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빠서 독후감도 제때 올리지 못하네. ‘백치 아다다’란 작품을 대하면서 과연 천치에 반풍수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아다다의 성실함보다는 천치에 비중을 둔다. 다시말해 단점만 크게 보인다는 것이다.
아다다의 행동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라는 것'과 같다. 그만큼 아픈 경험은 유사하기만 해도 기겁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다다(학실)의 행동은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다.
처음 시댁에 갔을 때의 행복감이 일순간 돈으로 인해 무너져 버린 아픈 기억은 수룡이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수룡이의 마음이 순수하다 손 치더라도 사람의 마음은 언제 변할지 모르는 간사함이 내재되어 있기에 결국은 시차만 있을 뿐 충분히 그러고도 남음이 있다고 본다.
아다다의 분노로 돈은 바다에 뿌려지고, 이에 따른 수룡이의 분노 역시 극에 달해 비극으로 끝나버리는 아다다의 삶이 기구할 뿐이다.
아직도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이해심이 부족한 이 시대에 백치 아다다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정으로 인간다운 사랑에 굶주린 장애인의 삶을 통해 아직도 만연하고 있는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경안시하는 우리 사회가 좀더 밝아지기를 바란다. |
|
아다다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 세상 살아가는데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한 우리나라 단편 최초의 주인공이 아닌가 말이다. 프랑스 모빠상의 단편집을 읽을 때와는 달랐다. 내 근저에 깔린 근현대사의 정서나 애환 같은 것들 때문인지는 모호하나, 아무튼 아다다에 대한 마음이 아리고 애처로워 그 아이가 가까이 있다면 뜨거운 아메리카노나 한 사발 사멕이고 싶었다. 모빠상의 주인공들은 말 그대로 너무 이국적이라 사랑의 실연에도 남의 일인듯 무덤덤이더니, 아다다의 죽음은 양수에 꽂은 대자 주사바늘 처럼 온 근육을 긴장시키며 아프게 한다. 아다다여, 그러나 너는 잘 죽었구나. 수룡은 아내자리보다 더 중했던 돈을 잃었고 그 사실은 네가 살아 있더라도 산 목숨으로는 견딜 수 없을만큼 가혹했을테니 차라리 잘 되었다. 다시 태어나거든 총명한 머리로, 지혜로운 언변으로 맑은 목소리로, 세상 누구보다 곱고 이쁜 얼굴로 이 세상에 와서 네가 그토록 원하던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길... 내가 기도해줄게. 그렇게 누구보다 번듯하게 이 세상에 다시 오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