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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외국작가의 소설, 그것도 단편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무언가에 단단히 자극을 받았기 때문일 게다. 마루야마 겐지,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작품집을 읽게 된 것도 마찬가지 이다. 윤대녕의 산문집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에서 윤대녕이 추천한 29권의 책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 책 또한 처음 받아 들고, 쉽사리 읽지를 못하고 오랫동안 묵혀 놓았다. 외국소설, 그것도 단편집을 그다지 읽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율배반적 이지만 구매할 때는 선뜻 했으면서, 받아 들고서는 고민을 많이 했다. 책에는 중편소설 2편이 실려있다. [달에 울다]와 [조롱박 높이 매달고]가 그것이다. 구도자적인 생활로 주목을 받은 작가라 하는데, 막상 작품을 읽고서는 왜인지 모를 허기가 몰려온다. 작가 자신의 삶을 얘기한 것 일까? 두편 다 장소에 집착하는 남자의 고독을 엿볼 수 있다. 시소설(詩小說)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평가 받는다는 [달에 울다]는 그래서인지 그냥 시를 읽는 것 같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한장면, 한장면이 눈앞에 있는 것 마냥 그려진다. 소설속 주인공인 나는 사과농사를 짓는 농가의 외아들로 태어나, 10대, 20대, 30대를 함께 성장한, 처음으로 사랑했던 여자 야에꼬가 마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때 까지를 그리고 있다. 방안엔 병풍이 쳐져 있다. 그리고 병풍 안에는 법사가 그려져 있다. 주인공인 나는 사과 밭을 경작하며 한번도 고향을 떠난 적이 없지만, 법사는 세상을 유람하고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계절이 바뀌면서 나의 이야기도 바뀐다. 봄 병풍의 그림은 중천에 걸려있는 흐릿한 달, 동풍에 흔들리는 강변의 갈대 그리고 걸식하는 법사다.(8p) 촌장집 곳간을 털던 야에꼬의 아버지는 마을사람들에 들켜 쫓기고, 결국엔 붙잡혀 나의 아버지 손에 죽는다. 야에꼬는 어머니와 함께 마을을 떠난다. 30년전, 소설속 주인공 내가 10살 즈음의 일이다. 여름 병풍에 그려진 것은 산기슭에 걸린 초승달, 천지에 무성한 초록 풀 그리고 거지 법사다.(32p) 야에꼬와 사랑에 빠진 나는 시간만 나면 야에꼬의 몸을 탐한다.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 하지만, 야에꼬는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나를 유혹한다. 20살 때의 일이다. 가을 병풍에 그려져 있는 것은 그림자 하나 없는 명월, 가을바람에 굽이치는 초원, 그리고 거지법사다. (61p) 야에꼬는 아이를 하나 기르고 있다. 내 아들은 아니다. 난 한 3년 사귀다가 그만두었다. 야에꼬는 마을의 다른 사람들과도 사귀었으며, 그렇게 지내다가 어머니가 죽자 마을을 떠난다. 난 야에꼬를 역까지 바래다주었다. 10년전 30살 즈음의 이야기다. 겨울 병풍에 그려져 있는 것은 잘 닦인 겨울 달, 얼음과 가루눈에 갇힌 산정호수, 그리고 거지법사다.(84p) 눈이 내리는 날, 야에꼬가 돌아왔다. 읍내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야에꼬가 눈 속에 누워있다. 한 순간도 내 의식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야에꼬 였다. 이 작품도 그렇고 [조롱박 높이 매달고]도 마찬가지다. 한 남자가 나오고, 그는 자신의 삶의 근원인 고향에 집착하고, 자신이 살아온 날들은 물론 모든 것들과의 단절을 꿈꾼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다시 찾아가는, 고독의 길을 가고 있다. 생각해보면 겁에 질려 살아온 40여 년이었다. 잃는게 두려워서 분투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차례차례 잃어만 갔다. 그러나 나는 많은 것을 잃었기 때문에 나 자신으로 되돌아 올수 있었다. (134p) 이렇게 되기까지, 이렇게 알기까지 소설속 주인공 나는 흔들린다. 바람이 불어온다. 문득 나는 어떠한지 생각해본다. 나는 지금 있는 이공간에서 무얼 느끼고 있을까? 지금껏 살아온 삶 속에서 얻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잃는 것이 아까워서, 두려워서 혹시 더 많은 것을 잃어 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본다. 작품을 쓰는 것이 구도(求道)가 되어버린 작가. 그는 자신의 삶을 그렇게 반추해보고, 자신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 것 같다. 나는 나를 찾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리고 지나가버린 전반기 삶 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바람이 불어온다. 차가운 바람이다. 그리운 바람이다. 그리고 서글픈 바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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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달에 울다」와 「조롱을 높이 매달고」라는 두 편의 중편 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개인적으로 마루야마 겐지는 『물의 가족』과 『천년 동안에』 이후 세 번째인데, 표제작이기도 한 「달에 울다」는 이 두 작품과 기본적인 정서나 이야기의 구조가 유사하다. 이들 작품은 주제, 동기, 음형(音型)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변형한 변주 같다. 소년이 자라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된다. 1000일 넘게 사랑했던 여자는 그의 나이 서른에 고향을 떠나, 마흔 하고도 십 개월이 되던 해에 돌아오지만 죽는다. 한 남자가 살아온 40년 하고도 십개월의 무거운 시간의 흐름이 맹렬하기보다는 도도한 큰 강의 흐름처럼 흘러간다. 견고한 ‘가족’과 ‘마을’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숨막혀 하는 개인을 본다. 그 개인들의 자포자기를 본다.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질 수 없는 개인의 절망을 본다. 운명에 꼭꼭 묶인, 해방되고 싶으나 해방될 수 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힌 한 인간을 본다.
어제와 오늘이 별반 다를 게 없는, 그저 그런 일상일수록 사랑은 더욱 강렬하다.
‘소설은 너무 이완되어 있고, 시는 너무 긴장되어 있으며, 이 두 장르의 한가운데가 영화’라고 생각한 마루야마 겐지는 시와 소설의 중간적 장르를 갈구해왔는데 이 작품은 그가 추구한 시소설(詩小說)의 정점에 있다. 시의 함축성과 소설의 서사성을 함께 가진 이 작품에서 소설의 문단(文段)은 시의 연(聯)처럼 기능한다. 그리고 각 문단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이루지만, 각 문단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진다. 어떤 문단을 읽어도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시처럼 읽힌다. 『천년 동안에』나 『물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단문으로 구성되어 매우 강렬하다. 마루야마 겐지의 문체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과 정체되어 있는 개인 사이의 괴리, 아무리 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 남자의 고독과 슬픔이 병풍 속 법사의 이야기와 교차함으로써 효과적으로 부각된다. 태어날 때부터 그를 지켜보던 법사가 그려진 사계절의 병풍은 마흔하고 십개월을 산 그를 여전히 굽어보고 있다. 볏짚을 채운 요와 고이노보리를 부셔 만든 이불 속에 있던 열 살의 아이는 30년 십 개월 뒤 전기담요와 전기요 사이에 끼어 있는 사내가 되었다. 그러나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교교한 보름달의 독기서린 빛, 비파 소리를 닮은 강풍이 쏟아내는 비통한 절규가 청년을 압도하고 영혼까지 마비시켰기 때문일까?
그리고 달은 개기월식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핏빛 선연함과 푸른 물의 차가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물, 달, 사과나무의 이미지가 ‘차갑고 그립고 서글픈 바람’과 같다. 개기월식으로 하늘에 떠있던 달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날, 그의 고독과 광기도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을까? 철저한 어둠 속에서 숨죽여 울고 있는 한 남자의 울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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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아먀 겐지 선생의 에세이를 읽고 이 냥반의 소설이 무척이나 궁금했었습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해요. 에세이임에도 문장이 아주 괜찮았었거든요. 물론 그렇다는 것은 번역자 분이 잘 했다는 얘기도 되는 것이지만 어쨌거나 그게 큰 동기였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게다가 한가지 더 추가한다면 그 에세이에서 말하는 겐지 선생의 생각은 그야말로 저랑은 정반대의 것들 천지였거든요. 거의 모든 사고 방식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하나도 맞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겐지 선생의 글이 궁금했다는 건, 그만큼 문장에 대한 힘이 컷다는 방증이 되기도 하겠네요. 이 분, 정말로 자신이 센코쿠 시대의 사무라이라고 생각하고 사시는 분 같거든요. 내 글이 좋으면 책이나 사보면 돼지, 뭘 찾아와서 싸인을 해달라는 둥, 귀찮게 하느냐, 하고 버럭하시는 분이십니다. 어쨌거나 전반적으로 사회성은 크게 부족해보이는 듯한 선생이셔요.
이 책은 두 편의 중편소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가 타이틀인 <달에 울다> 이고 다른 하나가 <조롱을 높이 매달고> 입니다. 여기서 조롱은 새장을 말해요. 달에 울다. 제목 참 멋지지 않습니까. 이 작품을 두고 천 개의 시어가 빚어낸 한 편의 소설이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전개와 문단 구성 자체가 약간 시처럼 되어있기도 합니다. 헤르타 밀러 아주머니의 <숨그네>처럼 말이죠. 박민규 작가님의 <죽은 왕년를 위한 파반느>도 일반적인 문단하고는 양식이 좀 다르죠? 전부 달에 울다 계통인 것 같습니다. 내용보다는 운율에 더 많이 신경 쓴 듯 보이는 작품이었어요. 그러니 반대로 말하자면 원작의 맛을 느낄 수 없었을 뿐더러, 감동도 없었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머리로만 이해될 뿐, 문장을 읽으면서의 기쁨은 없었습니다. 이건 역자의 문제라기 보다 아마도, 원문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면서 겪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종종, 한국어로도 각운을 맞추려고 애쓰신 듯 보이는 문장들이 있었으나 아무래도 그건 한계가 있었죠. 해서 이 작품만 읽었다면 크게 실망하여 다시 마루야마 겐지의 작품을 일부러 찾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작품이 대단히 실망스럽다기보다 제 기대치가 아주 높았었기 때문이지요. 재미있다고 볼 수 없었음에도 뭔가 모르게 예술의 분위기는 풍기고 있어서 무시할 수만은 없는 묘한 경계에 선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작품인 <조롱을 높이 매달고>에서 겐지 선생이 표현하고자 하는 작품의 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좋더군요. 물론 대중적인 재미를 가진 소설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문장 또한 그 자체로는 대단히 아름답다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범상치 않은 묘사가 많긴 했지만 그 자체로 탁월하다고는 하기 어려웠지요. 그러나 작품 자체가 가진 분위기가 압권이었습니다. 고독한 자의 표상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 작품에서 풍기는 고독은 말하자면 카프카의 그것 같은, 정말 작가 자신이 고독하지 않고서는 뽑아낼 수 없을 것 같은 리얼 고독이었습니다. 만든 감정이 아니라 살아있는 그대로의 진짜 감정. 마를렌 하우스 호퍼의 <벽>이란 작품과 그 분위기가 대단히 유사했어요. 분위기 자체만으로 고급 문학이라는 느낌을 줄 정도였으니 대단히 정제된 작품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한국 순문학 중에서도 괴로워하듯 독백하는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잘 맞는 취향일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스토리가 중요한 독자 분에게는 절대 맞는 소설이 아니니 제목이 아무리 멋져도 노노.
어쨌거나 읽고난 전체적인 이미지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멋있네. 제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후후, 가오 있는데. 20대 식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오오, 간지 좀 나는데? 10대 식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님 좀 짱인 듯. 한 자리 숫자 나이를 가진 애들 식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아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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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달빛에 자신을 비춰보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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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고 쓸쓸하다. 소설은 삶이 지닌 얼굴 중, 냉기를 부각한다. 담담하고 서늘한 어투로.
<달에 울다>는 40세 농촌 총각의 온삶(전생애) 반추기이다. <조롱을 높이 매달고>는 가족과 헤어진 40대 중년남자의 제 2의 삶 이야기이다. 남자의 내면에 자리한 황폐함이나 고독을 글로 푼다면, 이 소설을 뛰어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들의 내면은 왠지 그럴 것 같다.
<달에 울다> 이곳은 사과를 주로 재배하는 마을. 농약과 비료로 척박해지는 땅과 농사빚으로 가난해지는 마을 사람들의 가계와 산업화로 죽어가는 농촌. 기쁨의 빛깔은 다채로우나 슬픔은 한 가지 빛이다. 농민소설에서 보곤 했던 농촌의 실상이 여기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를 게 없다.
“소나 말에 못지않은 노동, 소독약 냄새, 땀투성이, 흙투성이의 나날, 일 년 내내 바뀌지 않는 식사, 길고 할 일 없는 겨울, 그런 생활에 뛰어들 젊은 여자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이건 민중문학, 소위 농촌소설이 아니다. 여기에 담기엔 용어의 한계가 뚜렷하다. 인간의 내면을 짧고 예리한 문장으로 새긴 이 소설을 두고 누가 그랬던가, 시소설이라고.
촌장집 창고를 누군가 털었다. 마을 사람들이 추격했다. 도망자는 마을 남자, 야에코의 아버지였다. 소년의 아버지도 쫓았다. 혁혁한 공을 세웠다. 도망자는 붙잡혀 죽었다.
이 사건은 마을 사람들 기억에서 암묵적으로 존재한다.
소년은 야에코를 좋아했다. 소년과 소녀는 과거의 그 일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게 좋다. 소년과 소녀는 서로에게 첫여자이고 첫남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더는 연연하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야에코는 아비 모르는 아이를 낳은 후 어머니를 여의고 마을을 떠난다. 비 오는 밤, 남자가 된 소년이 야에코를 전송했다. 사과꽃향기 가득한 야에코와 그녀의 아이를.
병풍그림이 있는 방에서 잠을 자는 소년의 시선을 독자들은 따라간다. 소년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회상한다. 계절에 따라 나이를 먹는다. 인생의 사계절을, 40년하고도 10개월이 된, 지금의 내가 회상한다.
다시 봄, 은 없다.
남자는 어느 여자와 혼담이 오갔으나 뒤엎어지고, 아비와 어미도 때가 되어 죽는다. 소년은 이제 홀로 남아 사과농사를 짓는다.
소설은 변화를 짜임새있게 그렸다. 계절이 바뀌면 병풍그림의 철이 달라지고, 소년의 이부자리가 바뀌고, 나이가 들어간다.
겨울, 맨발로 돌아온 야에코에게 눈이불을 덮어준다.
개기월식이다. 계절마다 등장했던 달이 드디어 사라진다. 야에코의 죽음을 암시하며 소설은 끝맺는다.
<조롱을 높이 매달고>
“생각해보면 겁에 질려 살아온 40여 년이었다. 잃는 게 두려워 분투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차례차례 잃어만 갔다. 그러나 나는 많은 것을 잃었기 때문에 나 자신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 내 주위에는 나밖에 없고, 나는 그런 나에게 눌리어 숨이 막힐 것 같다.“
남자는 헛것이 보인다. 또 하나의 나와 이야기도 나눈다. 두 아들과 아내는 나를 버렸다. 남자가 그들을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폐허가 된 고향의 폐가에서 캠핑을 하는 남자. 마을사람들이라면 대개는 피리새를 키웠던 시절. 그 시절을 회상하며 혼자만의 휴식을 맘껏 즐기고 싶다.
하지만 폐허는 또다른 폐인의 점령지이다. 바싹 마른 노인 하나가 토굴 속에서 산다. 노인에게는 남자가 가지지 못한 게 있다.
“피리새 소리는 내 온 몸 깊숙이 스며들어 영혼의 가장자리까지 도달했다.“
피리새. 한 번도 피리새를 가지지 못했던 시절. 남자는 노인의 피리새를 가져온다. 돈을 남겨두고. 노인이 돈에 응한 적이 없으니, 남자는 도둑질을 한 셈. 그러나 남자는 점점 자기합리화를 한다. 세상을 경멸하였으나, 그 또한 자신이 경멸하던 세상이 되어간 셈이다.
아비를 위해 몸을 파는 여자, 빨간 하이힐을 신은 딸이 남긴 편지 '노인의 낙을 빼앗지 말아주세요.'
남자의 폭력적인 말에도 묵묵부답이었던 노인이 남자를 향해 던진 말 "자넨 마음이 가난하고 비열해."
말을 탄 3인의 무사 환영을 보곤 했던 남자는 어쩌면 자신이 구원하고 싶었거나 동정해야 할 이들에게서 자기의 본질을 마주하는 말을 듣고는 괴로워한다. 내적 규율, 도덕과 갈등하지 않았다. 다만 짓밟힌 자존심이 분노를 일으킨 것이다.
결국 노인은 마을의 노천온천에서 자살을 하고, 남자는 다시 도시로 돌아와 일을 한다. 노인의 자살을 간접적 타살로 해석할 수 있지만, 무엇도 단정할 수 없다. 우리가 혐오했던 것들을 닮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언뜻언뜻 마주할 수밖에.
두 편의 소설 주인공 남자들은 회상을 한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아니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마도 체념이 소망을 압도하여, 이제는 회한이 남았다.
소설은 40대의 남자를, 돌이키기엔 늦었고 나아가기엔 힘이 달리는 그의 정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오직 그것뿐이다. 그이들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없이 고독해지는 순간에 읽어야 한다. 완벽한 몰입을 위하여.
“차갑고, 그립고, 서글픈 바람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을이 깊어졌고, 산에 있는 나무들이 단풍 들고, 그리고 갑자기 겨울이 왔다.“
소설의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겹쳐지는 문장이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백석 시 중에서
‘차갑고 그립고 서글픈’은 ‘외롭고 높고 쓸쓸한’과 만난다. 마루야마 겐지는 바닥까지 차갑다. 백석은 외롭고 따뜻하다.
고독에도 온도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삶의 촉각이 점점 예민해진다.
이건 아마도,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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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지는 물론 워낙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고, 전부터 계속 꼭 읽어봐야겠다.. 생각하고 있던 작품이기도 하지만, 읽는 내 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을 한두 번 느낀 것이 아니다. 힘차고 남성적인 작가이자 건조하면서 폐부를 찌르는 회심의 필력을 자랑하는 비범한 작가라고만 생각했는데 그의 작가적 역량이 내 짧은 생각만큼 단조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다. 문장은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서 선명하고 생생하게 펼쳐지고, 장면을 풀어나가는 작가의 필력은 여전히 살아 숨 쉬며 내용 또한 거대하지 않으면서 또 정신없이 빠져들게 만든다. 읽고 나면 <달에 울다>의 사과나무, <조롱을 높이 매달고>의 피리새, 하이힐 소리가 시각과 청각을 강렬하게 사로잡으며 생생한 이미지로 남는다. 둘 다 작가의 특별함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상징의 정점이다. 여성적이며 지나치게 감수성 예민하지 않아도, 미사여구와 현학으로 포장된 길고 장황한 문장이 아니어도 한 줄에 숨겨진 진짜 뜻이 무엇일까 머리 싸매가며 고민하지 않아도 문장은 살아있고, 내용은 간결하며 핵심적이고 뚜렷하다. 역시 뛰어난 작가다.
<달에 울다>도 함께 수록된 <조롱을 높이 매달고>도 무엇 하나 버릴 곳 없는 매끈하며 꽉 찬 수작이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 덕분에 확실히 책을 든 내 손이 즐겁고 마음이 윤택해진다.
#연말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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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장인이 시어를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엮어 만든 소설
달이 우는 것도 아니고 달에 울다니. 제목부터 마음을 확~ 사로잡는다. 이 책엔 <달에 울다> 이외에 <조롱을 높이 매달고>라는 중편이 실려 있는데, 소설의 형식은 다르지만 분위기는 비슷하다.
# <달에 울다>
가을 병풍에 그려져 있는 것은 그림자 하나 없는 명월, 가을바람에 굽이치는 초원, 그리고 거지 법사다. 흠집투성이 비파를 등에 멘 장님 법사는 회오리바람에 휘청이며 삭막한 황야를 헤매고 있다. 어디에도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짐승의 기척조차 없다. 그러나 비쩍 마른 그의 몸은 추억에 가득 차,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행복했던 나날들을 생생하게 기억해낸다. 교교한 보름달의 독기 서린 빛이 등골까지 스며들어 골수를 파먹고 있지만, 법사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강풍이 쏟아내는 대지의 비통한 절규는 어딘지 비파 소리를 닮았다. 그것은 병풍 곁에 깔린 호사스러운 이불 속에 들어가 있는 청년을 압도하고, 영혼까지 마비시켜버렸다.
사과 농사를 짓는 시골 마을에서 자라는 남자 아이. 아이는 어른으로 성장해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그 마을을 떠나지 않고 살아간다. 오직, 방안에 놓인 병풍의 4계절 그림을 벗삼아, 그 그림에 자신의 마음을 이입시키고 소통한다.
마을에는 짝사랑하는 여자 아이 야에코가 있다. 여자 아이의 집 사과 꽃 향기는 단번에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달콤한 향기가 난다. 하지만, 남자 아이의 짝사랑은 가슴 시리다. 야에코의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이 쏜 총에 맞아 죽고, 그녀는 엄마와 마을을 떠나고, 몇 년 후 다시 돌아오지만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 그리고 다시 마을을 떠난다. 남자 아이는 야에코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다.
이 소설은 불행한 삶을 사는 야에코를 바라보는 남자 아이의 성장을 사과꽃 향기와 병풍의 그림에 대입시켜 그리고 있다. 함축적인 시어를 엮어 문장을 구성한 이 <달에 울다>는 소설이라기 보다는 시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동양적인 소설의 매력이란 이런 것이다.
# <조롱을 높이 매달고>
“개도 정신병에 걸리나요?”
어쩌면 나는 세상에 장단 맞추는 것을 그만둘 기회를 오랫동안 노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드디어 그 일에 성공한 것일지도 모른다. –p117
삶의 전반부를 완전히 망쳐버린 남자가 있다. 정신병을 앓게 되었고, 직장은 잃었으며, 아내와 이혼 후 가족들과는 헤어졌다. 철저하게 혼자가 된 이 남자. 늙은 개 한 마리를 자동차에 태워 어려서 살던 M 마을을 찾아 나선다.
M 마을은 폐허가 된지 오래다. 사람들은 모두 인근 K도시나 다른 곳으로 떠나 버리고, 아무도 없다. 남자는 이 곳에서 인생 후반부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적당한 빈집을 구하고, 야외 노천탕에서 목욕을 하고, 분열된 자아와 대화도 나눈다. 그러다가 마을에 남아 있는 노인을 발견하게 된다. K도시에 사는 그녀의 딸이 가끔 들러 노인의 생활을 돌봐주고 돌아가는 것이다.
남자는 노인이 키우는 피리새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던 중, 노인의 딸이 K도시에서 비참하게 돈을 벌고 있는 모습을 목도한다. 그리고 소설은 마지막에 ‘그럼에도 삶의 바닥을 찍은’ 남자가 K도시에서 다시 첫발을 딛는 대목에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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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출퇴근 길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생각해보니, 요즘 혼잣말을 하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게 보인다는 것이다. 누군가 공공장소에서 혼잣말을 하고 있어도 고개가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끝없이 욕을 퍼붓는 아줌마, 2~3개의 단어를 무한반복하는 청년, 처음보는 사람에게 계속 경례를 하는 아저씨. 이번 한 주동안 내가 목격한 사람들이다.
그들도 이 소설의 남자처럼 외로운 것일까. 마음 둘 곳 없어 피리새 한 마리로 신경전을 벌이던 이 소설의 두 남자처럼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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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느껴지는 첫인상이 매우 좋았다. 잔잔하고 고요한 것 같으면서 은근히 우울한 느낌까지 들어서 줄거리를 추측하기 보다는 그저 그 느낌에 취해버렸다.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책의 내용이나 전체적인 줄거리는 그다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초지일관 분위기에 취해 책을 읽어버린 것이다. 나는 그동안 일본의 문학을 소소하고 잔잔하다는 것에 그쳐 생각했다. 그래서 딱히 인상 깊은 책도 없다. 이 책도 마찬가지로 잔잔하고 소설을 본다는 느낌보다는 내가 전지전능한 신이 되어 한 개인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내가 그동안 읽어왔던 일본 문학과는 다른 점이 있다면 문장 하나하나가 날카롭고 무거웠다. 그 문장들이 묘사하는 광경 또한 고요했지만 차갑고, 그립고, 서글픈 바람처럼 애잔했다. 왜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고립된 환경 속에서 예술을 추구하는 작가의 의도였다면 성공적이었을 만큼 고립된 상황에 어울리는 문체였다. 항상 같은 자리에 있지만 주인공은 시린 바람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여느 잔잔한 소설들과는 달라보였다. 내가 유난히 일본의 문학에 대해서 민감한 것은 일본은 그 특유의 풍경과 환경을 잘 담아내는 것 같아서 문체에서도 그 분위기가 풍기기 때문이다. 간단명료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들은 바로 이 작가에 의해 소설이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신기했다. 그저 짧다고 느껴지는 문장들이 이루어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놀라웠다. 딱히 재미있는 줄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나와 다른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그 가치관을 배우고 나를 돌이켜 보게 한 책이었다. 늦은 밤 나는 달에 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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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가! 아니, 그 무엇이라면 바로 그 무엇은 무엇인가? "천 개의 시어(詩語)가 빚어낸 한 편의 소설"이라는 극찬과 함께 시소설의 경지를 보여준 작품이라는 흥미로운 설명이 붙어 있는 소설집이다. <달에 울다>와 <조롱을 높이 매달고>라는 두 개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의도적인지 알 수 없지만, 특이하게도 두 작품 모두 40대의 남자가 주인공이다. 두 남자 모두 가족이 없고, 개를 키우고, 나이든 개가 죽는다. 두 남자 모두 부모님들이 참으로 덧 없고 고단한 인생을 살다 갔다. 남겨준 것도 없고, 배울 것도 없는 그런 삶, 돌아가셨을 때 차라리 그것이 더 행복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리하여 이 두 남자의 삶은 지독하게 고독하고, 너무나 하찮다. 참으로 지독하게! 그러나 이러한 생에 대해 두 남자 모두 참으로 무심하다! 도대체 생(生)에 대해 의욕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한 편의 시처럼 운율이 느껴지는 <달에 울다>는 단숨에 읽어버렸다. 사계절을 모두 담고 있는 병풍처럼 시간이 흐름이 한눈에 보이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렇게 시간이 덧없이 흘러가는 동안 주인공은 너무나 훌쩍 나이를 먹어버린다. 삶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를 숨막하게 한 것은 바로 그렇게 훌쩍 흘러가버리는 시간에 대한 묘사였다. "볏짚을 채운 요와 고이노보리를 부셔 만든 이불 속 아이는 바로 30년 전 이제 막 열 살이 된 나다."(p. 8) "군데군데 솜이 삐져나온 요와 땀내 나는 값싼 담요 사이에 끼어 있는 젊은이는, 꼭 20년 전의 갓 스무 살이 된 나다."(p. 32) "방에 어울리지 않는 거위털 이불과 양털 요 사이에 끼어 있는 그 사내는 꼭 10년 전, 서른 살 때의 나다."(p. 61) "점기담요와 전기요 사이에 끼어 있는 그 사내는 40년하고 10개월이 된, 현재의 나다."(p. 84) 하나의 사건을 기억하고, 하나의 사랑을 추억하며, 부모님께 물려받은 사과밭에 의지하여 근근이 살아가는 이 남자에게 삶은 무엇이란 말인가? 한귀퉁이에 알게 모르게 존재하는 하나의 흙 알갱이처럼 존재하며, 그저 그렇게 산다. 나고 지는 꽃처럼, 피었다 지는 안개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는 바람처럼, 그렇게 이 땅에 잠시 머물다 흙으로 돌아가는 그것이 결국 인생인가? 오직 달만이, 달빛만이 영원한 듯하다. <조롱을 높이 매달고>는 조금 더 복잡하다. 정상인 듯, 비정상인 듯 알쏭달쏭한 의식세계를 가진 주인공. 어딘선가 계속해서 들려오는 피리새의 소리. 의사의 진단대로 하면, '너무 열심히 산 것'이 문제라고 한다. 너무 열심히 산 그의 '전반기'는 직장도 없고, 가족에게도 쫓겨난 채 그렇게 끝이 났다. <조롱을 높이 매달고>는 '후반기' 인생을 찾아가는 어떤 과정을 보여준다. 혼란과 절망을 넘어가지만, 그가 찾은 '후반기' 인생도 그다지 새로울 것 없고, 새삼 어떤 희망도 보이지는 않는다. '조롱을 높이 매달고' 자유를 찾아가는 듯 하지만, 슬프게도 나의 눈에는 자유를 찾았다고 보아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삶이 대단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삶은 정말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대단하게 흥분하고 요란하게 들썩이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찮은 것일지도 모른다. 인생이 우리의 생각처럼 그렇게 대단한 무엇이 아니라는 그러한 깨달음, 그곳에서부터 인생은 진짜 의미있어질지 모르겠다. 아귀다툼 같은 욕망을 넘어서고, 욕심을 버리면, 그때 비로소 진짜 가치가 보일 것만 같다. 나의 눈에 하찮아 보이는 삶을 살아낸 이 두 남자의 내면에 어떤 내공이 있어 보이는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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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아름답고 극적인 시를 읽으며 환상적인 공간안에 잠시 머물다 빠져나온 것 같다. 소설 <달에울다>의 작가 마루야마는 내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두 편의 중편을 담은 이 소설 한 권으로 완전히 각인되어버렸다. 너무나 독특한 전개방식이 돋보이는 <달에 울다>는 작가가 얼마나 고르고 골랐을까,싶은 단어와 다듬고 다듬었을 문장의 연속이었다. 갑자기 일본어가 배우고 싶을 정도로, 원어도 이 소설을 읽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멋있었다. 표제작인 <달에 울다>는 사과나무를 키우는 한 농가의 아들이 나이 들어가면서 겪는 지독하게도 짧은 행복을 추억하는 이야기다. 젊은이들 대부분이 마을 떠나 도시로 갔고, 사랑했지만자신을 버린 여인도 떠났다. 하지만 주인공 '나'는 키우던 개도 죽고, 모두가 사라졌지만 마을을 떠나지 못한다. 그리고 사랑했던 여자가 돌아와 마지막을 맞이한 그 마을에서 사과나무를 키우고 있다. 끔찍하게 지독하고 쓸쓸한 이야기지만 소설 속 그림에 등장하는 장님 법사는 자신도 황야를 헤매고 있으면서 모든 것을 보고 있는 듯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좀 덜 외로웠다고 느껴졌을까, 그 장님법사는 결국 '나'이다, 나는 아무데도 갈 수 없지만 법사가 그를 대신해 떠돌아 다니고 있다. 그 법사가 장님이라는 아이러니...그리고 그림의 배경은 소설이 진행되며 바뀌지만 결국 장님법사의 곁엔 아무도 없다. 비주얼적인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품일 뿐더러 범접할 수 없는 시적묘사와 서사로 오랜만에 소설을 읽으며 떨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번째 작품 <조롱을 높이 매달고>는 또다른 매력이 곳곳에 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매우 환상적이고 묘한 느낌을 풍기는 이 소설은 가족에게 버림받고 도시에서의 삶을 부정한 한 남자가 M이라는 마을에 찾아오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그곳에서 그는 피리새를 키우는 한 노인을 만나고 그 피리새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한다. 그리고 그 남자의 안에 존재하는 또다른 '나'는 죽기위해 찾아온 곳 M에서 뭔가를 키우기 위해 애쓰고 욕심내는 남자를 끊임없이 비난해댄다. K시에서 우연히 만난 빨간 하이힐의 여자는 노인의 딸로 몸을 팔아 아버지를 부양한다. 남자는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하고 노인을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생기지만 노인은 결국 자살한다. 남자는 도시로 돌아와 피리새를 조롱에서 날려보낸다. 그리고 살아간다.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현실엔 존재할 수 없는 기마병사 등 환상적인 요소가 등장하지만 좀 어려워서 솔직히 나는 이 작품에 작가가 숨겨두었을 보석같은 의미들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읽으면서 잘 이해하고 싶어서 얼마나 욕심이 났는지...그것은 뭐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인생의 아이러니와 인간의 근본적인 고독이 와닿아서일것이다. 두 작품 속 주인공처럼 내가 집착하고 떠나지 못하는 공간을 떠올려 보았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 인간의 운명을 바라보는 시선 등 심하게 고차원적인 전개에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것들에 열광하던 요즘의 내가 파악하기에는 우물같은 소설이었지만 이 글로는 부족한 정말 멋진 작품집이라고 말하고 싶다. 소설의 근본을 파헤치기 위해 선택한 작가의 기이한 생활방식마저도 소설에 집중하기 위함이기에 집중하는 사람은 역시 무섭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