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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어머니께서 추천하셔서 읽게 된 '분홍 벽돌집'. 아주머니께서는 나에게 이 책을 건네실 때 '무서운 책'이라 하셨는데, 겉표지를 보니 정말로 묘한 무서움이 느껴졌다. 난 그렇게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준과 수경이는 나와 같은 나이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행동을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수경이의 행동에 공감을 느낀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우리 나이때에는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없다. 서빙 알바를 하고 싶어도 18살이 넘어야 하고, 게다가 술집이라하면 미성년자는 아예 들어가지도 못할 뿐더러 햄버거집 알바도 거의 19살정도가 되어야 할 수 있다.
우리 나이때에 돈이 뭐가 필요있겠냐고 묻는 어른들 정말 많다. 지금은 혈기왕성한 10대이다. 더 예뻐보이고 싶고, 더 날씬해보이고 싶고, 더 꾸미고 싶은 욕구가 차오른다. 어른들은 다들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때는 안꾸며도 예뻐." 하지만 우리들 입장에서는 눈에 뭔가 좀 더 바르면 눈이 커보이고, 입에 좀 바르면 입이 생기있어 보이는 걸 느끼면서 자기만족을 한다. 그리곤 예쁘다고 생각한다. 어른들이 뭐라하든지간에. 우리 때에는 먹고 싶은 것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고, 사고 싶은 것도 많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돈을 벌 수 있는 곳이 없다. 단지 부모님의 용돈에만 의존할 뿐이다.
그런데 수경이는 내가 생각하기에 용돈을 안 받는 것 같다. (수경이 말대로라면) 그렇다고 해서 몸을 파는 것은 해서는 안될 짓이다. 자기의 몸은 그 누구의 몸도 아니다. 나 자신의 몸이기 때문이다. 먼 사람 얘기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가까이 느껴진다. 그이유는 이것이다. 가끔 심심할 때 채팅을 할 때가 있다. 모르는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굉장히 기쁘고, 좋은 일이니까. 그런데 그 채팅을 했을 때마다 쪽지나 대화가 한두 통씩 꼭 온다. 돈 많으니까 오라고 말이다. 또는 성적인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어디가 크니 작니 하며 말이다. 그 말을 하는 사람들 모두 남자였다. 그래서 난 살짝 남자란 존재가 두렵게도 느껴졌다. 그런데 성적인 만족을 느끼기 위해 만들어진 방들 중 정원이 꽉 찬 방이 있었다. 그렇다, 여자도 동의를 한다는 것이다. 경악했다. 과연 그 여자들은 그 남자가 좋아서 만나는가 그건 절대 아닐 것이다. 단지 돈!이라는 전제하에 만나는 것이다.
다시 수경이로 돌아가자, 가시엉겅퀴 그녀, 아름답지만 찔릴까 두려운 존재. 그녀는 굉장히 아름답다. 하지만 내부는 그렇지 않다. 수경이도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다. 가시, 뾰족한 것, 찔리면 아픈것. 자신의 아름다움이 가시라는 것에 아파하고 있는 것이다.
노숙자를 때린 혐의를 가진 준. 그의 삶은 웅이를 만난 후 급속도로 아래로 치닫았다. 준을 보니 꼭 우리 학교 남자애들이 떠올랐다. 남자애들은 무엇이 멋있다라고 생각을 할까. 놀아보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아이들을 보니 불쌍하다라는 생각이 났다. 자신보다 레벨이 높으면 굽실거리고 자신보다 레벨이 낮다 싶으면 떵떵거리니 어이가 없었다. 담배피고 술마시면 노는 줄 아는 그들. 정말 꼴불견이다. 나도 하라면 할 수 있다. 그것쯤이야, 하지만 난 더러워서 안 할 뿐이다. 겉에서 봤을 땐 멋있을 지 몰라도 폐를 보면 너무나도 더러울 테니까. 웅도 아마 그중 한명일 것이다. 아니다 그들보다 더한 존재이다. 친구를 개떡으로 보니까 말이다. 말도 안되는 '우리들의 수칙'을 주장하며 한 아이의 삶을 벼랑끝으로 내던지게 했으니까 말이다. 진정한 우정이란 서로를 감싸는 건데 '우리들의 수칙'에서는 웅을 위한 수칙일 뿐이다. 하지만 나였어도 '우리들의 수칙'에 따랐을 것이다. 맞는 것이 두려워서... 그렇다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다. 맞는다는 것은 육체적고통이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족보에 빨간줄이 그어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육체적 고통보다 더 할지 모른다. 취직할 때도 결혼 할 때도 모든 것의 걸림돌이 될 것이니까. 하지만 다행인것은 준이가 새로운 인생을 찾았다는 것이다. 한남자, 털보아저씨로 하여금 자아를 되찾은 것이다.
이 두명의 공통점은 이것이다. 사회가 이 둘을 내친 것. 누군가가 관심을 조금이라도 가져주었다면 안 일어났을 일들이었다. 우리 나이 때에는 부모라는 것이 굉장히 소중하다. 하지만 우리 나이 또래들은 그런 것을 잘 못 느낀다. 나 또한 그렇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부모님과 대화하는 일은 거의 없고, 친구들과 대화를 통해 나의 얘기를 말한다. 내 친구들과 얘기를 하면 서로 공감하면서 친해질 수 있고, 편하고, 내 이야기에 맞장구도 잘 쳐주니까 말이다.
몇몇 이렇게 느끼는 부모님들이 계신다. 우리 자녀는 아마 저와 제일 친할 거예요. 그건 어른들만의 생각이다. 어른들은 거의 어른의 틀에 맞추어서 생각을 한다. 말이 통할 리 있겠는가. 예를 들자면 우리 어머니와 나의 대화는 이렇다. "나 내일 친구들이랑 놀러가","공부는 하고 노는 거니? 시험 성적 이렇게 맞고선 놀 생각이 생기니?" 우리 두 모녀의 대화의 끝은 서로 화내고 끝이 난다. 어느 집안이나 똑같을 것이다. 애들과 대화해 보니 다들 나와 같았다. 절대 어른들은 이런 것을 묻지 않는다. 그애는 어떻게 생겼니, 그애는 무엇을 좋아하니, 너랑 얼마나 친하니, 그애랑 어떻게 친해졌니 같은 질문 말이다. 그러니 부모간의 대화는 거의 하질 않을 수 밖에. 누가 짜증내면서 말을 하고 싶을까 말이다. 내일이 되면 이런다. 공부는 하고 가니, 몇시에 오니, 빨리 놀다가 와서 책 좀 봐라. 기분 좋게 놀러갈 마음이 생기겠다 말이다. 소통이 안되니 자신을 알아주는 친구를 찾는 것이다.
선생님도 마찬가지이다. '분홍 벽돌집'에서 나오는 체육선생님 정도는 아니지만 그들은 전혀 우리에게 다가올 생각조차 안한다. 우리가 말을 걸어도 대화가 잘 통하지가 않는다. 대화가 안된다는 것은 선생님은 물론이거니와 대화를 나누는 자신도 짜증이 나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마음을 좀 더 열어준다면 우리는 그들(우리를 이해 안 해주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만큼 꼴통이지도, 삶의 걸림돌도, 아무것도 아니다. 희망으로 가득 찬 우리이다.
중3 김민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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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벽돌집을 읽기 시작하면서 다른 일들을 뒤로 미룬채 단숨에 읽어내려 갔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내 아이만은... ...'하는 생각이 서서히 틀린생각이라는 마음이 어느순간 들기 시작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귀한 아이들, 특히 청소년들의 드러나는 행동들이 그들만의 문제로서의 문제가 아닌 모두가 함께 해야 하는 하나의 삶의 과정인 동시에 과제라는 생각. 우리 어른들의 생각과 마음과 행동이 먼저 달라지고 변화되어야 함을 절실히 느낀다. 이 소설은 커다란 호수에 던져진 돌로 인하여 일어나는 작은 파장과 같이 우리 어른들의 마음을 두드려 주는 듯한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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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준에게
<분홍벽돌집>을 읽고는 특히, 준이 네가 방황 하는 부분을 읽고는 많은 반성을 했다.
물론, 노숙자를 때리는 것은 나쁘다. 학교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것도 나쁘다. 그리고 부모님의 총고를 잘 받아 들이려 하지 않는 것도 나쁘다. 그래서 책속에 서 보여진 네 행동을 두둔하거나 네 편에서 이해하진 않겠다.
하지만 나의 반성은 그동안 내가 어른들 입장에서만 그리고 모범적으로 사춘기를 보냈던 나의 과거 잣대로만 네 행동을 무조건 나빠! 라고 단정하진 않겠다는 뚯이다.
내 아들을 포함해여 준이와 같은 청소년을 .. 그들의 내면에 상처는 무엇이고, 그리고 어떻게 달래주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정말이지 진지한 고민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니다. 나는 고민은 했건만 소설속 털보 아저씨 처럼 달래줘야 한다는, 그 실행까지는 옮기지 못했던 것 같다.
준이가 만든 영화가 이 세상 많은 사람에게 희망의 불씨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회에서 인정받지 봇한 청소년들이 털보아저씨와 같은 좋은 어른을 만나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꿈을 이뤄 나가는 건가를 네가 만든 영화를 통해서 이 세상에 확인시켜 주면 좋겠다.
그리고 수경이가 네 영화를 통해서 다시 부활되었으면 좋겠다. 가족에게까지 손가락질을 받고, 마음을 나누지 못한채 결국 소설속에서는 가시 영컹퀴꽃은 실들어 버렸지만.. 네 영화를 통해서 새롭고 당당하고 그리고 이 사회를 이끄는 여성의 리더가 되는 수경의 모습으로 꽃피워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멋질까..싶다.. . ...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는 청소년기를 아주 모범적으로 살았던 사람도 있고 그 반대인 경우의 사람도 있다. 아니, 많다.
성공한 사람들!. 이 사회에 공헌한 사람들! 그들의 청소년기를 살펴보면 모두 다 모범생였던 것은 아니다.
나이들수록 느끼는 건 되려 삶의 여러 질곡길을 걸어 본 후에 그 경험을 경험으로만 끝내지 않고, 자양분으로 삼은 사람들이야말로 이 사회의 진정한 리더로 활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준이 너는 분명, 너의 바램처럼, 털보 아저씨의 바램처럼, 가시 엉컹퀴인 수경이의 바램처럼, 이 사회에서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그러리라 믿어..
참, 소설속에서 너는 아직 영화를 만드는 중이지만.. 언제쯤 네가 만든 영화를 볼 수 있겠니? 영화 이름이 <가시 엉컹퀴 꽃>일려나? 어떻게 , 어떤 모습으로 그 꽃이 피어나는지 독자로, 관중으로 너의 작품을 지켜 보겠어..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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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방비한 상태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 아이들은 아직 다 자라지 않았다. 그래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어른들은 관심과 사랑을 조금만 주어도 변할 수 있는 아이들에게 무관심과 차가운 시선들만 준다. 우리 엄마도 이 책을 읽고나서 어른들의 무관심과 그런 냉정한 것이 많은 것 같고, 수경은 돈을 벌기위해 원조교제를 했는데 수경이의 엄마가 자기 몸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려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라면서 아쉬워 했고, 준이도 선생님을 잘못 만났고 어떻게 선생이 학생보고 자퇴를 하라는 선생님이 어딨나면서 너무나도 못 된것 같다고 하셨다. 나도 처음엔 어른들처럼 준과 수경이 같은 아이들을 안좋게 보았다. 하지만 얘기를 해보면 오히려 그런 아이들이 더 착하고 따뜻한 아이들이라는 것을 알게해주었다. 말을 나누어보면 정말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아이들인데 어른들은 나쁜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이들이 더 힘들게하고 삐뚤게 나가게 하는 원천 같다. 이 책을 읽고 사회가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또한 관심과 사랑으로 청소년들을 바라봤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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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청소년. 그들은 샌드위치처럼 낀 세대이다. 문학에서도 이들의 자리는 협소했다. 동화 읽기를 벗어난 청소년들의 삶을 다룬 이야기 역시 선택의 폭이 좁았다. 최근들어 신간도서 목록에 청소년 소설이 오를 때마다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그 중에서 <<분홍벽돌집>>은 이른바 문제아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묵직했다. 이 책은 청소년들이 겪는 모든 문제는 그들만의 선택이고 잘못이라는 생각을 되짚어 보게 만든다. 우리는 그 누구도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날 수 없다. 따라서 주어진 환경의 영향에서 벗어나기도 어렵다. 더구나 아직 미숙한 사고를 가진 청소년들이 처한 상황은 어떻게든 그들의 삶을 지배한다. <<분홍벽돌집>>의 아이들, 준이나 수경역시 사회적 구성원이라는 틀에 속해 있으며 상호연관에서 자유로울 수없었다. 조직 폭력 조직인 일진에 들어가게 된 준이와 원조 교제를 하던 수경을 이 사회와 완전 분리해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준이나 수경 같은 아이들이 생겨날 수 있는 여건에 일조하며 살아가는 건 아닌가? 한 번쯤 돌아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누구나 기피하고 내 아이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믿는 소년원이 우리 곁에는 존재하고 있다. 그 안에는 우리 아이들 또래가 갇혀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작가는 절망뿐일 것 같은 소년원의 아이들에게 분홍빛 희망을 힘차게 던지며 묻고 있다. '우리는 가슴이 식은 방관자이지 않을까?'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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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통해 슬쩍 보았던 <분홍 벽돌집>이란 제목과 묘한 분위기의 표지가 막연한 재미를 기대하기에 충분하였는데....... 막상 받아들고 보니 뒷모습의 소년 또는 소녀인듯한 누군가를 향해 뾰족뾰족 가시 돋힌 식물이 뻗어가고 있는 그림에 왠지모를 두려움이 밀려온다.
나중에야 가시를 마구 뻗친 것은 가시엉겅퀴로 결국엔 죽음을 맞이한 수경의 닉네임이기도 하고 준이 새롭게 태어나도록 희망을 안겨줄 영상 제목이기도 한 것으로 묵직한 의미를 담은 상징물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튼, 표지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으로 몇 장을 읽어내려가던 나는 어느새 주위에 맴돌고 있는 딸아이를 의식하며, 곧 사춘기가 될 딸아이가 이 책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이 책 속의 아이들이 겪는 삶의 모습을 몰랐으면 하는 심정이 보다 솔직할 것이다. 과연 그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 보이지만 말이다. 간접적으로라도 들려오는 요즘 청소년들의 삶은 이미 이십 여 년 전의 나의 그것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깜짝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
요즘 청소년들을 상징(대표)하는 듯한 준과 수경. 준은 학교와 또래들로부터, 수경은 학교와 사회로부터의 무관심과 따돌림으로 그들만의 도피처 혹은 최선책을 선택하지만 그것은 아직 세상을 너무나 모르는 순진한 아이들의 어리석은 것 그 이상은 결코 못 되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스스로 옳은 선택이라 굳게 믿었던 것은 어느새 자신의 발목을 옭아매고 다시는 일상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이 되고 만다. 결국, 깊은 수렁 속으로 가라앉고 마는 수경에 반해 다행스럽게도 한 줄기 희망을 빛을 발견한 준은 다시금 세상으로의 도약을 꿈꾼다.
그리 낯설 것 없는 오히려 너무 익숙한(?) 이야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준과 수경의 이야기가 문득 질문 하나를 던져온다. 과연 우리는 책 속의 이야기처럼 어떻게 될 줄 모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성매매로 잡혀온 딸아이를 부끄러워 하며 끝까지 찾지않았던 수경의 가족들이나 자신이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학생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은 채 문제아로 낙인 찍어버리는 준의 담임은 물론, 미성년자인 수경과 은밀한 거래를 했던 많은 성인 남자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결과 만으로 아이들의 미래를 몇 마디의 말과 몇 번의 망치질로 쉽게 나락으로 밀어넣는 경찰이나 판사들......심지어 수렁에 빠진 아이들을 더욱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는 상담사나 의사까지...
아직 세상을 모르는 철부지 아이들인 준과 수경 그리고 못되고 미운 만큼 철없고 안타까운 웅이까지 아이들은 그렇다고 쳐도 이미 세상의 부조리함과 모순된, 어린아이들이 쉽게 판단하고 내딪기에는 구석구석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우리 사회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알만큼은 아는 어른들.
준과 수경은 철조망과 칙칙한 회색 벽돌로 둘러싸인 감별소에서보다 분홍 벽돌집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새로운 싹을 키우지만 그것조차 내게는 다행스럽지 않다.
자신을 가시엉겅퀴라 거침없이 이야기하던 수경.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가시에 찔릴까봐 두려워한다던.......그렇게 가시로 무장한 채 두려움없이 살 것 같던 수경이 채 꽃을 피우지 못하고 스러져가고, 그래도 살아남은 자로서 준은 끝까지 자신을 믿고 지켜주는 엄마와 털보 선생의 바람대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고자 한다.
어쩌면 분홍 벽돌집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힘겨운 희망을 품어내야 하는 곳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 세상은 분홍 벽돌로 둘러싸여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밀려온다.
이 세상은 자라는 아이들은 물론 모두에게 실망이나 절망, 따돌림과 격리라는 것에서 자유롭다면, 마음껏 조건없이 행복한 세상이면 얼마나 좋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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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책을 읽고 쓰는 게 엄청 귀찮다. 귀찮다기보다 잘 쓰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듯하다. 솔직히 말하면 꽤 오래전부터 그냥 대충 쓰고 있다. 이런 것은 안 쓰는 것보다 나쁠지도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저 읽는 것뿐인가? 하지만 그저 읽기만 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아주 잠깐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렇기에 귀찮고 잘 쓰지 못할지라도 이렇게 쓰고 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것이지만 말이다. 나 자신이 알아주면 괜찮은 거 아닌가 싶다. 여기에 나온 준과 수경은 자기 자신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준한테는 자신을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엄마가 있었다. 학교 선생님은 준을 안 좋게 봤을지라도 말이다. 그런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있다면 좋은 거 아닌가 싶다. 어리기 때문에 잘 몰랐던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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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홍'이라는 어감에, 그 어감에 담겨있는 색채에 일종의 콤플렉스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분홍벽돌집'이라는 책 제목에 괜한 거리감을 두었다는 것이 떠올라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것만 같다. 분홍벽돌집이라고 하니 왠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환상적이고 아기자기한, 흔히 말하는 '핑크빛무드'가 떠올라서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닥 당기지 않는 기분으로 누군가 툭 내밀어준 책을 집어들어 읽기 시작했다. 아무런 생각없이 '분홍벽돌집'이 뭐야? 라는 심정으로. 그런데 내가 얼마나 막혀있었던가...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이 책의 첫머리에서부터 당황스럽게도 아이들이 쓰는 은어와 속어가 마구 뒤섞여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튀어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내 친구들도 많이 썼던 말이고, 지금 내 주위에 있는 아이들 역시 욕이 아니라 일상용어처럼 쓰이고 있는 언어들인데도 '문학작품'이라는 선입견에 막혀 이런 어색함을 느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책장을 넘겨갈수록 아이들의 대화는 내게 척척 달라붙듯이 익숙해졌고, 이야기는 내가 접해보지 못한 환경이지만 왠지 저자의 치밀한 사전조사를 통한 현실적인 부분들이 많다는 것이 감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청소년 소설에 흔히 가정형편과 그러한 환경으로 인한 부모의 무관심과 학교에서의 차별이라는 성장배경이 있다면 분홍 벽돌집은 그런 성장배경에서도 착실히 자라나는 모범생을 하나정도 끼워넣어주는 희망도 주지 않고 있다.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게 아이들을 끝까지 내몰고 마는 부모와 교사와 수많은 어른들이 있을뿐이다. 아니, 아니다. 그런 수많은 어른들 사이에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아이들을 위한 부모다운 부모, 스승다운 스승이 있기는 하다. 그것이 어른의 관점에서 바라본 나의 희망이다. 경계선에 선 아이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천성이 나쁜것은 아니지만 그저 환경에 몰려 벼랑끝에 서게 되어버린 아이들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어쩌면 착한아이와 나쁜아이의 구분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존감을 갖고 확실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아이와 자기 자신을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해 온전히 서있기 힘든 아이의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책의 이야기 줄기는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겉돌기만 하게 된 준과 반찬장사를 하는 엄마의 경제력에만 의존해야하는 가정에서 언니와도 비교되어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는 수경의 이야기가 엮이며 경계선에서 흔들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감싸주는 어른들의 모습이 아니라 철저히 아이들만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이 이야기는 어딘가 모르게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아웃사이더로 겉도는 준은 그를 철저히 경멸하는 담임에 의해 학교를 관두게 되고, 친구에게 끌려다니며 원하지 않는 폭력과 비행을 일삼게 되고, 자신의 꿈인 모델이 되기 위해 희망을 잃지 않고 노력하던 수경은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성매매를 일삼게 되어버리는 일들이 오로지 아이들만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기에 내 마음은 더 불편했다. 끝내 선처되지 않고 결국은 소년원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나에게 퍽퍽한 현실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기도 했고, 괜히 어줍잖은 이야기로 세상은 그래도 아름답다,라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는다는 것에 알수없는 안도감을 느끼게 하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절망으로 이야기를 끝내버리기엔 이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경계선의 아이들을 벽 속에 갇혀버리게 하는 것이될지도 모른다. 물론 준의 앞날이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경계선에 높이 세워진 벽을 허물고 있는 준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한없이 가벼울수만은 없지만 아이들을 이해하고 손을 내밀어준다는 것은 나의 입장과 나의 가치관과 나의 선입견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곳에 있는 아이들이 잡을 수 있도록 내 손을 내밀기만 하는 것뿐임을... 생각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