 남편이 대통령에 이르기까지의 내조자로 보였는데, 과연 그것이 여사의 모든 것이었는지 의문스럽다. 한 세기에 가까운 삶을 사신 그분을 단지 김대중 대통령의 아내로서만 기억한다는 것은 왠지 역사의 일부를 망각한 느낌마저 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희호 평전]은 뒤늦게나마 그분의 잘 알지 못했던 삶은 물론 한국 현대사를 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출간은 시의적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편의 리뷰로 감히 그분의 삶을 다룬 이 책을 모두 담아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새롭게 알게 된 부분과 의미있는 부분으로 정리를 해봄으로써 뒤늦게나마 이희호 여사의 뜻을 기리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1. 여성 지식인이자 운동가로서의 삶 1922년 9월 21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의 외가에서 출생한 이희호 여사는 감리교를 모태신앙으로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가 제대로 학문을 배우지 못한 아쉬움으로 인하여 어렸을 적부터 신식 교육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는 결국 집안의 도움없이 홀로 공부를 해야 했으며,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는 적극적인 성격을 보였다고 한다. 더구나 대학 졸업 이후 농촌에서 지도원으로 활동하면서 목격한 여성의 비참한 현실을 통하여 이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된다. 이희호의 눈에 비친 농촌 여성들이 현실은 가혹했다. 여성들은 억압적인 가부장제 아래서 짓눌렸고, 집안일과 바깥일을 모두 함께 하느라 중노동에 시달렸다. 이때의 경험으로 이희호는 뒷날 미국 유학을 갈 때 '유학에서 돌아와 농촌여성 교육기관을 세우겠다'는 꿈을 품기도 했다. - p. 44 中에서 -
이러한 관심은 해방 이후 보다 적극적인 그녀의 활동을 통하여 행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려면 남자 뒤로 빠져선 안된다는 그녀의 생각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1세대 여성 운동가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말을 앞세우지 않고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 그것이 페미니스트 이희호가 여성차별 현실 앞에서 택한 전략이었다. - p. 53 中에서 - 해방 이후 혼란한 상황과 이어진 6.25 전쟁 와중에서도 그녀는 그러한 자신의 신념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활동에 매진하게 된다. 1952년 11월 여성문제연구원을 창립하였는데, 이 역시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가 여성이었지만 정작 여성들은 가부장제 아래 짓눌려 숨도 쉬지 못하였기에 여성의 인권을 지키고 지위를 높이는 일을 할 기구가 절실하였다는 그녀의 생각에서 비롯되었기에 당시 여성 운동가로서의 그 그릇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이 단체는 1959년 여성문제연구회로 이름을 변경하면서 남녀차별 법조항을 철폐하고 헌법에 보장된 남녀평등을 현실에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 결국 1989년 가족법 개정을 이끌어 낸다. 당시 이 개정을 주도한 인물이 평화민주당 총재이자 남편인 김대중이었으니 그녀의 여성 운동이 지속적으로 진행되면서 결실을 맺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힘겨운 당시 상황 속에서 그녀는 결혼보다는 사회 및 여성 운동가로 활동하기 위하여 1954년 8월 미국으로 떠나고, 그곳에서 훗날 그녀의 활동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학문을 접하게 된다. 1958년 귀국을 한 그녀는 여성 지식인으로서 1959년부터 YWCA연합회 총무로 활동하면서 학문의 길이 아닌 사회활동의 길로 내딛게 된다. 학문의 울타리 안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보다 사회와 직접 만나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 이희호의 마음 밑바닥에 있는 근본 지향이었다. 이희호는 "나는 학구파가 아니다"라고 여러 번 말했는데, 그것은 곧 자신이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이희호에게 공부는 목표라기보다는 활동의 동력이고 바탕이었다. - p. 86 中에서 - 실제 그녀의 활동은 혼인신고 캠페인을 통하여 사실상의 일부다처제로 여성이 고통받고 있던 때에 일부일처제가 여성 권리 보호의 중요한 장치임을 강조하며, 요정정치에 대한 비판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또한 1962년 5월 10일 김대중과 결혼을 한 이후에도 1960년대 내내 그녀는 여성운동가의 길을 꾸준히 걷게 된다. 여성문제연구회 회장(1964~1971)으로 활동하며 여성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 환경을 조사하고 개선 방향을 제시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통상 결혼으로 인하여 그녀의 여성운동 경력이 단절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정치가의 내조가로만 산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여성운동가이 길을 걸었으며, 정작 그러한 활동을 접은 것은 남편의 요구가 아닌 정치가의 외압이었다. 이후 그녀는 민주화운동을 통하여 이전의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여성문제를 민주주의 문제와 하나로 보았다. 여성과 남성의 관계가 한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을 판단하는 척도이며,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참여할 때만이 민주주의의 정통성이 확보된다고 생각했다. - p. 115 中에서 - 이희호 여사의 이러한 생각은 확실히 그녀를 한 정치인의 내조자로만 볼 수 없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녀는 남편과의 민주화운동을 통하여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여성 및 사회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신념은 남편 김대중의 혹독한 정치적인 시련과 고통을 그저 조용히 함께 한 내조가 아니라 그녀 역시 함께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음을 보여준다.
2. 민주화운동가로서의 삶 김대중 대통령은 1960년 5.16 쿠데타 이후부터 정치적으로 무수한 탄압과 시련을 겪게 된다. 가택연금은 일상이었고, 체포와 고문은 물론 일본에서 중앙정보부의 음모로 인하여 납치 및 살해의 위기에 이르기까지 하였으며, 신군부의 집권 시절에는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 그의 끊임없는 민주화 운동 및 정치적인 도전이 더욱 위대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시련을 겪고 일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이러한 것이 가능했던 이유를 이희호 여사의 내조를 꼽고 있지만, 이 책은 그것이 단순히 아내의 역할에 한정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사실 이 책의 많은 부분이 이희호 여사의 삶보다는 남편의 정치적인 행보로 채워지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을 잘 살펴보면 그 과정 중에 이희호 여사의 의지와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
1976년 3.1일 민주구국선언으로 인하여 감옥에서 철저하게 격리된 김대중의 시련은 고립무원의 처지였다는 점에서 더욱 혹독하였다. 그의 지지 세력 역시 대부분 수감된 상태였으며, 누구하나 그를 옹호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972년 10월 17일에 이루어진 10월 유신의 주요 골자가 국회 해산, 정치 및 정당활동 금지, 헌법 효력 정지, 비상국무회의가 헌법조항의 기능 수행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그 비정상적인 상황은 선뜻 나서서 김대중을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비상조치를 남발하면서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을 최대 사형을 언도할 수 있다는 말도 안되는 시대였다. 하지만 이희호 여사는 위의 사진처럼 옥외 투쟁 및 항의를 하게 된다. 정부의 탄압에 항의하면서 입에 검은 십자가를 테이프로 형상화하여 붙이거나 옷에 남편의 수인번호를 붙여서 그 나름의 시위 활동을 벌인 것이다. 앞서 말한 당시의 비정산적인 시대를 감안한다면 그녀의 활동은 단순한 내조가 아니라 그녀 역시 그녀만의 민주화운동을 벌였던 것이었다.
특히 신군부에 의하여 내란 음모 사건에 휘말려 사형을 선고받고, 청주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했던 남편을 끝까지 지지한 그녀의 행동은 민주화에 대한 굳은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완전히 격리되어 훗날 그 시기에 정신적인 공황으로 무너질뻔했다는 김대중의 고백을 감안한다면 그녀는 남편에게 구원자이자 동행인이었던 것이다. 청주교도소에 수감된 남편과의 2년 동안 보낸 649통의 편지는 단순히 가부장적인 관점의 내조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종교와 신앙은 두 사람 편지의 주요 주제였다. 이희호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에 기대어 남편에게 용기를 주고 성서의 내용을 빌려 하고 싶은 말을 넌지시 전했다. 김대중도 믿음과 구원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자주 밝혔다. 기독교의 역사와 성서의 가르침을 끌어와 정치적 견해를 에둘러 내보이기도 했다. - p. 397 中에서 - 종교를 통하여 반드시 개인과 사회가 같이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이희호 여사의 평소 신념은 홀로 격리되어 공황에 빠질 수 있는 남편에게 희망이자 구원으로 다가왔던 것이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이희호 여사는 남편과 함께 또 하나의 민주화운동을 하였던 것이다.
3. 평화와 인권을 지향하는 삶 많은 시련 끝에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은 결국 선거에서 승리하고 그 꿈을 이루게 된다. 물론 그 꿈은 끝이 아니라 자신이 그리던 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시작이었다. 이 시점에서 이희호 여사는 여성은 물론 아동 및 소외받는 이웃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2000년 5월 소록도 한센인을 영부인 중 최초로 방문하였으며 여성과 아동에 대한 제도 정비에도 힘쓰게 된다. "어린이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곧 평화롭고 번영된 인류의 미래를 만드는 일입니다. (중략) 우리의 아이들이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 밝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나서야 합니다." - p. 663 中에서 - 2002년 5월 8일 UN아동특별총회 기조연설에서 보여준 이희호 여사의 발언은 그러한 관심이 단순히 생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녀가 평소 한국이 평화와 화해는 물론 인권을 강조한 것은 그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희호 평전]은 이처럼 이희호 여사의 삶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던 부분을 통하여 다양한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의미를 깨닫는다면 그분의 삶 역시 여성 및 인권과 같은 사회 운동은 물론 민주화운동에도 크게 기여를 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의 또 하나의 의미있는 기록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희호 여사는 너무나 조용하게 우리 곁을 떠난 것이었다. 이회호와 김대중에게 덮씌어진 음해와 비방의 너울을 걷어내는 데 마음을 기울였다. 이희호가 살아온 지난 한 세기의 역사는 해방, 통일, 인권, 민주주의를 향한 길고도 힘든 격투의 시간이었다. 이 평전을 쓰는 동안 그 역사를 만든 민중의 노고를 잊지 않으려고 했다. - p. 725 中에서 - 저자의 집필 목적에서 나타난 부분들로 인하여 여사는 그저 조용히 떠나고자 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도 이르게 된다. 여전히 우리 내부에서는 지역 감정 및 정치적인 흑백 논리로 인하여 이들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희호 여사 및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비판의 여지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라든지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은 심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노벨상을 받으려는 로비가 아니라 노벨상을 주지 말라는 로비가 있었다." - p. 650 : 2000년 노벨평화상 선정위원장 베르예의 증언 - "이희호 여사는 민주주의와 인권 수호를 위한 노력을 평생 대통령과 함께해온 만큼 노벨평화상의 절반은 부인의 몫이다." -p. 653 : 중국 인민일보사의 [스다이차오] 잡지의 평론 - "민주화운동에 지도자적 역할을 수행하고, 아동과 여성의 권익에 앞장서 왔으며, 김대중 대통령의 동반자로서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 p. 654 : '펄 벅 인텨내셔널'이 주는 '올해의 여성상' 수상 이유 - 저자는 왜 외부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희호 여사의 모습을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아직도 그분에 대한 정확한 내부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비록 이 한 권의 책이 그분의 삶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다루었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알지 못했던 이희호 여사의 삶의 전반을 짚어볼 수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것은 아래의 이희호 여사의 소망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되리라.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고 높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한길을 걸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었으면 합니다." - p. 721 中에서 -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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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은 지난 6월 10일 향년 97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192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화여고와 이화여전을 거쳐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일본의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1962년 부산 피난 시절에 만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결혼해 민주화운동을 위한 동지의 길을 걷게 된다.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영부인이 됐으며, 대통령 사후인 2009년에는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으로 취임해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힘써 왔다.
1939년 세일러복에 단발머리를 한 이화고녀 4학년 때의 모습(맨 오른쪽이 이희호 여사)
이희호 여사는 모교 이화여대 부총장이자 와이연합회 회장이던 박마리아의 권유로 1959년 1월부터 대한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초대 총무를 맡아 1962년 5월 김대중과 결혼한 뒤 그해 12월 그만둘 때까지 꼬박 4년간 의욕적으로 활동했다.
1962년 5월10일 이희호는 정치인 김대중과 결혼했다. 결혼식은 조향록 목사(맨 뒷줄 신랑 신부 사이)의 주례로 서울 종로구 체부동에 있던 외삼촌 이원순의 저택에서 올렸다. 대청마루에서 혼례를 마친 뒤 정원에서 찍은 양가 가족 사진이 남아 있다. 앞줄 신랑 왼쪽에 앉은 이가 신부의 아버지 이용기, 신부 오른쪽에 앉은 이가 큰오빠 이강호다. 둘째 줄 맨 왼쪽에 선 이는 신랑의 비서 조길환, 그 옆 넥타이 맨 이가 신랑의 남동생 김대의이고, 맨 뒷줄 오른쪽 끝이 막내 동생 김대현이다.
이 평전은 2015년 4월부터 2016년 11월까지 〈한겨레〉를 통해 총 80회에 걸쳐 연재된 〈고난의 길, 신념의 길〉에서 오류를 바로잡고 몇몇 사항을 보완해서 펴낸 것이다. 여기에는 이희호 여사의 어린 시절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만남, 유신 암흑기, 청와대에서 보낸 시간, 동교동 시절로 나눠 일생을 소개하고 있다.
1972년 10월 11일 도쿄 납치 후 생환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반기며 차를 나누고 있는 이희호 여사. "내 입에서는 그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1998년 2월 2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제15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희호 여사는 남편 김대중 전 대통령과 나란히 섰다. 여사는 청와대에 들어간 뒤 먼저 권위주의 문화를 청산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각하'라는 말 대신 '대통령님'으로 부르라고 했어요, 나도 '영부인' 대신 '여사'로 불러달라고 했지요."
2008년 11월 이희호 여사의 자서전 《동행 -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 출판기념회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있다. 당시 남편은 아내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평전을 집필하기 위해 2여 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한 고명섭 한겨레 논설위원은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희호 평전 집필은 내 삶의 예정된 시간표에는 들어 있지 않은 작업이었다. 우리 현대 정치사의 중심에 선 인물의 삶을 재현하는 일은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는 일이다. 그 일이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의 삶을 그리는 일이라면 괴로움은 두 배가 된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동반자요, 동역자요, 평생을 함께 한 정치적 동지였으니, 이희호를 기술하는 일은 김대중을 기술하는 일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두 사람의 삶은 너무나 많은 정치적 쟁론의 한복판을 가로질러왔다. 그러므로 그 삶을 뒤쫓는 일은 사나온 말들의 가시덤불을 헤쳐나가야 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722쪽)
고인의 삶에서 1세대 여성운동가로서의 족적도 엿볼 수 있다. 대한여자청년단, 여성문제연구원, YWCA연합회,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 몸담으며 여성 운동의 초석을 다졌다. 이때 중요한 행보로는 가족법 개정 운동, 축첩 정치인 반대 운동, 혼인신고하기 운동 등이 있다.
2019년 6월 11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희호 여사의 빈소 모습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성장과 함께 했던 고인의 삶은 신념을 지키기 위해 무수한 고난을 감수해야 했던 고난의 길이이었다. 그 모든 역경을 이겨 내온 고인의 삶은 내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단순히 한 정치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유력 여성운동가이며, 평생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헌신한 고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보는 또 다른 관점을 만날 수 있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