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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의 「전원교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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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 소녀를 사랑하게된 중년의 목사. 그는 자신의 사랑이 동정에 기인한 인류애적 사랑인지, 아니면 한 여인에 대한 애틋한 감정인지를 스스로도 분명하게 인지하지 못한 채 그녀에게 빠져든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지극한 정성으로 세상을 보게 된 소녀 제르트뤼드. 그녀 역시 맹인으로 어둠과 침묵 속에 침잠되어 있던 자신에게 세상의 모습을 하나 둘 아름답게 묘사해주고 자신을 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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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 소녀를 사랑하게된 중년의 목사. 그는 자신의 사랑이 동정에 기인한 인류애적 사랑인지, 아니면 한 여인에 대한 애틋한 감정인지를 스스로도 분명하게 인지하지 못한 채 그녀에게 빠져든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지극한 정성으로 세상을 보게 된 소녀 제르트뤼드. 그녀 역시 맹인으로 어둠과 침묵 속에 침잠되어 있던 자신에게 세상의 모습을 하나 둘 아름답게 묘사해주고 자신을 넓은 세상으로 이끌어준 목사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껴왔지만, 마침내 눈을 뜨게 되어 목사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그가 자신이 어둠 속에서 상상해왔던 인물이 아닌 너무도 낮설고 초라한 중년의 늙은이일 뿐임을 깨닫고 실의에 빠진다. 

 

그녀는 어둠속에서 상상해온 목사의 모습이 바로 자신이 앞을 못보던 시절 차가운 거리감을 가지고 대하던 목사의 아들 자크의 모습이었음을 깨닫지만, 자크는 이미 아버지인 목사와 연정을 품었던 제르트뤼드에 의해 충분한 상처를 받고 자신의 영혼을 가까스로 추스려 수도사가 되는 길을 택한 후였다. 그녀가 수술을 통해 앞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 기쁨 보다는 오히려 불안감을 느끼게되는 목사, 눈을 뜨고 난 후, 예전과는 다른 표정으로 어색하게 목사를 대하는 제르트뤼드..  결국 '당신은 내가 어둠 속에서 사랑했던 그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은 당신의 아들 자크의 모습이었다' 라는 고백과 함께 깨어진 환상, 이미 이을 수 없어진 자크와의 사랑에 절망하며 제르트뤼드는 자살을 택한다. 맹인이었을 때는 한없는 자비심과 이해력, 그리고 지순한 사랑을 품었던 그녀가 눈을 뜨고 난 후 왜 그렇게도 변한 것일까..?

 

목사가 품은 그녀에대한 사랑의 도덕성 문제는 사실 이 작품에서 그리 중요한 테마는 아니다. 수기를 통해 목사가 직접 밝혔듯이 그 사랑의 시작과 전개 어느 부분에서도 목사는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저 불쌍한 한 소녀의 신세를 처량하게 느껴 하느님과 자신의 뜻을 일치시켜 동정의 손길을 보낸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름조차 없고, 벙어리 할머니와 단 둘이 자란 탓에 앞을 볼 수 없는 것은 물론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슬픈 짐승'이었던 그녀에게 목사가 보여준 온정은 인간적으로 당연한 것이었다.

 

그녀 제르트뤼드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을 세상으로 이끈 유일한 손길인 목사에게 애착관계를 형성하게되는 반응은 당연하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또 지혜로왔기으므로, 놀라운 발전을 보이며 한 여인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을 바라보는 목사의 경이감에 그녀의 애정표현이  - 그것이 남녀간의 사랑이건, 은인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건 그건 중요치 않다. 결국 그것의 표출이 어떤 식이던 그 표출을 일으킨 더 근원적인 감정의 동인은 결국 같은 것이기에 - 더해져 둘 사이의 감정은 예사로운 수준을 넘어서게 된다. 수기 또는 일기 형태로 진행되는 이 작품에서 화자인 목사의 비교적 차분한 논조의 상념들을 따라가다보면 둘 사이에 진행되는 친애적 관계에서 도덕적 흠결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목사 스스로가 당시엔 미처 알 지 못한 것으로 표현되는 - 그러나 그의 아내와 아들 등은 모두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으며, 독자도 충분히 그런 느낌을 전달받을 수 있는 - 자칫 위험한 감정이 드러나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그것은 아들 지크가 그녀 제르트뤼드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것에 대해 강한 반발감을 보이며 아들을 설득하고, 결국 그가 여행을 떠나도록 종용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독자는 약간의 이물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그 동안 보여주던 목사의 독백 이면에 숨은 목사가 미처 수기로도 써내지 못한(자신은 자각조차 못했다고 고백하지만 그건.. 사실 그다지 신뢰가 안가는 고백이다) 감정이 급격한 물살을 타고 표출되기 때문이다. 잔잔한 바다에 갑자기 일어난 큰 파도같은 느낌의 이 전환은 사실 이야기의 클라이막스에서 전개되는 목사와 제르트뤼드의 표면적 갈등보다 더 큰 긴장감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이 작품을 읽어가다 보면 그것이 비록 맹인의 경우에 한하는 문제가 아닌, 많은 이들의 사랑과 그 확인에 관한 이야기라는 느낌이 든다. 이 작품에서는 제르트뤼드가 눈을 뜨게 된 후, 목사의 기대이상 늙고 초라한 외모와 자크의 젊고 아름다운 모습에서 '눈먼 사랑' 속에서 싹튼 자신의 감정이 자신만의 상상이 만들어낸 실체가 없는 헛된 것이었음을 깨닫는 형식을 빌지만, 사실 세상의 많은 사랑이 설레임이라는 감정, 자신이 만들어낸 상상과 편견에 의해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려버린다는 현상을 인정한다면, 그것이 비단 그녀 제르트뤼드의 외모지향으로 비롯된 비겁한 변심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랑의 경우가 그렇다. 처음엔 세상에 둘 도 없이 사랑스럽고, 자신이 그 대상에게 가지는 사랑의 이유가 바로 그 대상 자체의 남다른 장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같은 행동이나 말에도 무언가 타인과는 색다른 의미가 부여이고, 실재가 아닌 관찰자의 주관적 느낌에 의해 포장된 그의 언행과 행동이 돋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돋보임은 진실이 아니기에 눈을 가리던 안개의 장막이 걷힌 후에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상대의 진면목을 알게되는 시기가 필연적으로 도래한다.

 

그러면 대개는 두 개의 선택이 기다린다. 하나는 또 다시 자신의 눈을 가려줄 무언가를 찾아 상대를 과감히 또는 은근히 떠나는 것, 다른 하나는 진실이 보이기 시작한 상대와 함께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 받아들이고 (약간의 체념 내지는 양보를 통해) 기존의 관계형태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는 것이다. 첫 번째 선택에 대해서는 별 할 말이 없다. 끊임없이 변형되지만 결국 순환되는 문제이며 언젠가는 두 번째 선택을 통해 종결되는 문제이니까. 그런데 가끔 두 번째 선택을 한 이들의 반응에선 재미있는 점들이 발견된다. 보통 눈을 뜬 서로에 대해 사랑이라기엔 멀고, 우정이라기엔 가까운 소위 '정(情)'이라는 정서적 연대로 설레임은 없지만, 솔직하고 편한 관계로 진화하는 메인스트림의 수순과는 달리 색다른 해석과 입장을 취하는 경우들이 있는 것이다.

 

하나는 끊임없이 자신이 예전에 느꼈던 눈가림의 감정을 일깨우며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상대방에게 계속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달라고 은근한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는 경우다. 이 경우 둘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제3자는 무척 난감한 느낌을 받게 된다. 충분히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이 둘 사이에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전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의 눈가림의 감정이 마치 그대로 유지되는 것마냥 보이는 둘의 관계는 처음엔 주변의 부러움을 살 수도 있다. (어쩌면 그들이 의도하는 것은 그 주변의 부러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옆에서 계속 관찰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삐긋거리는 현실과의 부조화로 인해 무안하고 안쓰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건 처음 만난 연인을 보며 느끼는 손발이 오글거리는 닭살과는 다르다. 손발이 오글거리는 닭살에는 그래도 질투심 비슷한 것이 배어 있지만, 이 감정엔 연민 비슷한 것 밖에 없으니까.

 

또하나의 색다른 반응은 자신의 눈을 가리던 장막이 걷히는 현상을 상대방의 변화, 더 나아가서는 변심이라고 믿어버리는 반응이다. 이런 이들은 상대가 변한 것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일방적 착각과 편견이 씻겨나간 것일 뿐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고, 그 탓을 상대방에게 돌려버림으로써 있지도 않은 책임감 내지는 죄책감을 상대방에게 은근히 뒤집어씌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두 반응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은밀하게 닿아 있다는 사실. 자신이 변하지 않았음을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확인시켜나간다는 첫 번째의 행동은 결국 두번째의 경우에서 상대방이 변했다고 느끼는 이들이, 그럼에도 자신은 변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는 노력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인식변화를 상대방이 변한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자신의 불변성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세뇌시키고 그것으로 인한 어색한 관계유지를 통해 두 사람 사이의 관계와 현실 세상 사이의 부조화를 끊임없이 조장하고있는 것.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사람의 모습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다만 조금씩 느리게 성숙해갈 뿐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바라보고 판단하는 느낌은 애초 부족한 정보를 토대로 형성된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에 비추어진 사람의 그림자같이) 어설픈 실루엣 같은 것이어서, 거기에 추가적인 정보가 하나 들어가고, 그릇된 것으로 판명된 정보가 하나 빠질 때마다 모습이 크게 변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을 상대방의 변화로 받아들인다는 건, 여전히 자신의 생각이나 태도에 아무런 책임이 필요없다는 철없는 유아기적 무책임에 근거한 발상은 아닐까..

 

목사에 대한 보은과 연인에 대한 사랑의 차이를 혼란스러워한 제르트뤼드는 결국 양심과 본능이라는 두 개의 상반된 감정을 조율하지 못하고 죽음을 택한다. 죽음으로 그 문제를 풀어간다는 그녀의 발상은 비록 연민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동의할 만한 것은 결코 아니다. 주변의 모든 이들을 만족시키고 납득시키겠다는 의지로 한 선택이기에 더욱 그렇다. 자신을 아는, 자신이 애정(그것이 어떤 성격이던)을 품은 모든 이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삶, 인정받을 수 있는 삶의 방식이나 선택이 과연 존재할까? 물론 아니다.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목사의 부담스런 애정이나, 그녀가 눈을 뜨기 전까지 가지고 있던 주변 사람들에 대한 착각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에게 정말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 너무나도 부족했던 '자기애'였다. 스스로에 대한 사랑과 자아존중감의 결핍이 바로 그녀가 죽음을 택하게 한 몹쓸 이유였던 것이다.


p***i 2011.10.24. 신고 공감 8 댓글 8
리뷰 총점 종이책
그대 사랑이 보이시나요,전원 교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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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악> 이 작품을 언제 읽고 다시 읽게 된 것인지. 중학교 때에도 고등학교 때에도 난 유독 '고전'과 '세계문학'에 빠져 도서실 한 귀퉁이에서 두껍고도 세로줄 쓰기의 책들을 탐독하는데 시간가는 줄 몰랐다. 집에서도 늘 끼고 있는 책들이 고전과 장단편문학,하지만 그때 읽고는 다시 집어들 여유가 없었는지 그때 읽은 것으로 만족을 한 것인지 도통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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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악> 이 작품을 언제 읽고 다시 읽게 된 것인지. 중학교 때에도 고등학교 때에도 난 유독 '고전'과 '세계문학'에 빠져 도서실 한 귀퉁이에서 두껍고도 세로줄 쓰기의 책들을 탐독하는데 시간가는 줄 몰랐다. 집에서도 늘 끼고 있는 책들이 고전과 장단편문학,하지만 그때 읽고는 다시 집어들 여유가 없었는지 그때 읽은 것으로 만족을 한 것인지 도통 기회가 없었는데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때 읽었던 책들을. 이 작품은 영화로도 보았던 기억이 있고 사춘기시절 무척이나 가슴졸이며 안타까움에 결말이 꼭 그래야했을까? 하며 혼자 한탄하던 작품인 듯 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장애와 비장애'의 차이는 무엇이고 '보인다는 것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지. 그리고 '육체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 의 그 미묘한 차이를 이 작품에서 다시금 느껴본다.

 

'나는 길 잃은 양을 데리고 온 거요.'

귀머거리 노파의 임종을 지키러 갔던 목사는 노파의 죽음 후에 홀로 남겨진 눈이 보이지 않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제르트뤼드'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그가 거두지 않으면 거둘 사람이 없다는,목사이기 때문에 여러마리의 길 잃는 양 중에서 자신은 한마리의 양을 데리고 왔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집에는 다섯명의 아이와 아내 아멜리가 있다.아멜리는 갓난아기 때문에도 힘들어 했는데 자신이 데려 온 장애아 때문에 일이 더 늘어나 푸념을 늘어 놓았지만 그는 아내의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제르트뤼드를 교육시키는데 온 정성을 쏟아 붓는다. 남자들은 어느 집이나 여자들이 하는 일에는 관심이 덜하다.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그리고 예감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모른다. 아내는 장애아를 보는 순간에 직감이 좋지 않아 반대를 한 것인데 목사인 남편의 만류를 그녀를 돌보게 되었다.

 

다기망양이라고 했다. 길이 여러 갈래여서 양을 잃고 있다는 것을,자신은 장애아인 제르트뤼드에게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마르탱은 목사에게 그녀를 교육하면서 '일기' 같은 쓰길 바랬다. 그녀는 아직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깨끗한 도화지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순수한 영혼이니 모든 것을 잘 받아 들일거라는,그녀의 잠자고 있는 세상을 열어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귀머거리 할머니와 함께 했기 때문에 그녀가 말을 못한 것인지 워낙에 말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던 듯,하지만 그녀는 세상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목사가 들려주는 그대로 세상을 상상하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순수한 영혼에 목사는 세상의 더러운 '죄'와 같은 것을 들려주고 싶지 않아 함께 숲길을 걷거나 음악을 들려주면서 그녀의 또 다른 세상을 열어 나갔다. 함께 음악회에 갔다가 들은 '전원 교향곡' 그곳은 물론 베토벤이 귀가 들리지 않은 시기에 만든 곡이라 알고 있지만 듣을 수 있는 사람보다 더 아름답게 곡을 만들었다. 그녀는 그 곡을 들어가며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운지 묻는다.과연 그럴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상상속에 갇힌 세상,목사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상상만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그녀에게 때를 입히고 싶지 않았던 목사,하지만 세상은 결코 아름다운 것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눈이 보이는 사람들은 자기가 누리는 행복을 모른단다... 그렇지만 볼 수 없는 저는 듣는 행복은 알아요.'

 

'나이를 먹었다고 항상 아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

서서히 자신만의 세상에서 나와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그녀 앞에 목사와는 다른 젊은 남자인 목사 아들 자크가 나타나고 몰라보게 변한 그녀에게 반한 자크는 그녀와 결혼할 것을 다짐한다.하지만 신앙과 아버지 앞에서 뜻을 굽히는 자크, 그때까지도 자신이 제르트뤼드를 사랑하고 있음을 몰랐는데 아내의 수수께끼 같은 말이 자꾸만 그를 붙잡는다.그랬다. 아내는 그녀에게 향하는 목사의 '진심'을 보았던 것이다. 누가 장애이고 누가 장애자가 아닌지. 아내는 볼 수 있었던 목사의 사랑을 목사인 자신은 눈이 보이지 않는 제르트뤼드처럼 눈을 뜨고도 못보는 그야말로 자신의 사랑에 장애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아니 그는 자신의 사랑을 주님의 사랑으로 밀어 부치려 했다. 종교적 사랑이지 자신의 육체적 사랑이 아니라고 절대적으로 부정을 했던 것이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했다. 자신의 진심을 자신에게도 제르트뤼드에게도 속일 수가 없었는데 친구 마르탱은 그녀의 눈을 검사 한 후에 그녀가 수술을 받으면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그녀는 수술을 받게 된다.

 

드디어 그녀는 동면의 삶에서 깨어나게 된 것이다. 목사는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려 하면 할수록 그녀에게 향하고 그런 마음을 어쩌지도 못하는 사이 그녀가 수술을 마치고 들어서던 길에 사고가 일어났다. 그녀가 정말로 시냇가에 '물망초'를 꺾기 위하여 몸을 굽힌 것인지 아니면 자살을 하려고 그랬던 것인지 그녀는 물에 빠져 생사의 갈릴길에 서게 되었다. 비로소 드러나는 그녀의 마음, 지금까지 목사를 사랑하고 있는 것인줄 알았는데 세상을 보게 된 순간 깨닫게 된 그녀의 마음은 목사의 아들 '자크'에게 향하고 있었다는 것. 하지만 자크는 아버지와 그녀 때문에 개종을 한 후 였고 그녀는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들에,그리고 자신의 사랑의 미묘함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고 산다는 말을 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눈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는 어떤 세상을 그렸을까? 목사가 다섯아이와 아내가 있는 남편임을 그리고 그의 곁에는 이런 모든 상황을 걱정하는 아내가 있음을 그녀가 보았던 것이다. 눈을 뜨고 처음 그녀가 보게 된 세상은 아름다움이 아닌 자신의 마음안에 있는 '죄'였던 것이다. '제가 처음 본 것은 우리의 과오,우리의 죄였어요.' 목사가 읽어주던 말씀 중에 '만일 너희가 눈이 먼 사람이라면 죄가 없으리라.' 과연 그랬을까? 눈이 보이지 않았던 그때 보지 못하던 '죄와 과오 그리고 걱정어린 아내의 얼굴'을 보면서 제라트뤼드는 자신의 길을 알고 말았던 것이다.

 

목사는 왜 아내의 조언에도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그동안 '눈이 멀어' 있었던 것일까? 눈이 먼 소녀를 치료하고 교육시켜서 개안을 시켜 놓았지만 막상 자신의 눈은 멀어 있는 아이러니한 세상,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던 제르트뤼드.목사의 옷을 걸치고 종교라는 믿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려 했언 목사, 우린 어쩜 그런 진실한 사랑을 부정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 자신안에 존재하는 사랑은 눈이 멀어서 보지 못하고 눈 앞에 급급한 사랑만 좇아 가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마음까지 마음의 눈이 먼 것은 아니다. 좀더 자신의 마음에 충실했더라면,목사의 옷을 벗고 자신에게 진실했더라면 그들의 사랑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자크와 제르트뤼드의 사랑은 이루어졌을까? 자신이 사랑하고 있기에,그것을 부정하면서도 마음 안에서는 받아 들였기 때문에 아들과의 사랑을 반대해야만 했던 목사, 결국 소녀의 죽음으로 그리고 아들의 개종으로 그는 두 영혼을 잃게 되고 말았다. 눈을 뜨고 있는 그대,사랑이 보이시나요? 정신적 사랑을 갈구하면서 육체적 사랑을 좇아 가고 있는 당신, 당신의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y******2 2012.03.14. 신고 공감 2 댓글 2
리뷰 총점 eBook
전원 교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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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의 작품 "전원 교향악"을 읽었다. 서정적인 사랑 이야기다.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고, 순수하면서도 부정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평생 심미적이고 도덕적인 글쓰기를 선보였던 지드는 이 작품을 통해 자기애에 빠진 인간의 자기기만적인 모습을 비판적으로 그려내었다. 앙드레 지드의 다른 작품 "지상의 양식"이나 "좁은문"보다 이 작품이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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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의 작품 "전원 교향악"을 읽었다. 서정적인 사랑 이야기다.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고, 순수하면서도 부정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평생 심미적이고 도덕적인 글쓰기를 선보였던 지드는 이 작품을 통해 자기애에 빠진 인간의 자기기만적인 모습을 비판적으로 그려내었다. 앙드레 지드의 다른 작품 "지상의 양식"이나 "좁은문"보다 이 작품이 더 좋았다.   

YES마니아 : 로얄 s******y 2017.05.03.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전원 교향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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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못 한다 vs 보지 않는다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는 ‘볼 수 있다, 보지 못 한다’와 ‘볼 수 있다,  보지 않는다’란 문제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음을 이 책을 통해 느꼈다. 제르트뤼드는 ‘보지 못 한다’란 전자의 경우지만, 목사는 후자의 경우다. 가장 신과 가까운 목사가 자신의 사랑을 위해 부러 ‘보지 않으려’하던 모습이 더없이 인간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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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못 한다 vs 보지 않는다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는 ‘볼 수 있다, 보지 못 한다’와 ‘볼 수 있다,  보지 않는다’란 문제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음을 이 책을 통해 느꼈다.

제르트뤼드는 ‘보지 못 한다’란 전자의 경우지만, 목사는 후자의 경우다. 가장 신과 가까운 목사가 자신의 사랑을 위해 부러 ‘보지 않으려’하던 모습이 더없이 인간적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모든 사건과 애증의 원인을 제공한 목사에게, 부인이 있음에도 소녀를 사랑한 목사에게 가장 끌린다. 부인부터 아들, 소녀까지 제각기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계기를 만들어 주고는, 되려 목사는 자신의 이기심과 사랑에 조심스러워하며 괴로워하고 번뇌한다.

  책의 제목인 ‘전원 교향악’……. 귀로만 들을 때는 참 환상적이지만, 눈을 뜨면 환상이 깨져버린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눈은 서로의 진심을 제대로 전달하고는 있을까?

s*******u 2009.09.10.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앙드레 지드 [전원 교향악]
"앙드레 지드 [전원 교향악]" 내용보기
보이는 것은 모두 진실일까?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안믿어.' 그런데 과연 보이는 것은 믿을만한 것인가? 작가 앙드레 지드는 보이는 화자와 보이지 않는 제르트뤼드를 제시하며 독자들에게 응수를 묻는다. 일기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가운데 불안한 아내의 얼굴이 등장하는 순간을 기점으로 독자들은 점점 혼란과 충격에 빠져든다.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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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은 모두 진실일까?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안믿어.'

그런데 과연 보이는 것은 믿을만한 것인가? 작가 앙드레 지드는

보이는 화자와 보이지 않는 제르트뤼드를 제시하며 독자들에게

응수를 묻는다. 일기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가운데 불안한

아내의 얼굴이 등장하는 순간을 기점으로 독자들은 점점 혼란과

충격에 빠져든다. 행복을 찾아가던 보이지 않는 제르트뤼드가

보게 되며 결국 이야기는 불쾌해지고야 만다.

 

 

이타적인 사랑은 존재하는 것일까?

 

두 번째로 작가는 인간의 이타적인 사랑에 대한 물음표를 던진다.

동정심과 의무감에서 출발한 주인공의 '사랑'은 제르트뤼드에게

입을 맞춘 순간 다른 '사랑'으로 변질되고야 만다. 물론 사람사는

세상에서 다른 의미의 사랑으로의 전환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주인공은 성직자에 유부남이라는 사실이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작가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아름답고 안타까운 이야기

로 펼쳐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앙드레 지드는 끝없이

자기부정과 자기기만에 빠진 주인공의 모습을 그리며 비참하고

모호한 결말을 독자들에게 선물하였다.

k****k 2009.09.0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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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사랑은 과연 불륜이었을까...?
"목사의 사랑은 과연 불륜이었을까...?" 내용보기
"당신은 저걸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   이 말은 우연히 노파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가게 된 목사가 그 노파의 혈육인 눈먼 소녀 제르트뤼드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그날 밤 아내가 목사에게 한 말이었다. 그러나 목사는 종교적인 사랑으로 자신은 이 소녀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녀와 그들 가족의 생활은 시작된다.   목사에게는 다섯아이들과 아내. 그리고 제르트뤼드.
"목사의 사랑은 과연 불륜이었을까...?" 내용보기

"당신은 저걸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

 

이 말은 우연히 노파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가게 된 목사가 그 노파의 혈육인 눈먼 소녀 제르트뤼드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그날 밤 아내가 목사에게 한 말이었다. 그러나 목사는 종교적인 사랑으로 자신은 이 소녀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녀와 그들 가족의 생활은 시작된다.

 

목사에게는 다섯아이들과 아내. 그리고 제르트뤼드. 목사는 앞을 보지 못하는 그녀에게 점자로 글자를 가르치고 눈에 보이는 것들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세상인지 가르쳐 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 노력들을 제르트뤼드는 어느 순간부터 받아들였고, 나날히 발전해 나간다. 그리고 아름다웠던 제르트뤼드.

 

눈 먼 자신에게 단 하나의 가르침을 준 목사님. 제르트뤼드에게 목사님은 모든 것이었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또 그녀는 그 사랑을 감추려 하지 않았으며, 사랑한다고 말을 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목사님의 사랑은 모든 것이라고. 목사의 아들 자크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고 목사가 제르트뤼드에게 말했을때, 그녀는 자신에게는 목사님뿐이라고 말하였다.

 

목사는 자신의 사랑이 오직 종교적인 사랑이라 생각했다. 내면에서는 그게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이 불륜. 또는 죄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 사랑은 제르트뤼드를 보호하고 사랑해줄 의무가 있는 종교적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아들이 제르트뤼드를 사랑한다고 자신에게 말했을때 심각하게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은 그렇게 계속 지속되는데.. 어느 날 눈 먼 제르트뤼드의 눈을 진찰한 의사로부터 수술이 가능하다는 말을 듣게 되고, 수술을 하게 되는데, 더 재밌는 건 그 수술이후 세상을 보게 된 제르트뤼드. 그녀는 목사의 얼굴을 보게 되고 자신의 사랑을 부정한다. 그리고 당당하게도 말한다. 목사님의 얼굴을 보고 난 후에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알았다고. 자신의 사랑은 젊고 아름다운 아들 자크였음을 알았다고 이야기한다.

 

거기서 이야기는 끝난다. 목사의 그녀에 대한 무한했던 사랑. 그리고 그것이 정말로 인간적인 사랑이었음에도 종교적인 사랑이라고 스스로 얽매여 있던 그에게 모든 것이  맞추어져 있다가 마지막 제르트뤼드의 눈이 고쳐지고 내뱉은 그녀의 말은 뜨악~ 했달까?

 

목사의 사랑은... 과연 불륜이었을까?

 

t****6 2009.09.22.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사랑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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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침’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누구나 쉽게 이해 할 수 있듯이 이 작품만큼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악은 없었기 때문이다. 연주회장을 나온 뒤에도 제르트뤼르는 오랫동안 말없이 황홀경에 잠기어 있었다. 목사님이 보고 계신 세계는 정말 그렇게 아름다운가요? 그녀는 마침내 이렇게 물었다.   이 소설의 시작은 어느 산골짜기에 자리한 낡은 오두막에서부터다.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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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침’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누구나 쉽게 이해 할 수 있듯이 이 작품만큼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악은 없었기 때문이다. 연주회장을 나온 뒤에도 제르트뤼르는 오랫동안 말없이 황홀경에 잠기어 있었다. 목사님이 보고 계신 세계는 정말 그렇게 아름다운가요?

그녀는 마침내 이렇게 물었다.

 

이 소설의 시작은 어느 산골짜기에 자리한 낡은 오두막에서부터다.

어느 노파의 죽음, 그리고 집 안에 웅크리고 앉은 노파의 유일한 식구이자 장님인 조카딸 제르트뤼르를 목사가 맡게되면서 시작된다. 제르트뤼르는 장님인데다가 씻지도 입지도 배우지도 못해 아주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골칫덩이쯤으로 목사의 집에 들어 온다. 그런 그녀를 동정과 연민으로 품는 목사, 하지만 그의 아내는 달갑지않다. 여자로서의 질투, 자신의 자녀들보다도 더 애정을 쏟는 남편에대한 모정의 욕심 그것들로

똘똘 뭉친 목사의 아내에게 제르트뤼르는 달갑지않은 손님일 뿐이다.  

맨처음 제르트뤼르는 이가 득실거리고, 음식 앞에서만 반응을 하는 짐승과도 같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말끔하게 씻기고나니 덥수룩한 머리에 숨겨져 있던 맑고 앳된 얼굴이 드러난다. 그리고 목사는 그녀를

가르치기로 결심한다. 그의 결심은 굳고 숭고하게 그녀의 배움으로 스며든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하얀색과 검은색을 묘사하고 세상을 알려주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리고 솜이 물을 머금듯, 빠르게 익혀가는 제르트뤼르의 모습도 한 몫한다. 제르트뤼를 보고 있노라면

빨강머리 앤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세상은 아름다워'라며 낭만과 감성으로 충만했던 귀여운 빨강머리 앤이 조금 진중해지면 제르트뤼르쯤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목사와 소녀의 관계는 점점 변질되어간다. 목사로서의 성직자적인 사랑이 남성과 여성의 사랑으로 변하는 부분에서 이 책은 또 다른 면모를 펼쳐보이며 독자를 사로잡는다. 물론, 변질된 사랑의 끝은 개안한 제르트뤼르의 깨달음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전원교향악>이라는 감성적이고 밝은 분위기의 제목은 목사와 제르트뤼르의 그 어떤것도 개입되지 않았던 순진무구한 사랑을 담아 묘사한 것이다. 제르트뤼르에게 꼭 들려주고 싶어했던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교향악. 이 소설은 가장 순결했던 사랑의 순간을 가장 시적이고도 음악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끝은 비록 종교적인 깨달음과 죄의 뉘우침을위한 죽음으로 어둡게

끝을 맺고 있지만 말이다.



YES마니아 : 로얄 d***s 2014.01.2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