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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 치열하게. 그러나 생각만 해보아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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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만큼 별점 주기가 애매한 책은 처음인것 같다. 저자의 주장과 논리의 이끌어감에 대한 공감적인 측면에서는 별한개도 아깝다. 그리고 번역에 대한 부분 역시 별 두개가 아깝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잔뜩 떠앉게 된 생각거리들을 생각하면 별 다섯개도 부족하다. 이반 일리히의 학교 없는 사회는 그 주장의 공감여부를 떠나 한번 쯤 고민해볼 가치가 충만한 문제들이 곳곳
"한번쯤 치열하게. 그러나 생각만 해보아야 할." 내용보기

이책만큼 별점 주기가 애매한 책은 처음인것 같다.

저자의 주장과 논리의 이끌어감에 대한 공감적인 측면에서는 별한개도 아깝다.

그리고 번역에 대한 부분 역시 별 두개가 아깝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잔뜩 떠앉게 된 생각거리들을 생각하면 별 다섯개도 부족하다.

이반 일리히의 학교 없는 사회는

그 주장의 공감여부를 떠나 한번 쯤 고민해볼 가치가 충만한

문제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는 아주 신기한 책이다.

 

 

 

<학교없는 사회>는 처음부터 강렬하게 시작한다.

그리고 이 처음의 주장은 이 책을 이끌어가는 근저를 이루고 있다.

이반 일리히는 서두에 과정과 실체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병원의 치료를 건강으로, 사회복지를 사회생활의 개선으로, 경찰보호를 사회안전으로,

무력균형을 국가안보로, 과당경쟁을 생산적 노동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 결과 건강,공부,존엄,독립,창조 자체는,

그런 목표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강변되는 제도의 수행보다 열등한 것으로 정의된다. p24

 

 

그리고 이 주장을 시작으로 하여

학교화 혹은 제도화가 얼마나 인간의 창조성과 자율성, 효율성, 평등을 억압하는지에 대해

논지를 펼쳐나간다.

위에서 말한대로 이반 일리히의 주장 자체에는 동의할 생각은 없지만

책에는 상당히 재미있는 생각들, 고민해볼만한 생각들은 참 많다.

 

특히 과정과 실체를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누구나 한번 쯤 깊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다.

다만 이반 일리히는 이 생각을 토대로 너무 막나갔다.

 

그는 이 생각을 발전시켜나가 학교화라는 것의 무의미함.

제도라는 것의 무의미함과 단점들을 모조리 들춰낸다.

물론 그 단점들 자체로는 틀린 말을 하지는 않는다.

 

학교화가 발달될수록, 특히 인간이 학교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학교를 통한 계습의 세습화가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이 책에서 내가 유이하게 공감한 주장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세습화를 없애기 위해 학교 자체를 없애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반일리히는 또한 학교화란 것이 오히려 인류의 평등에 덫을 놓는다고 주장한다.

학교화가 진행될수록 절대 빈곤에 처한 국가들이 빈곤의 원인을 그 스스로에게 뒤집어 쓸수밖에 없다는 주장에도

조금은 공감이 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절대빈곤국가들에 학교화, 관료화를 진행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에까지 공감할 수는 없다.

 

학교를 통한 세습화가 문제가 된다면 그 학교를 들어갈 수 있는 문턱을 낮추면 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재임기간중 내가 가장 반대했던 부분은 에프티에이와 의전원,로스쿨이었다.

의전원과 로스쿨, 한학기 등록금만으로 약 천만원에 가까운 금액을 지불해야 하는,

그래야 의사,변호사가 될수 있는 사회야말로 이반일리히가 지적한 교육을 통한 계급의 세습화가 이루어지는 사회다.

그렇다면 의전원의 등록금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것이 교육을 통한 계급의 세습화를 막는 길이지 않을까?

그런데 부의 세습화, 계급의 세습화를 막기 위해

의학,법학을 배우는 교육과정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 책에서 이반 일리히가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그는 제도라는 것을 그렇게 신뢰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에게 제도란 그저 그 제도에 기댄 특권층을 만들어내고 그들을 보호하는

인류의 평등과 자유를 막는 백해무익한 존재일 뿐이다.

 

잘 고치는 사람이 의사가 되어야한다. 잘 가르치는 사람이 선생님이 되어야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과정 한가운데가 비어있다.

잘 고치고, 잘 가르치는 사람은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

이반 일리히는 오로지 결과만을 바라보고 얘기하고 있다.

 

제도라는 것은, 면허라는 것은, 배타적 권리라는 것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과연 처음부터,태초에 하나님이 명하시어 제도라는 것이 존재하여 교대가, 사범대가, 의대가 생겨났을까?

아니다.

잘 가르치고 잘 가르치는 사람을 판별하기 위해서 면허제도가 생기고.

그 제도를 안정적인 틀 위에 올려놓기 위해 그 제도를 위한 교육제도가 생겨났다.

 

이반 일리히는 그저 지금 보이는 그 현상의 문제점들 때문에 이 과정을 다시 처음부터 되풀이하자고 할 뿐이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한들, 수십년, 수백년, 혹은 수년이 지나면 다시 이와 같은 제도가 생겨날 뿐이다.

물론 그 안의 내용까지 똑같아질수는 없겠지만 어찌 되었든 제도라는 틀에 묶일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면허를 가지지 않는 사람중에도 환자를 잘 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선생님의 자격을 가지지 않는 사람중에도 학생들을 올바로 잘 지도해줄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런 최소한의 사람을 기대어 환자들과 학생의 피를 쪽쪽 빨아먹는 돌팔이들은 더욱 많다.

물론 그들이 발각되어 처벌받고 수요자가 그들을 찾지 않으면 그뿐이라고, 그 것 자체도 수요자들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이반 일리히의 생각이지만 그건 너무도 무책임하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손실에 대해 이반 일리히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이렇게 똑똑하므로, 내 주변의 인물들은 그렇지 않으므로,

이반 일리히는 너무도 밝은 세상에서 살아온듯한, 모든 것이 장밋빛으로만 가득한 주장에 매몰되어 있다.

 

그가 생각하는 인간은 너무도 똑똑하다.

모두다 전문가가 될 수 있으며, 사람들은 공부망을 통해 서로 학습하고 인간의 창조성을 발달시킬 수 있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존재한다. 이반 일리히 역시 그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사람들이 더욱 많이 존재하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제도는 그렇지 않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성을 확보해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생겨난 존재이다.

 

제도화란, 학교화란 최고의 대답이 아니다.

인류 역사는 가끔 가끔씩 퇴보해가면서도 큰 흐름에서는 꾸준히 발전해왔다.

그 발전이란 부의 분배일 것이다.

왕과 귀족, 평민과 노예가 존재하던 그 빈부의 격차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사회에서

조금씩 조금씩 그 부의 분배가 평등화 되는 사회로 발전되어 왔다.(물론 그렇다고 지금 상태에 만족하고 살라는 말은 아니다.)

앞으로도 계속 빈부의 격차가 해소되는 사회로 이끌어나가야한다.

 

이반일리히는 이 빈부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제도 이전의 사회, 원시사회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이다.

태초의 사회처럼,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사회에서 다시 시작한다면 모든 인류가 잠시나마 평등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간들은 예전처럼 사회를 만들고 왕을 만들고 귀족을 만들고 계급을 만들것이다.

그리고 그 계급을 없애기 위한 인류의 수천년 역사가 다시 반복될 것이다. 물론 지금 해왔던 것이 있으니

그 시간은 엄청나게 단축될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다시 이반 일리히와 같이 주장하는 학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공허하다.

 

이반 일리히가 중요시하는 가치들.

인류의 자율성, 평등, 존엄, 건강.

분명 학교화라는 미명 아래 그 실체와 과정이 혼동되고 있기는 하다.

 

학교화, 제도화는 정답이 아니다.

그저 인류가 지금까지 찾아낸 답안들 중에서 그나마 가장 괜찮은 답안일 뿐이다.

문제점은 없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인류가 해야할 일이다.

그리고 그 문제점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학교가, 교육이, 제도가 필요하다.

 

 

이 책에는 위에서 언급한 가장 뼈대를 이루는 것들 외에도

상당히 재미난, 이야기거리들이 많다.

아마 책을 통한 토론이 하고 싶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그야말로 보배와 같은 책이리라.

 

나온지 40년이 되어가는 책이지만

이 책의 주장과 이반 일리히의 생각은 지금도 센세이셔널하다.

그래서 재밌고 솔깃하다.

하지만 그 뿐이다. 그리고 그 뿐이어야 한다.

 

모쪼록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한번 쯤 고민만, 해보기를 바라며.

 

j*******s 2010.08.31. 신고 공감 4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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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공부 너무 믿지마, 교육은 삶의 교육 노동교육 인간관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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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없는 사회 』   저자: 이반 일리히 번역: 박홍규 출판:생각의 나무 발간 한국에서 2009년 7월 7일 원제 발행일 - 1970년   Q 겨울은 항상 추운데 이번 겨울 날씨가 매우 춥습니다. 특별히 어제 오늘 최고로 춥다고 합니다. 이런 추위를 녹여줄 책이 있나요? 오늘 소개할 책은 무엇입니까? A 오늘 소개할 책은 자녀를 둔 부모님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제목을 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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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없는 사회 』

 

저자: 이반 일리히

번역: 박홍규

출판:생각의 나무

발간 한국에서 2009년 7월 7일 원제 발행일 - 1970년

 

Q 겨울은 항상 추운데 이번 겨울 날씨가 매우 춥습니다. 특별히 어제 오늘 최고로 춥다고 합니다. 이런 추위를 녹여줄 책이 있나요? 오늘 소개할 책은 무엇입니까?

A 오늘 소개할 책은 자녀를 둔 부모님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제목을 가진 책입니다. 이반 일리히 교수의 < 학교 없는 사회 >입니다. 생각의 나무 출판사에서 만들었습니다.

번역은 영남대학교 법학과 박홍규 교수가 했습니다.

 

Q 저자가 처음 들어 보는 분입니다. 소개가 필요한것 같은데 이반 일리히는 어떤 분입니까?

A 이반 일리히 교수는 카톨릭 사제입니다. 그리고 후에 대학교 부총장까지 지낸 교수입니다.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했습니다. 카톨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로 있다가 카톨릭교회의 정책에 반대했다가 사제를 그만두게 됩니다. 이반 일리히는 사제직을 떠난 후 『학교 없는 사회』를 비롯하여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글들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서독의 카셀 대학과 괴팅겐 대학에서 유럽 중세사를 강의하는 등 저술과 강의활동에 전념했습니다. 2002년 12월 2일 독일에서 향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가디언〉, 〈르몽드〉, 〈뉴욕 타임즈〉 등을 사후 특집 기사 등을 통해 그에게 20세기 최고의 지성 중 한 명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참고)

<로마의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1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아일랜드-푸에르토리코 교구에서 보좌신부로 일했으며, 1956년부터 1960년까지 푸에르토리코의 가톨릭대학교 부총장을 지냈다. 그러나 사제 확대정책에 반대한 것, 피임정책을 지지한 것 등 일련의 교회 정책에 반대한 것이 빌미가 되어 교황청과 마찰을 빚다가 1969년 사제직을 떠났다. >

 

Q < 학교없는 사회>의 책의 핵심내용은 무엇입니까?

A “ 가치의 제도화 ”라는 개념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개념인데요 한가지를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쉽게 말해서 교육이라는 것이 오늘날 어디에서 시킬 수 있나요? 학교입니다. 그래서 좋은 대학가려고 노력하지요 어느 학원나왔다고 좋은 직장 주지 않습니다. 서울에 sky 대학이나 미국의 유명 대학을 나왔다고 해야지 스펙이 쌓이고 사회가 인정하여 주는 통념입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학교교육을 제가 어릴적부터 개혁하여야 한다고 했는데 개혁이 되었습니까? 30여년이 흘렀지만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나, 도지사, 시장들도 나를 뽑아주면 한국의 교육을 바꾸어보겠다고 했지만 전국민이 아직도 그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치를 제도화 - 도구화 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교육은 학교만을 통하여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가치를 어느 틀속에 넣고 아무리 바꾸려 해도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속의 교육은 결국 - 산업적 생산양식 자체의 존재방식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속에서의 교육은 거대한 공장에서의 부품으로 전락하는 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인성교육, 창의교육은 이런 방식의 교육형태로는 결코 만들어 질수 없다고 저자는 벌써 40년전에 말하고 있습니다. 선구자적인 안목입니다. '가치의 제도화'란 도구의 과잉발전으로 인해 도구가 일상의 전 영역을 지배하게 된 현대 사회의 특징으로입니다 건강은 병원, 공부는 학교, 이동은 교통수단, 존엄은 사회복지제도, 독립은 군대, 창조는 노동, 안전은 경찰, 정치는 정당, 신앙은 교회, 의사교환은 언론 등 인간 삶과 사회의 여러 가치들이 서비스로 제도화되어 가치와 제도가 혼동되는 과정을 표현한 일리히 사상의 핵심개념입니다

 

Q 이 그러면 저자는 학교를 무조건 없애자는 것인가요?

A 물론 저자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너무나 혁명적이어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저자는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사회구조의 틀을 바꾸지 않고 항상 댐질씩 미봉책론 항상 문제의 핵심을 파고 들지 못합니다. 학교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보다 더 깊이 학교화된 사회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사회는 병원, 학교, 사회제도, 심지어 종교까지도 저자는 인간을 자유케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육이 인간을 구속하고, 로봇화 시키는 것을 반대합니다. 사회가 결국 그런 식으로 만들어져 있다라는 것이지요. 인간이 사회를 위해서 존재하는 방식은 하나님이 허락한 방식이 아닙니다. 사회구조가 인간을 위해 변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이반 일리히의 위대함은 현대문명 자체가 위험하다라고 진단하는 것입니다,.

 

Q 요즘 일반학교를 떠나 대안학교쪽으로 자녀들을 보내는 분들이 주변에 있습니다. 이런 맥락과 이반 일리히의 논리와 관계가 있습니까?

A 일리히는 <학교>가 들어가는 것 자체를 반대합니다. 학교가 학교가 아닙니다. 현대사회의 구조를 구성하는 상부구조가 학교입니다. 일리히에는 어떠한 형태이든지 학교는 결국 인간을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곳입니다. 차별화를 가져오는 기초를 제공하는 곳이지요. 한국사회가 그렇지 않습니까? 좋은 대학을 나온다는 것은 결국 좋은 서비스를 받아서 다시 좋은 직장을 찾기 위함이 아닌가요? 경쟁사회를 유도하고 고착화 시키는 곳이 학교입니다. 현대인은 개인이기 때문에 그런 구조에 반기를 들수가 없는 것이죠 너무나 큰 힘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아마도 대안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분들의 마음속에는 조금 눈이 떠진 면이 있지만 결국 일리히의 눈에는 일반학교나 대안학교 결국 제도의 가치화 정도로 밖에 보지 않는 것입니다.

 

Q. 다시 <학교 없는 사회>로 돌아와서 이반 일리히의 개념들을 더 욱 상세히 설명해 주세요

A 일리히는 제도로서의 학교를 분석하면서 배우는 것 가르치는 것이 학교에 의해 독점(근원적)된 사회를 < 학교화 사회>라고 규정합니다. 오늘날 학교는 < 교육>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육의 문제점들이 결국 <학원>만능주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1-2세부터 시작되는 학원의 열풍을 알지 않습니까? 몇 년전 보도된 영어발음을 위하여 혀를 어릴적에 수술해주는 부모가 있습니다. 교육즉 좋은 외국어 고등학교에 보내려고 좋은 혀를 만들어 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한국에서 자녀를 교육하는 부모는 누구나 동일한 마음입니다. 결국 좋은 학교에 가기 위하여 좋은 학원을 보내는 것이지요.

배운다는 것은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의무와 필요가를 가미시키면 <가르치는 >서비스 산업이 발달하는 것입니다. 결국 스스로의 자발성은 없어지는 것이지요 결국 교육은 없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면 쉽습니다. 목사가 예배를 인도할 때 가장 강조해야 하는것은 성도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최소한의 입장으로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단지 분위기만 잡으면 됩니다. 목사가 성도들을 대신하여 주도적으로 하나님을 대신 만나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일대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배가 점차로 제도적 가치화 되어 버리면, 환경이 더욱 예배를 지배합니다. 참여예배가 아니라 경청예배, 구경예배가 됩니다. 예배의 주체인 하나님과 성도들은 빠지고 공연이 되기가 쉽습니다.

일리히의 교육과 학교 개념이 이런 것입니다.

 

Q 일리히의 교육관은 무엇입니까?

A 일리히가 신부라서 그런지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이제 산업주의 시대의 역군을 만들어 내는 교육장소인 학교는 소명을 다했다라는 것입니다. 유럽의 12세기이후 20세기까지가 학교의 임무라는 것이지요. 오늘날의 근본교육은 개인과 개인이 연결된 필요성을 가진 자발적 교육으로 돌아가야 한다라는 것 입니다 일리히는 이것이 결국 평등교육과 자발성의 교육을 만들어 낸다라는 것입니다. 네크워크 공부망을 구성하여야 합니다.

일리히의 교육방식은 <학교없는 사회> 6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1) 교육적 목적을 참고 서비스 2) 기능교환 3) 동료연결 4) 넓은 의미 교육자참고 서비스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학교의 독점을 바꾸어서 모든 시민들이, 배움을 원하는 자들이 스스로 접근할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배움 네트워크를 통하여 공유적 자율성 공부를 필요만큼 하면 됩니다. 개인 요구의 필요이상의 공부는 낭비입니다. 평등성을 원하여 시작되었던 학교교육은 현재 그 목적을 상실하였습니다. 현재의 교육방식은 더욱 불평등을 고착시킬뿐이며, 산업화의 한 소재로서 전락되어 진정한 가치교육은 , 창의 교육은 없어질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수학을 대학교 졸업때까지 15년정도를 공부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수학과를 졸업한 학생외에 15년 공부한 수학을 얼마나 사용합니까? 결국 수학은 필요성과 잘발성이 아닌 가치를 제도화하여 성적을 매기고, 우수학생이 누군지 알기 위하여 공부하는 것입니다. 실용성 면에서는, 효율성면에서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것이지요. 수학을 배우기 원하면 실생활에 필요한 만큼 배우고 그 외 수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더 깊게 많이 배워야 합니다.

학교 자체가 현대사회의 모든 가치체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결국 학교가 가르치는것과 배우는 것의 혼동을 가져옵니다. 결국 인간은 상상력도 학교화 되어지고, 가치대신에 제도화된 서비스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좀더 부연하면 좋은 학교 나오면 좋은 인격이 자연스럽게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좋은 직업가지면 좋은 행동을 한다라는 것이지요. 아닙니다. 분명 아닙니다. 한국처럼 대학나온 사람 비율이 높은 나라가 왜 윤리적, 가치적 모습들은 형편없습니까? 학교의 본질, 교육의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일리히는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진짜 공부는 어쩌면 학교 밖에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일리히는 공부는 교육의 결과라는 것을 거부합니다. 실생활과 떨어진 지식위주의 공부는 공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학습자의 흥미를 자극하지 못하는 주입식 공부는 건전한 상상력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봅니다.

필요적 자발적 교육은 삶의 현장에서 배우는것입니다. 이것이 교육이고, 가르침입니다.

 

Q 일리히의 학교제도 비판을 더 좀 해주세요

진행자님도 알다시피 한국의 중고등학교에 왜이리 폭력이 난무하고, 각종 대학교에 왜 이리 비리가 많습니까? 왜 전국이 고3 수험생을 배려해야 합니까? 왜 어린아이들을 좋은 유치원에 보려고 엄마들이 밤새워 줄을 서고 원서를 집어넣으려 합니까? 그것은 학교의 기능이 계급적이라 그렇습니다.

학교 교사의 권한은 한국사회에서 무한대입니다. 교사가 점수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생은 절대 순종하고, 반항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창의적이지 못하지요. 비인간적입니다. 그래서 학생들 스스로도 폭력화되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권력화를 잠재우지 못하면 결국 인간은 서로가 경쟁하며 노예화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교육을 위하여 엄마 아빠가 노예지요. 고3수험생을 둔 엄마는 고3의 노예입니다. 그러니 일리히가 학교제도 자체를 거부하고 근본구조를 없애야지 사회구조가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일리히는 주장은 제가 듣기에도 혁명적입니다. 그러나 본서를 읽으면서 목사로서 보면 일리히가 신부구나 생각이 됩니다.

 

Q 여러 가지로 일리히의 책을 분석해주셨는데도 너무나 혁명적 이야기들이라서 본서를 이해하기가 어렵네요 도와주실 방법은 없습니까?

A사실 저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본서를 사서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번역을 하신 박홍규교수가 <학교없는 사회> 전반부와 후반부에 많은 쪽수(지면)를 할애하여 일리히 사상의 핵심들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도 먼저 책의 내용을 읽기 보다 너무 생소한 개념들이 많아서 번역자 박홍규교수가 정리한 부분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박교수는 이 책을 6번째 번역한 분입니다. 한국사회에서 교육과 학교라는 개념이 너무나 방대한 관심을 가졌기에 다른 번역자들도 <탈학교사회>라고 번역을 5번씩이나 했다고 합니다. 이반 일리히의 다른 주요개념들도 아주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초보자들도 이 책 한권만 읽어보아도 <이반 일리히>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Q. 일리히가 주장하는 <학교없는 사회>의 핵심을 다시한번 말씀하여 주세요?

A. 학교 교육에 대한 맹신을 파기하고자 하는 하나의 사상운동입니다. 모든 교육은 학교를 통하여 된다라는 가정하에 강제적으로 통제하에 제도적으로 고착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현재의 사회를 유지시키지만 결국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억압과 소외로 결과를 가져옵니다.

일리히는 학교를 현대의 종교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지상에서 착취받은 자들에게 천국을 약속하고 학교는 교육을 통해 평등을 약속합니다.

일리히의 학교관은 - 지역의 자립을 촉구하며 구체적인 빵의 노동을 통한 자율적 공생의 관계에서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배워야한다고 느낄때 언제든지 배울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일리히의 교육은 이웃과 공동체와의 상호보완과 연결점속에서 교류하면서 사물을 지각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s******1 2012.12.14.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학교 없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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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만은 한참 전부터 듣고 있던 책이지만, 사두고 안 읽다가 작년에야 손에 들었고 올해가 되어서야 겨우 끝까지 읽었습니다. 내용은 좋은데 번역이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네요. 그렇지만 번역하신 분이 전문번역자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책 내용의 반을 차지하는 후기가 더욱 좋아서 어색한 번역투에도 끝까지 참고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제목의 학교 없는 사회가 은유적인 표현일꺼라
"학교 없는 사회" 내용보기


 소문만은 한참 전부터 듣고 있던 책이지만, 사두고 안 읽다가 작년에야 손에 들었고 올해가 되어서야 겨우 끝까지 읽었습니다. 내용은 좋은데 번역이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네요. 그렇지만 번역하신 분이 전문번역자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책 내용의 반을 차지하는 후기가 더욱 좋아서 어색한 번역투에도 끝까지 참고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제목의 학교 없는 사회가 은유적인 표현일꺼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이 책의 내용은 정말 학교가 없는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 같은 보통 사람들은 국가 없는 세상보다도 학교 없는 세상을 더 상상하기 힘들지요. 이 책에서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첫번째 지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학교'라는 것이 지금 같은 형태를 띈 것은 천년도 안 되는 일인데다가, 과연 학교에서 모든 학문의 진보가 일어났냐 하면 그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학교가 오늘과 같은 과목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정말 최근의 일입니다. 우리가 교과과정에서 배우는 많은 것들은 사실 거의 19세기에 개념이 정립되었기 때문에 그전 학교에서는 물론 가르칠 수가 없었죠. 그렇지만 위대한 학문을 한 사람들은 학교를 모두 나오지 않았느냐? 그렇게 물으신다면 이건 마치 모든 살인범은 밥을 먹었기 때문에 밥이 살인의 원인이라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문명사회의 거의 모든 아이들은 어린 시절에 학교에 가기 때문에 학교의 세례를 받지 않은 아이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학자들도 모두 학교 출신인 겁니다. 그렇지만 학문에 성공하는 사람의 비율을 생각해보면 학교처럼 비효율적인 투자도 없을 것입니다. 일리히는 학교의 목적이 학문에 있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이를 두가지 방법으로 논파합니다. 첫째는 학문을 하는데 학교 시스템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학교의 목적은 시스템 그 자체를 학습하는 자체에 있지 가르치는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는, 안팎을 모두 드러냅니다.


 먼저 일리히는, 학문을 배우는데 학교가 필요없다는 것을 실례로 증명해 냅니다. 그는 남미로 날아갑니다. 그가 태어난 유럽에는 학교가 부족한 곳이 없기 때문에, 남미를 선택한 것인데, 여기서 그는 그가 제안한 방법을 통해 교사-학생 관계가 아닌 네트워크를 구축한 학습법으로 짧은 시간 안에 자원봉사자끼리 언어를 배우는 작업을 통해 그의 이론을 증명해냅니다. 그에 따르면 교사와 학생 간의 상하 관계는 배움에 별 도움이 되지 않고 또 학생이 직접 자신의 진도를 조정할 수 없는 미리 정의된 한 학기 짜리 진도는 배움의 저해 요소일 뿐이라고 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공교육 사교육 모두 들이는 시간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에서 이 이론은 잘 증명되고 있습니다. 공교육의 실패는 아이들의 선행학습 때문이 아닙니다. 개개인별 맞춤 학습을 하는 사교육에 비해서 공교육의 틀은 사실상 참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공교육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은 스스로 자초한 것일 뿐입니다. 공정한 교육의 기회 제공이라는 측면에서 현재의 사교육은 비난받고 있지만 정확히 이야기하면 경직된 공교육은 사교육의 대안이 되지 못합니다. 사교육이 기승을 부린다고 해서 공교육이 죽는게 아니라 공교육이 못하니까 사교육이 들어설 여지가 생기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 같은 구조에서는 공교육이 절대로 사교육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한 교실에 수준이 다르고 관심이 다른 아이들을 몰아넣고 앞에서 교사가 진도를 나가는 방식은 대부분의 아이들을 지루하게 합니다. 관심 없는 아이는 진도를 따라갈 의지가 없고 관심 있는 아이에게는 진도가 너무 느립니다. 이 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생각을 못하고 그저 사교육을 때려잡겠다고 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교육으로 아이들을 내모는 셈입니다. 물론 일리히류의 네트워크 학습법은 학습자 본인의 의지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겠지만, 핵심은 일리히의 대안이 아니라 학교와 학문에 대한 일리히의 분석이겠죠. 사실 고등학교를 돌아보면 간단합니다. 저는 대부분의 공부를 문제집을 통해서 했습니다. 수학이나 물리, 화학 같은 과목의 수업은 너무 어려웠죠. 그런 나를 구제한 것은 방과후의 공부입니다. 수업시간 + 복습이 공부의 당연한 구조겠지만, 돌이켜보면 많은 학생들에게 수업시간이 과연 얼마만큼의 도움이 되었나는 생각해볼만한 점입니다. 특목고를 자퇴하고 학원 등에서 공부해서 대학에 오는 수많은 학생들을 보면 학교가 과연 무슨 도움이 되는가 회의가 들었던 기억이 다시 살아나네요. 


 그렇다면 학교의 목적이 학문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목적이란 말인가? 일리히는 학교의 목적은 체제 공고화라고 말합니다. ( 명시적으로 이야기한게 아니라 제가 읽고 정리하다보니 생각한 거지만 이게 맞는거 같아요. 아니면 누가 아니라고 좀 얘기해줘요. ) 이를테면 기독교 국가의 학교는 기독교적인 생활양식을 전파하는 겁니다. 오늘날의 종교는? 자본주의죠. 그래서 학교의 주요한 역할은 소비를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 간단한 논리는 도저히 반박할 방법이 없네요. 오늘날 학교가 없다면, 대체 어디에서 이런 획일화된 국민들이 나올 수 있을까요? 학교가 아니면 지금 우리가 가지는 동족간의 일체감, 국가에 대한 소속감, 사회에 대한 순응, 그리고 무엇보다 소비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어디서 배웠을까요? 사실 이 사실에 대한 반례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학교를 안 다는 사람이 워낙 없기 때문에! 


 일리히는 현대 사회의 병폐 중 하나가 이 '학교 중독'에 있다고 봅니다. 학교에 집착하지 않으면 큰일날 것도 없는데 학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학교를 제외한 사회에 대한 사고 자체를 못하게 되고, 문제점도 세대를 반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학교를 연상할 때마다 처음 생각나는 것은 상하 관계인데, 그것이 비단 한국식 억압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학교 제도 자체의 문제라는 일리히의 통렬한 일격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e****e 2015.02.13.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가치의 제도화'에 저항하라!! [학교 없는 사회]
"'가치의 제도화'에 저항하라!! [학교 없는 사회]" 내용보기
엇그제만 해도 옹알거리며 말을 배우기 시작한 것 같던 딸 아이가 벌써 5학년이다.  아이는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받고 있고 요즘에는 종종 방과후 프로그램도 학교에서 받고 있다. 학교 담임선생이 정기적으로 지시하는 숙제가 있다. 그리고 초등학생이지만 일주일에 2번 영어학원(작년에는 일주일에 3번이나 영어학원에 가야 했다.), 음악학원 1번을 간다. 이외에 아이 엄마는 별도로
"'가치의 제도화'에 저항하라!! [학교 없는 사회]" 내용보기
엇그제만 해도 옹알거리며 말을 배우기 시작한 것 같던 딸 아이가 벌써 5학년이다. 
아이는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받고 있고 요즘에는 종종 방과후 프로그램도 학교에서 받고 있다. 학교 담임선생이 정기적으로 지시하는 숙제가 있다. 그리고 초등학생이지만 일주일에 2번 영어학원(작년에는 일주일에 3번이나 영어학원에 가야 했다.), 음악학원 1번을 간다. 이외에 아이 엄마는 별도로 아이에게 한자 공부를 시키고 있고 가끔 수학이나 과학숙제도 시킨다. 걸스카우트까지 가입하여 한 달에 한 두번 관련행사에 참여한다.
아이가 아빠와 놀러 왔을 때에도 늘 숙제를 안고 왔고 컴퓨터 게임을 하던, 퍼즐놀이를 하던, 애니메이션을 보던 아이는 하루종일 숙제 노트를 끼고 있다.
아이가 낑낑대고 있는 숙제를 가끔 들여다 보면, 초등학교 4,5학년 수학과 영어, 기타 과목의 수준은 우리 세대가 중학교에서 배우던 정도에 해당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전반적인 초중고의 수업 난이도가 30년 전보다 높아졌다. 아이들의 성숙도나 지식, 지혜의 수준이 더 높아진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아이 엄마가 우리의 부모처럼 ’아이를 통해 자신의 한을 풀려고’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녀 역시 ’모두가 사교육을 받고 있는 현실’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의 현실은 꽉 짜여진 구조 속에 놓여있다. 
30년 전에 아이들이 무언가를 배우고 익힐 때 그들은 거의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부모들이나 형제들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에서 배웠고 아이들끼리 동네에서 각종 놀이와 게임을 통하여 사람들과 어울리고 대화하고 협의하고 규칙을 배우고 만들고 실행했다. 4계절 내내 계절과 조건에 맞는 놀이가 존재했다. 동네 골목과 인근 놀이터와 공터, 논과 밭, 들과 야산, 농수로와 하천은 언제든지 아이들의 놀이공간과 배움의 공간으로 제공되었다.
하지만, 이제 도시의 아이들에게 제공된 놀이공간과 배움의 공간은 거의 없다.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는 유치원 이전의 유아들이 어울려 놀 수 있는 정도이고 유치원 정도의 아이들부터는 어울리고 놀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그런 공간은 유치원에서 별도 학습비를 받아 단체로 다녀야 하거나 부모들이 주말에 이동수단을 통해 아이들을 데리고 멀리 움직여야 했다. 유치원이나 학교가 끝난 후에 아이들이 갈 곳은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공간을 사교육이 장악했다. 1990년대에는 강남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 학부모들이 사립중학교와 사립고등학교, 또는 특목고나 8학군을 목적으로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고 단기 유학을 보내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어느정도 경제력이 되는 학부모들이 강남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사교육은 삽시간에 수도권으로 전파되었다. 
이제는 아이들이 오후 시간과 저녁 시간에 어울릴 수 있는 친구들이 없기 때문에 학원에 보내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학부모의 경제력 수준이 아이의 학원 수준과 학원의 갯수를 결정한다. 방학 동안의 단기 해외체류나 장기 유학 역시 부모의 경제력이 결정한다. 부모의 경제력이 부족한 학생들은 스스로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여 돈을 모은후 유학을 가거나 워킹 할리데이를 떠난다. 그렇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학생들의 평균 학습수준은 평준화를 향해 달린다. 오로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이자 목적이다. 학부모들에게도 학생에게도 다른 교육은 중요하지 않다.
비슷한 교육을 받고 비슷한 학원을 다니고 비슷하게 해외에 갔다 오면 전체적인 학생들의 수준은 비슷해진다. 모두가 특목고나 일류 대학이 목표다. 어차피 대학의 입학정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평가로 학생들은 걸러진다. 일류대학와 이류대학의 차이는 없다. 한국의 대학은 어차피 멕시코의 주요 대학, 중국의 주요 대학의 경쟁상대가 아니다. 대학의 질이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상대평가로 들어온 학생들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것도 특별한 차이도 아니다. 수 십만명의 대학 입시생들 중 1만명 정도까지 끊어서 서울대와 연고대를 가게 되는 것이고 그 뒤에도 그렇게 입학정원에 따라 학생들이 서열이 매겨진 대학에 들어간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취업을 위한 무한 경쟁이 또 다시 시작된다. 한국의 경제 시스템은 저고용 구조다. 고용 역시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추세다. 정부와 기업은 아직 그런 구조를 바꿀 생각이 없다. 이 한정된 취업을 위해서 도 다시 대학생들은 1학년부터 경쟁을 시작한다. 안정된 직장으로 분류되는 공무원과 공기업 채용에 수백, 수천대 일의 경쟁이 일어난다. 그렇게 공무원이 될 바에야 무엇하러 4년 동안 수 천만원을 들여 대학에 입학하는가? 대학에는 학문도 진리도 없다. 비싼 등록금만이 있을 뿐... 

요즘 ’반값 등록금’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끌벅쩍하다. 오늘 처음으로 청계광장 집회에 참석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서 착잡한 느낌이 들 수 밖에 없었다. ’반값 등록금’ 문제는 등록금 액수의 문제만은 아니기 때문이고 한국에 민주화를 이룩해 냈다는 486세대의 자부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절차적 민주화 이외에 더 국민들에게 중요한 경제적, 제도적 민주화는 아직 요원하다. 오히려 양극화와 교육문제의 경우는 486세대가 음으로 양으로 확대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등록금 문제는 오로지 대통령 당선과 국회 장악을 위해 정치적으로, 포퓰리즘으로 선언한 정책이 부메랑이 되어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에게 날아왔다. 당장 수 백만원의 등록금을 납부해야 하는 대학생들과 학부모들이야 ’반값 등록금’이 실현되면 가계 형편이 나아질 것이다.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신용불량자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반값’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왜 등록금이 그렇게 높아야 할까 근본적으로, 구조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취업을 목적으로 학생들을 받아들인 대학과 사학재단에게 물어야 한다. 취업이 되지 않았으니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고? 무차별하게 대학설립을 허용한 정부에게 따져야 한다. 실업과 가난을 책임지라고!! 

무엇이 문제일까? 무엇을 놓친 것일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1971년에 처음 발간된 이 책은 ’교육’을 둘러싼 전반적인 구조와 역사, 세계관과 문화를 이야기한다. 학교와 대학, 교육과 배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반 일리히는 학교를 단순히 교육이나 배움이라는 문제를 넘어서 국가와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제도와 시스템의 시각으로 이해해야 함을 주장한다.
 
나는 작년 11월에 저자가 1973년에 처음 발간한 <성장을 멈춰라>를 읽었다. 저자는 그 책에서 근대 서구사회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무한한 진보’와 ’무한한 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현대 사회를 구조적으로 파탄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무한한 성장은 결국 "권력을 양극화하고 좌절을 보편화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양식 또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떠나 근대 산업사회 경제방식이 결국 인류와 생태계를 자멸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학교 없는 사회> 역시 근대적인 경제방식이 가져온 또 하나의 시스템이자 제도이자 문화이다. 
 
----------------- * 이반 일리히는 누구인가? ---------------------------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했다. 열한 개의 언어를 익히고 신학과 역사학과 화학분야의 학위를 갖고 있으면서도 항상 떠돌이 학자를 고집한 그의 장기는 기존학자들과 ’전문가’들의 주장에 ’구멍을 숭숭’ 뚫어놓는 것이었다. 학교에, 의료체제에, 국가의 원조체제에, 종교계와 정치계에 관해 그가 던진 학설은 발표될 때마다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의 격한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형식적인 모든 의례를 거부하는 사람이다. 그는 1951년 정치 망명객이자 신부의 신분으로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교회고위직의 승진코스를 추구하기보다는 푸에르토리코지역에서 보좌신부로 일하며 빈민과 함께 사는 삶을 택한다. 이후 1956년부터 1960년까지 푸에르토리코의 가톨릭대학교 부총장을 지내지만 점점 정치적이 되어가는 교회의 정책에 반대하며 교황청과 마찰을 빚다가 1969년 사제직을 떠나게 된다.
본격적으로 세상에 그를 알리게 된 계기는 아마 CIDOC이라고 알려진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를 설립하고 나서일 것이다. 이곳은 한편으로는 어학기관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의 여러 현실과 그 문제점을 생각하는 지식인들과 평신도 종교활동가들이 모여 토론을 나누고 수많은 책과 소책자들을 출간해내는 싱크탱크이자 전진기지였다. 이곳에서 그는 소위 선진국들의 개발원조에 반대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한편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교회가 신성하게 여기는 모든 것과 충돌하였다. 이 활동은 말 그대로 성공적이었고 그로부터 몇 년 후 일리치는 바티칸으로 소환되어 사제직을 떠나게 된다.
그 후 일리치는 "학교 없는 사회", "성장을 멈춰라", "병원이 병을 만든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그림자 노동" 등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글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카셀 대학과 괴팅겐 대학에서 유럽중세사를 강의하며 저술과 강의활동에 전념했다. 이 후 그의 관심은 12세기를 중심으로 한 과거를 기준삼아 현대사회를 되돌아보는 일에 기울었으며 그 결과로 나타낸 책이 "텍스트의 포도밭에서"이다. 현실의 문제를 보기 위해서는 그 이면을 직시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와 전통으로 돌아가 성찰해야 한다는 그의사유방식은 이후 아나키스트와 녹색운동가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 사상가, 환경운동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교육학, 역사학, 정치학, 언어학, 의학, 여성학, 종교학, 문학을 넘나들며 시대를 여행하는 그의 강의방식 역시 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나 정작 일리치 자신은 행동을 촉구하는 소책자운동만을 펼쳤을 뿐 그의 사상을 집대성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소규모 청중을 위한 강연이 아닌 방송을 통한 인터뷰를 공식적으로 거부한다. 그 후 15년이 넘도록 어떠한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던 이반 일리치를 대담으로 끌어 낸 사람은 캐나다 CBC 방송의 데이비드 케일리이다. 집요한 설득 끝에 이뤄진 이 대담은 1988년에 시작됐고 이후 1992년까지 여러 차례 이어졌다.  ------------------------------

 1978년 처음 이 책 <학교 없는 사회>에 대한 한국판 번역이 <탈학교의 사회>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리고 그 뒤 1984년까지 3번이나 더 출간되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한국에 출간된 것은 2004년이었다. 우연하게도 제3세계 여러나라에서 이 책은 1980년대 중반까지 번역되어 출간되었다가 그 이후 사라졌다. 역자인 박홍규 교수는 1980년대 중반까지 보수적인 어용학문에 대항하는 유효한 무기로 사용되었다가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 관심이 사라진 것이 배경이라고 추측한다.
박홍규교수가 2009년 새롭게 이 책을 번역하여 출간한 이유는 여러가지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박교수가 이반 일리히의 사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고 한국의 사회문제와 교육문제에 대한 이반 일리히의 근본적인 문제제기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히는 학교의 존재가치 자체를 부정했고 나아가 사회 자체가 학교화된 것까지 부정했다. 

-------------- * 박홍규 교수는 누구인가? --------------------
오사카 시립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하버드 로 스쿨 객원교수를 역임한 바 있다.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로서 영남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전공뿐만 아니라 인문,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한다. 여러 예술가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의 평전과 역서들을 출간하고 있는 저자는 영국의 진보적 사상가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를 조명한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사상], 베토벤의 삶과 음악 세계를 새롭게 해석한 [베토벤평전: 갈등의 삶, 초원의 예술], 오페라를 그 시대 정치와 사회의 관점에서 살펴본 [비바 오페라], 빈센트 반 고흐의 예술 세계를 그린 [내 친구 빈센트], 루쉰의 사상과 문학 전체를 넓은 시야에서 조망한 [자유인 루쉰], 자유 학교를 위한 순교자로 알려진 페레의 생애를 쓴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마라] 등의 책들을 집필하였으며,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대상 저작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등을 국내에 처음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간디자서전], [문화와 제국주의] 등의 책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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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히는 1958년 미국 교육학자인 에버릿 라이머(Everett Reimer)를 통해 처음 학교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뒤 일리히는 학교를 통해 보편적인 교육을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새로운 교육내용을 ’주입’하는 방법을 추구하는 추세를, 그 정반대의 제도 추구, 즉 개개인의 삶의 모든 순간을 공부하고 나누고 돕는 순간으로 바꾸도록 고양시키는 교육’망’ 형성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 [왜 학교를 비국가화해야 하는가]에서 일리히는 학교가 과정과 실체를 혼동하도록 ’학교화’한다고 주장한다. 과정과 실체가 혼동되면 새로운 논리, 즉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 좋은 결과가 생긴다든지, 단계적으로 올라가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식의 논리가 생겨난다. 그런 논리로 인하여 ’학교화된’ 학생들은 수업을 공부하고 학년 상승을 교육이라고 졸업장을 능력의 증거라고 능변을 새로운 것을 말하는 능력이라고 혼동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학생의 상상력까지도 학교화되어 ’가치 대신 서비스’를 받아들이게 된다. 즉 병원의 치료를 건강으로, 사회복지를 사회생활의 개선으로, 경찰보호를 사회안전으로, 무력균형을 국가안보로, 과당경쟁을 생산적 노동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 결과 건강, 공부, 존엄, 독립, 창조 자체는, 그런 목표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강변되는 제도의 수행보다 열등한 것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병원, 학교, 기타 시설을 운영하는 데에 더 많은 자원을 퍼부어야 건강, 공부, 존엄, 독립, 창조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p.24) 가치는 사라지고 제도가 가치를 대신해버리게 된다는 말이다. 
일리히는 그러한 ’가치의 제도화’가 반드시 물질적 오염, 사회적 양극화, 심리적 무능화를 초래한다고 보여준다. 이 세가지는 지구의 붕괴와 현대적 비참함을 초래하는 과정이다. 일리히가 ’가치의 제도화’를 주장한 지 정확하게 40년이 지났고 우리는 한국사회 곳곳에서 ’가치가 제도화되어버린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 

우리 역시 ’학교에 다녀야만 공부가 가능한가?’라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일리히의 지적처럼 실제로 우리는 그다지 학교에서 배운 것이 없음을 기억하고 있다. 말과 글, 도덕과 규칙, 계산과 논리, 자연과 기술, 의사소통과 협조 등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은 학교가 아니라 학교 밖에서, 즉 가족과 동네에서, 교사가 아니라 친구와 선배, 어른들로부터 배웠다. 요즘은 가정과 가족보다 TV와 인터넷이 더 큰 역할을 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일리히가 문제제기한 1960년대의 미국과 멕시코의 ’학교화’와 학교의 무능한 모습은 2011년 한국의 ’학교화’가 학교의 무능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학교화’는 학교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 역시 21세기의 진실이다. 

2. [학교의 현상학]에서 일리히는 ’학교’를 특정 연령층에게 의무적 교육과정의 전일제 출석을 요구하는 교사와 관련된 과정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학교는 겨우 20세기 들어서 유럽에서 시작된 것이고 동양에는 20세기 중반에서야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3. [진보의 의례화]에서 일리히는 ’학교’가 ’끝없는 소비라는 신화’를 전수한다고 주장한다. 학교는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수업이 공부를 생산한다고 가르친다. 가치있는 공부는 수업 참가의 결과이고 공부의 가치는 투입량에 따라 증가하며 마지막으로 이 가치는 성적과 졸업장에 의해 측정되며 문서화된다고 배우고 확신한다. 우리가 학교가 필요하다고 배우고 동의하게 되면, 우리의 모든 활동은 각각 전문화된 여러 제도에 소비자가 의존하는 모습을 갖게된다. 그 과정을 통해 근대적인 생산양식, 소비사회에 필요한 수요자를 양성시키고 꿈과 미래를 정형화시킨다.(p.91)
사람들이 학교화돼 가치가 생산될 수 있고 측정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들은 모든 종류의 등급화를 수긍하게 된다. 즉 국가의 발전을 측정하는 척도, 아기의 지능을 재는 척도, 심지어 평화를 향한 과정을 전사자의 수로 계산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유학을 가거나 석사, 박사 학위를 받으면 학사 졸업자보다 더 유능하고 뛰어난가? 아이들을 더 잘 가르치는가? 더 올바르고 도덕적으로 행동하는가?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4. [제도 스펙트럼]에서 일리히는 사회의 모든 제도가 제조와 파괴, 생산가 소비만을 반복하는 생활방식인 조작적 제도와 자발적이고 독립적이면서도 상호 관련된 생활방식인 공생적 제도라는 두 가지 극단이 존재한다고 정의한다. 산업적 관료사회 이후를 향해 가는 현재로부터, 산업화 이후의 자율 공생사회라는 미래 즉 행동의 강도가 생산을 능가하는 미래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서비스 제도 양식의 개혁, 그중에서도 무엇보다도 교육 개혁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p.114)

5. [부조리한 일관성]에서 일리히는 학교에서의 수업과 졸업장이 ’공부’를 정의하는 ’제도의 가치화’를 근본적으로 제고하지 않는 어떠한 교육개혁이나 새로운 수업방식은 모두 ’학교화’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한다.

6. [공부망]에서 일리히는 ’학교화’를 거부하고 진정한 ’공부’의 가치를 이룩하기 위한 대안으로 ’공부망’을 제시한다. ’공부망’을 위해서는 교육적 목적을 위한 참고서비스, 기능 교환, 동료 연결, 넓은 의미의 교육자를 위한 참고 서비스가 접근법으로 필요하다. 

7. [에피메데우스적 인간의 부활]에서 일리히는 프로메테우스를 욕망과 가치의 제도화에 대한 신화속의 인물로 묘사하면서 그의 동생인 에피메테우스를 통해 균형, 조화, 가치 중심의 인간형의 부활을 이야기 한다. 

박홍규교수가 선택한 ’학교 없는 사회’라는 제목도 이반 일리히의 본 뜻을 100% 담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일리히가 이야기하는 ’Schooling’은 ’학교화’라는 의미로 일리히가 만든 단어라 할 수 있다. ’학교화’라 함은 ’학교’를 제도화함으로서 ’공부’와 ’배움’을 독점하고 그에 따라 학교를 다니는 것이 마치 공부를 잘하게 되고 배움이 커지는 것 처럼 인식된다는 의미다.
즉 ’가치의 제도화’를 의미한다.
일리히에게는 ’학교화’는 배움-학교 뿐 아니라 건강-병원, 안전-경찰, 안보-군대, 부자-GDP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Deschooling’이라 함은 ’학교화’의 반대이고 ’학교화’를 거부하고 저항하고 거기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따라서 ’Deschooling Society’는 ’비학교화된 사회를 의미하는 것이고 사회를 ’비학교화’하여 ’제도가 가치를 독점’하는 현상을 극복하여 가치 그 자체를 스스로, 공생적으로 확보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학교 없는 사회(2009)>의 1/3은 박홍규 교수의 해설에 할애하고 있다. 사실 일리히의 번역본 원문은 꽤 난해하다. 박교수의 해설 부분이 없었다면 책의 내용 중 상당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주요 핵심을 얻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었다. 박홍규 교수는 친절하고 알기 쉽게 이반 일리히의 주장과 생각을 정리해 주었다.
일리히의 주장의 요점은 일률적인 기계식 의무교육 및 고급교육이 결국 계급을 정당화하고 부와 권력의 불평등성을 심화시키는 것이므로 부당하다는 것이다. 부만이 아니라 권력도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학교교육에 대한 물신적 존경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학교교육을 믿고 있는 한, 학교교육이란 돈과 같은 기초적인 인간상품의일종으로서 인간이란 지식자본가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학교 없는 사회’는 단순한 학교 해체가 아니라, 제도화되지 않은, 따라서 계급화되지 않고 자율적인 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산업사회 경제방식에 철저하게 지배되어온 한국에서 일리히의 사상이 퍼지고 대안이 관철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일리히가 주장하는 ’제도화된 가치의 불합리성’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가 ’제도화된 가치’를 인정하고 동의하고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에게, 우리 아이들과 후손들에게 남는 것은 양극화의 심화, 좌절의 보편화, 공동체의 해체, 물질과 의식의 오염이 만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이들과 후손들에게 지옥을 물려줄 수는 없지 않은가!!
일리히의 사상과 이론의 핵심과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받아들이게 되면 현재의 구조와 시스템, 의식과 문화를 기초로 하여 현실을 재해석하고 실정에 맞는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교사들은 교사들 나름대로, 학생들은 학생들 나름대로, 학부모들은 학부모 나름대로 고민하고 논의해야 하고 서로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기로 한국에서도 일리히가 제시한 대안적인 방법들은 지금 여러 단체와 집단에서 모색하고 있고 먼저 시도하고 있다.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지녀야 하고 그에 따른 근본적인 대안을 찾아서 실행해야 한다. 
 
일리히가 가르쳐 준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근본에서 다시 생각하라’는 메시지였다.
 
* 책 속의 문장
- 이처럼 과정과 실체가 혼동되면 새로운 논리, 즉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욱더 좋은 결과가 생긴다든가, 단계적으로 올라가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식의 논리가 생겨난다. 그런 논리에 의해 ‘학교화된’ 학생들은 수업을 공부라고, 학년 상승을 교육이라고, 졸업장을 능력의 증거라고, 능변(能辯)을 새로운 것을 말하는 능력이라고 혼동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학생의 상상력까지도 학교화돼, 가치 대신 서비스를 받아들이게 된다. 즉 병원의 치료를 건강으로, 사회복지를 사회생활의 개선으로, 경찰보호를 사회안전으로, 무력균형을 국가안보로, 과당경쟁을 생산적 노동으로 오해하게 된다. … 이 책에서 나는 그러한 ‘가치의 제도화’가 반드시 물질적 오염, 사회적 양극화, 심리적 무능화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세 가지 차원은 지구의 붕괴와 현대적 비참을 초래하는 과정이다. 나는 빗물질적 요구가 물질적인 상품의 수요로 변화할 때, 즉 건강, 교육, 수송, 복지, 심리치료가 서비스나 ‘보호’의 결과로 정의될 때, 지구의 붕괴 과정이 어떻게 증폭되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 책 속의 책 : 플라톤 <국가>, 이반 일리히 <병원이 병을 만든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그림자 노동>

[ 2011년 6월 12일 ]
c****n 2011.06.13. 신고 공감 0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