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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 희곡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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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 :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인연   최인훈의 희곡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는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설화를 바탕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 설화가 실려 있는 <삼국사기>(김부식)를 보면, “용모는 구부정하여 우스꽝스러웠지만, 속마음은 환하게 빛났다.”는 내용으로 온달을 기록하고 있다. 온달은 눈 먼 어미를 극진히 봉양하는 효자이기도 했고,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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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 :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인연

 

최인훈의 희곡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는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설화를 바탕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 설화가 실려 있는 삼국사기>(김부식)를 보면, “용모는 구부정하여 우스꽝스러웠지만, 속마음은 환하게 빛났다.”는 내용으로 온달을 기록하고 있다. 온달은 눈 먼 어미를 극진히 봉양하는 효자이기도 했고, 자기 분수를 지킬 줄 아는 현명한 위인이기도 했다. 그는 평강공주가 아내가 되겠다고 하자, 이런 산골에는 여자가 살 수 없다며 필시 당신은 사람이 아니고 여우나 귀신일 거라며 공주를 멀리 했다. 물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온달은 결국 평강공주를 받아들였다. 신분 구별이 엄격했던 당시 사회에서, 천민과 공주가 결혼하는 것은 사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이 이야기에는 신분을 넘어서 사랑을 나누는 두 연인에 대한 당대 백성들의 소망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희곡 제목에 드러나는 대로, 최인훈은 이 희곡에서 온달과 평강공주가 맺은 인연의 불가피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만날 수밖에 없는 사람은 어떻게든 만난다고 하던가. 이번 생에 만나지 못하면 다음 생이 있고, 다음 생에 만나지 못하면 그 다음 생이 있다. 인연이란 인간의 시간을 넘어서 있다. 인연이라는 말이 운명이라는 말과 이어지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는 사람이 있고, 만나고 싶지 않아도 만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 오죽하면 불경에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서 괴롭고, 증오하는 사람은 자꾸만 만나서 괴롭다는 말이 있겠는가. 인연이 선택이라면, 우리는 인연에 대해 무어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인연이 선택을 넘어서는 일이기에 우리는 어떤 사람과 인연을 맺을지 궁금해 한다. 인연이라는 말에는 모르는 것을 알고 싶은 인간의 호기심이 내포되어 있는 셈이다.

 

이야기는 산길을 헤매던 온달이 여자 혼자 있는 집을 찾으면서 시작된다. 산속에서 나무도 하고 사냥도 하는 온달은 덫에 짐승이 걸렸는지 확인하기 위해 산에 오른 터였다. 덫에 걸린 짐승을 호랑이나 이리가 자꾸만 채어가, 온달은 가까운 바위굴에서 밤을 보내고 새벽 일찍이 짐승을 거두러 가는 길에 그만 길을 잃은 것이다. 깊은 산속에 혼자 사는 여자는 별다른 경계 없이 온달을 집안으로 들인다. 음식상을 차려온 그녀는 온달에게 이런저런 일들을 묻는다. 상을 물리자 여자는 갈아입을 옷을 가져온다. 온달이 옷을 갈아입자 여자는 거문고를 타기 시작한다. 온달은 그저 꿈만 같다. 장에서 날나리 패들이 풍악을 타며 노는 것을 본 적이 있지만, 여인네가 직접 타는 거문고 소리를 듣는 것은 처음이다. 소리만 그런 게 아니라, 여자와 한 방에서 마주앉는 것도 처음 겪는 일이다.

 

거문고를 타는 여자의 그림자가 창호지에 어린다. 놀랍게도 구렁이 한 마리가 거문고를 타고 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마주보다가 일어나 창호지 뒤로 들어가 눕는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치자 창호지에 구렁이 그림자가 다시 어린다. 그와 함께 위로부터 웅장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늘님을 모시던 구렁이는 그만 실수를 저질러 이 산으로 유배를 왔단다. 다행히 이번에 용서함을 받고 하늘나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늘의 심부름꾼은 늙은 소나무에 내려와 여인을 맞이할 거라고 했다. 그런데 그 나무를 어제 낮에 온달이 찍어 넘겼다. 승천할 장소를 잃은 여인은 이제 다시 천 년을 기다려야 한다. 한이 맺힌 여인은 그 긴 세월을 견딜 요량으로 온달을 죽여 그 살과 뼈를 취하려고 한다. 다만 온달 역시 모르고 한 일이니, 하룻밤의 즐거움을 더불어 누려 그 한을 누그러뜨렸다는 말이다.

 

온달은 자신의 잘못을 기꺼이 인정한다. 자기 죽음으로 여인의 한이 풀린다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을 참이다. 온달은 다만 늙은 어머니가 걱정일 뿐이라고 말한다. 온달이 죽으면 늙은 어머니도 죽게 된다. 한을 푸는 데만 집착해서 여인은 그만 온달의 어머니를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여인은 하룻밤을 같이 보낸 온달을 살리고 싶다. 하지만 하늘의 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벌을 주는 게 또한 하늘이 만든 법칙이기도 하다. 생각 끝에 여인은 한 가지 방편을 내놓는다. 만약 하늘이 온달을 살릴 생각이 있다면, 자기 말이 끝나자마자 앞산에 있는 빈 절간에 걸린 종이 세 번 울릴 거라는 것이다. 빈 절간에 누가 있어 종을 세 번이나 울릴 것인가?

 

그런데,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 온달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받은 영웅이라는 표시다. 온달이 그만 물러간다고 하자, 여인은 가지 말라고 애원한다. 천 년 동안 이승에서 살아야 할 여자다. 그 긴 세월을 어찌 홀로 견딘단 말인가. 그렇다고 아무 남자를 만나 살 수도 없다. 온달은 하늘이 낸 사람이다. 어쩌면 자신을 위해 하늘이 이 사람을 보내주었는지도 모른다고 여인은 생각한다. 온달은 당연히 거절한다.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다는 게 그 이유이다. 다만 온달은 늘 이 길을 다니니 다시 들르겠다는 말을 남긴다. 인연을 아예 끊지는 않겠다는 것. 이승 사람이면서도 하늘에 사는 여인과 인연을 맞겠다는 것. 여인이 가지 말라고 다시 애원하지만 온달은 그예 문을 나선다.

 

온달은 텅 빈 절로 간다. 도대체 누가 종을 친 것일까? 마루에 노파가 쓰러져 있다. 어머니다. 머리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다. 어머니, 어둠 속으로 온달의 비통한 부르짖음이 퍼져 나간다. 소리를 지르며 온달은 잠에서 깨어난다. 새벽녘, 동굴이다. 쭈그리고 앉아 그는 생각에 잠긴다. 여기저기 거닐다 다시 쭈그려 앉아 생각한다. 손가락으로 허공을 더듬어 기억 속에 있는 길을 떠올려 본다. 짐승이 우는 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생각날 듯 생각나지 않는 길. 그저 꿈이었던가. 그러다가 온달은 퍼뜩 어머니를 생각한다.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여인이 꿈속에만 존재한다면, 어머니는 실제 현실에 존재한다. 꿈속 여인은 죽을 리가 없지만, 현실 속 어머니는 언제나 죽을 수 있다.

 

꿈인 듯, 현실인 듯

 

온달의 집으로 대사와 평강공주가 들어선다. 평강공주는 비구니가 되기 위해 대사를 따르고 있다. 정말로 비구니가 되고 싶어 가는 게 아니다. 궁중에서 돌아가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평강공주는 비구니가 된다는 핑계로 절로 가는 것이다. 그 절로 가는 길에 온달의 집이 있다. 대사는 공주에게 때를 거역하면 안 된다며, 공주를 이곳으로 보내는 부왕의 마음을 헤아리라고 당부한다. 몸을 담은 곳에 연연하지 말고, 마음속에 품은 뜻을 중히 여기라는 말을 아울러 덧붙인다. 마음만 내면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집이 자기 집과 같은 것이다. 공주가 자기 집을 놔두고 다른 집을 찾을 까닭이 무엇이냐고 힐난한다. 이리 대가 센 공주가 궁중에서 편하게 살 수는 없다. 상대를 아우를 힘은 부족하고 욕망은 크니 왕이 공주를 다른 곳으로 보낼 수밖에 없다.

 

대사는 공주가 성에 머물러 있으면 골육상쟁은 피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공주는 분하다. 무서운 음모를 꾸미는 이들은 궁중에 남았는데, 그저 아비 곁에 남으려는 자신은 쫓겨났기 때문이다. 대사는 이를 평화라고 말하고, 공주는 이를 항복이라고 말한다. 참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고,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늘 져야 한다는 대사의 말은 공주의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공주의 오라비인 왕자는 자리를 버리고 출가하고 싶다는 뜻을 대사에게 내비쳤다. 공주는 오라비의 속마음을 헤아리기 힘들다. 오라비는 궁중의 암투에서 벗어나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바라고, 공주는 왕실을 위협하는 세력을 물리치고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싶다. 왕자와 공주가 바뀌어 태어났으면 좋겠지만, 어디 그게 뜻대로 되던가. 여우가 꾸민 짓(27)이라는 공주의 말을 참조하면, 암투는 아마도 새 왕비와 왕자(공주)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양이다.

 

대사가 물을 뜨러 간 사이, 공주는 울타리 쪽에 널어놓은 짐승 가죽을 둘러본다. 호랑이 가죽이다. 이 집에 사는 사내가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았단다. 호랑이 가죽 옆에는 곰 가죽도 있고, 여우 가죽도 있다. 호랑이를 잡은 장사는 대력장군보다 더 용맹한 장사라고 공주는 단언한다. 대사는 그 장사 이름이 바보 온달이라고 알려준다. 이름을 들은 공주가 놀란다. 어렸을 때 공주는 울보였다. 아버지가 얼러도 공주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먼 산을 가리키며 자꾸만 울면 저 멀리 산 속에 사는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보낸다고 말했다. 그 말이 그때는 얼마나 무서웠는지. 한데, 지금 공주는 바보 온달이 사는 집에 와 있다.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인연은 맺고 싶다고 맺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공주는 이전에 온달의 집에 와본 것 같은 느낌에 빠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생생하게 이 집이 떠오른단 말인가. 대사는 부모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가 있던 곳을 보는 것이 부처의 힘이라고 말한다. 흔히 말하는 전생이다. 공주는 마당을 가로지르는 토끼를 본 것도 같고, 뒷산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도 이미 들은 것도 같다. 마당에 있는 절구까지 생각나는데, 정작 온달의 얼굴은 생각이 안 난다. 밖에 나갔던 온모(온달의 모친)가 돌아오자 대사는 다시 길을 떠나려고 하지만, 공주가 선뜻 따라 나서지 않는다. 공주는 아무래도 이 집에서 지울 수 없는 인연을 느낀 듯싶다. 시간이 흘러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그녀를 이 집에 붙들어 매는 것이다.

 

온모가 대사에게 꿈 이야기를 한다. 관을 쓴 온달의 모습이 햇덩이처럼 눈부셨는데, 조금 있다가 바로 그 관에서 피가 흘러내렸단다. 대사는 온달이 장가를 드는 꿈이라고 푼다. 그럼 관에서 왜 피가 흐른 것일까? 대사는 피는 생명이니, 기운이 좋아 그런 거라고 얼버무린다. 뒷산을 산책하고 온 공주는 여전히 이 집을 떠날 마음이 없다. 그녀는 어릴 적에 들은 바보 온달이 땅을 밟고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현실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존재가 이리 집을 짓고 살고 있는데, 어떻게 확인을 안 하고 떠날 수 있는가? 공주에게 온달은 현실과 꿈 사이에 존재한다. 궁을 떠나 비구니가 되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라 싫고 무섭고 분하고 억울하긴 해도 이상스럽다거나 어리둥절하진 않았다.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그저 아버지와 대사를 따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머무는 곳이 온달네 집이라는 말을 들은 때부터 공주는 현실인 듯, 꿈인 듯한 묘한 상황 속으로 빠져든다. 그녀는 온달이라는 사람을 보면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드디어 사립문이 열리며 온달이 나타난다. 송아지만한 곰 한 마리를 어깨에 메고 있다. 온달을 봤으니 이제는 길을 떠나야겠다고 대사가 말하자 공주는 대뜸 이 집에 남겠다고 선언한다. 갑작스럽다. 도대체 공주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결심에 이른 것일까 

 

대사님, 무얼 놀라십니까? 궁속에 있던 몸이 산속의 암자에서 세상과 끊는 몸이 된다면 이미 어제까지의 나는 없는 것. 그러니 내 한 몸을 이래라저래라 할 사람은 없겠지요. 아까부터 나는 꼭 꿈을 꾸는 것 같았지요. 그 옛날 아버님께서도 온달에게 시집보내신다던 그 말이 이렇게 이루어질 줄이야…… 인연이요, 업이라고 하셨지요? 이게 인연이요 업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필이면 이 길목에 온달의 집이 있고, 집을 나온 내가 여기서 발길이 멈춰지다니…… 이제 환해졌어요. 여기가 내 집이군요. 그래서 그렇게 모두 예전에 보던 물건이군요. 그래요. 내가 살던 곳이에요. 여기가 아버님 팔에 안겨서 멀리 바라보던 곳. 철없이 무서웠던 건 아마, 그때는 여기 올 것이 익지 못해서 그랬던가 봐요. 길이 없는 데로 보낸다고 하면 무서운가 보지요? 길이, 이젠 길이 익고 터져서 이렇게 오고 보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군요. (45~46)

 

길이 없는 곳이 이제 길이 되었다. 인연으로, 업으로 연결된 길이다. 이번 생에 인연을, 업을 풀지 않으면 다음 생까지 그것은 이어진다. 공주는 온달의 집에서 온달과 더불어 이 인연을, 이 업을 풀려고 한다. 아버지와 더불어 살던 화려한 궁전은 덧없는 물방울에 불과했고, 가는 길을 몰라 두려움을 일으켰던 온달(의 집)이 실재로서 등장했다. 대사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한다. 지엄한 몸이 어떻게 저런 천민과 결혼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공주는 출가를 하는 것은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이라고 받아친다. 지엄을 가지고 가는 출가도 있느냐고 되묻는다. 공주가 부엌에서 나오는 온달 앞에 나서 갓을 벗는다. 공주를 본 온달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꿈속에서 본 그 구렁이 여인이다. 공주는 거침없이 두 분을 모시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온모가 놀란 얼굴로 대사를 본다. 대사는 거세게 고개를 젓는다.

 

공주는 뜻을 꺾을 생각이 없다. 온달은 넋이 나간 듯이 그저 서 있을 뿐이다. 꿈에 본 여자가 어떻게 현실에 나타난 것일까?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는 온달이 어떻게 대사가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끝내 대사가 이 분은 평강 왕의 공주라고 외친다. 깜짝 놀란 모자는 땅에 바짝 엎드린다. 신분이 밝혀졌지만, 공주의 뜻은 의연하다. 홀린 듯이 공주를 바라보는 온달을 대신하여 온모가 죽을죄를 지었다고 읊조린다. 그래도 공주는 뜻을 굽히지 않는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꿈이라면, 그것이 무슨 꿈인지 알아보고 싶다고 외친다. 공주는 어린 시절에 들었던 꿈같은 이야기를 현실에서 경험하고 있고, 온달은 꿈에 본 구렁이 여인을 현실에서 다시 보고 있다. 온모가 온달에게 죽을죄를 빌라고 말해도, 온달은 무엇에 씌운 듯이 그저 멍한 얼굴로 공주를 바라본다.

 

죽음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인생사에서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10년이라는 말이다. 공주는 이제 궁에서 생활하고, 온달은 장군이 되었다. 백성들은 온달을 산에서 호랑이를 타는 영웅으로 떠받든다. 그만큼 온달은 백성들 마음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온달은 전쟁터에서 시간을 보냈다. 싸우는 족족 승리를 거두었고, 왕의 신망 또한 두터웠다. 밝은 지점이 있으면 어두운 지점도 있는 법, 천민 출신인 온달이 승승장구하는 것을 귀족들이 마땅히 여길 리가 없다. 게다가 온달의 부인은 권력 욕망에 불타는 평강공주이다. 10년 전의 궁에는 공주를 지켜줄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가 왕이고, 오라비가 왕자였지만, 그들은 사사건건 시비를 일으키는 공주를 절로 내쫓은 이력이 있다. 지금은 공주를 온달이 지켜준다. 호랑이를 타고 다니는 영웅 온달을 그 누가 업신여길까.

 

전쟁터에 나간 온달이 그리워 공주는 잠을 못 이룬다. 이번 싸움에 이기고 돌아오면 온달은 대장군이 될 것이다. 실력으로 따지면 이미 온달은 대장군이 되었어야 한다. 공주와 온달을 견제하는 세력의 힘은 아직도 막강하다. 그들은 싸움을 명분으로 온달을 전쟁터에 내보낸다. 공주는 이제 온달을 자기 곁에 두려고 한다. 변방을 떠돌던 온달이 궁중에서 자리를 잡으면, 공주가 꿈꾸는 세상 또한 그만큼 빨리 이루어질 것이다. 지난 10년을 허투루 보낸 게 아니다. 그 기간 동안 공주는 온달과 더불어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 반대자들을 가차 없이 제거했다. 산속에서 짐승이나 잡으며 살았을 온달을 대고구려의 장군으로 만든 게 바로 공주 자신이 아닌가. 온달과 함께 있으면 공주는 어떤 일이든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제 그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이 밤에 공주는 이상스레 마음이 설레는 걸 느낀다. 전쟁터에 간 온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둘은 예사 인연이 아니다. 온달은 꿈속에서 본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고, 공주는 어린 적 아버지 입에서나 맴돌던 인물을 남편으로 맞았다.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공주 앞에 기적처럼 온달이 나타난다. 아직 날이 새지도 않았는데, 전장에 있어야 할 온달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것일까? 갑옷을 입은 온달의 몸은 피로 낭자하다. 깜짝 놀란 공주가 달려가니 온달이 손을 들어 막는다. 자기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다. 온달이 죽었다면 싸움에도 진 것인가? 아니다. 온달은 싸움에서 이겼다. 싸움에서 이긴 장군이 그럼 왜 죽은 것인가? 나를 죽인 것은 고구려 사람이오.”(64)라고 그는 비통하게 외친다. 같은 편이 온달을 죽였다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공주, 고구려 평양성의 인심은 무섭더이다. 이 몸은 산에서 활을 쏘고 창으로 끼니를 얻던 그때처럼 편한 마음을 한신들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인 평양성에서 나는 눈멀고 귀먹은 짐승이었습니다. 나는 보지도 듣지도 않았습니다. 부마될 내력 없는 이 몸을 비웃는 소리도 나에게는 가을날 산의 가랑잎 스치는 소리더군요. 하늘인 당신을 모신 이 몸은 아무것도 듣도 보지도 않았습니다. 무엇을 들어야 할 이치가 있었을까요? 숱한 사람들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공주 당신께서 하시는 이야기를 다 들어서는 안 된다고. 온달은 나라의 부마이고 나라의 장군이라고…… 그러나 이 몸에게는 부질없는 말들. 공주, 당신이 나의 고구려였습니다. 고구려 그것은 당신이었습니다. 덕이 높으신 왕자의 말씀도 내 귀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분들은 모두 다른 고구려를 섬기는 어른들인 것을 나는 알게 되었지만 지금까지도 이 몸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지금 나는 당신에게서 떠납니다. 나는 두렵습니다. 당신 말고 다른 고구려를 섬기는 사람들이 당신을 해칠 일이, 공주…… (66)

 

죽은 온달은 살아 있는 공주가 걱정되어 유령으로 나타난다. 온달이 죽으면 아무도 공주를 지켜줄 수 없다. 10년 전에도 그런 일이 있지 않았는가. 온달은 지난 10년 동안 공주를 하늘로 알고 살았다. 오로지 공주를 위해서 전쟁터에 나가 힘껏 싸웠다. 평양성의 귀족들은 온달을 부마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산에서 살 때는 몸은 고돼도 마음은 참으로 편했지만, 능력 있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사는 평양성에서 그는 눈멀고 귀먹은 짐승이 되어야 했다. 그는 평양성에서 일어나는 권력 투쟁을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내인 공주가 권력 투쟁의 중심에 서 있다는 걸 온달이 몰랐을 리 없다. 온달이 가고 싶은 길과 공주가 이르고 싶은 길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래도 어쩌랴, 온달에게는 오직 공주만이 하늘이었다. 공주가 곧 고구려였다.

 

숱한 사람들이 공주가 하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온달은 공주의 남편이나 장군이 아니고, 나라의 부마이자 나라의 장군이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공주와 나라를 구분했지만 온달은 공주가 곧 나라여야 했다. 그는 공주를 지키기 위해 나라를 지켰다. 그런 그를 주변 사람들이 그냥 놔둘 리 없었다. 공주와 각을 세우는 사람들은 공주보다 먼저 온달을 제거해야 했다. 섣부르게 공주에게 칼을 들이밀었다간 무지막지한 온달의 칼에 베일 수 있었다. 온달은 자신이 죽으면 공주 또한 죽은 목숨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어떻게든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정적들의 표적이 된 공주를 기필코 지켜내고 싶었다. 새벽 종소리가 울린다. 온달은 머리에 상처가 있는 장수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부탁하며 저 멀리로 사라진다.

 

공주가 장군을 거듭 외치자 놀란 시녀들이 다가온다. 꿈인 것일까? 날은 아직 새지 않았다. 갑자기 밖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린다. 이 새벽에 어디서 말이 왔는가? 시녀들이 상황을 알아보러 나간 사이, 공주는 꿈속에서 온달이 한 말을 떠올린다. 그는 공주를 위해서 싸움을 한다고 했다. 온 나라가 우러러보는 높은 자리에 올라도 별다른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고도 했다. 평양성에서도 온달은 으뜸가는 용사였다. 장군을 지키기 위해 공주는 장군의 적들을 목 자르고 멀리 쫓아 보냈다. 공주 홀로 가는 길이 아니라 장군과 더불어 가는 길이었다. 장군이 그 길 위에 있기에 공주는 거침없이 앞만 보고 달려갈 수 있었다. 공주에게 온달은 하늘이었다. 온달이 이를 길이 곧 공주가 이를 길이었다. 밖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린다. 상황을 알아보러 간 시녀들이 들어와 장군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꿈이 아니었다.

 

무대는 전장으로 바뀐다. 들판에 있는 작은 천막 안에 온달의 관이 있다. 병사들이 아무리 힘을 써도 관이 움직이지 않는다. 영웅의 가슴에 맺힌 한이 걷히지 않았다는 얘기다. 관이 움직이니 않으니 사람들은 두렵다. 소식을 들은 공주가 나타난다. 관 앞에 다가간 공주는 병사들에게 관 뚜껑을 열라는 손짓을 한다. 온달의 시체를 쓰다듬으며 흐느끼던 공주는 이내 몸을 일으켜 장수들에게 투구를 벗으라고 명령한다. 온달은 머리에 상처가 있는 장수가 자신을 죽인 범인이라고 했다. 온달을 섬긴 부장과 장수들이 싸움터에서 장수는 투구를 벗지 못한다고 맞선다. 공주가 거듭 명령을 내려도 그들은 군율이 산과 같다며 투구를 벗지 않는다. 분노한 공주가 직접 벗기려고 하자 호위 군사들이 창으로 막아선다. 공주를 공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표시다. 온달이 죽은 마당에 공주가 무슨 수로 이를 막겠는가.

장군, 비록 어제까지 장군이 치닫던 벌판이라 하나, 이제 누구를 위해 여기 머물겠다고 이렇게 떼를 쓰십니까? 장군의 마음을 내가 알고 있으니 집으로 돌아가십시다. 고구려는 내 아버지의 나라, 당신의 원수를 용서치 않으리다. 평양성에 가서 반역자들을 모조리 도륙을 합시다. , 돌아가십시다. (77)

 

공주만이 죽은 온달(의 영혼)을 달랠 수 있다. 공주가 병사들에게 관을 들어 올리라고 하자 기적처럼 관이 올라온다. 온달을 죽이는 데 동의한 부장과 장수들은 이 상황을 어떤 마음으로 보았을까? 누군가가 명령한 일이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온달이라는 영웅을 죽였다. 공주는 복수를 맹세한다. 머리에 상처를 입은 부장이 공주의 서슬 푸른 말을 듣고 두려움에 떠는 장수들에게 공주보다 더 높은 사람이 우리 편이라고 이야기한다. 공주보다 더 높은 사람은 누구일까? 왕일까? 왕자일까? 아니면 왕과 왕자를 움직이는 또 다른 세력일까? 공주가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면 막강한 세력과 힘을 겨루어야 한다. 온달을 잃은 공주가 과연 이 싸움을 감당할 수 있을까? 공주가 감당을 하든, 못 하든 싸움은 이제 시작되었다. 공주가 살려면 공주보다 더 높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 싸움.

 

욕망

 

공주가 대사와 함께 온모가 사는 오두막을 찾는다. 온모는 공주와 온달이 평양성으로 떠난 이후에도 이 오두막을 떠나지 않았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집은 그대로다. 여전히 온달을 잊지 못하는 공주에게 대사는 집착을 버리라고 충고한다.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 마당, 저 울타리, 저 산봉우리들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숱한 세월이 흘렀는데도 왜 이것은 변하지 않는가? 공주는 시간이 흐르는데도 변하지 않는 이 강산을, 이 세월을 용서할 수 없다. 온달과 더불어 그 거친 세월을 견딘 대가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온달을 처음 만난 그때나, 온달을 잃은 지금이나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공주는 도대체 온달과 어떤 시간을 보낸 것인가 

 

대사가 공주에게 10년 전 온달이 꾼 꿈 이야기를 한다. 온달이 꿈에서 본 구렁이 여인이 바로 공주였다. 온달은 이 꿈을 공주에게 말하지 않았고, 공주는 어릴 적 아버지에게 들은 바보 온달의 이야기를 온달에게 말하지 않았다. 온달과 공주의 인연은 아주 먼 옛날의 어느 시점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그 까마득한 시간을 내버려둔 채 지금 이 순간을 꿈인 듯 살아냈다. 지금 이 순간에 펼쳐지는 꿈을 위해 공주는 온달에게 글을 가르치고, 술책을 일러주고, 고구려와 신라를 말하고, 궁중이 어떤 곳인가를, 누구를 죽여야 하는지를 알려 주었다. 꿈속의 구렁이 여인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일이었다. 구렁이 여인이라며 하지 않았을 일을 공주는 왜 실행에 옮긴 것일까?

 

권력을 향한 욕망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것이 없다. 10년 전에도 공주는 권력 싸움에서 밀려나 절로 도피하는 중이었다. 그 길 위에서 그녀는 운명처럼 온달을 만났다. 공주는 산골 오두막에서 조용히 사는 삶 대신 온달을 고구려의 대장군으로 만드는 삶을 선택했다. 구렁이 여인이라면 어땠을까? 온달은 공주와 산 10년을 꿈속 세상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평양성에 몸을 두고 있으면서도 늘 짐승을 잡고 사는 산속 삶을 꿈꾸었다. 구렁이 여인과 살았다면 온달의 꿈은 현실로 이루어졌으리라. 꿈을 접은 온달은 평양성에서 공주의 꿈을 더불어 꾸며 살았다. 공주가 꾸는 꿈이 곧 자신이 꾸어야 할 꿈이었다. 공주가 글을 가르치면 글을 익혔고, 무예를 기르라면 무예를 길렀다. 온달에게 공주는 새로운 삶의 시작점이었고 종착점이었던 셈이다.

 

공주는 온달이 죽은 다음에야 온달이 꾼 꿈의 진실을 알게 된다. 만약 공주가 10년 전에 이를 알았다면 공주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사실 이 질문은 무의미한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때 보지 못한 것을 우리는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보게 된다. 다시 똑같은 상황이 반복돼도 공주는 아마 온달의 꿈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욕망의 그늘은 이토록 짙은 것이다. 욕망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그 너머에서 빛나는 또 다른 꿈을 욕망의 어둠 속에 묻어버린다. 공주는 장군과 내가 한 꿈속에서 살면서도 모르고 지냈다는 것이 또 다시 새로운 짜증스러움이 되는구나.”(92)라고 한탄하지만, 그녀는 결코 온달과 한 꿈속에서 산 적이 없다.

 

온달은 온달의 꿈을 꾸었고, 공주는 공주의 꿈을 꾸었다. 그 두 꿈이 너무나 거리가 멀어 온달은 제 꿈을 버리고 공주의 꿈을 자기 꿈으로 받아들였다. 공주는 이 사실을 왜 몰랐을까?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렸기 때문이다. 온달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공주의 꿈은 그래서 온달이 죽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다. 산골 오두막까지 찾아온 장교의 칼에 공주는 한 많은 생을 맺는다.

 

온달을 통해 공주가 꿈꾸었던 세계를 상상해 본다. 그 세계는 아마도 구렁이 여인이 꿈꾸던 세계와는 확연히 다를 것이다. 구렁이 여인은 꿈속에서 온달을 붙잡으려고 했다. 온달이 어미를 핑계 삼지 않고 여인 집에 머물렀다면, 온달은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는 법이다. 우리는 다만 이미 일어난 일에서 이야기 속 인물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한 욕망을 안타깝게 지켜볼 뿐이다.

 

 

 

o*****s 2019.12.29. 신고 공감 4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