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중업 건축전 관련 도슨팅을 준비하면서 읽은 책인데, 김중업의 작품세계에 대한 상세한 분석 내용이 담겨있다. 우선 김중업의 건축을 지역적 정체성을 서구적인 건축언어로 소화하여 뛰어난 작품성 획득했다고 평한다. 물론 1980년대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새로운 건축언어가 창조할 수 없었고, 대신 과거 자신이 만들었던 건축언어를 복제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중업의 건강은 1983년부터 약화되기 시작했고, 1984년 예술의 전당 현상설계를 계기로 쓰러지면서 생명이 위독했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형태가 스케일에 상관없이 지나치게 과장되기도 하고, 또 문맥과는 별다른 연관성 없이 합성되기도 하여 전체적으로 작품의 질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 당시 거의 모든 초기 단계 설계가 실무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후 김중업이 여기에 몇 가지 손을 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또한 그의 작품 가운데 많은 부분은 당시 한국의 낙후된 기술상황과 건축주의 무리한 요구, 그리고 건축심의 과정의 부당한 요구로 인해 쉽게 변경되고 건축가의 의도대로 지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그가 1960년대 서울에 지은 주택들은 도시가 급속도로 팽창하면서 도시 중심부에 위치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보다 많은 이익을 거두려는 자본의 논리로 인해 빠르게 파괴되었다고 한다. 김중업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주한 프랑스 대사관의 경우에도 한국 건축의 전통적인 구축성, 지붕과 공포, 그리고 기둥으로 구성된 한국의 전통적인 목구조 체계와 철근 콘크리트 구조 체계가 절묘하게 결합된 것에다가 건물의 교묘한 배치, 지붕이 갖는 독특한 조형미가 특징이라 언급하고 있다. 김중업의 건축 설계를 들여다보면 세 가지 패턴이 나타나는데, 살아 움직이는 선의 이미지, 공간을 한정하고 구분할 때 주로 등장하는 평면이 계속해서 작은 원으로 증식하는 원의 이미지, 육중하고 부드러운 곡선의 이미지에 날카롭고 세련된 감각을 부여하는 날카로운 예각의 이미지라고 언급한다. 또한 움직이는 선의 미는 유년시절 고구려 예술에 심취했던 영향을 받아 북방민족이 가졌던 호방함과 기운생동함을 표현하는 것이라 말한다. 또한 김중업은 일생 동안 돌무덤이나 거석에 대해 깊이 매료되었다고 한다. 프랑스 소도시들을 찾아 다니며 돌무덤을 스케치한 사본도 남아있는데, 김중업 건축에서 거석의 이미지가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게 특징이라고 한다. 결국 김중업의 건축은 동시대 다른 건축가들에 비해 스케일이 크고, 그 형태적 견고함이 두드러진다고 평한다. 이것이 역동적인 선과 결합하면서 김중업 특유의 호방하면서도 시적인 형태를 탄생시키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 책은 시간 순으로 김중업의 인생과 작품 세계를 돌아보고 있다. 특징적인 것은 김중업이 고교 시절 보들레르와 랭보의 시에 심취했고, 야수파적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부모가 시인이나 화가가 되어 비극적 생애를 마감할 것을 걱정하여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라고 권유했다고 하는데, 그 당시 동경미술학교 출신 미술 선생이 건축을 해보라고 격려해서 1939년 요코하마 고공에서 건축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 학교는 특히 교육수준이 높았고, 김중업을 지도한 나까무라 준뻬이 교수는 파리 유학파로 에꼴 데 보자르 출신이기에 보자르 방식으로 지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당시 고전주의, 비례, 조화, 대비에 관한 문제, 창이 가지는 이미지 등을 주로 공부했다는 것이다. 1941년 요코하마 고공을 수석졸업하고 일본의 건축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김중업이 세계적으로 도약하게 된 계기는 1952년 이태리 베니스에서 열린 제1회 국제예술가회의에 참가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이 회의는 베니스 영화제와 베니스 비엔날레와 함께 열렸는데, 한국대표로 이 회의에 참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신문을 통해 알았다고 한다. 부산 피난 전 서울에서 이미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과 교유했고, 부산에서도 교유를 넓혀나갔기에 그가 한국대표로 뽑힐 수 있었다고 한다. 김중업이 베니스로 떠날 때 그는 그것을 일생일대의 기회로 삼았다고 한다. 특히 자신이 존경하던 르 꼬르뷔제를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감 때문에 더욱 그랬다고 하는데, 그 당시 김중업은 남쪽으로 넘어온 가족과 일가친척들을 부양하기 위해 서울공대뿐 아니라 부산에 피난 온 여러 대학에서 시간을 쪼개 가르쳤고, 이때 너무나 과로한 나머지 교실에서 쓰러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어려움을 벗어나 더 큰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는 것이다. 김중업이 베니스에서 르 꼬르뷔제를 만나 그의 아틀리에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고, 꼬르뷔제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건성으로 한번 파리의 자기 작업실로 와보라고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쨌든 그가 르 꼬르뷔제 사무실에 찾아갔을 때 임시로 샹디갈의 행정청사 옥상정원 설계에 대한 일거리를 받아 2주간의 시험을 거쳐 동양적이고 개성이 넘친다는 평을 듣고 1년 계약직으로 채용되어 일하기 시작한 상황도 이 책에는 자세히 상술되어 있다. 그러면서 르 꼬르뷔제가 김중업을 받아준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언급한다. 코르뷔제 스스로 라 쇼 드퐁 예술학교의 건축교육에 한계를 절감하고 비엔나와 파리로 나와 여러 건축가에게 자신의 스케치를 보여주며 일자리를 찾던 경험과 인도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많은 일손이 필요했던 것, 르 꼬르뷔제의 건축복음을 세계에 전하는 사도를 길러낸다는 의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르 꼬르뷔제 사무실에서 했던 일들은 향후 김중업의 건축세계에 다양하게 적용되었다고 하는데, 대표적으로 중앙공업연구소 건물은 샹디갈 행정청사의 장관블록 모티브를 적용한 것이고, 이경호 주택의 구조체계와 지붕형태는 빌라 쇼단의 것을 차용한 것이라 한다. 또한 샹디갈 주지사 관저에 초생달처럼 건물 위에 얹힌 지붕이나 십자형 기둥은 김중업 건축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라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은 파리의 르 꼬르뷔제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안 덴마크 건축가 요른 웃존과 알바 알토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특히 알바 알토 사무실로 자리를 옮길 생각까지 했는데, 르 꼬르뷔제가 그 말을 듣고 화를 내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나중에 주한 프랑스 대사관을 짓기까지 김중업이 집착한 자연주의적 건물 배치는 북구적인 분위기가 짙게 배여 있고, 1964년 뉴욕박람회를 위한 한국관과 1960년대 김중업의 주택작업에서도 알토의 건축 모티브가 발견된다고 말한다. 또한 바르셀로나도 방문했었는데, 가우디는 르 꼬르뷔제와 함께 김중업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건축가였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김중업은 건축 외에도 회화와 영화에 많은 관심이 있었고, 피카소의 그림에 관한 스케치도 많이 남겼다고 한다. 또한 나중에 한국 건축계에서 계속 탄압받는 소수로 남기를 고집했던 것도 잘 타협하지 않는 르 꼬르뷔제 스타일이라 한다. 김중업이 르 꼬르뷔제 사무실에서 약 3년간 일을 배운 뒤 한국으로 귀국하자마자 사무실을 열었다고 한다. 이 때 실무를 담당했던 사람들은 프랑스로 떠나기 전 가르친 제자들과 귀국한 이후 출강하기 시작한 홍익대 학생들이었던 안병의, 이춘림, 전명현, 윤도근 등이었다고 한다. 그의 사무실은 늘 10여명의 소수로 운영했으며, 가족과 친척들이 많이 참여했는데, 이것 역시 르 꼬르뷔제 스타일이라 한다. 어쨌든 그는 귀국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별다른 검증 없이 한국 건축계를 대표하는 스타가 되어 일거리 확보가 수월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에는 건축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사무실이 흔치 않았고, 또 건축가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대중적 의식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김중업은 건축가의 직분과 자신의 존재를 대중적으로 각인시키기 위해 대중매체를 적극 활용했다고 하는데, 한국 최초 개인전시회를 열었다는 것이다. 미술가가 아닌 건축가가 전시회를 갖는다는 사실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김중업의 경우 하나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난 다음 이와 관련된 후속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는데, 그의 치열한 작가의식으로 인해 건축주 사이에 많은 문제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라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김중업과 라이벌 관계에 있던 김수근은 하나의 건축물을 의뢰 받으면 건축주와 인간적인 친분을 돈독히 하여 계속해서 비슷한 성격의 건물을 수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공간지의 창간과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의 창설을 통해 하나의 건축적 인맥을 형성한 김수근에 비해 김중업은 "인생에서 동정은 없다."는 스승 르 꼬르뷔제의 영향을 받아 건축을 넘어서 부조리한 사회의 틀 자체를 바꾸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김중업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설계에 임했을 때 무엇이 과연 진정한 근대건축인지 혼동했다고 한다. 근대건축이 형성된 지는 이미 20~30년이 지난 상황이었고, 동시대 서구 건축가들은 이미 근대건축이 불러일으킨 문제점을 비판하고 그것의 대안을 모색 중이던 시점이었다고 한다. 원시적 생명력과 지역적 전통에 기반한 새로운 경향들이 비소하고 획일화된 근대건축의 복제품들에 대응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심정적으로 1920년대 유럽의 아방가르드들, 특히 르 꼬르뷔제에 의해 이룩된 건축이 진정한 근대건축이라고 생각했지만, 김중업 자신이 1950년대 몸담았던 르 꼬르뷔제 건축사무소에서의 작업은 그것과는 거리가 먼 아주 거칠고 지역주의적 성향이 강했다는 것이다. 눈은 계속 1920년대로 향하고 있었지만 손은 르 꼬르뷔제 사무실에서 습득한 설계방법으로 향했다는 말이다. 김중업의 초기 설계는 건물전체에 투명성과 경량감을 부여하고 건물의 구축체계를 직접 노출시켜 조형과 결부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고 한다. 특히 유리로 처리해 건물의 투명성을 최대로 확보하려 했던 건물은 부산대학교 본관과 명보극장이었고, 구조체제를 노출시킨 건물은 유유산업 사무실, 인천 해무청사, 수도여사대 체육관, 유엔묘지 채플, 도뀨호텔이었다고 한다. 사실 이 건물들은 동시대 서구건축과 비교하여 그다지 높은 작품성은 획득하지 못했기에 1960년 이후 경량성과 투명성의 개념이 김중업 건축에서 주된 요소로 등장하지 않고 주로 거칠고 원시적인 매스와 대비되는 방식으로 건물에 나타났다고 한다. 또하나 김중업의 초기 설계 특징은 전통건축을 변형시키고 재해석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경주국립공원 계획안, 자유의 종각 계획안, 석굴암 전실계획에서 그런 것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특히 불국사의 건축 요소를 많이 활용하게 되었는데, 불국사의 전면에 나오는 자하문과 범영루를 변형시켜 주한 프랑스 대사관의 대사관저와 대사집무실 형태를 이끌어 내었고, 불국사의 기단과 돌출한 배수구도 그의 건축물에 많이 응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에는 명보극장 사건에 대한 흥미로운 언급들이 담겨 있다. 이른바 한국판 마천루 사건이라 언급하고 있는데, 명보극장 개관을 앞두고 설계자인 김중업이 시공사를 고발한 것이었다. 시공사가 건축구조와 재료를 원래 설계도면과는 달리 마음대로 변경하여 설계자의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건축주가 바뀌면서 일어난 일인데, 김중업이 이기긴 했지만 현재 명보극장은 김중업이 설계한 건물은 철거되고 김석철이 설계한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고 한다. 한편 1953년 휴전 이후 한국에는 대학 설립이 활발했는데, 많은 건축가들이 대학 캠퍼스 계획에 참가했다고 한다. 1950년대 경제성장이 미미하여 큰 설계 프로젝트가 없는 상황에서 대학 시설은 건축가들에게 자신의 건축적인 사고를 펼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는 것이다. 김중업은 1950년대 말 부산대, 건국대, 서강대, 수도여사대 건물설계에 참여했고, 1960년대 중반부터 제주대학 건물설계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 건물들을 설계하면서 르 꼬르뷔제의 1920년대 언어들에 대한 여러 가지 모방과 변용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부산대의 건물 전체 모습은 샹디갈의 행정청사를 경사진 대지에 맞게 옮겨다 놓은 것인데, 두 건물 다 입면의 변화를 이용하여 긴 건물을 분절시켰고, 그것은 내부기능을 자연스럽게 외부로 노출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입면 효과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건국대학교 도서관의 기본형태는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 본부에서 직접 영향을 받았는데, 중앙에 있는 둥근 램프를 통해 올라가면서 1/3의 레벨차를 두고 세 방향의 열람실로 접근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이 건물내부는 김중업이 남긴 도면과 상당히 다르게 시공되었다고 한다. 또한 서강대 본관은 지형과 조화되는 형태구성 때문에 초기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데, 전면에 튀어나온 기둥과 그 기둥 사이에 난 창들의 면 분할이 특징이라고 한다. 폭이 좁고 높이가 높은 매스로 되어 있어서 수직성을 갖고 있는 부분에는 그 벽면에 수평적인 발코니를 강하게 돌출시켜서 수평적 수직이라는 느낌을 주고, 길이가 길고 낮아서 수평성을 가진 매스에는 수직 기둥을 벽에서 돌출시켜 수직적 수평이라는 느낌을 주었으며, 두 매스를 하나의 편복도를 통해 공유하고 지붕을 씌었다는 것이다. 이 건물이 보통 대지보다 상당히 높았기에 지붕이 없을 경우 시선을 붙들어 맬 수 없었을 것이라 한다. 또 흥미로운 언급은 르 꼬르뷔제의 모듈로를 한국에 적용한 이력이다. 이것은 서구인의 체형 기준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한국 건축에 적용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모듈로 개념은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 현실에 맞게 변형되고, 1960년대 이후에는 거의 사용을 안했다고 한다. 어쨌든 김중업 건축 초반부 설계건물인 서강대 강의동 건물은 모듈로 개념을 그대로 적용해 한층 높이를 4.1미터로 맞췄다고 한다. 행정청사 층고인 4.17미터와 유사하다. 서강대 본관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대학교 건물의 층고를 이 정도로 유지했다고 하는데, 요즘 층고는 설비 공간을 포함하여 3.6-3.9미터 수준이라 한다. 초반에 서양인의 신장을 기준으로 책정된 모듈로 체계를 김중업이 별다른 수정 없이 받아들였기에 부산대, 서강대 본관, 중앙공업연구소 내부는 분위기가 휑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어서 이 책에는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특히 이 건물은 체험하는 모든 이들에게 어떤 시적 울림을 준다면서 말이다. 대지와 건축과의 관계, 건축이 지니는 구축성, 채와 채의 미묘한 충돌, 부분과 전체가 갖는 상관적 스타일, 그리고 움직임을 반영한 건물의 배치가 이 건물들의 건축을 특징짓는다고 한다. 하지만 증축과정에서 건축적 재질과 의식 없는 사람들에 의한 설계수주로 인해 김중업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건물에 변화가 가미되어 엉뚱한 모양의 지붕과 기둥 변형이 일어난 게 안타깝다고 말한다. 어쨌든 주한 프랑스 대사관은 북한산에서 시작하여 인왕산을 거쳐 남산에 이르는 지맥상에 놓인 곳에 지어진 건물로 곡선 지붕은 이런 대지의 기운을 건물로 끌어들여 밖으로 내뿜는 반향판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앞 부분에서 꼭대기까지 높이 차가 12미터 이상 차이 나는 경사진 대지에 네 개의 건물을 따로따로 배치했는데, 넓은 지붕과 열주들로 구성된 대사관저, 곡선 지붕이 솟구치는 대사집무실, 평지붕과 테라스로 구성된 영사관 건물, 그리고 영사관 직원 주택이 배치되었다고 한다. 이 건물들의 배치는 이동하면서 특별한 시지각적 장면을 연출하도록 구성되었다고 한다. 정문에 들어섰을 때, 영사관 건물로 향하는 계단 전, 대사관저로 올라가는 분기점이 바로 그 장면들이 연출되는 지점이라 한다. 각기 축을 달리하며 분리된 채 서 있는 세 채의 건물이 사람들의 이동에 따른 몇 가지 주요 시점을 중심으로 비교적 일관되게 배치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르 꼬르뷔제가 그리스 아크로폴리스를 대상으로 행한 배치분석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언급한다. 르 꼬르뷔제는 예전에 3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크로폴리스를 올라가면서 여러 시점에서 일어나는 시지각적인 변화들을 관찰한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리고 주한 프랑스 대사관의 지붕도 한국건축의 지붕에서 추출한 것이라기보다 르 꼬르뷔제의 행정청사 프로젝트의 주지사관저에서 따 온 것이라 말한다.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서 두 개의 서로 다른 곡률을 가진 지붕을 함께 사용한 것은 대조적인 지붕 형태를 통해 전체 건물들을 조화롭게 구성하려는 건축가의 생각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대사관저의 지붕은 대지에 장중하게 내려앉는 형태를 취하고 있고, 대사집무실의 지붕은 하늘을 향해 상승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불국사의 조형구성방법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지붕의 곡률이 비교적 큰 범영루와 곡률이 작은 자하문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대사관저 앞에 나와 있는 열주는 한국 전통건축에서 나타나는 목구조 개념을 현대적인 방법으로 승화시킨 것이라 한다. 또한 대사집무실의 경우 자갈과 콘크리트를 섞어 만든 매우 거친 판넬로 마감한 것은 르 꼬르뷔제의 라 뚜렛트 수도원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 한편 김중업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이성적 측면보다는 비합리적 정서, 감성, 영감을 중시했으며, 1960년대 김중업을 사로잡았던 것은 강력한 원시주의가 갖는 시각적이고 미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불규칙한 곡선과 노출콘크리트를 주로 사용했고, 서산부인과병원, 제주대학본관, 유엔묘지정문 등이 그에 맞는 건축이라고 언급한다. 또한 지역적 전통을 근대적 경향과 결합시키려는 의도는 1960년대 작품에 나타나는 특징이라 한다. 특히 1962년 미국에서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루이스 칸을 만나 백년지기가 된 것, 1965년 8월 르 꼬르뷔제 사망 소식을 듣고 프랑스로 건너가 6개월간 머물면서 프랑스와 다른 유럽국가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건축 경향을 예민하게 관찰했다는 사실도 언급한다. 그 당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당시 관심을 끌었던 것이 바로 건축-조각운동이라 한다. 영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뉴-브루탈리즘과 맥락이 통하는 것인데, 건축-조각운동은 엄격한 공업화를 지향하는 건축경향에 대항하여 한 개인에 의해 이루어진 작품으로써 개인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신념에서 시작된 것이라 한다. 또한 서산부인과병원의 발코니나 제주대학 본관의 곡선 램프에서는 가우디 건축의 영향을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결국 김중업은 기하학적 곡선이 아닌 인간에 의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불규칙한 곡선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하나의 통합된 대상을 분절시켜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절된 대상이나 요소들을 하나의 굵은 선으로 통합하려는 경향은 굵은 곡선들이 여러 개 중첩되는 스케치로 나타났고, 작은 원들이 서로 병치되면서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경향도 나타났다고 한다. 김중업은 먼저 자신이 설계할 건물의 성격과 프로그램, 대지의 여건을 곰곰이 생각하고 건물의 형태를 입면적으로 발전시킬 것인지 아니면 평면적으로 발전시킬 것인지 먼저 결정했다고 한다. 단순한 기능을 가지면서 조형성을 강조할 경우 입면적으로 풀어나갔고, 비교적 기능이 복잡하고 다양한 건물들은 평면적으로 풀어나갔다는 것이다. 평면적으로 풀 경우 평면이 전체 스킴의 주가 되고 입면과 단면은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했고, 반대로 입면 중심으로 설계할 경우 반대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유엔묘지 정문은 명백히 입면이 주가 되었고, 서산부인과와 태양의 집 쇼핑센터는 반대라고 한다. 대지여건에 상당한 시적 감흥을 받아 그 풍광에 어울리는 강한 조형성을 가진 건물로 설계하여, 바다를 향해 출항하는 배의 이미지, 대지에 사뿐히 내려앉는 비행기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제주대학 본관은 적절한 보수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철거되었다고 한다. 제주대학은 건물옥상에 커다란 곡선 지붕을 얹히고 십자형 기둥을 세운 것이라든지, 살아움직이는 듯한 선의 흐름으로 램프를 만든 것이 특징이라 한다. 서산부인과의원의 경우 자궁처럼 생긴 타원형인데, 이 원형은 기하학적 단순성으로 인해 기능에 따라 계속 분화해 나갈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증식하는 원은 건물의 기능을 분절하고 거기에 어떤 영역성을 불어넣을 때 활용되었는데, 다양한 크기로 증식하는 원들로 구성된 평면형태는 르 꼬르뷔제 건축에서 잘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김중업이 설계한 수직동선 램프는 환자들로 붐비는 병원이어서 계단보다는 낫다는 관점과 조형적 측면에서 다양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측면을 고려했다고 한다. 거친 노출 콘크리트로 된 벽체와 이것과 대비를 이를 수 있는 투명한 유리창을 달고자 했지만 그 당시 시공기술로는 불가능해서 결국 천장 부분은 콘크리트 지붕으로 덮였다고 한다. 김중업의 주택건축은 그의 건축여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많은 건축언어들이 주택에서 실험되어 다른 건물에 적용되었으며, 매년 계속해서 지어졌기 때문에 그의 생각의 추이를 생생히 반영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군사정권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공공건물 수주를 거의 하지 못했던 김중업이 건축주를 확보할 수 있는 통로가 바로 주택이었다고 한다. 주택은 비교적 규모가 작아서 그것의 형태와 공간을 다루기 쉽고, 그래서 그의 새로운 시도들이 쉽게 반영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주택이든지 최초의 스케치에서 제시되는 것은 향을 중심으로 건물을 배치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대지를 처음 찾았을 때 대지에 대한 상상력, 배치계획에서 처음 대문을 들어서서 현관까지 이르는 접근로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이루어졌고, 건물과 자연의 접촉을 최대로 하기 위해 주로 정원을 최대한 내부로 끌어들이는 방향으로 설계했다고 한다. 1950년대에는 넓은 자연 속에서 주거의 여러 기능들을 분산시켜 놓은 자연주의적 경향을 보여주었고, 1960년대에는 직교 그리드 내 모든 실들이 배치되었으며, 1980년대에는 모든 실들이 원과 불규칙한 선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특히 수공간의 설치는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하는데, 한국은 겨울에 춥기 때문에 물이 그다지 환경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고, 또 주택에서는 이것을 유지하기가 힘들었기에 그곳을 메워서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고 한다. 김중업이 설계한 주택은 꽉 막힌 방과 터진 공간과의 대비와 온실, 계단실, 거실을 묶어 하나의 유동적 공간으로 처리한 게 특징이라 한다. 모든 중요한 실들에는 문을 열고 나와서 거닐 수 있는 테라스나 발코니가 딸린 것도 특징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1980년대 김중업이 설계한 주택들은 공통적으로 원과 원, 원과 사각형, 곡선과 사선으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서로 형상의 유사성과 기하학적인 대비를 통해 건물에 강력한 힘을 부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건물 가장자리에 박혀 있는 계단실은 남성적인 힘을 부여하고 있는데, 이것의 기원은 유럽 고성에 등장하는 육중하고 병치된 원형 매스들이라 한다. 또한 1960년대 지붕은 주로 한옥의 지붕을 부풀리거나 왜곡시켜 만들었는데, 1980년대에는 아스팔트 싱글이나 삼각타일, 동판 등이 지붕에 사용되면서 불규칙하면서도 자유스러운 곡선의 지붕형태가 가능했다고 한다. 특히 김중업은 귀국하면서 태양열의 이용에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가져 태양열 흡수 집열판 등을 설치했는데, 1970년대 일어난 오일 쇼크의 여파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960년대 주택은 대가족 중심 가족제도 때문에 폐쇄된 개별 방들이 많았지만 자유롭게 터진 공간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 반면, 1980년대에는 핵가족화되면서 내부공간은 자유롭게 유동적이 되었다고 한다. 김중업이 프랑스로 추방된 배경에는 광주대단지사건에 대해 언론을 통해 정부 정책을 비난했기 때문이며, 그가 국외로 추방된 이후 한국에 남아 있던 그의 설계사무소에 의뢰된 작품들은 실무자들 선에서 계속 진행되었다고 한다. 물론 국외에서 김중업이 편지를 통해 외환은행 본점 현상설계, 주택, 성공회회관 같은 프로젝트를 지휘했지만 한계가 있어서 결국 김중업의 의지대로 설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프랑스를 거쳐 미국에 체류하던 시절에 김중업은 포스트모더니즘보다는 루이스 칸의 작품에 심취했다고 하며, 영국의 선박재벌인 윌리엄이 도버 해협에 띄울 해상호텔 설계를 하버드 대학원에 의뢰했고, 하버드 측에서 이를 김중업에게 맡겨서 바다호텔의 설계가 이루어진 이야기도 언급되고 있다. 한국에 귀국한 이후 관광산업으로 급부상하였던 명성그룹에 의해 이를 실현시킬 기회가 있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김중업의 귀국 이후 1980년대 한국사회는 건축활동을 펼치기에 여러 가지 좋은 여건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경제발전에 따른 엄청난 물량의 건축물이 필요했고,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운동장과 그 밖에 부대시설 건설 붐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덕분에 김중업은 큰 어려움 없이 한국의 건축계로 재편입했다고 한다. 1980년대 김중업 건축은 르 꼬르뷔제 영향이 사라졌다고 한다. 사무실 시설에서도 1960년대는 철근 콘크리트의 박스형 건물이 주를 이루었지만 1980년대는 날카로운 예각으로 된 유리 매스가 중심이었다고 한다. 특히 1980년대 작품에서 루이스 칸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진 건물이 바로 태양의 집 쇼핑센터라 한다. 2~3개 층이 하나의 커다란 원형을 통해 나타나고 이것의 중간에는 원형 창을 가로지르는 보가 걸려서 독특한 느낌을 주고 있다고 한다. 물론 1950년대 중반부터 김중업이 탐구하여 온 많은 건축언어들이 집합된 건물이긴 하지만 서로 통일되지 않아서 산만해 보이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1980년대 초를 제외하고 김중업은 건강 문제 때문에 설계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고 한다. 새로운 건축 언어들을 창조해내는 대신 기존에 사용했던 언어들을 다시 끄집어내서 기본 틀로 만들고 여기에 다양한 요소들을 끼워 넣는 방법을 취했다는 것이다. 또한 현상설계에 당선되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접어두고 현실적으로 당선될 수 있도록 설계안을 맞춘 느낌도 난다고 한다. 그 중에서 육군박물관은 1980년대 설계한 문화시설 가운데 가장 높은 작품성을 가지는데, 이것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건물의 규모를 더욱 키우라고 지시해서 스케일이 비대해졌다고 한다. 김중업이 최초로 설계한 고층빌딩은 1967년 설계한 국제화재보험 빌딩, 두 번째가 삼일로 빌딩, 세 번째가 갱생보호회관이라 한다. 김중업은 르 꼬르뷔제 건축언어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에도 유독 고층 건물에서는 그의 영향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아마도 한국상황에 부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일거라 하는데, 대신 미스 반 데르 로에가 고안한 마천루를 모방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삼일로 빌딩은 미스가 미국에서 발전시킨 마천루의 프로토타입을 그대로 한국에 적용시킨 첫 번째 사례라고 소개한다. 뉴욕 시그램 빌딩을 모델로 했는데, 이 건물 설계를 의뢰한 삼미그룹이 주로 철과 특수강을 생산하는 기업이라 김중업에게 철과 유리로 된 단순한 건물을 요구한 것도 그 빌딩을 모방하게 된 이유라 한다. 김중업의 말년 역작인 올림픽공원 천년의 문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는데, 한국의 지붕선을 공중에 매달고 지붕 아래에는 세라믹 타일로 전통적인 문양과 상징 동물을 집어 넣어 육체에 대한 생명과 정신에 대한 자유를 상징하려고 했다고 한다. 굵은 곡선과 날카로운 예각의 대비와 아울러 기념물 주위로 진입광장, 조형물, 기념광장, 그리고 만국 국기게양대를 배치했다고 한다. 이 책을 통해 호방한 스케일과 시적인 조형언어가 특징인 김중업 건축을 자세히 알아 볼 수 있었다. |
|
건축업계에 있습니다.
김중업의 프랑스 대사관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인이 관심이 있어하기에 선물할 일이 있을 때 일부러 주문하여 선물하였습니다.
음..받아본 당사자 말을 옮기자면 "건축책"의 느낌이라기보단 인문서, 평전, 기타등등 문학에 가까운 느낌이랍니다. '건축론'을 담았다고 나와있는데 자료집같은 느낌의 서적을 기대했던 모양입니다.
구매에 참고하세요~ |
|
선물용으로 구입하였습니다.
생각 보다 자료가 부실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자료집이 아니긴 했으니까요 좀더 문학적인 성격이 강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전 같은 느낌이랄까 .
과거 프랑스 대사관의 출입이 가능할 적에 그곳에 다녀왔던 분이 프랑스대사관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좀더 자세한 자료를 기대하였는데 그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곤 책을 덮어버리셔서... 전체를 읽어 본 건 아니지만 도집이라던지 자료를 궁금해 하시는 분은 고려하세요~ 건축'론'에대한 해석이니까요 아무래도 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