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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평전 - 고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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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0일 이희호 여사께서 향년 97세로 별세하셨다. 그리고, 너무나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 영면하셨다. 이러한 슬픈 상황 속에서 정작 그분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는 점이 오히려 안타깝게 느껴진다. 1970년대 후반에 태어나서 대학 시절에 비로소 마주한 여사의 모습은 야당 당수 및 대통령의 아내로서의 이미지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조용하면서도 자애스러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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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6월 10일 이희호 여사께서 향년 97세로 별세하셨다. 그리고, 너무나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 영면하셨다. 이러한 슬픈 상황 속에서 정작 그분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는 점이 오히려 안타깝게 느껴진다. 1970년대 후반에 태어나서 대학 시절에 비로소 마주한 여사의 모습은 야당 당수 및 대통령의 아내로서의 이미지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조용하면서도 자애스러운 그 모습은 남편이 대통령에 이르기까지의 내조자로 보였는데, 과연 그것이 여사의 모든 것이었는지 의문스럽다. 한 세기에 가까운 삶을 사신 그분을 단지 김대중 대통령의 아내로서만 기억한다는 것은 왠지 역사의 일부를 망각한 느낌마저 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희호 평전]은 뒤늦게나마 그분의 잘 알지 못했던 삶은 물론 한국 현대사를 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출간은 시의적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편의 리뷰로 감히 그분의 삶을 다룬 이 책을 모두 담아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새롭게 알게 된 부분과 의미있는 부분으로 정리를 해봄으로써 뒤늦게나마 이희호 여사의 뜻을 기리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1. 여성 지식인이자 운동가로서의 삶  

 1922년 9월 21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의 외가에서 출생한 이희호 여사는 감리교를 모태신앙으로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가 제대로 학문을 배우지 못한 아쉬움으로 인하여 어렸을 적부터 신식 교육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는 결국 집안의 도움없이 홀로 공부를 해야 했으며,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는 적극적인 성격을 보였다고 한다. 더구나 대학 졸업 이후 농촌에서 지도원으로 활동하면서 목격한 여성의 비참한 현실을 통하여 이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된다.

 이희호의 눈에 비친 농촌 여성들이 현실은 가혹했다. 여성들은 억압적인 가부장제 아래서 짓눌렸고, 집안일과 바깥일을 모두 함께 하느라 중노동에 시달렸다. 이때의 경험으로 이희호는 뒷날 미국 유학을 갈 때 '유학에서 돌아와 농촌여성 교육기관을 세우겠다'는 꿈을 품기도 했다.

 - p. 44 中에서 -

 

 이러한 관심은 해방 이후 보다 적극적인 그녀의 활동을 통하여 행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려면 남자 뒤로 빠져선 안된다는 그녀의 생각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1세대 여성 운동가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말을 앞세우지 않고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는 것, 그것이 페미니스트 이희호가 여성차별 현실 앞에서 택한 전략이었다.

 - p. 53 中에서 -

 해방 이후 혼란한 상황과 이어진 6.25 전쟁 와중에서도 그녀는 그러한 자신의 신념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활동에 매진하게 된다. 1952년 11월 여성문제연구원을 창립하였는데, 이 역시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가 여성이었지만 정작 여성들은 가부장제 아래 짓눌려 숨도 쉬지 못하였기에 여성의 인권을 지키고 지위를 높이는 일을 할 기구가 절실하였다는 그녀의 생각에서 비롯되었기에 당시 여성 운동가로서의 그 그릇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이 단체는 1959년 여성문제연구회로 이름을 변경하면서 남녀차별 법조항을 철폐하고 헌법에 보장된 남녀평등을 현실에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 결국 1989년 가족법 개정을 이끌어 낸다. 당시 이 개정을 주도한 인물이 평화민주당 총재이자 남편인 김대중이었으니 그녀의 여성 운동이 지속적으로 진행되면서 결실을 맺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힘겨운 당시 상황 속에서 그녀는 결혼보다는 사회 및 여성 운동가로 활동하기 위하여 1954년 8월 미국으로 떠나고, 그곳에서 훗날 그녀의 활동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학문을 접하게 된다. 1958년 귀국을 한 그녀는 여성 지식인으로서 1959년부터 YWCA연합회 총무로 활동하면서 학문의 길이 아닌 사회활동의 길로 내딛게 된다.

 학문의 울타리 안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보다 사회와 직접 만나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 이희호의 마음 밑바닥에 있는 근본 지향이었다. 이희호는 "나는 학구파가 아니다"라고 여러 번 말했는데, 그것은 곧 자신이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이희호에게 공부는 목표라기보다는 활동의 동력이고 바탕이었다.

 - p. 86 中에서 -

 실제 그녀의 활동은 혼인신고 캠페인을 통하여 사실상의 일부다처제로 여성이 고통받고 있던 때에 일부일처제가 여성 권리 보호의 중요한 장치임을 강조하며, 요정정치에 대한 비판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또한 1962년 5월 10일 김대중과 결혼을 한 이후에도 1960년대 내내 그녀는 여성운동가의 길을 꾸준히 걷게 된다. 여성문제연구회 회장(1964~1971)으로 활동하며 여성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 환경을 조사하고 개선 방향을 제시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통상 결혼으로 인하여 그녀의 여성운동 경력이 단절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정치가의 내조가로만 산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여성운동가이 길을 걸었으며, 정작 그러한 활동을 접은 것은 남편의 요구가 아닌 정치가의 외압이었다. 이후 그녀는 민주화운동을 통하여 이전의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여성문제를 민주주의 문제와 하나로 보았다. 여성과 남성의 관계가 한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을 판단하는 척도이며,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참여할 때만이 민주주의의 정통성이 확보된다고 생각했다.

 - p. 115 中에서 -

 이희호 여사의 이러한 생각은 확실히 그녀를 한 정치인의 내조자로만 볼 수 없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녀는 남편과의 민주화운동을 통하여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여성 및 사회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신념은 남편 김대중의 혹독한 정치적인 시련과 고통을 그저 조용히 함께 한 내조가 아니라 그녀 역시 함께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음을 보여준다.

 

 2. 민주화운동가로서의 삶 

  김대중 대통령은 1960년 5.16 쿠데타 이후부터 정치적으로 무수한 탄압과 시련을 겪게 된다. 가택연금은 일상이었고, 체포와 고문은 물론 일본에서 중앙정보부의 음모로 인하여 납치 및 살해의 위기에 이르기까지 하였으며, 신군부의 집권 시절에는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 그의 끊임없는 민주화 운동 및 정치적인 도전이 더욱 위대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시련을 겪고 일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이러한 것이 가능했던 이유를 이희호 여사의 내조를 꼽고 있지만, 이 책은 그것이 단순히 아내의 역할에 한정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사실 이 책의 많은 부분이 이희호 여사의 삶보다는 남편의 정치적인 행보로 채워지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을 잘 살펴보면 그 과정 중에 이희호 여사의 의지와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

 

 1976년 3.1일 민주구국선언으로 인하여 감옥에서 철저하게 격리된 김대중의 시련은 고립무원의 처지였다는 점에서 더욱 혹독하였다. 그의 지지 세력 역시 대부분 수감된 상태였으며, 누구하나 그를 옹호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972년 10월 17일에 이루어진 10월 유신의 주요 골자가 국회 해산, 정치 및 정당활동 금지, 헌법 효력 정지, 비상국무회의가 헌법조항의 기능 수행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그 비정상적인 상황은 선뜻 나서서 김대중을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비상조치를 남발하면서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을 최대 사형을 언도할 수 있다는 말도 안되는 시대였다. 하지만 이희호 여사는 위의 사진처럼 옥외 투쟁 및 항의를 하게 된다. 정부의 탄압에 항의하면서 입에 검은 십자가를 테이프로 형상화하여 붙이거나 옷에 남편의 수인번호를 붙여서 그 나름의 시위 활동을 벌인 것이다. 앞서 말한 당시의 비정산적인 시대를 감안한다면 그녀의 활동은 단순한 내조가 아니라 그녀 역시 그녀만의 민주화운동을 벌였던 것이었다.

 

 특히 신군부에 의하여 내란 음모 사건에 휘말려 사형을 선고받고, 청주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했던 남편을 끝까지 지지한 그녀의 행동은 민주화에 대한 굳은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완전히 격리되어 훗날 그 시기에 정신적인 공황으로 무너질뻔했다는 김대중의 고백을 감안한다면 그녀는 남편에게 구원자이자 동행인이었던 것이다. 청주교도소에 수감된 남편과의 2년 동안 보낸 649통의 편지는 단순히 가부장적인 관점의 내조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종교와 신앙은 두 사람 편지의 주요 주제였다. 이희호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에 기대어 남편에게 용기를 주고 성서의 내용을 빌려 하고 싶은 말을 넌지시 전했다. 김대중도 믿음과 구원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자주 밝혔다. 기독교의 역사와 성서의 가르침을 끌어와 정치적 견해를 에둘러 내보이기도 했다.

 - p. 397 中에서 -

 종교를 통하여 반드시 개인과 사회가 같이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이희호 여사의 평소 신념은 홀로 격리되어 공황에 빠질 수 있는 남편에게 희망이자 구원으로 다가왔던 것이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이희호 여사는 남편과 함께 또 하나의 민주화운동을 하였던 것이다.

 

 3. 평화와 인권을 지향하는 삶

 많은 시련 끝에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은 결국 선거에서 승리하고 그 꿈을 이루게 된다. 물론 그 꿈은 끝이 아니라 자신이 그리던 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시작이었다. 이 시점에서 이희호 여사는 여성은 물론 아동 및 소외받는 이웃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2000년 5월 소록도 한센인을 영부인 중 최초로 방문하였으며 여성과 아동에 대한 제도 정비에도 힘쓰게 된다.

 "어린이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곧 평화롭고 번영된 인류의 미래를 만드는 일입니다. (중략) 우리의 아이들이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 밝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나서야 합니다."

 - p. 663 中에서 -

 2002년 5월 8일 UN아동특별총회 기조연설에서 보여준 이희호 여사의 발언은 그러한 관심이 단순히 생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녀가 평소 한국이 평화와 화해는 물론 인권을 강조한 것은 그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희호 평전]은 이처럼 이희호 여사의 삶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던 부분을 통하여 다양한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의미를 깨닫는다면 그분의 삶 역시 여성 및 인권과 같은 사회 운동은 물론 민주화운동에도 크게 기여를 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의 또 하나의 의미있는 기록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희호 여사는 너무나 조용하게 우리 곁을 떠난 것이었다.

 이회호와 김대중에게 덮씌어진 음해와 비방의 너울을 걷어내는 데 마음을 기울였다. 이희호가 살아온 지난 한 세기의 역사는 해방, 통일, 인권, 민주주의를 향한 길고도 힘든 격투의 시간이었다. 이 평전을 쓰는 동안 그 역사를 만든 민중의 노고를 잊지 않으려고 했다.

 - p. 725 中에서 -

 저자의 집필 목적에서 나타난 부분들로 인하여 여사는 그저 조용히 떠나고자 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도 이르게 된다. 여전히 우리 내부에서는 지역 감정 및 정치적인 흑백 논리로 인하여 이들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희호 여사 및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비판의 여지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라든지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은 심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노벨상을 받으려는 로비가 아니라 노벨상을 주지 말라는 로비가 있었다."

 - p. 650 : 2000년 노벨평화상 선정위원장 베르예의 증언 -

 "이희호 여사는 민주주의와 인권 수호를 위한 노력을 평생 대통령과 함께해온 만큼 노벨평화상의 절반은 부인의 몫이다."

 -p. 653 : 중국 인민일보사의 [스다이차오] 잡지의 평론 -

  "민주화운동에 지도자적 역할을 수행하고, 아동과 여성의 권익에 앞장서 왔으며, 김대중 대통령의 동반자로서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 p. 654 : '펄 벅 인텨내셔널'이 주는 '올해의 여성상' 수상 이유 -

 저자는 왜 외부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희호 여사의 모습을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아직도 그분에 대한 정확한 내부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비록 이 한 권의 책이 그분의 삶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다루었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알지 못했던 이희호 여사의 삶의 전반을 짚어볼 수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것은 아래의 이희호 여사의 소망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되리라.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고 높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한길을 걸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었으면 합니다."

 - p. 721 中에서 -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g*******7 2019.06.26. 신고 공감 13 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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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주의와 인권의 성장과 함께 해온 이희호 여사의 거룩한 발자취
"한국 민주주의와 인권의 성장과 함께 해온 이희호 여사의 거룩한 발자취" 내용보기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은 지난 6월 10일 향년 97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192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화여고와 이화여전을 거쳐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일본의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1962년 부산 피난 시절에 만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결혼해 민주화운동을 위한 동지의 길을 걷게 된다.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영부인이 됐으며, 대통령 사후인 2009년에는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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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은 지난 610일 향년 97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192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화여고와 이화여전을 거쳐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일본의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1962년 부산 피난 시절에 만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결혼해 민주화운동을 위한 동지의 길을 걷게 된다.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영부인이 됐으며, 대통령 사후인 2009년에는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으로 취임해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힘써 왔다.

 

1939년 세일러복에 단발머리를 한 이화고녀 4학년 때의 모습(맨 오른쪽이 이희호 여사)

 

이희호 여사는 모교 이화여대 부총장이자 와이연합회 회장이던 박마리아의 권유로 1959년 1월부터 대한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초대 총무를 맡아 1962년 5월 김대중과 결혼한 뒤 그해 12월 그만둘 때까지 꼬박 4년간 의욕적으로 활동했다.

 

1962년 5월10일 이희호는 정치인 김대중과 결혼했다. 결혼식은 조향록 목사(맨 뒷줄 신랑 신부 사이)의 주례로 서울 종로구 체부동에 있던 외삼촌 이원순의 저택에서 올렸다. 대청마루에서 혼례를 마친 뒤 정원에서 찍은 양가 가족 사진이 남아 있다. 앞줄 신랑 왼쪽에 앉은 이가 신부의 아버지 이용기, 신부 오른쪽에 앉은 이가 큰오빠 이강호다. 둘째 줄 맨 왼쪽에 선 이는 신랑의 비서 조길환, 그 옆 넥타이 맨 이가 신랑의 남동생 김대의이고, 맨 뒷줄 오른쪽 끝이 막내 동생 김대현이다.

 

이 평전은 20154월부터 201611월까지 한겨레를 통해 총 80회에 걸쳐 연재된 고난의 길, 신념의 길에서 오류를 바로잡고 몇몇 사항을 보완해서 펴낸 것이다. 여기에는 이희호 여사의 어린 시절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만남, 유신 암흑기, 청와대에서 보낸 시간, 동교동 시절로 나눠 일생을 소개하고 있다.

책은 모두 7730여 쪽 분량인데, 크게 세 파트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어린 시절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 민주화투쟁을 함께 하면서 유신 종말을 맞은 시기(1~3), 신군부의 반난과 광주 민주화 항쟁 그리고 광장의 시련을 다룬 시기(4~5), 이어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한 청와대의 시간, 47년 동역자를 먼저 보낸 뒤 홀로 평양에 다녀오기까지를 다룬 시기(6~7).

고인은 생전 한겨레와 가진 인터뷰에서 여성운동가·민주화운동가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책은 영부인이자 여성지식인, 사회운동가로 활약한 고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생생히 되새겨볼 수 있게 해준다.

 

1972년 10월 11일 도쿄 납치 후 생환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반기며 차를 나누고 있는 이희호 여사. "내 입에서는 그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1998년 2월 2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제15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희호 여사는 남편 김대중 전 대통령과 나란히 섰다. 여사는 청와대에 들어간 뒤 먼저 권위주의 문화를 청산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각하'라는 말 대신 '대통령님'으로 부르라고 했어요, 나도 '영부인' 대신 '여사'로 불러달라고 했지요."

 

2008년 11월 이희호 여사의 자서전 《동행 -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 출판기념회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있다. 당시 남편은 아내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평전을 집필하기 위해 2여 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한 고명섭 한겨레 논설위원은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희호 평전 집필은 내 삶의 예정된 시간표에는 들어 있지 않은 작업이었다. 우리 현대 정치사의 중심에 선 인물의 삶을 재현하는 일은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는 일이다. 그 일이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의 삶을 그리는 일이라면 괴로움은 두 배가 된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동반자요, 동역자요, 평생을 함께 한 정치적 동지였으니, 이희호를 기술하는 일은 김대중을 기술하는 일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두 사람의 삶은 너무나 많은 정치적 쟁론의 한복판을 가로질러왔다. 그러므로 그 삶을 뒤쫓는 일은 사나온 말들의 가시덤불을 헤쳐나가야 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722)

 

고인의 삶에서 1세대 여성운동가로서의 족적도 엿볼 수 있다. 대한여자청년단, 여성문제연구원, YWCA연합회,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 몸담으며 여성 운동의 초석을 다졌다. 이때 중요한 행보로는 가족법 개정 운동, 축첩 정치인 반대 운동, 혼인신고하기 운동 등이 있다.

 

 2019년 6월 11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희호 여사의 빈소 모습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성장과 함께 했던 고인의 삶은 신념을 지키기 위해 무수한 고난을 감수해야 했던 고난의 길이이었다. 그 모든 역경을 이겨 내온 고인의 삶은 내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단순히 한 정치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유력 여성운동가이며, 평생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헌신한 고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보는 또 다른 관점을 만날 수 있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YES마니아 : 로얄 h*******c 2019.07.14. 신고 공감 3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