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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전을 읽을 때 처음 시작하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고전은 어렵다는 선입감이 먼저 들고, 또 그것을 읽는다고 내용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 자신이 서질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고전에 대한 해설서 내지는 강의서가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던 차 신영복교수께서 추천한 [사기 교양강의]와 [손자병법의 교양강의]란 책은 고전에 대한 독서 법을 가르쳐 준, 아니 그 책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면서 다시 한번 읽은 것과 같은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 후 이 책의 저자의 또 다른 저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연암의 열하일기를 해설하고, 어렵게만 여기던 [열하일기]를 여행할 수 있도록 가이드 역할을 해주던 그 책은 교양강의와는 또 다른 맛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책 또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란 책과 마찬가지로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 대한 안내서이다. 임꺽정은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에 홍길동,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의 3대도둑으로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그가 의적이었는지 아니면 혁명을 꿈꾸던 영웅이었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다만 [임꺽정]이 험난한 80년대 월북작가의 작품으로 금서로 지정되는 바람에 읽히기 시작했고, 책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해석들이 그를 도둑이아닌 의적으로, 신분제에 반항하는 투사로 우리에게 투영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책이 해설하는 홍명희의 [임꺽정]은 완간되지 않은 책이라고 한다. 청석골 7두령이 자모산성으로 가기 위하여 청석골을 비우는 시점에서 소설은 끝이 난다. 그 후 임꺽정은 자모산성에서 다시 구월산성으로 옮겨 최후를 맞이 했다고 한다. 홍명희가 어떤 이유에선지 여기까지 책을 쓰고 그 다음엔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북으로 가기전, 쓸 시간은 충분했지만 여기서 멈추었고, 이제 그도가고 없으니 이책은 영원히 미완의 대작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말이다. 저자는 임꺽정에 나오는 그들을 백수로 파악했다. 하나같이 직업이 없기 때문이다. 직업이 있는 사람들은 사대부 관료나 농업, 공업,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士)는 고사하고 농공상(農工商)의 범주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직업이 없다고 다 같은 백수는 아니다. 신분제 사회 하에서 사대부의 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그들은 거리로 내몰리는 현대의 백수나 비정규직과 다름이 없다. 그러기에 저자는 길 위에서 놀 수밖에 없는 마이너리그들이라고 했던 게다. 책은 총7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꺽정] 10권의 전편에 흐르는 내용들을 경제, 공부, 우정, 사랑과 성, 여성, 사상 그리고 조직 면으로 살펴본다. 청석골 7두령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어떠했는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달랐는지 홍명희가 보았던 그들을 분석해 내고 있다. 저자는 청석골의 임꺽정과 7두령들을 “노는 남자”라고 말한다. 그들은 일을 해 본적이 없다. 물론곽오주가 머슴살이를 하고, 길막봉이 소금장수를 했지만 그들은 장사보다는 노는 거에 더 관심이 많다. 또한 그들은 세상의 차별과 모순에 대한 울분은 강했을지언정 땅이나 집에 대한 욕구,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콤플렉스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어찌 보면 그들이나 현대에 사는 우리나 같은 마이너리그 이지만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고, 그들이 더 부러워 보이는 건 왜일까? 그들의 거점 청석골은 경제공동체이다. 도적질해온 재물들을 분배는 한다. 두령이 있고 두목이 있고 졸개가 있다. 그렇지만 건수만 있으면 사흘 밤낮으로 벌어지는 잔치에, 재물의 분배와 축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각자 무엇인가 한가지 할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또한 그들 일곱 남자는 노는 남자이지만 배우는 남자들이다. 꺽정이가 검과 말타기의 달인이 되고, 천왕동이 축지법, 유복이 댓가지(표창), 배돌석이 돌팔매 그리고 봉학이 명사수가 되는 데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공부가 있다. 그들은 글을 모르기에 이야기로 배우고, 놀면서 배운다. 배워서 무얼 할 것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이유 없이 그냥 배워두는 것이다. 백수가 되지 않기 위해 배우는 것에 목숨을 거는 현대의 우리들이 나중에 그것 때문에 백수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이 든다. [임꺽정]은 청석골 7두령의 이야기 이다. 물론 거기에는 많은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이 나오고, 임금이 나오고 난정이도 나오고 윤형원이도 나오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꺽정이와 7두령의 우정과 의리에 대한 이야기 이다. 청석골 7두령은 저자의 말마냥 절대로 착하고 좋은 놈들이 아니다. 그렇지만 좋은 친구들이 되었다. 왜? 서로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자는 좋은 사람들이라서 서로 친구가 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기에 좋은 친구들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들의 우정이, 그들의 의리가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친구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친구란 우리에게 삶을 선사 한단다. 아주 낯설고 새로운 삶을. 그렇지만 친구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어 있는데 어느 틈을 비집고 친구가 들어올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란다. 소설에서 사랑과 성은 약방의 감초다. 그것이 없다면 책을 읽는 기쁨이 반감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좀 허전하다. [임꺽정]에도 많은 사랑이 나온다. 저자는 그것을 군더더기 없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머뭇거림, 잔머리가 없는 오직 몸으로 부딪히는 그들의 사랑이 풋풋하기만 하다. 또한 당당한 여성의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남존여비의 사상이 골수까지 뒤 덮인 그런 사회의 수동적인 여성들이 아니라, 자기주장 강하고, 삶의 현장에서 모든걸 틀어쥐고 주도적으로 살아간다. 아마 그것이 그 시대 민초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대부의 딸, 사대부의 아내가 아닌 비천한 삶의 현장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살수밖에 없는 그녀들의 이야기에 속이 후련하기도 하다. [임꺽정]에는 조선의 지식인들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그 당시를 살아가던 성리학자는 물론 불교와 도교의 인물들이 총 출동 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임꺽정]에서 홍명희가 보여주려 한 것은 갖바치로 대변되는 유불선 3교의 메트릭스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면서 군자와 소인의 차이는 부귀도 공명도 아니고, 성공도 실패도 아니고, 요절도 장수도 아닌, 삶과 죽음 사이에서 누가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에 있을 뿐이라고 청석골 7두령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책에 등장하는 군자보다는 한심한 소인배 들에게서 더 큰 깨우침을 얻게 된다. 부귀영화의 무상함에 대하여, 권세의 참을 수 없는 비루함에 대하여, 그리고 초라한 너무나도 초라한 죽음에 대하여..
지금은 어렴풋하지만 한때 임꺽정을 읽으면서 많은 토론을 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때는 지금처럼 마음을 비우고, 책을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자가 청석골 7두령을 노는 남자들로 보고 현재의 비정규직 혹은 백수, 즉 마이너들로 보았듯이 그 당시에 나는 그들에게서 신분제에 저항하고, 사회를 변혁시키려는 동인을 찾을려고 했을 것이다. 벽초 홍명희는 그러한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그렸을 뿐인지도 모르는데. 이 책은 [임꺽정]을 읽기 전에 우리가 어떻게 [임꺽정]을 읽어야 하는지, 그리고 또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좋은 안내서라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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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돌아왔다! 전작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에로스>로 나를 홀딱 반하게 만들었던 그녀, 고미숙 쌤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고전평론가란 그녀의 타이틀답게 한 손에 임꺽정을 거머쥔 채 그녀표 걸쭉한 입담을 또다시 자랑하면서. 이미 전작에서 그녀만의 화려하고 구수한 입담과 통쾌한 해석에 넋을 잃은 경험이 있기에 그녀의 신간에 두 번 고민할 까닭은 애초에 없었다.
물론 고백 하나 하자면 내가 이 책에 유독 끌렸던 건 나 역시도 현재, 마이너리그에서 유유히 활개치고 있는 독자이기 때문인지도. 살짝 애매모호하다고?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난 백수다. 것도 이렇게 대놓고 나 백수랍니다 하고 밝히는 아주 당당하고 떳떳한 백수. 그래서 그녀가 들려줄 마이너리그 이야기에 더 목말랐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곧 개인사로 정들었던 마이너리그를 떠날 거지만 그녀가 임꺽정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또 어떤 통쾌한 쿵푸 지침을 내려줄지 기대만으로도 엉덩이가 들썩 들썩였으니까.
초반부터 저자에 대한 두터운 신뢰로 가득한 내 달뜬 리뷰로 미루어 짐작한 분들을 위한 경고 한 마디, 그녀가 들려주는 임꺽정 이야기를 예사로 흘려듣지는 말자. 고전평론가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경외심으로 똘똘 뭉친 고전을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해서 철저하게 까고, 쪼개고, 툭툭 털어서 보여주는 직업 아니던가. 적어도 고미숙 쌤이 자처하신 역할은 그렇단 말씀. 그러니 그녀식 임꺽정의 재해석을 둘러싼 섣부른 재미만 기대한 독자라면 각오 단단히 하고 읽어 내려가자. 재미만 얻기엔 이 책도, 저자의 수고도 너무너무 아깝단 말씀.
서론이 다소 길었는데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첫 단계에서는 우리가 임꺽정에 대해 잘못 알고 있던 통념을 철저히 깨준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임꺽정과 칠두령은 당대의 의적이 아닌 단지 전형적인 '노는 남자들'에 불과했다는 것! 허걱, 그녀는 정말 초반부터 예상치 못한 선빵날리는 덴 고수다. 첫 단계에서 놀란 마음을 채 진정시키기도 전에 저자는 바로 다음 단계로 돌입해 이런 '노는 남자들'의 현대판 풀이에 들어간다. 그럼 놀기 바빴던 이 남자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었을까? 그건 또 아니란 말씀. 그럼 이 잘 놀았던 남자들에게서 오늘의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놀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놀았던 이들의 자유로운 정신 자세가 아닐는지.
흔히 공부와 놀이가 연관될 때 그 상생 효과가 증폭된다는 것쯤은 독자인 우리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쉽냔 말이야 라고 저자에게 퉁명스럽게 되묻기에 앞서 다시 생각해 보자. 저자라고 그걸 몰랐을까? 몰라서 독자인 우리를 약 올리려고 이들이 왜 잘 놀게 되었는지 알려주려는 걸까. 저자는 임꺽정과 칠두령을 통해 오늘의 비정규직과 수많은 청년 백수들이 놓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한 가지를 일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단지 노는 남자들 같아 보이는 이들의 놀이와 학습이 하나 되었을 때 비로소 저절로 달인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의 우리에게도 그들의 꼬장꼬장한 자존심과 그 해탈의 마음자세가 필요하다고.
이래서 나는 그녀식 유쾌한 수다가 좋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가 임꺽정에 빗대어 보여주고 들려주는 오늘의 우리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너무 통쾌해서 좋아 죽겠다. 그녀는 가볍게 던지는 농담 한 토막이라고 하지만 그 농담을 던지기 위해 그녀가 임꺽정을 부여잡고 쏟았을 그 시간들이 고스란히 전해지기에 나는 저자에게 고맙고 또 고마웠다. 앞서 밝힌 것처럼 내가 백수라서가 아니라 가끔 길을 잃고 헤매는 친구들을 본다. 자신의 진로를 뒤늦게 발견하고 찾아가는 과정에서 불안해하는 녀석도 봤고, 등 떠밀려 들어간 회사를 제 발로 뛰쳐나온 후 또다시 길 위에서 서성이는 녀석도 봤다. 모두가 정석의 길을 걷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 책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도 그 녀석들이었다. 분명 마이너리그의 주자들인데도 우리는 여전히 만나면 서로 당당하고 떳떳하다. 오늘에 기죽지 않고,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감과 젊음, 그 패기로 백수의 생활을 알뜰살뜰히 즐기고 있기에.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임꺽정과 칠두령을 언급하면서 끊임없이 격찬한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나와 내 친구들은 이미 상당수 가지고 있다는 마음에 한 쪽 가슴이 괜히 뻐근하기까지 하다면, 너무 조증이라고 흉보려나.
언제든지 가뿐히 박차고 나갈 준비가 되어 있기에 스스로 마이너라고 기죽고 지낸 적 없었지만 한편으론 답답한 마음이 들 때도 간혹 있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임꺽정과 칠두령 안에 사랑도, 우정도, 경제도, 정치도, 온갖 사상도 자유롭게 버무려졌던 것처럼 내안에도 임꺽정이 있고 칠두령이 있다. 그러니 그걸로 족하다. 단지 한 가지 더 바람이 있다면 내 한 걸음이 또 다른 한 걸음을 부르듯이 이 당당한 한 발자국들이 모이고 모여서 서로 연대하는, 순환할 수 있는 길이 되길 바라고 희망한다. 헤매는 자 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니라고 말했던 톨킨의 말처럼 나를 포함한 많은 길 위의 마이너들에게 이 책이 한 줄기 빛이 되길 소망하면서, 먼지 쌓인 벽초의 임꺽정을 움켜쥐게 만든 저자의 입담에 찬사를 보내면서 유쾌했던 현대판 임꺽정과의 만남을 마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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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고전과 관련한 우리 교육의 맹점이 텍스트를 읽지 않고, 그 텍스터에 대한 평가부터 주입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힘으로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능력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 내 의견이었는데 그렇기에 이책 속 해석은 어디까지나 고미숙님의 의견이라고 전제하면서 읽어갔다.
임꺽정을 위시한 칠두령들은 재지 않았고, 칠인칠색의 캐릭터는 인간적으로 보면 결점투성이었지만 서로의 결점을 보완하는 끈끈한 사이였다. 상하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로 의리를 목숨보다 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임꺽정은 사랑할 때에도 화끈했다. 부인 운총도 밀당 한번 하지 않고 빼는 법 없었다. 꺽정과 그들은 뜨겁게 몸으로 교감을 나누었고 주저없이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런 이후에 부모의 허락을 구할만큼 절차에 구애받지 않았고, 스스로 배우자를 선택한 것이었다. 임꺽정의 이런 저돌적인 애정방식은 결곡 다른 여성과 애정편력을 보였지만, 결국 운총에게 돌아가게 되는데, 그만큼 운총은 꺽정에게 당당했다.
홍명희의 '임꺽정'에서는 다양한 애정유형들이 그려지는데, 평생 아내를 못잊었던 일편단심 오두령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내 몸을 홀애비래도 내 맘은 아직도 핫애빕니다" 라고 말하면서 뼈에 사무칠만큼 그리웠던 아내때문에 끝끝내 청석골을 떠나지 못하고 홀로 남게 됐다.'임꺽정, 길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을 읽다보니 결국 마주하게 된 것은 등장 인물들의 캐릭터와 삶의 태도였던 것이다.
필자 고미숙은 임꺽정을 의적이라고 단정하지 않고 있다. 그보다는 길 위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받아들였던 자유인이었다는 것을 후하게 평하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자유로움은 현대 백수들에게 당당한 자유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영감을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지는 않았다. 필자가 수시로 '임꺽정' 인물들에 대한 애정을 밝히고 있는지라 그들에 대해 긍정일변도로만 해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아마도 고미숙님은 이들의 신분이나 직업, 청석골이라는 공간이 조선의 성리학적 윤리에 얽매이지 않은 삶의 공간이었고, 그렇기에 유목민의 노마드적 삶, 고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정신과 관계를 맺어갔다고 평가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래도 '임꺽정'을 읽지 않았기에, 이렇게 조심스럽게 짐작하게 된다.
'임꺽정'이 미완성인 채로 끝을 맺었음에도 등장인물들이 질펀하게 잔치판을 벌이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임꺽정과 청석골 두령들이 도둑이었는지 의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그들이 생동감넘치고 천연덕스럽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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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만나본 이름 석자'임꺽정' 80년대 금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며 폭넓은 독자들의 인기를 누리던 이 책을 고전문학을 전공한 저자에 의해 새로운 관점으로 재 해석하여 '길위에서 펼펴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이라는 제목을 달아 출판하였다.한때 임꺽정과 장길산을 비교하며 토론하고 밤새우던 객기어린때가 내게도 있었음을 떠올리며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주류에 속하지 못하는 비정규직과 취업을 못한 배수나 명퇴한 사람들을 일컬어 우리 시대의 마이너라 칭한다면 분명 청석골 칠두령을 비롯한 그의 졸개들은 조선시대 마이너임에 틀림 없다. 비주류임에도 그들의 배짱과 의리, 갖바치의 지성과 미래를 보는 탁월한 안목을 한수 배우게 되길 바라며 그들의 향연에 동참해 보자.
특별한 직업도 없는 백수들이 먹고 사느네 어려움을 겪기는 커녕 남들다하는 사랑도 하고 끈끈한 유대감으로 얽킨 우정도 공유하고, 온갖 놀이에도 동참 할수 있엇는지 의하하기만 하다. 우리 시대의 백수들은 직업 없이는 돈 없고 돈 없이는 사랑과 우정은 고사하고 변변한 놀거리 조차 없는게 뼈아픈 현실이다. 무엇이 이들을 주눅들지 않고 당당할수 있게 만드느지 그 차이가 대체 뭘까?
우선 꺽정이와 그의 친구들은 이세상의 차별과 모순에 울분을 터트리기는 하지만 . 직업이나 인종,차별, 자격 등 온갖 주류적 가치에서 자유로울수 있었기에 낡은 의례와 습속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창조 할수 있었다
그들도 배움의 길을 가긴 했다. 가다가 옆길로 새 놀이로 들어서도 배움이곧 놀이고 배움과 놀이가 따로 없는 이상적인 교육 형태로 각자 잘할수 있는 것을 배워 달인의 경지에 오랐다. '축지법과 장기의 달인' 천왕둥이, '돌팔매의 달인' 배돌석이, '표창의달인'박유복이, '활의 달인' 이봉학이 음양오행의 이치와 술수를 터득한 양주팔과 타고남 장사에 검술과 말타기의 달인 임꺽정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배우기를 주져하지 않고 스승에 거머리처럼 붙에 배움에 올인하는 그들에게 이시대의 백수들이여 힌수 배우길 바란다.
칠두령들은 제각기 다른 출생의 비극과 가난과 질병, 멸시와 천대. 원한과 복수로 점철된 인생들이기에 허물이나 자신의 인생역경을 있는 그대로 까발려 터놓고 비밀 없는 사이가 될수 있었기에 목숨까지 걸수 있는 쫀득한 우정을 지닐수 있었다.
자격지심과 비밀,거짓으로 포장된 현대의 백수들이여 이들의 우정과 인생관을 부러워 말고 나부터 친구에게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봄은 어떨런지...
임꺽정이 여전히 사랑 받는 이유는 리얼리즘에 있다. 그가 의협심에 불타 세상를 바꾸고자 의적이 된건 아니다. 그는 다만 생계형 도적일 뿐이다. 이점은 홍길동이나 장길산과 비교되는 대복이다. 이들은 단지 먹고 살길이 어려워져 길위에서 만난 이들과 함께 청석골을 만들고 자급자족하는 생활의 달인으로 거듭났다. 특별한 능력의 달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능력을 돈 버는데 쓰지 않고 백수의 자존심을 지킨다. 능력이 어디 화폐가치로 측정 되겠는가. 오늘의 백수들이여 온갖 자격증, 해외 연수등 스펙 만들기에 공들이며 그대들 자신을 화폐적 가치척도에 종속 시키려 하는가. 시간의 노예로 살지 말고 시간을 부리며 살길, 그 자유 시간들을 아낌 없이 신체적 능력을 확장하는데 쓰고 불안해 하거나 두려워 말고 행운과 마주 할때 배짱과 호기로 당당히 기회를 잡기 바란다. 참고로 이책을 읽기전에 필히 임꺽정을 읽고 본다면 좋을듯 싶다. 그래야 제대로된 마이너들의 세계를 들여다 볼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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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한권 씩 읽고 그때그때 리뷰를 썼지만 끝까지 읽고나니 《임꺽정》의 깊이와 넓이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하던 차에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으로 《임꺽정》을 새롭게 다시 읽을 수 있었고, 그 여운을 오래 간직할 수 있었다. 《임꺽정》을 백정의 아들이 두목인 화적패거리들이 나오는 무협지로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지만, 연산군에서 명종조에 이르기 까지 사림의 수난사, 조선의 민속사, 불교와 도교의 사상 및 여성학 등의 다양한 시선으로 읽어내려면 그에 걸맞는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고전에 대한 다양한 저술을 해온 내공을 가진 저자 덕분에 《임꺽정》을 읽으면서 미진했던 부분들이 많이 해소되었다. 전반부에서는 임꺽정과 그의 의형제들이 무전취식을 하면서 길위에서 스승을 만나서 배우고 여인과 사랑을 하고 친구를 사귀는 역동적인 삶을 청년백수들을 위한 대안적 삶의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자존심과 배짱으로 힘차게 사는 이들을 보며 우리 시대의 청춘들도 자학의 늪에서 벗어나 각자의 방면에서 행복한 달인이 되는 길을 찾게되기를 기원한다. 《임꺽정》에 나오는 인물들이 워낙 똘끼가 충만한데다 고미숙 또한 이에 질세라 더욱 명랑한 글쓰기를 하고 있으니 읽는 동안 엔돌핀도 왕창 분비되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후반부의 '사상'편인데 《임꺽정》을 읽으면서 왜 묘향산 거사 정희량과 갖바치 양주팔에 대해서는 벽초가 자상히 말해주지 않는 걸까 안타까왔는데 그 허전함을 많이 채워주었다. "한국 도교사를 보면 한국 도가의 맥을 이렇게 잡고 있다. 김시습-정희량-승대주-정렴(268쪽)." 임꺽정의 스승인 양주팔을 가르쳤으며 천문지리, 사주명리, 주술 및 의약에 도통한 신비로운 사람으로 묘사되는 정희량이 바로 김시습을 이은 한국도교사의 중심인물인 것이다. 정렴도 《임꺽정》에 간신소인배인 정순봉의 장남으로 잠시 나오는 것을 보면 벽초가 성리학 뿐 아니라 도교에도 일가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저자가 "점복술이 사건의 성패를 가늠하는 것이라면, 사주명리학은 평생의 운세를 짚어보는 이치다"(283쪽)라며, 믿거나 말거나 《임꺽정》이 미완으로 남게 된 것을 벽초의 사주풀이로 설명한 것도 흥미로웠다. 임꺽정의 스승인 양주팔은 고리백정이었던 시절부터 범상치않아 백정학자로 불리우며 조광조 등의 사림들과 벗으로 사귀었다. 산천을 주유하다가 정희량 또는 이천년이라고 불리는 도사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나증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병해대사가 되어 생불로 추앙을 받았으니 백정으로서의 신분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한계 조차 뛰어넘었다. 《임꺽정》의 진짜 주인공은 갖바치 양주팔이 아닌가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서,《임꺽정》은 유불선이 한데 어우러진 거대한 용광로이며 우리 민족문학의 보고라고 주장한다. 이제는 《임꺽정》이라는 불멸의 작품을 써낸 벽초 홍명희를 만나러 갈 차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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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만남] 백수 100만 시대, 백수들에게 고함, “임꺽정을 만나라” 고전평론가 고미숙의 표현에 따르자면, 나도 한때 ‘임금 노예’였다. 보다시피 과거형. 지금은 그러니까, 이른바 ‘백수’. 통계청의 실업률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이 사회의 비정규직. 다시 고미숙의 표현을 빌자면, ‘노는 남자’. 이런저런 날품팔이와 앵벌이로 생계를 지탱하고 있는. 혀를 끌끌 찰 양반도 있겠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도와준 것도 없으면서, 쯧. 사실 생이 마냥 암울하진 않다. 나름 애환도 있고 다소 불편한 것도 있지만, 임금 노예일 때와는 다른 재미와 경험을 만끽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10여 년 동안 지탱해 온 임금노예에서 벗어나던 때는 그랬다. 배는 불러오고, 물론 임신으로 착각하진 않겠지!, 월급은 마약이었다. 과감한 포기가 진짜 더 큰 행운을 준다고 믿고 싶으면서도, 노예의 편안에 솔깃한 나이 즈음. 사람살이는 더 이상 달콤하지도 않을뿐더러, 쓰라리고 시큼한 것임을 알 수 있는 나이. 야망과 탐욕이 뒤범벅된 채, 라인잡기에 고민하는 사람들을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풍경. 부동산과 아이들 교육(아니, 정확하게는 사육)이 자신의 모든 것인 양, 자신의 서사를 지우고 있는 사람들. 이 팍팍하고 강퍅한 사람살이! 아, 더 이상 그러다간 죽을 것 같았다. 그런 풍경에 젖어 살다보면, 다른 철학이 있을 수가 없잖아! 꿈 혹은 내 자신은 저 어디 하수구에 처박힌 채,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알 수 없는. 그럼에도 현실을 핑계로 꾸역꾸역 연명해야 할 것만 같은. 스무 살엔 혁명을 해도, 마흔만, 아니 이제는 서른만 넘으면 비루한 현실 속에 귀순하고야 마는 굴레에 풍덩 빠질 것 같은 거라. 내가 거친 대부분 직장도 그랬다. ‘더 세고 많은 것’을 요구할 뿐, ‘세상에 좀더 나은 것’을 만들고자 하는 직장도 그닥 없었다. 영혼이나 철학, 사람이 다 무언가. 그저 경영상의 논리와 사람을 숫자로 치환하는 이윤동기만 횡행할 뿐. 지 멋대로 ‘쁘레땅 뿌르국’(<개그콘서트>의 개그코너)이지 뭐. 뭐 여하튼,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라며, 다양한 이유가 범벅돼 10여년 직장생활, 고이 접어 나빌레라~ 그리곤 다른 시작을 꼼지락대고 있다. 안으로 충분히 쌓질 못하고, 게워내기만 했던, 내 안의 이야기들을 다시 만들어갈 수 있도록 충전하면서.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를 비롯한 고미숙의 책, 이야기는 그런 면에서 백수인 나를 지탱하는 좋은 버팀목이었다. (참조 ☞ 연애불능시대, 사랑탐구가 고미숙, ‘에로스 바이러스’를 뿌리다 )
그리하여, 어찌 이 책, 『임꺽정, 길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고미숙 지음, 사계절 펴냄) 또한 반갑지 아니할쏜가. 더구나 강연도 열린단다. 제목 하여 ‘고전평론가 고미숙, 『임꺽정』으로 쿵푸하다!’. 아니, 임꺽정! 천하를 들었다 놓은 괴력의 장수. 이 땅의 백수를 위해 어떤 강령을 내려 주실라나. 기대 반, 설렘 반. 지난 24일 친구와 함께 신촌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오늘 우리의 만남, 그렇다. 우연이 아니다. 모든 만남은 우연이지만, 우연이 우연을 불러 인연이 넓어지고, 인연은 또 다른 세계를 만나는 통로가 되지 않던가. 운명은 그렇게 찾아온다. “우연이 필연이 될 때, 운명이라고 하죠. 오늘 우리는 크고 엄청난 내공을 지닌 책(『임꺽정』)을 매개로 만났고, 이것이 운명으로 전환될 수 있어요. 이 책의 힘을 빌어서 서로의 운명을 바꿔보는 실험을 해 봤으면 좋겠어요.”
어쩌면 마지못해, 자신을 존중하기 위한 약속 때문에 시작한 일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임꺽정이 고미숙을 낚은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고미숙이 임꺽정에게 풍덩 빠졌다. “한 번 읽어서 원고를 쓸 수는 없잖아요. 더구나 한 번 읽어서 끝나는 건 고전이 아니죠. 2~3번 읽고, ‘이 책을 만난 것이 더할 나위없는 행운’이라고 느껴지는 게 고전이죠. 『임꺽정』을 3번 읽고부터는, 약속을 지킨다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내가 이 이야기를 전파하기 시작했어요.” 그의 동선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임꺽정이 저자의 욕망과 관계의 배치를 바꾼 셈. 그리하여, ‘책이 인생을 바꾼다’는 격언은, 단순한 은유나 수가가 아니라는 것이 고미숙의 전언. 인생의 동선을 바꾸기 위해서는, ‘책’을, 그리고 ‘쿵푸’(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씀. 무엇보다 잊지 마시라. 작업의 으뜸도, 역시 책 그리고 공부다. 글쓰기 또한, 책과 공부를 통해 이뤄진다. 언어가 신체에 들어오면 세포가 도발한단다. 그래서 말이 튀어나오고, 머리가 아닌 몸 전체 세포가 움직이면서 글쓰기가 이뤄진다는 것. 몸으로 밀어붙이는 글쓰기가 중요한 이유. “머리로 한다면 너무 빈곤하잖아요. 기억도 잘 안 나고. 책 읽고 느낌을 말할 수는 있어도 디테일은 나오질 않아요. 그런데 텍스트가 몸으로 쏙 들어오면, 핏줄이나 경락을 타고 움직이다가 툭툭 튀어나와요. 이것이 글쓰기의 중요한 코스에요. 텍스트랑 몸을 섞는 것. 말문이 막힌다는 말이 있는데, 말도 길이 있어야 다녀요. 말일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계속 훈련하는 것도 중요하죠.”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또한 친구. “날 어떻게 생각하든, 미워하든 간에, 공동체 혹은 내 말을 들어주는 친구가 있어야 해요. 공부는 혼자가 아니고, 네트워크 안에서 이뤄져야 하거든요.” 이 정도만 해도,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지 않은가. 이 넓은 세상 위에, 그 길고긴 시간 속에, 수많은 사람들 속에, 책을 매개로 모인 사람들. 그리고 이것을 읽는 당신. 임꺽정과 그 무리는 의적이 아니다, 그저 ‘노는 남자들’! 그런데 한번 떠올려보자. 임꺽정. 어떤 생각부터 드는가. 의적? 민중의 대변자? 그건 80년대, 쌍팔년도의 시선이다. 저자는 “가끔 의적 노릇을 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아니”란다. 의적이 되겠단 생각도 없다. 의적이 되겠다는, 의적이 되어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하겠다는 명분 따윌랑도 없다. 많은 뜻 있는(?) 독자들과 비평가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하겠나. “고전은 프리즘을 바꾸면 다른 각도에서 읽을 수 있어요. 시대를 바꿔가며 재해석 되죠. 『논어』가 왜 아직까지 읽힐까요. 한 번 보고 접는 교과서와는 달라요. 졸업 뒤에 교과서를 꺼내 감동을 되새기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아요? 교과서에 실린 글만큼 좋은 것도 드문데 대부분은 왜 그것들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지 않을까요. 거기 있는 텍스트는 단 하나로만 해석됐기 때문입니다. 교과서에 실리는 순간, ‘지식 통조림’이 되죠. 단 하나의 척도로만 해석되는 것은 폭력적이에요.” 모름지기 생명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이질적이어야 한다. “계속 재해석될 수 있다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어요. 똑같은 해석의 지평을 갖는 것은 생명력이 없어요. 『열하일기』라는 텍스트가 200년 뒤 나에게 말을 걸고, 나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느낌이었어요. 『임꺽정』이 80년대 ‘민중변혁’으로 끝났으면 고전이 되지 못했을 거예요. 말의 웅성거림을 들려주고 내 몸의 세포들이 참지 못하고, 그래서 내가 (『임꺽정』을) 세상에 전달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어요.” 다시 돌아가서, 임꺽정은 의적으로 보기엔 상당히 하자(?)가 많다. 임꺽정 입장에서도 ‘왜 의적으로 살아야 해?’라고 버럭 화를 낼지도 모른다. “백정이지, 힘은 장사지, 자존심은 더럽게 세고, 그런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반역자 밖에 없죠. 무슨 이념이나 그런 걸 갖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내가 나답게 살려는 힘이 강한 겁니다. 살다보니 청석골에 가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80년대를 비롯 오랫동안 금서로 묶여있던, 의적도 아니요, 민중의 대변자도 아닌, 임꺽정과 그 청석골 무리가 지금에 와서 고미숙을 도발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얘들이 다 백수, 노는 남자들이라는 것이 절 감동시켰어요. 감동을 넘어 경이로웠죠. 이들은 계급이나 신분을 뛰어넘겠다는 욕망도 없어요. 어떤 정규직도 갖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저자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조선의 선비들도 그렇지만, 그리스 시대에도 자유인은 직업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 시절 노예란 정규직을 가진 이들이었다. 평생 한 가지 직장과 일에 붙박여야 하는 것, 그것이 노예의 저주받은 숙명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토록 정규직을 열망하는가? 과연 그게 자연스러운 생존 본능일까? 백수는 임금 노예인 정규직을 얻지 못해서 안달복달하고, 정규직은 언제 거리로 내몰릴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그래서 결국 백수나 정규직 모두 노예가 되어버리는 오늘날의 기막힌 현실! 이 현실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우리를 꺽정이와 그의 친구들은 이렇게 선동한다. 제발 그렇게 한심하게 살지 말라고. 길 위에도 얼마든지 ‘자유의 새로운 공간’이 존재한다고. 그러고는 이렇게 다짐한다. 길 위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수해주겠노라고.”(p.20) 지금 시대의 통념에서 벗어난 이들이 가진 놀라운 에너지. 노는 데서 나오는 그 에너지. 의사 혹은 변호사와 같은, 고소득 전문직을 선망하는 시대에서 빗겨난 반역의 에너지. “지금은 잉태했을 때부터, 의사가 임신 몇 개월이라고 얘기할 때부터 대학에 가야한다는 임무가 있잖아요. 내 아이의 ‘싱크빅’을 위해서 태교를 하고. 그런데 의사가 돼서 병들고 불편한 사람들을 좀더 자유롭게 해주겠다는 그런 말은 별로 못 들었어요. 잉태되는 순간부터도 고액 연봉의 정규직이 되겠다는 욕망만 있고. 그건 고소득층뿐 아니라 중산층, 빈곤층까지 똑같습니다. 아까 말한 교과서적인 사회, 단 하나의 척도 밖에 없는. 역사 이래, 지금처럼 정신줄 놓은 세대는 없을 거예요. (웃음)” 청석골, 그 야생적인 삶을 위해 노는 남자들이 활개를 치는 청석골은 어떤 곳일까. 연인의 사랑보다 진하고 핏줄보다 더 질긴 칠두령의 사랑이 있고, 그런 인연들이 얽히고 설켜서 만들어진 일종의 인디언 부락. “추방당한 존재들이다 보니 이들에겐 정착민의 규범이 부재한다. 어떤 권위나 습속에도 예속될 필요가 없다. 대신 현장이 요구하는 윤리적 규칙들이 그때그때 만들어진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유동성, 낡은 가치들을 교란하는 불안정성, 그리고 그것이 유발하는 역동적인 야생성 등 이것이 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특이성이다.”(p.21) 이곳엔 백수들의 야생의 삶이 있다. 크왕~ “청석골에는 싸우면서도 코믹과 해학이 함께 합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삶. 이것이 지금 필요한 야생적인 삶이죠. 이런 이질적 삶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어요. 천민, 추방자, 아무 것도 없는 존재들이 펼치는 파노라마를 우리 시대 중산층의 교과서적인 삶과 비교할 때, 우리는 너무 허접하게 사는 것 아닐까요. 연봉이 5000만원이 돼도 피가 말라요. 연봉이 1억원이 돼도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2억원을 벌어야 하고. 사회적으로 어떤 기득권이 없음에도 자유로운 사람들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지금은 영양과잉의 시대죠. 밥이 얼마나 위대한지도 모르는.”
부러우면, 지는 거? 아니, 부러우면 따라 해라.
그런 게 부러우면, 우리도 해야 한다. 부러우면, 그들을 벤치마킹하라. “이들은 추방당한 존재들이면서 또한 탈주하는 자들이기도 했다. - 추방과 탈주!”(p.52) 따지고 보면, 비정규직, 실업자 등도 사회에서 추방당한 자들. 추방당했다고, 좌절과 우울에 빠져 있을 것인가. 천만에.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탈주와 연대. 저자는 과객문화의 부활을 강조한다. “밥은 기본적으로 나눠먹는 것이 원칙이에요. 시공간이 열려 있으니까, 백수로 먹고 살 수 있는. 지금은 연봉이나 저축이 없으면 불안하고, 내 것이 없으면 굶어죽거나 왕따가 되죠. 그래서 ‘등처가’도 필요하고. 어쩌면 이네들은 하나 같이 다 백수일까요. (웃음)” 물론 이네들의 삶이 완전하고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시대의 획일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이 아닌 다른 상상력을 끄집어내기. 하나의 유형에 불과한 것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임꺽정』에서 볼 수 있듯이) 사돈 처녀에게 얻어먹는 것이 왜 쪽 팔려야 하나요. 결혼을 해도 지금 한쪽이 경제력이 약하면, 눈치보고 라이벌 의식 느끼고 그러죠. 그러면 결혼하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경제적으로 개길 수 있는 것이 많아지는 게 가족 아닙니까. 『임꺽정』에서는 헤쳐모여 살고, 떠나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집을 선물하고 갑니다. 이 얼마나 좋은 미풍양속입니까. 미풍양속을 보존하고 이어받자면서 왜 이런 것은 이어받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과객문화, 집 선물, 사돈이 팔촌과 같이 사는 것.”
“한편으로 가족으로부터 탈주하고, 다른 한편으론 사돈의 팔촌까지 서로 뒤엉켜서 새로운 패밀리를 이루는 것. 이 둘은 아주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깊이 연동되어 있다. 가볍게 떠날 수 있는 자만이 언제든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법이므로. 그에 비하면 우리 시대 가족관계는 얼마나 무겁고 고달픈지. 고작 3, 4인에 불과한 핵가족임에도 늘 소통의 결핍에 시달리고, 그럴수록 더더욱 서로에게 집착한다. 떠날 수도 없고, 머물 수도 없는, 집착과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성(城) 혹은 감옥. 가족이 세상과 소통하는 출구가 아니라, 그 출구를 봉쇄하는 창살이 되어버린 시대. 가족주의와 사적 소유를 오버랩시킨 대가치고는 참 가혹하지 않은가.”(p.34) ‘교포박’(교수를 포기한 박사)이라고 불린 저자는 본의 아니게 그런 삶을 살게 됐다. ‘수유+너머’가 그런 비빌 수 있는 바닥이고. “이제는 스스로 탈주해야 해요. 내 자유를 위해서. 나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욕망의 배치가 바뀔 때 삶의 생성이 일어납니다.” 진짜 사랑과 성도 청석골에 있다 저자는 청석골의 억세고 드센 여성들은 물론, 무엇보다 그네들이 만드는 사랑에 감탄했다. “사랑을 하는 것은 의식과 이성의 영역이 아닌, 몸 안의 굉장히 다양한 자연의 지침이 신호를 보내주는 겁니다. 대상이 바뀌어도 똑같은 건, 내 안의 지층이 아직 살아나지 않은 거죠. 나를 아직 모르는 겁니다. 여기서 읽은 그런 얘기들을 『호모 에로스』를 교정할 때 막 넣기도 했어요. (웃음) 내 안에 있는 원초적 세포가 움직일 때는 사회적으로 어떤 압력이 와도 꿈쩍 않아요. 태풍의 눈과 같은 거죠.” 저자는 연암 박지원에서 2% 부족한 것을 임꺽정과 그 무리들에게서 찾았고 해소했다. 성과 사랑. 연암은 인텔리다 보니 성에 대해선 노코멘트. “조선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면 이 책을 보면 됩니다. 어법이나 불타는 풍속도를 리얼하게 보여줍니다. 홍명희도 그런 야담이나 야사, 풍속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노래도 있지만, 그렇다, 사랑은 아무나 한다! 소유나 출신, 외모와 학벌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다만 필요한 건 낯선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충만한 몸뿐이다. 그런 점에서 길이야말로 에로스의 거처다. 집과 가문의 울타리에서라면 절대 불가능한 마주침이 길에서는 흘러넘친다. 예기치 않은 만남과 열정이 폭발하는 사랑의 성소, 그곳이 바로 길이다. 그 위에서 ‘충만한 신체, 충만한 대지’가 뜨겁게 교차한다.”(p.164) 책에 나온 꺽정이와 운총이의 사랑도 잠깐 언급하자. “병해대사를 따라 백두산을 유람하다 운총이를 만났고, 이제 다시 백두산을 떠나 어디론가 가야만 한다. 목적도, 방향도 없고, 언제 어디서 끝날지도 기약할 수 없는 길, 그런 길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랑도 사실 기약이 없다. 언제 만날지, 아니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알 수 없다. 헌데 중요한 건 그럼에도 사랑을 하고 혼인을 한다는 사실이다. 놀랍지 않은가? 사랑은 반드시 미래가 보장되어야 하고 결혼을 하기 위해선 만반의 준비-직업, 아파트, 자가용, 기타 등등-를 갖추어야 한다고 굳게 믿는 우리 시대 청춘들로선 가히 ‘혁명적인’, 아니 ‘미친 짓’이다. 하지만 꺽정이와 그의 친구들에겐 이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랑이란 본디 그런 자질구레한 기준과 통념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 아니던가. 이것저것 재고,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보고, 그러다 언제 사랑을 한담? 아니, 그리고 그런 게 뭔 사랑이람? 하고 도리어 우리에게 반문할 것이다.”(p.157) “좋은 앎이 좋은 몸, 좋은 삶을 만든다” 시대의 획일적인 압박과 폭력에 포박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뭣이 있을까. 공부다. ‘공부의 힘’이 백수를 자유롭게 한다. 삶하고 분리된 공부가 아닌. 고미숙 왈. “좋은 앎은 좋은 몸을 만듭니다.” 말과 글, 글과 삶, 그 사이가 먼 우리에게 제대로 된 앎이 필요하다는 말이렷다. “사회적 장벽과 경계를 가로지를 수 있는 가치는 공부와 앎, 오직 이것뿐이다.”(p.42) 모름지기 잘 사는 것은, 돈이 많거나 권력을 쥐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간극이 없는 것이다. “지금 대학들은 뇌사 상태고, 지식은 무용지물이에요. 자본주의 측면은 물론 인생에서도 도움이 안 돼요.” 더 많고 풍요해졌음에도 우리가 잘 살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이유. 그러면 어떤 공부가 좋을까. 저자는 고전을 권한다. 고전은 아까도 말했듯, 시대에 따라 재해석되고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것. 그것은 “너무 깊고 넓”기에 가능하다. 히말라야에 끊임없이 오르는 것과 같다. 히말라야는 오를 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크고 넓은 바다를 끝없이 가도 새로운 길이 보이는 것과도 같다. “우리가 아는 성경, 불경, 논어 등은 정말 소박한 말들로 돼 있는데, 그럼에도 넓고 깊은 비전이 있어요. 임꺽정은 아직 얼마나 폭이 넓은지 알 수 없으나, 어휘나 관계, 동선이 지금 우리시대의 소설보다 강도나 밀도 면에서 시대를 더욱 잘 읽게 해 줘요.” 고전을 읽는 이유는, 그리하여, 지금 여기의 삶을 위해서! “나의 삶을 변환하기 위한 힘으로 고전만큼 든든한 빽이 없습니다.” 고전과 함께 필요한 것은, 자아의 증식을 가능하게 해 주는 사람. 병들고 소멸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함께 놀고 공부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스승, 친구라면 더욱 얼쑤~ “요컨대 친구란 초월적 가치의 대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생을 함께 구성해가는 동반자를 의미한다. 이처럼 시공간을 넘어 주류적 사상의 지형에서 탈주한 이들의 윤리적 무기는 언제나 우정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주류적 질서란 늘 수직적 위계를 중심으로 구축된다. 따라서 그로부터 탈주하기 위해서는 수평적 연대로 이동해야 한다. 수직적 위계에서 수평적 연대로! 탈주와 전복은 거의 예외없이 이런 흐름을 탄다. 우정의 윤리가 부각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우정보다 더 수평적이고 역동적인 가치는 없는 법이다.”(p.141)
저자는 바란다. 길의 시대에 비전, 이들의 힘과 지혜를 세상에 널리 전파하는 전령사가 될 수 있길. 그리하여, “이 땅의 모든 백수들 혹은 백수를 꿈꾸는 이들이 길 위에서 살아가는 배짱과 기예를 터득할 수 있기를. 또 그리하여 길이 곧 삶이 생성되는 장소가 될 수 있기를. 그 생성이 이 세계를 한없이 불온한 열정으로 뒤덮을 수 있기를. 청석골 칠두령이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p.21) 이날의 마무리도 그리 하였도다. “애인이나 애인을 삼고 싶은 사람과 『임꺽정』을 같이 읽으세요. 2~3개월 같이 읽다보면, 저절로 다 됩니다. (웃음)” 거듭 생각한다. 누구 말마따나, 새로운 모럴을 창조하지 못하면 저항이든 혁명이든 아무 소용이 없다. 이 시대에 바이러스처럼 퍼진 획일적인 모럴만 가지고선, 우리에게 자유는 없다. 자존심을 지킬 수도 없다. 만국의 백수들에게, 지금 필요한 건 뭐? 임꺽정! 놀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노는, 임꺽정을 만나자. 그리고 연애가 고픈 자들에게도. 연애 하고 싶다고 징징거리지만 말고, 『임꺽정』을 펴라. 그 전에 애피타이저로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을 읽어도 좋겠다. 빙고~ [YES24 기고원문 미세수정본]
(* 고미숙 샘도 그랬고, 함께 간 이도 그랬다. 연애, 작업의 으뜸은 독서라! 격하게 '동감'을 표하노라. 연못남(연애 못하는 남자)·연못녀(연애 못하는 여자)에게 책읽기를 권한다. 그래도 연애가 안 된다고? 그럼, 아직 '시절인연'을 만나지 못한 거다. 읽고 또 읽을 지어다. 시절인연의 맞닿음을 위해. (참조 ☞ 연애불능시대, 사랑탐구가 고미숙, ‘에로스 바이러스’를 뿌리다 ) 음, 결혼까지는 모르겠다. 그건 좀 다른 문제라.ㅋㅋ 그래도 결혼 못(않)은 수컷으로서 분명히 추정컨대, 책 읽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생활은 무자게 괴로울 거라는 것. 아니면 말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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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모든 마이너가 전수받아야 할 삶의 노하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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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안하고 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