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독거노인이 사망한 후 일주일이 지나서야 발견이 되었다. 군청으로 연락이 와 장례를 치러주게 되었는데 그 노인의 장판에서는 썩은 돈 3백만원이 나왔다. 장판에 돈을 숨겨 놓고 배고파 죽은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아프다기 보다는 노인이 돈을 악착같이 모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가슴이 아린다. 그래서인지 독거노인의 죽음과 맞물려 이 책을 읽으면서 자본주의라는 깊은 심연속에 잠기는 기분이 들었다 . '자본주의'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나 거대담론으로 파고들어간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자본주의와 거대담론으로서의 자본주의는 많은 차이를 느끼게 한다.그만큼 자본주의는 친숙하기 때문이다. 거대담론으로서 자본주의를 철학자 강신주는 욕망의 집어등으로 표현하였다. 수많은 욕망, 우리는 하루 중에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있다. 그것이 물건이든 , 사람이든, 어떤 것이든 '욕망'에 지배받고 있다. 그러나 그 욕망은 '나'를 위한 욕망일까? 아니면 '타자'를 향한 욕망일까?
『상처 받을 권리』에서 저자 강신주는 자본주의 체계를 해부하여 곳곳에 메스를 들이댄다. 자본주의 속에서 가짜가 아닌 진짜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화려한 페르소나를 약속하는 거짓된 인문학보다는 페르소나를 벗고 맨얼굴로 자신과 세계에 직면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인문 정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거짓된 인문학은 진통제를 주는 데 만족하지만, 참다운 인문학적 정신은 우리 삶에 메스를 들이대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친숙하고 평범한 삶을 낯설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적 삶은 너무나 친숙하고 평범해서 우리 삶이 얼마나 자본주의에 길들여 있고, 그로부터 상처받는지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다행이도 문학과 철학자들로 인해 자본주의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저자는 '행운'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적 삶’을 낯설게 보지 않고서는, 이 의식하기조차 두려운 상처를 치유하기란 난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상처 받을 권리』의 구성은 문학자 네 사람과 철학자 네 사람을 짝패로 하여 자본주의의 삶을 원초적으로 다가가게 한다. 이들의 삶과 문학과 철학에서 비롯된 '욕망'이라는 사유는 자본주의를 낯설게 바라보게 함으로써 우리의 내면속에서 '진짜'를 찾게 해 주는 성찰의 시간이 되기에는 충분하다.
(이상 vs 짐멜),(보들레르 vs 벤야민),(투르니에 vs 부르디외),(유하 vs 보드리야르) 이상은 최초로 '돈'의 논리를 찾은 문학자로서 짐멜은 화페경제의 모순점을 지적한 철학자로서 짝을 이루어 '돈'의 지배를 받게 된 무의식의 트라우마를 말한다. 화폐경제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 이루어졌던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와해시키고 , 오직 돈으로만 개인들이 서로 연결되도록 만들었다.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우리의 독립성과 자율성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에 산다는 것은 자본이 가져다주는 축복과 풍요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거기에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 중의 하나인 사랑마저도 왜곡할 힘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독거노인의 죽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노인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오면서 돈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돈을 가진 자가 우월하다는 생각을 하였기에 악착같이 돈을 모았을 것이다. 유년 시절에 겪었던 ' 경제적 트라우마'로 인해 자리잡은 '돈'이 절대적인 '힘'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체득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인된 경제적 트라우마, 경제적 공포로 인하여 돈에 집착하였으나, 그런 돈의 공포로 인하여 결국엔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돈에 자유롭지 못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심리적인 메커니즘은 쇼핑, 주식, 펀드, 재테크 ,도박 등 '돈'을 향한 욕망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리의 시인 보들레르는 19세기 파리를 매춘부와 같다고 묘사하였다. 마르크스 또한 자본주의 사회를 보편적 매춘의 시대라고 지적하였는데 이것은 성적으로 몸을 팔지 않았을 뿐 , 결국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돈을 벌 수 있는 자본주의의 현실을 말한 것이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 사회는 고통스러운 곳이기에 '종교'가 그들에게 현실의 고통을 덜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벤야민은 돈이라는 신에 대한 철저한 복종 , 그리고 신의 은총을 기다리는 소망과 기대 심리가 인간에게 존재하였기에 자본주의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된 것으로 본다. '매춘'은 자본주의의 논리를 통해 정당화되는 강간이라고 한다. 동시에 사랑에 대한 배신 행위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사랑을 아무리 자본의 논리로 포섭하려고 할지라도, 사랑은 자본의 한계를 돌파할 어떤 힘이 있다고 한다.
강신주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는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타인에 의해 길들여진 모습을 벗어야만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의 삶이란 연극에 불과하다는 통찰에 이른 철학자 에펙테토스는 "너는 작가의 의지에 의해서 결정된 인물인 연극배우라는 것을 기억하라." 라는 말을 남겼다.
결국 우리의 모든 욕망은 자아가 아닌 타자를 향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마주해야 한다. 자본주의에 의해 각인된 기존의 욕망들을 억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힘에 의해 철저히 상처받게 될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태어나면서 씌어지는 페르소나를 벗고 맨 얼굴인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의해 상처받고 있는 삶의 모습을 저자는 면밀하게 살피고 그 상처를 마주보게 하여 상처를 '진정한 상처'로 느끼게 한다. 자본주의하에 태어나 돈을 모으기만 한 채 죽어간 쓸쓸한 독거노인의 죽음이 그저 모르는 타인의 죽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우리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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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길들여져 살아가는 삶의 초라함을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저자는 자본주의 체제의 생존비밀을 '욕망의 집어등'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심해의 오징어들이 배에 달린 수많은 집어등의 치명적 유혹에 벗어나지 못해 달려들듯이, 우리도 산업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교묘하게 작동하고 있는 치명적 유혹의 불빛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화려한 옷의 마네킹을 비추는 쇼윈도 불빛, 자극적이고 섹시한 웨이브와 고혹적인 목소리를 발산하는 텔레비전의 불빛은 욕망에 이끌려 필요하지도 않는 물건을 구매하게 만들기 위한 자본주의 집어등이다. 우린 이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동의 현장으로 내몰리게 된다. 현대인의 삶을 요약해 본다면 집어등의 유혹, 타오르는 욕망, 자유로운 소비, 허무한 결핍, 인내로 가득 찬 노동, 다시 시작되는 집어등의 유혹이라는 악순환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린 이런 생활에 익숙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자유는 '소비의 자유'일 뿐이고 자본주의에서 얻는 기쁨이란 '자기 파괴적인 욕망의 충족'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욕망이라는 것도 진정한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나 사회 시스템에 의해 기대되는 타자의 욕망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우리의 삶을 낯설게 만들어 봄으로써 우리 삶의 민낯을 되돌아 보자는 것이 이 책의 의도한 목적이다.
삶을 낯설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시야가 필요하다. 저자는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의 욕망을 4명의 시인과 4명의 철학자의 직관과 이성을 통해 돌아보고 있다. 문학과 철학이라는 짝패를 통해 자본주의 삶이 보여주는 단면을 때론 이성적으로 때론 감성적으로 살펴본다. 먼저 이상과 게오르그 짐멜을 통해 자본주의와 돈의 문제를 살펴보고, 보들레르와 발터 벤야민을 통해 유행, 매춘, 도박과 같은 자본주의적 삶의 편린을 살핀다. 다음으로 미셀 투르니에와 부르디외를 통해 자본주의 내면을 심층적으로 돌아보고, 유하와 보들리야르를 통해 소비측면에서의 자본주의 유혹을 살펴본다.
결국 의식적 자기 돌아보기가 없다면 우리의 삶을 자본주의에 휘둘려 상처받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욕망의 본질을 돌아보면서 스스로 절제해 나가는 용기와 실천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민낯을 돌아보는 것은 그런 상처의 뿌리를 보고 주체적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결의를 다지고 자신을 되찾는 진정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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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철학이 필요한 시간]과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이란 책으로 저자를 만났다. 그리고 그에게 푹 빠졌다. 대학교에서 자연과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인문학 서적을 읽는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큰 즐거움이다. 그러면서 삶에 대해 생각해보고, 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이 어쩌면 내면 속의 알지 못하는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한 과정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책을 읽고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매번 마음속에 남는 커다란 빚이지만, 그래도 그 빚을 조금씩이라도 갚기 위해 난 또 책을 펼쳐 든다. 친숙하다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에 길들어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친숙하다는 것이 항상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저자는, 삶은 우리 뜻과는 달리 항상 낯설어지는 과정에 있는 것 이라고 한다. 따라서 미리 낯설어지는 경험은 우리에게 삶에 대한 지혜를 제공할 수 있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이 세계는 자본주의 사회이다. 너무나 친숙해서 잊고 지내는 자본주의 체계의 생존 비밀은 욕망의 집어등이라고 한다. 집어등의 불빛을 보고 몰려드는 오징어 떼들처럼, 우리 또한 집어등에 걸려 허우적거릴 때마다 주머니는 소리 없이 비워지고, 우리는 끊임없이 다시 노동의 현장으로 내몰리고 있다. 즉,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길들이고 자극하여 끝없이 상품을 소비하게 하고, 그 결과 노동으로 얻은 화폐는 소비되고, 또 다시 우리는 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평범하고 친숙한 우리의 모습이다. 그래서 저자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불편한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자본주의 체제에 연루되어 있는 우리의 내면세계를 탐색하고자 한다. 자본주의로 인해 상처 받고 분열되어 있는 내면세계를 보듬고, 치유할 수 있는 희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 그러기 위해서 저자는 네 사람의 문학자와 네 사람의 철학자가 펼치는 직관과 이성을 가지고서 친숙한 우리의 삶을 조금은 낯설게 성찰할 수 있도록 해준다. 20세기 초, 모던보이를 꿈꾸던 이상과 게오르그 짐멜, 보들레르와 발터 벤야민, 미셸 투르니에와 부르디외, 그리고 압구정동의 유하와 보드리야르가 바로 그들이다. 자본주의는 우리 본성에 저절로 맞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게 배워야 하는 경제규칙이다. 이런 자본주의는 근대에 들어 상업자본주의가 산업자본주의로 전환되면서 본격적으로 우리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기 시작했다. 산업자본주의는 화폐경제의 도입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이는 인간과 사물 사이의 관계를 소유관계에서 매개된 관계로 만들어 버렸다.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가 와해된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인간을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관계로 격상시켰지만, 돈만이 나와 타인 혹은 나와 사물을 연결시켜주는 유일한 매개물이 되어 버렸다. 그러기에 돈이 없으면 독립성과 자율성은 하루 아침에 사라진다고 짐멜은 보았다. 또 산업자본주의는 대도시라는 공간적 배경 속에서 발달되어 왔다.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시골사람들은 주변세계와 유기적인 일체를 구성하며 삶을 영위한다. 그러나 지적인 도시인들은 주변세계와 얼마간의 냉담한 거리를 두게 된다. 이것은 자유라는 감정의 기초가 되면서, 동시에 그들을 고독에 빠지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대도시와 화폐경제는 산업자본주의의 쌍둥이라 볼 수 있다. 평범한 우리는 화폐에 대한 물신숭배를 부정하지만, 행동으로는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화폐에 대한 물신숭배를 수행하고 있다. 그러기에 짐멜은 대도시에서 개인들이 자유와 평등을 가진다는 것은 소비자로써 행동할 때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즉,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은폐할 때만 가능했던 것이다. 이상 또한 자신의 모더니즘을 찾기 위해 경성에서 동경으로 방황하였지만, 그의 모더니즘은 문학에서만 존재했을 뿐, 삶에서는 제스처로써만 존재했다. [날개]에서 주인공에게는 돈이 바로 인공의 날개였다. 그러나 노동을 하지 않는다면 인공의 날개가 돋아날 가능성은 없다. 그저 불가능한 날개가 돋기를 꿈꾸며 절규하고 있을 뿐이다. 이상이 경성에서 모더니즘의 원조를 찾는다고 동경을 향해 떠났지만, 동경 또한 모방도시에 불과했다. 19세기 산업자본주의가 세계로 확장될 때, 모든 도시의 원형으로 자리잡은 도시는 프랑스 파리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해시시에 잔뜩 취한 보들레르를 만난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잉여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고, 광적으로 신상품을 찾는 산업자본주의가 인간의 내면에 남긴 원형적 트라우마를 확인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는 상품에 대한 존재론적 우월성을 갖는다. 또한 화폐는 미래라는 시간과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가능하게 해주는 힘을 갖는다. 자신을 팔아야 돈을 마련할 수 있는 노동자들은, 그러나 그들이 받는 임금은 미래를 꿈꾸기에 턱없이 부족했고, 따라서 도박에 대한 욕구가 발생하는 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욕망의 충족을 뒤로 미룰 때, 그것을 갈망하는 인간의 의지는 더욱 강화되며, 그러한 우리의 욕망구조를 가장 잘 포착한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산업자본주의의 시선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벤야민의 도박, 매춘, 유행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억압 받는 사람들에게 역사는 진보한적이 없었음을 깨닫는다. 지금은 힘들지만 나중에는 결국 해결된다고 보는 진보에 대한 맹신은,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억압적 상태를 도리어 은폐시킨다고 그는 보았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차이에 대한 개념을 철학적으로 정의한바 있다. 그전에는 차이란 동일성이란 개념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인식하였으나, 들뢰즈는 동일성이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효과로 파악했다고 한다. 차이란 타자와의 마주침으로써 경험되는 것이라는 얘기다. 이것은 투르니에가 다니엘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패러디 한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우리에게 던지는 인간 내면의 무의식구조와 맥을 같이 하며, 브르디외가 말하는 아비투스와도 일맥상통한다. 브르디외는 전자본주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과 자본주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내면세계의 간극을 미래와 관련된 시간의식 속에서 찾았다. 전자본주의 사람들은 미래를 잠재적으로 올 것으로만 이해했던 반면, 자본주의 사람들은 가능성의 장으로서 파악하고 있다. 잠재적으로 올 것이란 사계절과 같이 무한한 순환으로써 표상되지만, 가능성이란 어떤 일이 일어날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화폐경제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허영과 욕망은 싹트게 되며, 산업자본주의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산업자본주의는 광고를 통하여 끊임없이 우리가 가진 낡은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것을 구매하도록 유혹한다. 광고에서 소개되는 새로운 상품은 기능상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에로틱함, 새로움, 행복함이란 기호가치를 강하게 부여된다. 이것은 타인으로부터 주목과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과 허영의 감정이 있기 때문에 작동된다. 그러기에 보드리야르는 산업자본주의 발달의 핵심이 기술 개발에 따른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이 아니라, 인간의 허영과 욕망을 부추기는 유혹적인 소비사회의 논리에 있다고 보았다. 보드리야르의 통찰 역시 벤야민이나 부르디외의 통찰과 그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다. 산업자본주의가 열어놓은 소비사회는 인간에게 자유와 평등을 실현시켜 주었다. 비록 소비의 자유이면서, 욕망의 평등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돈이 없다면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 한 것이었다. 상품에게는 주인이 될 수 있지만, 돈에게는 노예가 되는 삶, 그러한 우리들의 삶은 분열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소비의 자유라는 치명적 상처를 안겨준 셈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처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니 그러한 상처가 우리의 내면세계에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인문학은 이러한 상처를 치유해주는 학문이라고 한다. 자본주의를 경제적인 차원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관련하여 파고 든 이유이기도 하다. 소비사회의 욕망의 집어등에 걸려 상처받고 병들어 온 우리에게, 저자는 인간 내면 속의 욕망을 제대로 이해하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다면 지금의 고통도 견뎌볼 만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사람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만큼 최소한의 생계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들의 문제와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를 직시할 여유가 생긴다. 우리가 인간답게 살수 있는 보편적 복지를 요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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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가 이렇게 답답하고 한심하게 느껴진적 없고... 거의 주저 앉아서 울고 싶은 심정이다.
내 생애, 지난 35년간 자본주의에 의하여 철저히 농락(?)당하고 강간(?)당했었다니.
책을 읽는 종종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었다. 이건 홍차맛과 더불어 떠오르는 아련한 순간이 아니라... 신용카드를 들고, 마음 껏 신나게 긁어대던 모습과 직장인의 비애를 온몸으로 느끼겨 절규하던 순간이 오버랩되면서...
씨팔, 나는 정말 바보처럼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거기에 더 답답했던 이유는, 나 혼자 뭘 어떻게 한다고 변화되지는 않는다는 것이였으나...이렇게나마 자본주의의 시퍼런 난도질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음에 얼마나 감사했던지.
그렇다고...돈을 쓰지 않는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이민을 간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니...그저 답답할 지경일뿐.T.T
4개로 구성된 챕터에 이상,보들레르,트루니에를 인용한 글이다. 특히, 트루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원래 눈여겨 보던 작품이였는데,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전반적으로 지루하지 않게 읽었는데...
문학작품이 주는 것과 다르게, 또 이런 책들이 주는 묘미가 있다. 올해 읽는 인문사회 도서 중에서는 최고 최고 최고 짱짱짱짱~ 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다짐해 본다. 이젠...자본주의고 나발이고... 그냥 무식하게 난도질 당하고 있지는 않겠다고. 그래서, 농락 당하지 않고, 유린 당하지 않고...내가 주도하는, 깨어있는 삶을 살아보겠다고.
- 전자본주의 시대든 자본주의 시대든 인간에게는 특이한 허영심, 즉 구별짓기(distiction)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짐멜이 대 도시의 삶에서 보았던 '질적 개인주의'는 타인으로 부터 자신을 구별지으려는 인간의 허영심과 그것을 이용한 산업자본주의 소비사회의 논리가 결합된 현상인 셈입니다. (99페이지 언저리)
-백화점은 자본주의적 욕망을 훈련하는 공간임. 자신이 주목받는다는 도취감, 그리고 주목받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의지가 암묵적으로 교차하는 공간. 필요에 의해서 구입하기 보다는 부유함과 허영을 과시하기 위함. (134페이지부터)
-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기 보다 오히려 탐용스럽고 잔인할 뿐만 아니라 질투심으로가득 찬 허영의 존재에 더 가깝습니다.
1st. 패션은 상류상회로부터 기원합니다. 2nd. 패션은 중간 계급이 상류사회의 패션을 모방하자마자 곧바로 소멸됩니다. 3rd. 중간 계급에게 패션은 어쩔수 없이 따라야 하는 폭군적인 성격 (138쪽,139쪽)
-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보편적 매춘의 시대라고 지적했다. 성적으로 몸을 팔지 않았을 뿐, 결국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야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167쪽 가운데)
- 전자본주의 : 미래는 잠재적인 올 것 자본주의 :미래는 가능성의 장
비교하여...
종교적인 측면에서, 내세 때문에...현실에서 항상 금욕하고 긴장하고 살아야한다는 스트레스를 준다.
- 미래 현실주의적인 전망은 실제로 현재에 직면할 수단을 지닌 사람들에게나 가능하고, 요즘처럼..비정규직, 설실업자 ,노숙자는...그런 여유자체가 없다.(244쪽)
- 하지만, 로빈슨은 알아버렸습니다. 삶은 놀이의 주체지이 노동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 나아가 오직 현재만이 긍정의 대상이라는 것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읽어 볼 것
- 돈이 없으면 우울하고, 돈이 있으면 명랑해진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산업자본이 우리의 욕망을 길들이는데 성공했다는 분명한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350쪽)
기타 등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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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여년 전 쓰여진 장자에는 글을 글 그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글 속에 숨겨진 진의를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얼마전 우리나라를 방문해 강연한 슬라보예 지젝은 농담섞인 이야기로 자본주의를 풀어나갔다. 한 남자가 여자와 데이트를 하고 여자의 집 앞에 데려다 줬는 데 여자가 커피 한 잔 하고 가라고 한다. 남자가 자신은 커피를 마시지 않는 다고 하자 여자는 우리집에도 커피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지젝은 이야기를 하면서 이 여자가 커피를 마시고 가라고 한 것이 정말 커피를 마시고 가라고 한 것이었냐고 묻는다. 이어 자본주의도 이것과 같다고 했다. 묻는 것과 속 뜻이 다른 데 많은 사람들이 알아채고 있지 못한다고 이야기 했다. 2000년이 지났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진의가 무엇인지를 고민한다.
이 책은 인상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한 여성이 보너스를 두둑히 받고 몇 달 동안 바라만 보던 백화점 명품관에 있는 핸드백과 구두를 산다. 손에든 핸드백과 구두를 보고 날아갈 듯한 기분을 느끼지만 이내 마음 한 구석에 허전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런 저런 계산을 해보고 꼭 샀어야 할 것이라며 자위하고 백화점을 나선다. 이 이야기로 자신의 욕망과 타자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 하는 데 이 자신과 타자의 욕망은 이 책 전반적으로 흐르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책의 주요한 테마이다. 자신과 타자. 이것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동물로 태어나서 숙명적으로 겪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 하지만 볼 수 없다. 세상에는 정확하게 수평으로 걸려있는 거울은 없으며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은 언제나 약간의 왜곡이 있기 마련이다. 거울이 이럴 진데 카메라나 물에 비친 자신 같이 다른 것을 통해 보는 자신의 모습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정말 볼 수 없는 것인가? 이 책은 무의식, 내면, 도시, 돈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상과 짐멜을 비교하고 보들레르와 벤야민을 비교하며 투르니에와 부르디외를 비교한다. 마지막으로는 유하와 보드리야르를 비교한다. 비교한다는 표현보다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엮어나간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 같다.
나와 타자의 관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연결되어 있고 달라진 그리고 달라지고 있는 가치관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 각각의 주체로서 연결되어 있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삶에서 우리는 각각 어떻게 살아야 주체적이고 진정한 나로써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보고 장점과 단점을 찾아내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남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만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 이라 생각한다. 힘듦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찾아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은 많은 페이지에 많은 이야기로 우리에게 좀 더 잘 사는 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모래위에 손가락으로 쓴 글씨같이 순식간에 없어지는 교훈들이 아니라 수 천년이 지나도 깊숙히 남아있는 돌에 깊숙히 새긴 글씨같이 깊은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사람, 돈 , 휘황찬란한 도시에 이르기 까지 현대사회에서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글감을 통해서 우리에게 좀 더 행복하게 잘 살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진정한 나를 찾아서 나를 보고 지금의 불안과 불행을 떨쳐버리고 안락함과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을 읽고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야한다면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우리는 다른 것에 앞서 우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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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네의 건초더미 연작이다. 같은 장소에서 건초더미를 시간의 변화에 따라 보이는 것을 모네가 그린 것이다. 진짜 건초더미는 어떤 것일까? 진짜 건초더미라는 것은 있기는 한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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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강신주님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언제나 철학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던 것 같다. 철학이라는 것은 무겁고 읽기 어렵고 읽고 나서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라 말랑한 책들을 읽으려고 해도 결국 다시 철학책을 찾게되고 손에 잡게 되더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안에 있는 사고방식 구조가 근본과 본질을 찾아 사유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동안 여러 철학자들을 들락날락 거리다가(그야말로 들락날락) 현실과 격리되지 않고 삶과 괴리가 없는 철학, 즉 삶에서도 충분히 그 효용이 입증되는 철학, 삶의 문제는 건드려주고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철학을 찾다가 강신주라는 이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철학은 사변이나 학에 매몰되지 않고 언제나 현실에서 출발해 철학을 통해 다시 삶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삶과 철학은 열매와 뿌리의 관계가 된다. 굳이 분류하여 말하자면 실천철학이라고 할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렇게 분류할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고대로부터 내려온 철학은 철학의 시작이 되는 이성과 현실을 지나치게 이분화하는 대당구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철학의 무력함을 철학은 세상을 해석할 뿐 변혁시키지 못한다라고 표현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는 강신주라는 이름에서 현실과 삶, 그리고 철학의 유기적인 융합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안에서는 삶과 사유가 따로 놀지 않고, 현실과 이론이 따로놀지 않았다. 그의 해석을 거치면 삶은 철학을 통해 극복되는 시선을 얻게되고 철학은 삶을 통해 그 정당성을 얻게되었다. 아무리 어려운 이론도 그의 설명을 거치면 다 이해가 되었다.
그동안 읽어온 강신주님의 책 중에 <상처받지 않을 권리>는 그의 철학자로서의 면모를 가장 유감없이 발휘해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라는 거대담론과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의 관계를 8명의 문학가와 철학자를 2명씩 4개로 분류하여 설명하므로써 무지의 구름속에서 가려져 있는 자본주의라는 망령의 실체를 명확히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것 뿐 만아니라 개인의 영혼을 옥죄이는 자본주의의 구조나 자본의 욕망을 거부하게 끔하는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격려해 주었다. 너무나 익숙하고 가까워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자본주의의 틀안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개개인의 욕망을 구조의 틀에서 보지 못하고 언제나 개인의 능력으로만 보았던 자신의 무지를 철저히 깨닫게 해주었다. 자본의 환각과 마수를 조금이나마 깨달았을 때 이 거대한 자본의 구조앞에 철저하게 무기력한 개인을 발견함과 동시에 함께 걸어가야할 사람들의 연대가 얼마나 절실한지 또한 느끼게 되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강신주의 이 책이 다른 자본주의에 대한 채들과 구별되는 것은 다른 책들은 주로 정치와 경제와 관점에서 자본주의에 대해서 풀었다면 이 책은 자본주의의 환경이 인간의 내면에 미치는 영향을 풀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주는 상처에 대한 관점으로 풀었다. 그래서 이 책은 독창적이고 매우 실제적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 <상처받지 않을 권리>는 언듯보면 인간이 주는 상처를 말하며 심리학에 대한 내용인 것 같지만, 사회구조가 주는 상처는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지만 가장 미묘하고 깊게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자본주의에 대한 내용이다. 어두컴컴한 자본주의의 터널을 지나가는 우리에게 조금의 희망을 주는 것은 가장 마지막 부분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에서 제안했던 자본주의 대안 공동체 NAM(new Associationist Movement)을 소개하므로 그것을 극복하는 실천적 방안까지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그의 책 <역사의 종말>에서 자본주의가 역사의 궁극적 종착점이 될 것이라고 했는지만 강신주는 자본주의는 극복될 것이고 새로운 사회구조가 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모종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바로 가장 마지막에 던져주는 이 실마리가 강력한 실천철학적 결론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짝은 이상과 게오르그 짐멜이다. 이 두사람을 통해 우리 삶이 자본주의와 도시로부터 얼마나 영향을 많이 받는지 확인할 수 있다. 짐멜에 의하면 돈이란 바로 현재의 신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이 가진 초월성과 포괄성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 바로 자본주의하에서 생겨난 돈이라는 것이다. 이 돈은 현세의 인간에서 모종의 종교적 안정을 주는 것으로써 돈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것을 교환할 수 있는 전능한 물건을 소유하고 잇는 것이기에 인격과 삶이 자본에 매몰되며 돈이 없을때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돈을 소유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짐멜은 돈의 물신적 성격을 통해 현대인들을 정신과 삶을 매어버린다고 말한다. 이상은 그가 살던 당시 경성이라는 도시를 통해서 이러한 자본주의가 시작된 도시라는 공간속에서 어떻게 인간의 내면이 구성되어져 가는지를 그의 소설 <날개>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짝은 보들레르와 발터 벤야민이다. 두 사람의 도움으로 유행, 매춘 그리고 도박과 같은 자본주의적 삶의 다양한 편린들을 곰곰이 생각해볼 수 있다.(p.23) 발터 벤야민은 서양 최초의 자본주의적 대도시라 할 수 있는 파리를 철저히 함으로써 근대 자본주의의 처음 풍경을 그려주고 있다. 그 당시 파리는 세계의 수도이자 모더니티의 수도를 대표하는 것이였다. 벤야민은 세계의 수도이자 모더니티의 수도인 파리에 대한 풍경에 대한 자료를 철저히 모아서 <파리의 아케이드>라는 책을 펴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자본주의와 도시의 구조 그리고 그 속에 거주하는 도시인들의 삶 사이의 밀접한 연관관계를 파헤쳤다. 보들레르는 그 당시 자본주의의 도시 파리가 주는 향략과 매춘에 빠져 살면서 황페해가는 자신의 내면을 여러 가지의 시로써 남겼다. 두사람의 문학과 철학 자료는 도시속에 나타난 자본주의의 모습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주고 그에 대한 인간의 내면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잘 보여주었다.
세 번째 짝은 미셀 투르니에와 부르디외이다. 두 사람의 성찰로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가면서 얻는, 아니 정확히 말해서 자본주의로 각인된 우리의 내면세계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p.23) 부르디외는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놓은 돈, 물건, 패션을 통해서 인간은 그것을 소유하고 소비함로써 타인들과 구별짓기를 시도하려는 인간의 허영과 욕망을 폭로했다. 결국 부르디외는 자신의 연구르 통해서 자본주의적 생산물은 단지 인간의 더러운 욕심을 드러내는 도구일 뿐이라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네 번째 짝은 유하와 보드리야르이다. 두 사람을 통해 소비사회의 유혹적 논리와 아울러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다시 한 번 숙고해볼 수 있다.(p.23) 보드리야라는 그의 주저이자 명저가 된 <소비의 사회>를 통해서 자본주의는 생산이 아니라 소비를 통해서 작동 유지되며 그렇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소비욕망을 부추겨 소비하게 끔하는 자본주의의 욕망을 폭로했습다. 그리고 소비자인 동시에 노동자인 자들이 아무런 댓가없이 선물을 증여하므로 자본주의의 마수의 손길을 끊을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였다. 보드리야르의 이 통찰은 철학에서 윤리로 넘어가는 길목으로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였다. 결국 인간이 자본주의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으로 보드리야르와 가라타니 고진에서 찾았는데 보드리야르의 증여로써의 행위와 가라타니 고진의 소비자들의 단합하여 생산-소비조합을 통해서 직접 물건을 생산하는 공동체를 통해서 인간 욕망을 부추기고 추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마수에서 벗어나 참된 인간의 길을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서 가장 압권이 바로 이 부분이다. 비록 실현하여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크지 않지만 이러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것만으로도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볼때 이 책은 강신주가 쓴 책중에서 철학적 깊이와 현실적 적용이 가장 뛰어난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철학의 기능은 이래야 하지 않을까. 이성과 현실이라는 대당구조로 철학을 현실에서 분리시켰던 오랜 서양전통의 철학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현실에 개입하여 현실을 해석할 뿐 아니라 변혁시키는 것이 철학의 참된 기능이 아닐까 한다. 조금은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칼 마르크스가 소망했던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시키는 철학이 바로 이러한 기능이 아닐까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상처받지 않을 권리>는 지금까지 내가 본 책중에서 철학의 위치를 가장 제대로 정위치 시켜놓은 책인 것 같다. 자본주의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한번쯤 꼭 읽어보고 함께 고민해봐야 할 시대의 화두를 던져주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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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체와 정신들이 끊임없이 상처받는 지금의 이 세계, 그 가해자의 속성이란 무엇인가? 가해자인 그것의 본성과 기원을 찾고, 또한 가해자가 이용하는 우리들의 약점과 그 결과적 현상을 사회학자들, 철학자들, 시인 등 예술가들의 역작들과 비평을 통해 분석하고 진단하고 있다. 가해자란 화폐자본주의이며, 산업자본주의이고 소비자본주의 이다. 즉 세상의 모든 가치들을 포획한 자본주의 체제와 그 포획된 영역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종속되어 허덕이고 상처받는 우리 사람들의 얘기를 들려주며, 궁극에는 어떻게 이 지독한 체제를 극복하고 상처받지 않는 세상을 실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보는 장이라 하겠다. 저자는 무엇보다 먼저 이러한 자본주의가 언제 어디서 어떠한 형태로 발생하여 세계를 점령하고 새로운 종교적 지위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추적하는데, 그것은 소위 모더니티(modernity), 근대화라는 표현으로 우리에게 이해된 것의 내면이라는 관점에서 시작된다. 우리에게는 20세기 초 서구 근대화, 산업사회로 우리보다 앞서 접어든 일본을 통해 식민지 수탈체제에 실려 경성에 들어왔으며, 서구의 경우에는 19세기 초 프랑스 파리가 모더니티, 즉 자본주의의 출발지라고 보고 있다. 당시의 사회현상들과 사람들의 모습 등 시대상을 묘사하고 그 현상에 내재한 가치들을 성찰하는 과정은 감칠맛 나는 문예비평이며, 일종의 문서고(文書庫)들이 외부성과 연결되어 만들어낸 한 시기를 총합하는 인식론적 형상들이나 형식화된 체계들을 규명하는 고고학적 방법론으로 다양하고 풍부한 석학들의 명 저술들의 해설의 형태를 띠고 있다. 20세기 모던보이를 자처했던‘이상’의 소설 『날개』와 사회학자‘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현상들에 대한 저술들을 통해 화폐(돈)가 사람들의 가치관, 물질관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추적한다.
이렇듯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인간의 내적 양태의 변화, 도시화와 같은 공간적 변모, 산업자본의 생리를 다양한 관점들에서 탐사해 나간다. 시선을 자본주의, 모더니티의 발원지인 파리로 돌리면 우리의 ‘이상(李箱)’에 대입되는 인물로서‘보들레르’를 얘기하게 되며, 자본주의의 시작을 19세기 파리에서 찾았던 사상가‘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향하게 한다. 사창가와 도박, 매일매일 새로운 상품이 현란하게 진열되는 아케이드는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유혹해대고, 그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돈의 위력은 견고해 진다. 여기서 보들레르라는 모더니티의 신경증을 앓던 인물의 욕구와 욕망의 구분을 통해 돈이 자본주의의 숨겨진 종교로서 탄생하는 그 비극성을 보여주고, 인간으로부터 사랑조차 불가능하게 하는 자본주의의 가공할 폭력성을 목격하게 한다. 한편 자본주의하면 대개의 사람들이 떠올릴 수 있는 키워드들이 있다. 바로 우리들이 사는 곳에서 감관(感觀)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패션과 떨어질 수 없는 유행이란 단어나, 신상품, 그리고 이를 사고파는 매개 수단인 돈, 그리고 과시의 욕망과 이로부터의 출현하는 계층의 구별, 등등 소비자본주의사회의 여러 모습들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유행은 누가 만들어내는 것일까? 산업자본이 잉여자본을 만들기 위해 주도한다. 역시 새로운 상품이란 것도 기존의 것을 가능한 빠른 시간에 낡은 것으로 인식시켜 보다 거대한 잉여자본을 획득하기 위한 자본가들이 발견한 자본주의논리이다. 인간의 치명적 약점인 허영심을 재빠르게 이해한 산업자본가들의 전략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인간의 약점을 꿰뚫어 본 사회학자가‘부르디외’이다. 그의 명저인 『자본주의의 아비투스』와『구별짓기』는 경제적 자본이 넉넉히 있다는 걸 외적으로 과시하려는 행위, 즉 상류층이 자신들을 타 계층과 구별 짓고자하는 의지로서 문화적 자본 등으로 대표되는 폭력적 현상이다. 이들 산업자본가들과 상류층이 하는 구별짓기의 작동원리를 보면 그것은 단지 돈의 축재를 통해 후천적으로 획득된 취향의 문제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하류층, 중류층에게는 도달하고자하는 욕망을 부추긴다. 실은 껍데기이고 부질없는 것임에도 소비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소비의 논리는 모든 인간들을 이 대열에 서게 한다. 그래서 현재의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재화를 미래를 위해 희생하는 고통을 감수한다. 마치 기독교가 말하는 내세라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와 닮아있다. 자본주의가 곧 기독교를 대체하는 인류의 유일종교가 되었다는 논리이기도 하다. 이와 유사한 소비적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폭력성과 폐해, 인간의 고귀한 가치들의 파괴성을 통찰한 석학들이 있다. ‘좀바르트’와 ‘보드리야르’가 그들인데, 허영을 부추겨 소비를 촉진하려는 산업자본의 음모와 소비자가 노동자이기도하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교활한 전략들을 간파했는가하면, 상품을 사용가치가 아닌 관념적 가치, 예로서 세탁기를 행복과 에로틱함, 새로움, 위세와 같은 가치로 받아들이도록 끊임없이 유혹하는 소비의 논리를 들추어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 저술은 오늘의 자본주의가 지니고 있는 은폐된 속성들을 다양하고 풍부한 지적 성찰들의 예시와 분석, 해설을 기반으로 그 도사린 문제점을 보다 쉽게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냄으로써 우리 세대는 아닐지언정 우리들의 후손들이 더는 상처받고 사는 고통의 세상이 아닌 자기존중과 평온과 행복을 누리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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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말솜씨다.(글솜씨라고 하지 않고 말솜씨라고 하고 싶다. 마치 작가가 쉼없이 말하고 있는 것을 듣고 있는 기분이었으니까.)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이미 상처받고 살고 있으면서 상처받았는지도 모르고 있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충격 같은 내용이었다. '내가 이 사회 속에서 이런 모습으로, 이런 심정으로, 이런 아픔을 겪으며 살고 있는 것이라고? 내가 몰라서 서글프고 서러웠던 경험들은 내 능력과 내 배경이 부족했던 탓에 생긴 것만은 아니었다고?'
내가 왜 백화점을 그리워하다가도 막상 백화점에 가면 쇼핑에 대한 의욕을 깡그리 잃게 되는지 그 이유도 알게 되었다. 그게 나의 '아비투스'였던 것이다. 도시 문명을 그리워하는 것도, 도시 문명에 질리는 것도, 도시 문명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도 모두 다.
자본주의 혹은 '돈'은 정말 무서운 힘을 가진 것이다. 글쎄, 내가 살아있는 동안 자본주의를 대신할 어떤 이념 체계가 생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이념에 지금보다 더 이상 속지 않거나 더 이상 매달리지 않을 정도로만 깨닫더라도 우리 삶은 훨씬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책 속에서 언급하는 문학 작품들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은 나를 민망하게 했다. 학생들과 수업을 할 때 고려해야 할 문제가 이토록 절실하게 담겨 있었다니. 가볍게 스치고 만 내 자질이 부끄럽다.
새해 첫 리뷰로 이 책을 선택한 내가 자랑스럽다. 이 책은 그런 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이 책을 읽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내 이 마음, 이 또한 자본주의의 속성에 갇힌 내 아비투스의 한 단면이며, 읽지 않은 사람들과의 <구별짓기>를 통해 우월감을 느껴보고 싶은 내 욕망의 일부일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으니까, 자랑하고 싶어서 떠벌이는 나를 내가 이해할 수 있으니까.
세상이 조금 전과 달라보인다. 기분이 좋다.
<바욜님 덕분에 읽은 책> - 흔적을 남겨 두고 칭찬 얻어야지.(이 역시 내 속의 아비투스란 말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