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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문학을 문학으로 존재하게 할까?
"무엇이 문학을 문학으로 존재하게 할까?" 내용보기
오츠카 에이지는 무라카미 하루키로 대표되는 일본문학과 미야자키 하야오로 대표되는 재패니메이션이 세계에 도달할 수 있었던 이유를 구조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보면서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과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을 이야기론적으로 분석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무라카미 하야오 작품의 특징은 구조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면서 이미 있는 이야기 구조 위에서 형성된 작품이란
"무엇이 문학을 문학으로 존재하게 할까?" 내용보기

 오츠카 에이지는 무라카미 하루키로 대표되는 일본문학과 미야자키 하야오로 대표되는 재패니메이션이 세계에 도달할 수 있었던 이유를 구조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보면서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과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을 이야기론적으로 분석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무라카미 하야오 작품의 특징은 구조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면서 이미 있는 이야기 구조 위에서 형성된 작품이란 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도 많이 비판하지만 주로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을 비판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서브컬처로서 존재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은 문학이란 이름으로 좀더 많은 후광을 입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의 흥행을 좀더 문제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 오츠카의 전작들에 이어 여기서도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과 프로프의 『민담형태론』이 많이 거론되는데 두 책이 나온 시대는 오십년 가까이 떨어져있지만 둘 다 이야기의 구조를 집중적으로 판다는데서 일치한다. 우리나라가 아닌 옆 동네 이야기지만 특히나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과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가 우리나라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끈다는 점에서 상당히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우리나라 소설이 전반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화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서장은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상 수상 직전 어떤 강연에서 한 발언을 언급한대서 시작하는데 오에는 강연에서 일본문학을 `가와바타`, `무라카미`, 자신 세 범주로 나누고 자신의 문학은 앞의 것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에 도달했다는 듯이 말하나 오츠카는 그 발언에 대해 반박한다. 그들 세 범주는 `전통형`, `고도자본주의형`, `서구형`이란 말로 대체 가능한데 오에가 생각한 세 개의 문학 카테고리가 세계화를 가능하게 한 요인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 셋이 해외에 전해진 이유는 이야기 구조에 철저해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세계화한 배경엔 오에가 느꼈던 80년대 문학의 세계화가 있다. 거기서 작용했던 원리는 어떤 부분에서 오에와 가와바타를 범 세계화시켰던 원리와 겹쳐지는 부분이 있으면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것을 더 철저히 했다. 가와바타도 오에도 근대 일본문학 안에선 이야기구조가 선명한 소설가로, 범세계화했던 근대소설은 대개 선명한 이야기 구조를 가진 작품이 많다. 이 이야기 구조의 철저화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일어났다. 80년대 일본 서브컬처의 세계화 역시 문학과 애니메이션의 형식이 글로벌 스탠다드에 가까워져 버린 결과다. 이런 서브컬처의 범 세계화로 뭔가 `일본적인 것`이 세계에 전달되었다는 착각이 또 일반화되어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 재패니메이션이 왜 세계에 닿았고 무엇을 전달했는가는 묻지 않고, 단지 `일본`이 세계에 닿았다고 기뻐하나 그것들이 세계에 닿은 이유는 `구조밖에 없기 때문이며 도달한 건 `구조`뿐이다. 애니메이션과 만화는 이야기 수준에서 `구조화`될 뿐만 아니라 다른 수준에서도 `구조화`되었기에 더 닿기 쉬웠다. 일본의 만화, 애니메이션은 `이야기`, `작화`, `연출`, `동화` 네 개의 수준에서 고도로 `구성`화되어 `구조밖에 없는 표현`으로서 범 세계화되었다. 그에 대해 서브컬처 문학 보편화는 이야기 수준의 `구조화`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런 전제 위에서 오츠카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분석한다.

 

 1장과 2장에선 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그 작품들이 어떻게 이야기 구조론 위에서 쓰였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80년대 들어와 거대서사가 종언하면서 구조주의가 유행한 상황을 설명하고 그 구조주의가 새로운 사상이 아니라 말한다. 구조주의는 1920년대 혁명 직후의 소비에트에서 성립한 러시아 형식주의(포멀리즘)이 사상적 기원으로 고도소비사회의 반영으로 비쳤던 `이야기소비론`도 포스트모더니즘적 문화상황의 분석인 `데이터베이스 소비`도  `구성주의`란 모더니즘적 사상의 부흥 내지는 철저일 뿐이다. 그런데 포멀리즘이 이미 만들어진 작품 내에서 그 법칙을 끌어낸 것과는 반대로 의도적으로 이야기론적으로 이야기하는 나카가미와 무라카미는 그 구조에 살을 붙여서 이야기했다. 또는 단편적인 텍스트를 이야기론적으로 재배치해서 `이야기`로서 몸을 만들었다. 나카가미 겐지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야기론적으로 이야기한다`에 항상 의도적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야기론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시험해 그 점이 무라카미 문학을 범 세계화했다. 무라카미 초기 작품은 과도한 고유명사의 인용, 문학적 정크의 다발로 소설을 만들었다. `문학`이 데이터베이스화된 `데이터베이스형 소비`의 `문학`으로, 그 점이 무라카미의 `문학다움`을 지탱한다. `정크`적인 이미지의 조각을 구성하는 걸로 소설을 쓰고 있다. 데이터베이스의 공유의식이 이 작가와 독자를 연결하는 점에선 라이트노벨과 다를 게 없는데 문제는 그 조각을 뭔가 소설다운 것처럼 가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라카미 작품의 연대기적 해석을 허구의 세계에서 날조된 연대기로 건담 연대기와 비교하는 게 흥미로웠다. 전공투 운동 종결 후, 이 세대의 문화 현상에 `가공의 연대기 만들기`가 있었는데 그 연대기 위에서 몇 개의 시리즈 작품이 이야기 소비적으로 만들어졌다. 문학도 서브컬처도 80년대에 먼저 가공의 연대기를 포함하려 했다. 그렇게 `연대기`가상의 역사가 재생한 다음에 이 연대기 안에서 이야기론적으로 이야기했다. `양을 둘러싼 모험`은 할리우드적 이야기구조에 따라서 썼고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란 기본포맷이 명확하게 구조화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은 기본적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지만, `나`는 어떤 시점에서 그것을 그만둔다. `나`이외의 누군가의 `갔다가 돌아오는 이야기`가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빌딩로망(성장담), 할리우드적 히어로즈 쟈니(영웅담)란 주인공이 자기실현하는 이야기구조를 채용하면서도 그것이 가져오는 주인공의 성장은 보류하고 있다. 

 

 3장과 4장은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을 분석하면서 동시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 미야자키 고로가 감독한 게드전기를 분석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게드전기를 혐오한 이유는 거기서 자기 작품의 결점을 거기서 노골적으로 드러내서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오츠카가 앞에서 언급했던 하루키가 옴 진리교 사건을 봤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에서 여성들은 자기실현을 하지만 남성들은 자기실현을 회피하고 결국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온다. 남성들은 결국 성장하지 못한다. 문제는 그것을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에선 덜 선명하게 그리는 데 반해 게드전기에선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랄까. 일종의 자기혐오다. 또한 벼랑위의 포뇨에서 어머니는 거대하게 그려지며 남주인공은 어머니의 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소스케는 이야기 전반에서 성장하지 않는다. 포뇨에 나오는 거대한 엄마란 상징은 에바에도 나오지 않았나? 포뇨에 나오는 그 바다는 에바의 혼들의 바다와 다를까. 그래도 신지는 거기서 빠져나왔지만 결국 미야자키 애니 남주인공들은 빠져나오지 못했지. 꽤 설득력있는 비평이었다.

 

 종장에선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들을 간결하게 정리한다. 애니메이션에서 러시아 포멀리즘의 영향을 이야기하고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가 지나간 단계들을 말하면서 결론적으로 그는  누군가가 가져다준 이야기에 의해 자기실현을 한 듯 느끼는 건 관두고 `근대적 개인`에 다다르는 다른 루트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야기에선 현실은 해결하지 않는데 이야기처럼 현실을 재구성하고 거기서 이해, 해결하려 한 게 9.11 이후 오츠카가 말한 재이야기화한 세계였다.  9.11은 아메리카, 내지 부시란 `이야기 메이커`의 폭주였고 거기에 일본인은 결손했던 나를 맡겼다.

 보론 `<후기를 대신해서>『1Q84』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재『스타워즈』화`에선 흥미롭게도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엄청나게 돌풍을 일으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1Q84』에 대해 비판했다. 『1Q84』는 이야기 구조를 교묘하게 사용해 헐리우드 영화처럼 읽기 쉬우면서  번역하기 쉬운 문체, 즉 구조밖에 없는 문체를 가진다. 무라카미 하루키는『양을 둘러싼 모험』에서 인스톨된 이야기 메이커의 구조에 저항하지 않았고 그게 보다 적절한 형태가 되도록 문체와 표현을 사용한 결과 `구조밖에 없는 소설`이 나타났다. 아오마메의 암살자 속성과 같은 캐릭터 조형 역시 애니메이션, 드라마 안에서 반복해 나타난 정도의 상상력에 불과하다. 어중간하게 캐릭터에 현실적인 속성이 있는만큼 더 설정 부재가 신경쓰이면서 캐릭터의 설명 부족으로 `문학`으로선 잘 되어있을지 몰라도 그다지 새롭지 않다. 만약 구조에 뭔가를 대입한다면 두 가지 선택이 있는데 하나는 아니메, 게임, 엔터테인먼트 소설, 할리우드 영화가 그렇듯이 캐릭터의 철저한 데이터와 가상현실로서 보다 정합성 있는 세계관이 보충되는 수단이다. 그렇게 되면 헐리우드 영화처럼 훌륭한 상품성을 가진, 문학과는 별개의 소설이 될 터이다. 또 하나의 선택은 구조가 이야기수준에서도 문장 수준에서도 완성형에 가까우면서 거기에 `구조`가 아닌 무언가-캐릭터의 `속성`과 `세계관`은 당연히 아닌-를 대입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야기를 엔터테인먼트 소설과 상품으로서의 만화, 애니메이션과 명확하게 구별하고 문학을 문학으로서 근거짓는 것으로, 그것이 만약 있다면 보고 싶다고 말한다.

 『1Q84』 내에서 무라카미는 문학자 선언을 한 듯한데 본래 부흥해야 할 `근대적 개인`과 `역사`는 거기에 대입되지 않았다고 오츠카는 본다. 단지 `문학`이 자신의 구조=이야기에 `빙의`할 거라고 무라카미는 믿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건 마치 우리나라 순문학자들이 말하던 바와 똑같지 않은가? 오로지 문학만을 추구하므로서 문학을 문학답게 하는 뭔가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점에서 말이다. 나도 오츠카처럼 진정 문학이 문학으로서 있을 뭔가가 있다면 한번 보고 싶다. 지금 상황에선? 글쎄……문학이 다른 엔터테인먼트 소설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려면 그 위치에 걸맞는 특별한 걸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상황에선 그냥 자기들끼리 특별한 게 있는 것처럼 동아리를 만들 뿐 다른 것과 확연하게 구분된 특징은 없는 듯하다.

 


인상깊은 구절

 

 그런 의미에서 『1Q84』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자 선언처럼도 의미가 잡힌다.
 하지만 마치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 처럼 유아기 기억에서 시작해, 프로이트 식 가족 로망스와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어빙을 연상케하는 난독증과 서번트 증후군 따위 어디선가 본 듯한 몇몇 문학장치가 종래없이 동원되는 한편, 무라카미 류의 『오분 후의 세계』를 아무래도 연상하게 하는 짜임새, 라이트노벨 미소녀 풍의 아오마메와 후카에리라는 캐릭터 조형이 시험되었다. 「문학」(「라이트노벨」 포함)의 데이터베이스에서 샘플링되었다, 는 거겠지. 하지만 그것들의 구체적인 표현은 미시마에게도 어빙에게도, 또는 후카에리라고 하면 아야나미 레이에겐 이르지 못하고, 하지만 현재 「문학」으로 본다면 마이조 오타로 등 라이트노벨 계 문학보다는 성숙했다. 무엇보다 구조는 『스타워즈』니까.
 웬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전 나카가미가 엄청 찬사를 받은 듯이, 이런 완전한 「이야기」를 쓰는 걸로 문학과 근대소설에 무효를 선언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근대소설을 부흥하려는 거겠지라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본래 부흥해야할 「근대적 개인」과 「역사」는 거기에 대입되지 않는다. 다만 「문학」이 자신의 구조=이야기에 「빙의」하리라 무라카미 하루키는 믿는다.
 나는 초월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왜냐하면 나는 문학이니까다.
 『1Q84』는 즉 그런 소설이면서, 아사하라와 『1Q84』가 어디가 다르냐고 하면 『1Q84』는 소설일뿐이다, 란 정도다. 그 사실만큼은 구원이다.

 

-이야기론으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야자키 하야오, <보론 (후기를 대신해) 『1Q84』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재『스타워즈』화> 251~252쪽에서 발췌

(*참고사항

 아야나미 레이 :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히로인 중 하나. 참고로 내 취향은 아스카 랑그레이다. 말없는 미소녀보다는 발랄한 미소녀가 더 좋다.

 마이조 오타로 : 일본 라이트 노벨 계 작가. 우리나라에선 학산에서 주로 번역출판하고 있음. 1973년생으로 2001년『연기, 흙 혹은 먹이』로 데뷔. 메피스토 상, 미시마 유키오 상 수상경력 있음.

 아사하라 : 아사하라 쇼코. 옴 진리교의 교주. 교단 선전에 서브컬처적 수법을 상당히 많이 사용. 인터넷을 잘 검색해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동영상을 볼 수 있을지도.

 나카가미 : 나카가미 겐지. 『고목탄』,『남회귀선』등을 쓴 소설가.
 조셉캠벨이 『스타워즈』제작시 루카스에게 많은 조언을 해준 사실은 유명함. 그래서 『스타워즈』의 구조는 조셉캠벨이 말한 단일신화론의 구조와 상당히 유사하다. 조셉캠벨의 단일신화론은 그의 저작『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보면 이해하기 쉬움.)
 

a****o 2009.09.29. 신고 공감 3 댓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