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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성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야 말로 야만인이다. - 레비 스트로스(Levi-Strauss) 직장 생활을 하며 이런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큰 도전인가를 새삼 느꼈다. 솔직히 끔찍했다. 사무실에 인문학 책을 꺼내놓을 시간적 여유가 없고 집에 돌아와 책을 읽는 건 불가능하며(연신 나를 찾는 이제 20개월 정도를 넘긴 아들 녀석으로 인해), 내가 책을 읽는 시간이라곤, 아들이 잠든 후나 이동 중인 전철이거나 잠시 들른 커피숍이 전부다. 이 푸념이 나에게도 생소하지만, 나와 비슷한 처지의 다른 이들에게 독서는 참으로 멀리 있는 것인 듯 싶다. 좀 더 많은 시간과 여유를 가지고 집중해 읽었다면 라투르의 이 책은 보다 더 흥미롭고 내가 벗어나지 못할 근대적, 계몽적 사유를 보다 풍성하게 만들 기회를 가졌을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몇 년 전 서점에서 우연히 구입했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제목이 무척 도전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이제서야 읽었다. 아마 한 두 번 읽으려고 했을 텐데, 저자의 표현방식에 적응하지 못했다. 실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가 쓰는 몇 개의 주요 단어들 - 하이브리드, 정화, 대칭적/비대칭적 등 - 에 대해선,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더 어렵고 모호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아마 프랑스학계 특유의 글쓰기 방식인 듯하지만(프랑스의 다른 인문학자들처럼). 야생의 사유와 계몽된 사유는 때때로 서로 아름다운 화해에 도달하거나 무지개 빛깔을 발하는 간섭을 일으킬 수 있다. - 7쪽 혹시 지금 우리 시대가 '근대'라고 느낀 적이 있는가? 데카르트적 근대 말이다. 아니면 20세기의 무수한 반-근대주의자들처럼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느낀 적이 있는가? 정말로 그들의 책에서 이야기하듯 이 세상이 그렇게 만들어지고 움직이고 있는가?
원시의 정신과 오늘 우리의 정신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거부될 것이다. 정보이론이 순수한 메시지에 집중한 반면에 원시 시대 사람들은 메시지의 물리적 결정론의 징후들을 메시지로 착각한다. ... ... 동식물계에서 감지할 수 있는 특성들을 하나의 메시지인양 다루고 그 속에서 '서명' 즉 기호를 읽어냄으로써 인간(원시정신의 소유자)은 엉뚱한 것을 중요한 요소로 삼는 오류를 범했다. 하지만 실제 의미 있는 요소가 어디에 있는지(미시적인 차원)를 알려줄 완성된 도구가 없었기에 인류를 해석을 통해 '희미하게' as through a glass darkly 나름대로 차이를 분간하였다. 이 원리의 발견적 가치와 현실의 정합성은 첨단 발명품들 즉 전기통신공학, 컴퓨터와 전자현미경 등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진 바 있다. - 249쪽 (Levi-Strauss, 1966, p268) 브뤼노 라투르는 인류학에 의지해, 근대라는 개념은 개념일 뿐, 우리 세상을 그대로 비추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마치 애초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처럼. 그리고 그 단추를 가지고 앞을 향해 나아갔을 뿐이다. 그리고 이 근대에서 시작된 '탈-근대'로 이상하긴 마찬가지. 그렇다고 라투르가 '비-근대주의자'는 아니다. 그의 목표는 '화해'에 있으며,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출발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나아가자는 데 있다.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인문학이 이 세계와 우리 삶 속에서 시작되었으나, 도리어 이 세계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해석 불가능하다고 단정짓고, 우리 삶을 기하학적으로 재단하고 억지로 정해진 어떤 틀 속에서 밀어넣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근대적 삶이고 근대의 이론들인 셈이다. 아추아르족은 각자 폐쇄된 채로 대립을 피할 수 없는 두 세계 - 인간 사회의 문화세계와 동물 사회의 자연세계 - 사이에 존재하는 이와 같은 이율배반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화의 연속적 가능성이 끊어지는 특정한 지점이 존재하는데, 여기서부터 인간에게는 극도로 낯선 야생의 세계가 시작된다. 문화의 영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자연의 이 조그만 조각은 소통관계가 수립될 수 없는 사물들의 집합을 포함한다. - 53쪽 (Philippe Descola의 1986년도 저작에서 인용. 아추아르족의 일상에서 우리의 일상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어쩌면 이 책은 인문학이 앞으로 어떤 태도로 걸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적절한 지적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세계는 변하지 않았으나, 근현대 철학은 우리의 진정한 세계와 무관하게 전진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투르는 근대의 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바 그 근대인은 우리가 아니다라고 말할 뿐이다. 형편없는 리뷰이지만, 여유가 되는 이들에게 이 책 읽기를 권한다. 좀 시간은 걸리겠지만, 꽤 흥미로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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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며칠 전 오랜 친구가 이 책에 대해 얘기했다. 번역본이 있어서 반가웠다. 그러나 영역본을 그대로 옮기면서 없는 단어가 등장한다. 지시사는 독자들이 문맥을 찾아서 보면 될 일이지, 영역본 특유의 풀어쓰기는 오히려 장애가 된다. 1. 번역서: 근대인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우리 선조들의 연결망에 대한 놀라움의 표면 아래로 파고 들어가면 우리는 그와 같은 이해의 부재라는 인류학적 근원을 발견한다.
원서: qu’est-ce qu’un moderne ? En creusant l’incomprehension de nos aines a l’egard de ces reseaux dont nous pretendons qu’ils tissent notre monde, nous apercevons ses racines anthropologiques. (현대적이라 함은 무엇인가? 우리 선조들이 우리 세계를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 망들의 시선으로 우리 선조의 몰이해를 파고들면, 우리는 인류학적 뿌리를 발견한다.)
2. 근대적이라는 것은 이중의 모순을 말하는데, 하나는 ‘자연’과 ‘사회’의 두 헌법적 보장 사이의 모순이요, 다른 하나는 ‘정화’의 실천과 ‘매개’의 실천 사이의 모순이다.”(『1장 위기』 중에서, 62쪽)
la double contradiction qui est moderne, contradiction entre les deux garanties constitutionnelles d’une part, et entre cette Constitution et la pratique de mediation, d'autre part. (현대적인 이중의 모순은, 한편으로 헌법적인 두 보장 사이의 모순이고, 다른 편으로는 이 헌법과 매개실천 사이의 모순이다.)
1) <1장 위기>가 아니라 <3장 혁명>에 나온다. 2) <정화>가 원문에 어디있는가 3) 영역본을 보든 일본어를 보든 자유다. 다만 그 번역본에 원문에 없는 말이 있으면 그 책임은 한국어 번역자(중역자)에 있다. 3. 그냥 번역하지 말자. 남조선은 왜 그리 양이책 번역에 정력을 낭비하는가. 피케티, 데이비드 크리스털, 브뤼로 라투르 번역자 모두 박사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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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뤼도 라투르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 과학사회학을 통해 ANT(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을 통해 접하게 되었다. 이 사람의 다른 저서를 통해 이 책을 알게 되었다. 2. 이 책의 특징 1) 이 책의 제목은 상당히 도발적이다. 우리가 이전에 접했던 포스트모던 사상을 넘어서 새로운 틀을 제시한다. 비근대주의라고 칭하는데 이 틀을 이용하면 근대주의가 세웠던 자연과 사회의 이분법을 교정시켜준다. 2) 과학철학을 통해 과학의 실재론과 반실재론 논쟁을 적절하게 정리하는 방법이 참 고민되었다. 이 책을 보면 이 또한 근대주의의 산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근대주의는 역사나 과학 등 모든 분야가 중세로부터 단절되는 것을 기초한다. 그래서 언제나 진보와 보수의 논쟁으로 정치 사회적으로 갈등이 표출되는 구조다. 단절되어 계몽되어야하는 것이 근대주의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하면 중세와 근대가 절대로 단절되지 않으며 연속선 상에서 논의할 수 있을 을 깨닫게 된다. 3) 과학의 산물과 인간이 결합한 하이브리드 세상에 대한 첫걸음이 이 책으로부터 시작된다. 3. 이 책의 단점 브뤼노 라투르의 책은 독해하기 어렵기로 알려졌다. 인문학자이다 보니 재치있게 쓴 글이 있는데 교양이 부족하면 농담을 해도 못알아들을 수도 있고 어쩌면 프랑스식 표현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근래 재번역된 어린 왕자를 봐도 프랑스어가 상당히 언어를 세밀하게 묘사하는데 영역이나 우리말 기본 번역이 그 맛을 못살리는 번역의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참 생각할 거리를 많이 준다..비근대를 행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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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ce&logNo=220454484813&proxyReferer=&proxyReferer=https://www.google.com/ * 브뤼노 라투르는 과학기술학자로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의 창시자 중 한 분이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을 우선 살펴 보자면..인간 사회를 관찰할 때 기존에는 인간 중심의 관계망으로 해석해서 인간 외의 사물들의 역할을 작게 해석하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사물들(인간의 발명품을 포함해서 생명체도 다 포함. 비인간)을 행위자로 받아들이면 인간과 사물의 주고받는 관계가 다 드러나면서 인간 사회에서 인간과 사물의 하이브리드된 현상까지 설명이 됩니다. 1. 소개해 드리는 책은 기존의 근대 정치학이 사물과 인간의 관계망을 깨서 인위적적으로 구분시켰다고 말합니다. 2. 그래서 다시 사물과 인간의 관계망을 회복시켜서 바른 관점에서 현재 직면한 환경 문제 등를 정치적으로 해결하자고 말합니다. 3. 이런 관점에서 현재 존재하는 인간만의 의회에 덧붙혀서 사물들도 함께 관계망으로 연결시켜서 볼 수 있게 사물 의회를 제안합니다. (이 책은 우리가 근대라고 믿는 이 사회 정치구조의 허구성을 인류학적 방법론으로 분석해 줍니다.) 이 책이 주는 시사점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근대의 정치 제도가 사물을 제외한 "인간만 주도적으로 참여한다는 정치 현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현재 벌어지는 온갖 사회문제(지구온난화, 방사능, 핵무기, 에볼라 바이러스 등)에는 인간이 아닌 사물들이 행위자로 참여하므로 이들을 함께 고려하는 "행위자 네트워크의 정치학"을 제안합니다. 과학기술자가 말하는 정치학에 대해 한 번 고려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왜 환경 문제도 정치학으로 이해하는지 모르시는 분들이 계실 듯 싶어서 이 글을 적었습니다. * 사물을 제외한 인간 사회의 정치는 개코원숭이의 정치와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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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올해 11월 26일(금) ~ 27일(토) 백남준 아트센터 국제 예술상 수상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브뤼노 라투르의 수상연설문이자 Making things public 전시회 도록의 서문이기도 한 「현실정치에서 물정치로-어떻게 사물을 공적인 것으로 만들 것인가」(백남준아트센터 팜플렛, 2010)에 대한 조정환 선생님의 해석입니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갈 무리, 2009)의 저자이자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의 수상자인 브뤼노 라투르는 수상연설문이자 Making things public 전시회 도록의 서문이기도 한 「현실정치에서 물정치로-어떻게 사물을 공적인 것으로 만들 것인가」(백남준아트센터 팜플렛, 2010)에서 물정치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한다. 그가 이해하는 물(物)정치Ding-politik는 Ding, thing을 그 어원인 모임 혹은 집회assembly로 해석함으로써 성립된다. 그는 정독을 요하는 긴 논의 후에 자신의 물정치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한다.
라투르의 논의는 더 이상 신체로서의 민중이 불가능하고 의회는 물론이고 노동자들만의 평의회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하며 재현과 매개의 가능성이 새로운 조건하에 놓여 있음을 시사한다. "공산주의가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공동체를 추구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유되어야 할 공통세계Common World가 무엇인가를 상상한 성급한 방식에 있다"(p. 29)는 단언은 이것을 증언한다.
신체, 리바이어던 방식의 모임을 통한 재현의 불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다중 개념은 라투르의 유령대중과 보조를 같이한다. 하지만 다중 개념은 살을 통한 새로운 몸의 구축을 전망한다.(네그리와 하트의 『다중』 2부 참조) 이러한 다중 개념은 라투르가 인식하고 있는 시대 개념과 정치 개념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라투르의 물정치 개념은 다중 개념이 빠지지 말아야 할 어떤 경계선을 알려주면서 그것이 나아가야 할 침로를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 벗어나야 할 것은 인간주의이다. 인간, 기계, 자연 등이 물Ding로서 서로 관계하고 얽혀드는 현실에 대한 유물론적 통찰이 필요하다. 둘째로 벗어나야 할 것은 이성주의이다. 의회, 평의회의 방안은 이성에 의한 재현, 즉 이성의 궁전을 통한 재현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이제 물정치적 모임은 모든 사람들이 오늘날 처해 있는 언어장애, 인지장애 등 다양한 장애에 대한 승인 위에서 그것들을 배제하기는커녕, 그 장애에 인공보철물을 장착하여 보정하는 것을 정치의 본령으로 인식하고 실천하는 태도를 요구한다. (보정이자 치유로서의 정치) 셋째 정치가 단일한 공동체의 구축으로 구심화되지 않고 다양한 아상블라주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되어야 하며 집회들의 모임뿐만 아니라 해산의 움직임까지 모으는 Commonwealth(공통체)의 구축으로 방향잡혀야 한다. 넷째 그러므로 다중은 하나로 묶인 실체적 대중이 아니라 유령 대중으로서 구성될 수 있다. 다중이 유령대중이라면, 그 주체는 진보와 연속이라는 연속의 시간 속에 살지도 않고 혁명과 대체라는 단절의 시간 속에 살지도 않는다. 라투르는 모든 것을 동시에 다루는 일련의 동시성으로서의 동거의 공간이 바로 그 유령대중의 활동공간이라고 말한다.(p. 29) 이것은 시간에 대해서는 무엇을 의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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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고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대학원 스터디 때문에 구입하고 읽고 공부하게 된 책이다. 그런데 제목부터 고민하게 만들고 속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책 읽다보면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또 끝까지 다 읽었다는 것에 나 자신을 스스로 칭찬하게 만든다. 그래도. 우리는 근대인이었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