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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발라드 1번을 많이도 들었다. 새로운 도전 보다는 현실 안주가 당연한(?) 12월. 올해도 어영부영 흘러가기 마련. 50대 후반의 <가디언>지 편집국장이 쇼팽의 발라드 1번 완곡 연주하기_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 배짱이 부러웠고, 좋아하는 음악을 나누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문화가 부러웠다. 그러나 특히 부러웠던 것은, 한 번 세운 목표를 달팽이일지라도 조금씩 전진해가는 그의 끈기와 집념이었다. 우이공산_ 필자에게 발라드 1번은 태산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 해 동안의 세상사가 이처럼 복잡하리라는 걸 1년 전에 미리 알았더라면 과연 다리가 후들댈 정도로 어려운 곡을 배우겠다고 쉽게 덤빌 수 있었을까? 아마 힘들었을 것이다. 도감청 사건 등 엄청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제정신 하나 간수하기 벅찬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런 날들이 머나먼 기억이 되었을 때를 기약하고 일단 음악 따위는 보류해두라고 분명 신중한 목소리가 끼어들어 필자를 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따지자면 한 해 동안 제정신을 잃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쇼팽 덕이 컸다고 말하는 저자는 말한다. 몰두하고 자신을 휘몰아갈 쇼팽의 발라드가 없었더라면 일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사건의 여울이 조금만 잠잠했더라면 애초 계획인 열두 달 내에, 오두막 음악실이 완성되기 전에, 주문한 피아노가 오기 전에 발라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감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성 기한을 늦추었다고 해서 반드시 후퇴했다고 볼 순 없을 것 같다. 덕분에 피아노라는 악기와 쇼팽의 작품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었고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음미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날이 갈수록 악보를 보지 않고도 연주 할 수 있는 패시지가 늘어나고, 때로는 손가락이 저절로 건반 위를 날아다니는 거 같은 느낌마저 들어 섬뜩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이 지점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데 따른 불안감이 뒷목을 부여잡는다. 설명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어떻게 안심할 수 있겠는가. 윌리엄, 마이클, 루시... 여러 명의 레슨과 피아니스트들의 조언을 받으며 희망을 얻기도 하고, 절망을 걷기도 한다. 직장인에게 매일 같이 하루 20분간 쇼팽 발라드 1번 연습하기_란 말처럼 쉽지 않은 리추얼. 그러나 그 마저 시간을 낼 수 없는 날들도 많았다. 도감청 사건은 늘 뜨거운 뇌관으로 언제든 일상을 엄습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발라드>와의 접점은 책인 <쇼팽 주법>을 읽는 날이 고작인 때도 많았다. 느리지만, 꾸준히_ 그는 결국 태산을 옮겨놓고야 말았다. 음악캠프에서, 그리고 자신만의 연주회에서 그는 쇼팽 발라드 1번을 연주하고야 만 것이다. 그것도 딸들에게 축하를 받으며_ 아마추어와 프로_의 세계에서 아마추어의 특권이란 그런 것, 즐기면서 할 수 있는 만큼 나를 밀어내도 되는 것, 하여 뚝 굳은 손을 풀고 디지털 피아노라도 들여놔서 다시 피아노를 치고 싶은 맘이 간절해졌다. 어느새 피아노 연습은 내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되어 있었다. 현실 도피라 해도 좋고, 어리석은 충동이라 해도 상관없지만, 내 몸이 피아노를 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출근 전 20분을 피아노 앞에서 보낸 날은 뇌의 화학 반응이 달라진 것만 같은 강력한 느낌을 받곤 했다. 연습을 하고 하루를 시작하면 마치 내 뇌가 ‘안정’된 것처럼 느껴졌고, 앞으로 열두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모두 대처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의 원천이 정확히는 화학 반응이 아니라 신경회로망의 재편임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p.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