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속류 박지원, 속류 들뢰즈라는 지적을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속류적 저작이 갖고 있는 미덕을 두루 갖추고 있는 이 책이 ‘리라이팅 클래식’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은 가당치 않다. 우선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재해석해내는 데 굳이 들뢰즈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 두 텍스트가 포개져서 새로운 깨달음을 생산해내는 것도 아니며, 이 책에서 누차 강조하는 박지원의 '탈주'는 들뢰즈/가타리의 거대기획에서 생성된 술어들을 차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가 들뢰즈로부터 술어만을 임대해서 기를 쓰고 [열하일기]에 적용하는 수많은 대목들은 여러 차례 눈쌀을 찌푸리게 만든다. 사실 들뢰즈가 이 책에서 '우정출연'하는 이유를 들자면 저자가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의 일원이라는 사실 외에 무엇이 있으랴. 이는 특정한 학문적 에콜에 속해있으면서 외부 집단과의 소통이 없는 사람들이 갖는 글쓰기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들뢰즈를 왜 공부하느냐'는 물음에 '들뢰즈니까'라고 대답하며 학자연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또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박지원 예찬'으로 일관하고 있는데, 그에 대해 ‘무지한’ 독자가 공명해줄 만한 정황적 설명과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기 그지없다. '박지원이 행한 선비들과의 교제는 지적 향연이고 중국 장사치들과의 만남은 우정의 드라마'라고 들떠서 이야기하는 대목들은 수사 이상이 되지 못한다. 때문에 이 책은 박지원에 대한 저자 자신의 자위(自慰)라는 혐의가 짙다. 게다가 도처에서 튀어나오는 소아병적인 진술들은 요지부동이고 요령부득이다. 아무런 맥락과 설명없이 '아는 사람은 알 터이지만 달라이라마는 내게 있어 영적 안내자이자 지적 스승이다.'라고 문장을 분지르고 넘어가버리는 대목에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적어도 박지원을 '리라이팅'하려고 도전했다면, '박지원은 문체반정(文體反正)에 저항해 새로운 탈근대적 문체와 사고를 선보였다'는 상식적 근거 외의 다른 근거들을 제시하거나 혹은 그 상식적 근거라도 다채롭게 재해석해내야 할 터인데 이 책은 둘 중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책 뒤에 보면 [함께 읽어야 할 텍스트]로 참고문헌들이 딸려나오는데, 이 책이 이 참고문헌들의 '짜집기' 이상을 해냈는지를 묻고 싶다. 박지원에 들뢰즈를 그것도 거죽만 갖다붙인 것, 그것이 이 책이 한 일이다. 나 역시 박지원에 대해서는 과문과람(寡聞寡覽)이라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최소한 그가 이 책에서처럼 삽화적, 희극적으로 논의될 그릇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들뢰즈를 다시 임대하여 '그러한 엄숙주의를 깨야 한다'고 말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엄숙의 가장 몹쓸 양태가 엄숙주의일지언정, 엄숙 그 자체는 진술이 가치있는 의미를 낳기 위해 반드시 내장해야 할 덕목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들뢰즈는 지금 말하는 엄숙 그 자체를 버리라는 사람이 아니다. |
| 야구에선 '선두타자'가 참 중요하다. 선두타자의 지상과제는 안타를 치건, 포볼을 얻건, 아니면 공에 한 대 얻어 맞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출루'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뒷타순 타자들의 후속타를 기다리는 것이 선두타자의 소임이다. 이 책은 도서출판 그린비의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의 선두타자로 나서서, 그 기대에 당당하게 부응한 책이다. 400여면에 이르는 이 책을 '예상밖의' 긴 시간을 투자해서 읽고 나니 '똘똘한 선두타자감'이었음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이 책은 '나는 천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고미숙의 '고백'과 함께 시작된다. 그러나 사실 이 책 전체는 '연암 박지원'이라는 천재에 대한 고미숙의 '호들갑에 가까운 환호성'이 그 주된 내용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듯 싶다. (물론 그녀는 연암 박지원은 유머가 있는 천재이기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노라고 고백해 놓고 있다. 박지원의 이 '유머'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만나게 되는 고미숙의 현란한 찬사의 '레토릭'의 면죄부가 되어준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 책은 '열하일기의 리라이팅'이 아니다. 이 책은 '연암 박지원'의 열렬한 팬이, 그의 멋진 작품을 보고 감동하고, 감격하며, 그 기쁨을 에너지삼아 신명나게 써 내려간 기나긴 독후감이다. 이 책의 아무 곳이나 펴서 몇 페이지만 읽어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연암을, 또 열하일기를 뼈 속 깊이 사랑하는지 정말 '얼얼하게' 느낄 수 있으리라. 책 읽는 내내, 단 한 순간도 빼어 놓지 않고 그런 그녀의 마음이 전해져 온다. 처음에는 '활기차게', 잠시 후엔 '얼얼하게', 종내에는 '지나치게'. 마치 맛난 과자를 들고 와서 권해 놓고선, 과자를 씹는 내내 '너무 맛있지? 정말 괜찮지? 진짜 최고지?'라고 계속 물으며 팔딱팔딱 뛰고 있는 친구를 바라보는 듯한 그런 마음... 그 친구한테야 정말 고맙고, 과자도 정말 맛이 있지만, 계속 그렇게 물어보고 확인하며 호들갑을 떨어대면 어느 정도 짜증도 나는 것이 인지상정일텐데 (혹 이것도 속물들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라면 나는 할 말이 없어진다) 고미숙은 약간의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건데 고미숙이 들고온 '과자'(연암 박지원)는 정말로 맛이 있었다. 앞서 말했듯 연암 박지원과 열하일기는 '선두타자'로서의 자격이 차고도 넘친다. 그리고 그 훌륭한 선두타자에 대한 신실한 열정과 순수한 애정으로 우리 앞에 다시 세운 고미숙 역시 칭찬 받아 마땅한 훌륭한 주루코치가 아닐 수 없다. 다만 '거리감'이 아쉽다. '정말 멋진 것'은 옆에서 현기증이 날 정도의 찬사와 확인을 계속 하지 않아도 멋진 것이 아니랴. 고미숙 조금만 더 냉정했더라면, 이 책 속에 나오는 느낌표들(느낌표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데 왜 'MBC 느낌표' 선정도서가 되지 못 했을까)을 반으로만 줄였더라면 이 책은 오히려 더 멋지지 않았을까. 이번엔 '무식한 독자'로서 흠을 하나 더 잡아보기로 한다. 고미숙은 이 책에서 '석사논문을 쓰던 그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서론-본론-결론-문제제기의 틀에 맞추어 아카데믹한 말들로 정형화해야 하는 그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면서. (책 첫머리에서 한 번, 소품과 고문의 충돌이 빚어낸 문체반정의 대목에서 또 한 번 나왔던 것 같다) 그런 그녀가 쓴 이 책에는 느낌표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 이름도 유명한 '들뢰즈/가타리'다. 그녀는 이 책의 첫머리에 이들로 인해 '클리나멘(돌연 발생하는 방향선회라는 뜻이란다)'을 경험했고, 그들의 사상에 '심취'했음을 밝혀 놓고 있다. 첫머리에 '면죄부성 고백'을 해 놓고 연후엔 '마음껏' 쓰는 것, 혹시 고미숙의 버릇은 아닐까? '들뢰즈/가타리'가 연암 박지원만큼 대단한 사람임은 절실히 알았지만, 그래도 너무 많이 등장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느낌표와 함께 이 두 석학의 출연빈도도 조금 더 낮았더라면 하는 바람은 역시 무식한 속물의 바람일 뿐일까. 앞에도 말했듯 이 책은 '예상외로' 오래 읽힌다. 언뜻 펴 보면 금새 읽힐 것 같은데(느낌표들 때문일까!) 실제 펴 들고 읽을라치면 꽤나 시간이 오래 걸린다.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지만 읽다보면 '봉상스''레토릭''아포리즘''테제' 같은 말들에 걸려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 부분'들이 꽤 있다. 이것까지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책임을 물을 순 없을 것 같다. 고미숙이라면,'황대경씨의 글이 사모관대를 하고 패옥을 한 채 길가에 엎어진 시체와 같다면, 내 글은 비록 누더기를 걸쳤다 할지라도 앉아서 아침 해를 쬐고 있는 저 살아있는 사람과 같다'고 말한 연암을 그토록 사랑하는 고미숙이라면 '조금 더 풀어서' 쓸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한 리어카 분량의 원고지를 소모하며, '피바다' 속에서 석사논문을 마칠 수 밖에 없었던 불우한 시대의 지식인이기 때문에라고 생각하며 너그러이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런데 나처럼 '무식한 속물'에겐 다소 버겁기에, 그녀의 클리나멘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그녀의 현란한 레토릭이 '지적 허영심을 확실히 자극하기 위한 미장센(고미숙은 이 단어도 참 좋아하는 듯)'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또 해 보게 되는 것이다. 조선후기의 '거인' 연암 박지원을, 뜨거운 애정으로 우리 앞에 생생하게 살려 놓은 그 공은 실로 크다하겠으나, 그녀가 그토록 흠모해 마지 않는 연암의 뜻을 어느 정도는 거스르고 있지는 않은지. '글이란 읽는 이들을 촉발하는 '공명통'이어야 한다. 찬탄이든 증오든 공명을 야기하지 못 하는 글은 죽은 것이다' - 123p 그렇다면 이 책은 내게 있어서 '살아있는 글'이 확실하다. '어쩜 이리도 연암에게 뜨거울 수 있을까!'라는 찬탄과 더불어 '나처럼 무식한 놈을 위해서 조금만 더 '현학'을 줄였으면 어땠을까'라는 아주 약간의 '증오'까지 야기시켰기에 하는 말이다. |
|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아 역사에 관련된 책을 많이 보는 편이라 텔레비젼에 소개된 이 책을 놓치고 싶지 않아 읽어 봤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노는 것 같아 적 잖이 실망했습니다. 사실 열하일기 원본을 한번도 본적이 없어서 찬찬히 살펴보았으면 했는데 원본전체는 사라지고 작가의 생각이 가는데로 마구 흐뜨려 놓아서 사실 그 자체를 전체적으로 알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작가는 이부분을 많이 연구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간추려 놓았겠지만 원전을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추천하고 싶지 않군요. 독자는 흥분하지도 않는데 작가혼자 들떠서 마구 괴성을 지르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부담스럽기도 하구요. 작가가 좀더 평정심을 갖고 찬찬히 쓴 제대로 번역된 열하일기를 읽고 싶군요. 어디 그런 책은 어디 없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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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 책을 구입해 읽은 이유는 열하일기에 대한 관심 때문이라기 보다는 들뢰즈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저자가 소속된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의 성향으로 보나, 책 뒤에 있는 용어 정리로 보나, 이 책은 '들뢰즈의 눈으로 본 열하일기' 정도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읽은 결과 본서의 초점은 '열하일기'에도, '들뢰즈'에도 맞춰져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박지원과 그의 열하일기 중심으로 서술은 하고 있지만 체계적인 소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들뢰즈의 여러 개념이 사용되고는 있지만 책속에선 마치 물에 기름처럼 유기적으로 섞이지 않고 둥둥 떠다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고미숙씨가 연암의 열하일기를 보며 쓴 수필정도라고 보면 딱 알맞을 본 책은 수입된 '근대'와 그로 인해 제대로 파악되지 못한 우리의 사상을 어느 정도 들춰내 소개(?)하는 것 만큼은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근대화'된 우리가 그저 하나로 묶어 '실학자'로 분류하던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이 알고보니 동시대의 사상적 라이벌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개인적으로는 꽤나 충격이었다는. 책을 읽으며 줄곳 그 어떤 외국에 대한 이야기보다 더 이국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동양에 사는 나조차 서양의 눈으로 동양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잠시 아찔해졌다. 그리고, '근대'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유들이 묻히고 사라지고 말았는지를 생각하며 굉장히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저자도 이 책을 꼭 열하일기나 어떠한 철학 사상을 소개하기 위해 책을 쓴 것 같지 않다. 책에선 줄곳 재미, 웃음, 포복절도 같은 단어들이 난무하는데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멀었던 연암과 그의 시대, 우리의 역사였으면서 우리가 멀리한 그 시대가 굉장히 재미있고 친숙하게 보여졌다는 점, 그 하나만으로도 이 책에 별 셋은 줄 수 있을 것 같다. |
| 이 책은 연암 박지원에 대한 저자의 동경을 듬뿍 담아 만든, 열하일기에 대한 화려한 예찬론이다. <열하일기>의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을 줄 알았으나, 주요부분을 발췌하여 쉽게 해설해 주는 일종의 가이드 북이었다.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 같다. 자신들을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지식 생산을 위한 연구공동체' 라고 소개하는데, 정말 흥미로운 곳이다. 이곳에서는 역사, 문학, 과학, 철학 등 인문학의 주제들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고 연구하고 세미나나 강좌를 개최하기도 한다. 워낙 특이한 문화를 가진 공간이라 몇줄의 글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궁금하신 분은 직접 방문 ^^ http://www.transs.pe.kr 저자는 열하일기를 '유목적 텍스트'로서 바라본다. 이 시선에는 '너머' 연구실의 성향이 깊숙히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구공간 '너머'의 첫 토론과 세미나의 주제가 들뢰즈/가타리의 <천의고원>이었는데, 이 강좌를 바탕으로 나온 것이 바로 <노마디즘 1,2 - 이진경> 이란 책이다. { 노마드(유목), 노마디즘, 리좀, 수목, 표현기계(*기계), 배치, 계열, 탈영토화, 재영토화, 봉상스, 되기(*되기), 주름, 클리나멘, 포획/포획장치, 홈패인공간/매끄러운 공간 } 저자는 계속 이런 이상한 개념과 용어들을 남발하는데, 이것들은 <노마디즘 1,2>에서 소개되고 정의되는 용어들이다. 즉, '너머'라는 연구실 문화 안에서 사용되는 언어들, 다시말해 그들만의 전문 용어들인데, 연구실 사람이거나 이 책을 읽은 사람이어야만 무리없이 넘어갈 이런 개념을 다룬 내용들이 종종 등장한다. 조금 편향적이고 불친절하게 느껴졌다. 전문용어라 하더라도 좀더 범용적인 개념을 사용했으면 어땠을까 한다. (다행히, 맨 뒤에 주요용어 해설이 있지만, 불행히 난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알았다) 물론 이것은 아주 작은 '부분적인 불만'에 불과하다. 이런 이상하고 난해한 개념들에도 불구하고 전체의 글은 너무 쉽고 재미있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프롤로그, 에필로그 등을 제외하고 크게 다섯 개의 장으로 구분되는데, 첫장은 연암의 둘째 아들 박종채가 쓴 <나의 아버지 박지원-박희병 옮김>이라는 책과 여러 일화들을 통해 박지원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이어 둘째장은 박지원이 살던 시기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한다. 본격적인 여행이야기는 3장부터 시작되는데, 읽기 좋게 해석된 원문을 싣고 그 아래로 친절하게 해설을 해주고, 때로는 저자의 글 사이에 원문의 일부분을 인용하며 정신없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문체가 재밌었다. 유쾌하고 유머러스하고 여러 측면에서 <열하일기>의 분위기와 닮은 느낌. 특히, 눈에 자주 띄었던 부분은 외래어와 속어의 적절한 남발이었다. (이번엔 불만 아님^^) 고문을 소개하면서 적절히 외래어를 섞어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묘한 밸런스를 이루면서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몇개 생각나는 대로 예를 들어보면, 지식인 밴드, 고지식한 커플, 연암팀, 연암의 '대탈주극', 연암이 '샌다', 등 고문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런 표현들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이 책은 열하일기를 쉽고 재밌게 소개한다. 장엄하고 엄숙하게 고문을 해설한다기보단 사춘기 소녀팬이 제일 좋아하는 가수를 소개하는 듯 하다. 전체적으로 비유하자면 '퍼레이드'의 분위기랄까? 물론 사춘기 소녀처럼 유치한건 아니다. 현란한 지적 유희와 깨달음의 퍼레이드랄까.. 결국, 나도 연암 박지원의 '열광적' 팬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투명한 열정, 가볍고 깊은 사유, 자유로운 전복정신, 그 역설과 패러독스'에 중독되다 <열하일기>의 '여행'을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거기에 담긴 것은 스쳐 지나가는 여행이 아니라, 이질적인 사유들이 충돌하는 장쾌한 편력이자 대 장정이었다. 파노라마적 관광도 아니고, 정처없이 떠도는 유랑도 아닌, 마주치는 것마다 강렬한 악센트를 부여할 수 있는 시공간적 편력, 그래서 그것은 더 이상 여행이라는 이름으로도, 편력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릴 수 없는 무엇이었다. 그것은 오직 '유목'이라는 이름으로만 불릴 수 있는 것이었다. 여행을 한다면 연암과 같은 여행을 하고 싶다.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정말 '여행', 새로운 마주침들에 즐거움과 경이로움으로 순간순간에 깨달음이 가득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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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독서는 3독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저자를 읽고, 자신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린비에서 내놓은 고전 '리라이팅(re-writing)' 시리즈의 하나이다. 고전의 텍스트를 읽고 저자를 살펴보되 정통한 가이드를 통해 현대적 맥락에서 재해석해 보자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독자가 자신까지 읽는 독서 3독을 완성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품이다. <열하일기>는 청나라 황제의 70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열하를 다녀오면서 겪은 일을 정리한 기행문이다. 하지만 보고 들은 것만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적은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다. 문장가, 사상가, 예술가, 실학자,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박지원의 삶과 고민과 열정과 지식이 낯선 땅을 처음 밟으면서 생기는 호기심과 멋지게 버무려져 있는 살아 있는 문학작품이다. 조선시대 양반이라는 신분상 제약과 유교적 가치관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결코 쓰여질 수 없는 대작이라고 하겠다. 고미숙의 <열하일기> 읽기는 독서 3독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으로 정리되어 있다. 1장과 2장에서는 박지원의 삶과 함께 그의 문체가 당시 사회에 끼친 영향을 살핀다. 고미숙은 연암이 넘치는 활력과 카리스마를 가진 태양인의 성품을 지녔다고 소개한다. 그러면서도 우울증을 지니기도 했다. 과거시험 보기를 거부하고 재야 선비로 살아가기로 결심하면서 시중에 떠도는 이야기를 글로서 정리하는 일을 하게 된다. 현재의 에세이류에 속하는 그의 문체는 당시 정조대왕을 비롯한 지도층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 1792년 정조는 이런 패관잡기는 물론 경전과 역사서의 수입을 금지하는 문체반정의 조치를 내린다. 이런 문체의 분위기를 주도한 사람으로 연암이 지목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다. 저자는 3장에서 열하일기 텍스트를 본격적으로 분석한다. 고미숙은 연암이야말로 낯선 것과의 접속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동시에 떠남도 두려워하지 않는 유목민(nomad)이라고 정의한다. 그의 작품 속에는 친숙함과 낯섬이 끊임없는 변주하고, 침묵하고 있던 사물들이 잠에서 깨어 유머와 패러독스의 옷을 입은 채 우리에게 달려온다는 것이다. 압록강에서 열하까지 4개월간의 대장정을 묶은 책이지만 하나하나의 글은 시작도 따로 없고 끝도 따로 없는 '천개의 고원'이라고 평가한다. 개개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독립성을 지닌 열린 구조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작품 속에 숨어있는 넘치는 유머, 열정의 패러독스는 4장에서 자세히 분석된다. <열하일기>를 소개하는 고미숙의 발랄한 문체는 열하일기 그 자체를 많이 닮았다. 사실 이 책은 고미숙 작가의 연암과 열하일기에 대한 짝사랑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하다. 노마드 성향을 지닌 노미숙 작가가 양반의 신분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며 사고의 변방을 자유분방하게 넘나드는 연암의 모습에 푹 빠진 것은 쉽게 이해가 된다. 그것이 연암과 그 시대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음은 자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노마디즘에 입각한 고미숙의 열하일기 읽기>라고 명명해도 좋을 것 같다. 먼저 <열하일기>를 읽고 나서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비록 이 책에서도 원문의 많은 부문을 인용해 설명하고 있지만 역시 열하일기의 맛은 전문을 읽어 보는 데 있다. 나는 학창시절에 <호질>이나 <일야구도하기>와 같은 열하일기의 단편을 접할 기회는 있었다. 그러나 전문을 읽어보고 나서야 <열하일기>가 단순 기행문을 뛰어넘는 하나의 사상서이자 예술작품인 동시에 철학서이기도 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왜 열하일기가 조선말기까지 금서취급을 받았는지, 다시 멋진 고전문학의 백미로 되살아났는지를 마음 속으로 느낄 수 있었다. |
| 평소 예스24를 즐겨 이용하는 단골로서, 예스24의 추천도서에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는 단골의 한 사람으로서 이 책이 4월의 추천도서에 올랐다는 사실에 공감하기 힘들다. 지난 주중 주문해서 주말에 일독했다. 일독한 후의 느낌은 한 마디로, 이 책 어디에도 연암의 본 모습 아니면 저자나 출판사가 주장한 새롭게 해석된 연암의 초상화는 없었다는 점이다. 어디까지나 저자 고미숙씨가 보고싶어만 했던 연암의 일면만 있었을 뿐. 거기에다가 너무나 산만한 문체, 과잉을 넘어 질식하기 일보 직전 수준의 감탄사와 문장부호의 남발, 레토릭. 메타포. 아포리즘. 노마드 등의 개념의 부적절한 사용...감탄부호 '!'가 과연 몇 개나 사용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한번 세어보려다 겨우 참았을 정도였다면... 이 책은 기본적으로 리라이팅클래식 시리즈로 선 보인 책이다. 고전의 새로운 해석을 표방한 책. 그러나 이 따끈따끈한 신간을 정색해서 정독을 한 나의 느낌은 '고전의 새로운 해석'이라고 표방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책이라는 생각이다. 너무 가혹할 지는 모르겠으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의 나의 심정은 '독후감'에 대한 비용과 시간으로서는 과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제목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4월의 추천도서 목록에 대한 예스24 편집진의 재고를 기대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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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지 가물가물 하지만 [열하광인]을 읽으면서 문체반정의 중심에 [열하일기]가 있었음을 알고 [열하일기]를 한번 읽어보리라고 마음먹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열하일기에 대한 짝사랑은 마음속에서만 맴돌뿐 마땅한 계기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고전을 읽는다는 부담외에 그것을 읽고 내가 온전히 그뜻을 이해할수 있을까하는 두려움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우연한 기회에 저자의 [열하일기]에 대한 사랑(?)은 우선 읽는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 그리고 두번에 걸쳐 연암과 [열하일기]를 생각하면서 연암이 걸었던 그길을 돌아본 것은 [열하일기]의 역설과 해학을 온전히 독자들에게 전해주는 바탕이 된것 같다. 저자는 1장에서 연암의 둘째아들 3장, 4장, 5장은 본격적인 [열하일기]에 대한 해설이라고 볼수가 있다. 해설이라기 보다는 저자가 느낀 사유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열하일기]를 아직 읽어보지 못한 우리들에겐 저자의 사유가 더 즐겁게 다가온다. 해설을 보지 못한체 먼저 [열하일기]부터 직접 읽는다면 그곳에 써있는 그 내용이 역설인지, 웃음인지, 비틀기인지 어떻게 눈치챌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비록 현대적인 언어로 번역해 놓았다 할지라도 그 시대의 상황과, 연암의 정신세계와 그리고 그 당시 선비들의 주된 관심사와 사유의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글을 읽고 하다못해 쓴웃음이라도 지을 수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타락하고 위선적인 사대부에 대한 풍자소설로 알려져 있는 [호질]에서 연암이 바라본 것은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연암식 유물론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한 병자호란 이후로 사대부들의 골수에 새겨져 국가이념이 되고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반대파를 잡는 것 이외는 아무런 내용이 없는 북벌론을 [허생전]을 빌어 쓸모없는 망상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학교다닐 때 고대소설로 읽은 [호질]과 [허생전]이 [열하일기]에서 따로 떼어낸 것을 알았다손 치더래도, [열하일기]속 [호질]과 [허생전]을 읽으며 저자처럼 연암이 진짜로 얘기하고 싶어했던 것을 알아차릴수 있었겠는가? 더불어 [열하일기]가 다 [호질]이나 [허생전]처럼 그렇게 쓰여진것도 아닌데, 설사 그렇게 쓰여졌다 할지라도 어떻게 연암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눈치챌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6장에서 저자는 연암과 다산에 대하여, 동시대를 살아온 두 천재가 그렇게도 이질적일수가 있는지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들이 그들을 조선후기 실학자로써 동일시하는 것은 학교에서 배운 실학담론이라는 거대한 틀의 균질성이 이들의 차이를 평면화 했기 때문이란다. 연암이 그당시 집권당파인 노론의 일원으로써 과거를 거부하고 권력외부에서 떠돌면서 계속해서 권력의 중심부로부터 미끄러져 나간 분열자의 행보를 한 반면, 다산은 집권에서 배제된 남인의 일원으로 정조의 탕평책에 기인하여 일찌감치 정계에 진출하는등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계속 진입한 정착민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문체반정 당시 연암이 배후조종자로 지목되고 정조의 회유와 당근을 비켜갈 때, 다산은 패관잡서를 재앙이라 규정 지으며 모두 불살라야 한다고 책문을 올릴정도로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서로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둘은 서로에 대해 단 한마디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평행선처럼 한 시대를 가로 지른 것뿐이라고 말한다. 연암의 [열하일기]는 그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일상사나 생각, 사유의 방법은 물론 청나라 및 이제 막 근대로 넘어오기 시작하는 세계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중심부에서 벗어나려 하는 주변인의 얘기가 쓰여있다. 내가 읽어낼수 있을지는 차치하고 [열하일기]에 대하여 이만큼이나마 알게된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이미 [열하일기] 상,하 두권을 구입하여 쌓아놓고 있으면서 읽을지 말지 갈등을 하고 있다. 그나마 이책을 읽었으니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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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열하일기 박지원을 논한 이 책의 소문은 진작부터 듣고 있었지만 접하지 못하다가 이제야 그 끝을 봤다. 다른 책보다 먼저 읽었어도 참 좋았을 책인데 왜 내가 주구장창 모셔두고 읽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내공이 있는 책이었다.
고미숙 작가님의 필담도 충분히 유쾌상쾌통쾌했다. 지엽적인 것만 보는 나로써는 충분히 배워야 할 부분들이 많았다. 숲을 바라 보지 못하고 나무의 나무결과 나뭇잎만 후벼 파는 스타일이 나에게 이렇게 거대한 작품을 하나로 아우럴서 관통할 수 있는 능력이 몹시도 셈이났다. 이런 장점들은 도대체 학습하면 되는 점인지 아니면 타고난 능력인지 헷갈릴때가 있다.
연암은 가히 천재적인 소질이 다분하다고 볼 수 있다. 흔히 나타나는 초기 우울증이 말해주듯이 심각한 우울증에서 빠져나오게 된 계기는 웃음과 유머다. 그리고 그가 만난 많은 소시민들이었다.
연암은 꾸준히 정치세력으로 부터 회유와 견제를 받아왔으나 은근슬쩍 눙치면서 그 언저리만을 맨돌았던 구도자적인 모습을 보인다. 말년에는 관직을 받았으나 이는 가족과 가난 때문이었다고 한다.
[열하일기]는 1792년 문체반정의 대표적인 금서였다. '연암체'라고도 일컬어지면서 많은 유생들과 문인들 세계에서 대박난 베스트셀러이자 대 유행체가 된 것이다. 주자학이 막강한 권력의 핵심이 되고 다른 모든것들은 이단으로 정의되던 때에 [열하일기]는 핫이슈였던 것이다. 이는 19세기 까지 개화의 핵심이자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때까지도 논의 되기 껄끄러웠던 매우매우 진보적인 성향의 책이었던 것이다.
[열하일기]의 시작은 연암이 청황제의 즉위식에 연행에 동행하게 되면서 시작된다.그때는 한족을 물리치고 청이라는 변방의 오랑캐가 4대째 100년 넘게 태평성대를 지키고 있던때였는데 조선은 오히려 한족의 지향하고 청의 변발을 무시할 때였다. 황제가 있는 연경까지 도착했으나 황제는 피서지인 열하에 가있다는 황당한 시츄에이션에 더군다나 조선사신을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칙서에 4일 밤낮을 세며 열하로 달려가는 모습들이 리얼하게 묘사되어있다.
그리고 만나게된 달라이라마(티베트불교-그때에는 유교가 성행하고 불교는 배척하는 국법에서 멀리하는 조선이었다.)이야기도 파격적이다. 유리창에서 만난 중국친구들과의 필담, 호질, 허생전, 열하에서 만난 요술쟁이, 코끼리 이야기등 여행기에서 볼수 있는 것들 플러스 세상담론과 도통한 이야기들이 그시대에는 큰 센세이션을 일으킬수 밖에 없었을 듯 싶다.
여기서 [도강록]에 나오는 구절을 소개해 보려한다.
'자네 길을 아는가"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닐세. 바로 저 강 언덕에 있는 것을" "이 강은 바로 저와 우리와의 경계로서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지. 무릇 세상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은 마치 이 물이 언덕에 제함과 같으니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곧 그 '사이'에 있는 것이네."
물과 언덕 사이에 길이 있다?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그렇다고 그 중간은 더더욱 아닌 경계. 그것은 그 어느 것에도 속하기를 거부하면서 '때와 더불어' 변화하는 어떤 지점일 터이다.
마치 연암의 삶과 같은 길의 비유이다. 연암은 사이의 은유들을 통해 결과론을 도출하려하던 것이 아니라. 계속 물음을 구성해내므로서 어떤 대상을 입체적으로 ,다층적으로 사유하길 원했다는 것이다. 한면만을 보거나 주장을 내세우면 치우치기 마련이다.모든 만물을 어울러 생각하는 연암, 먼지에서 부터 인간이 나왔기에 어떤 차별도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연암 같은 사람이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존재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여러 친구들과의 교류와 우정을 중시했던 연암을 통해서 그 뜻이 통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 순수하게 그리워 할 친구가 있다는 것이 못내 부러웠다.
또한, 여행기를 이렇게 맛깔나게 쓰며, 모든 것에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본인의 조그마한 심리묘사도 포함하여 메모광이었던 연암에게서 내가 주위나 낯선환경을 어떻게 대하는 가에 대한 부분도 반성하게 되었다.
가방이 배부르도록 필담을 나눈 글에 지인들에게 읽히기 위해 베껴쓴 글에 모든 것들을 기록하고 들려주고 싶어했던 그의 마음 덕분에 내가 지금 이렇게 흐뭇하게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신기하고 뿌듯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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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열하일기 해설집이다. 열하일기를 바라보는 철학적인, 다차원적인 분석과 해설들이 춤을 추고, 노래하고, 버무려진다. 저자의 박지원에 대한 애정은 하늘을 찌르고, 박지원의 삶이 당대에 미친 영향에 대해선 칭송을 넘어 찬양 수준으로 떠받든다. 과하면 부족한만 못하다고 했던가. 자연인 박지원은 사라지고, 온갖 현대 철학과 사회과학으로 무장한 근대의 선구자 박지원이 나타났다. 이런 표현에 정작 박지원 본인은 동의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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