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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이 1949년에 만든 <바다의 침묵 Le silence de la Mer / The Silence of the Sea>은 조곤조곤하게 말하지만 귀에 쏙쏙 들어오고 몸에 와닿는 정겨운 흑백 영화다. 쳐들어간 도이칠란트와 짓밟힌 프랑스가 서로 다른 생각을 하지만 끝내는 같은 길을 찾아보는 게 좋다.
2. 조카딸(니콜 스테판)과 단 둘이 살아가는 늙은이(장 마리 로뱅)가 겪은 제2차 세계대전은 어떤 모습일까? 1941년 도이칠란트의 기갑 장교인 베르너 폰 에브락 대위(하워드 버논)가 머물고 간 여섯 달을 돌아본다.
에브락 대위는 이 고을에 머무는 점령군 사령관인 셈인데, 시장이 내주려고 한 큰 집에서 머물지 않고 아담한 이집에서 지내고자 한다.
이 집 임자는 비록 도이칠란트에 나라를 빼앗겼지만 기죽고 살지는 않으려 한다. 그래서 제 집에 머물기로 한 에브락 대위가 무슨 말을 하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린다. 어떤 대꾸도 하지 않음으로써 도이칠란트 사람을 반기지 않는다. 온 몸으로 맞서는 셈이다. '우리 프랑스 사람들은 너희 도이칠란트 사람들한테 힘이 모자라 졌을 뿐 너희들보다 나은 사람들이야...'
아저씨와 조카 두 사람만 있을 때는 온갖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지만, 에브락 대위가 일을 마치고 저녁 9시 무렵에 나타나면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 제 할 일만 말없이 한다. 저녁을 먹은 뒤라 벽난로를 둘러 싸고 아저씨는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고, 조카는 바느질을 하거나 뜨개질을 하면서 보낸다.
3. 주인공 세 사람 가운데 영화 속에서 말을 하는 사람은 에브락 대위뿐이다. 프랑스 사람인 늙은 아저씨와 젊은 조카는 그저 에브락 대위의 말을 아무 생각없는 듯 들을 뿐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마음을 담은 말은 에브락 대위만 줄곧 하고, 늙은이는 겪은 일을 되새김질 하면서 그 때 느낌을 담담하게 읊기만 한다.
두 사람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지만, 앵무새마냥 밤마다 말을 하는 에브락 대위. 첫 날부터 저를 반기지 않는 두 사람한테 말한다. "저는 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을 우러러봅니다"
"저는 늘 프랑스를 좋아했어요. 저는 숲속 집에서 태어나 도시보다는 시골이 마음에 들고, 여기가 좋아요..." "프랑스와 도이칠란트가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이 될 겁니다" "프랑스의 겨울은 따뜻하네요. 제 고향은 정말 추워요... 저는 이집에서 오래 살고 싶어요. 이 마을의 아들이 되어서..."
프랑스와 도이칠란트가 싸우게 된 것은 나쁜 정치가들의 잘못이지만, 곧 하나가 되어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며, 그런 날 돌아가지 않고 프랑스에서 살 것이라는 에브락 대위.
4. 도이칠란트 장교지만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프랑스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생각보다 나쁜 사람은 아닌 듯하군...우리가 이렇게 저 사람을 내몰라라 해도 되는 것일까?" 두 사람은 마음이 오락가락 한다. 말을 받아주고 같이 나눠야 하나, 이제껏 지내온 것같이 그냥 지나쳐야 하나?
겉으로는 에브락 대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두 사람이지만, 속으로는 하나도 빼먹지 않고 다 듣고 있다. 들었을 때 속마음은 늙은 아저씨가 혼잣말로 들려준다.
사람만 놓고 보면 도이칠란트에서 음악을 배웠고 작곡을 하던 에브락 대위가 나쁜 구석이 없지만, 싸움은 에브락 대위 혼자서 하는 것도 아니고 큰 틀을 바꿀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도 아니다. "프랑스 사람들을 속여서 짓밟고 다 빼앗아야 해..." 하는 다른 장교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처음에는 낯설고 싫어했으나 말은 섞지 않아도 날이 갈수록 마음을 열고 가까이 가는 사이가 되었지만, 도이칠란트 사람인 에브락 대위와 프랑스 사람인 아저씨와 조카가 끝까지 하나가 되기는 어렵다. 그런게 전쟁이니까. 바보들이 저지르는 사내들만의 싸움. 그래서 처음부터 싸움은 벌이지 말아야 하는 것.
5. 잔잔하면서도 마음에 와닿는 대목이 더러 보인다.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눈에 띄게 만드는 감독의 솜씨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에브락 대위가 사귀던 아가씨 이야기를 하자 바느질을 잘 하다가 실을 놓쳐 얼른 다시 바늘귀를 뀌는 조카. 마냥 귀엽다. 쳐다보지도 않고 말도 안 듣는 듯하지만 마음은 젊고 말쑥한 에브락 대위한테 가있다.
파리를 구경하고 와서는 밤에 거실에 내려오지 않는 에브락 대위가 마냥 궁금한 아저씨. 아예 낮에 에브락이 일하는 일터에 가본다. 보기 싫어서 말도 붙이지 않던 도이칠란트 장교한테...
그래서 말은 붙이지 않고 끝까지 '바다같은 침묵'을 지키지만, 에브락 대위를 걱정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군인에게도 불법 명령에 맞설 권리는 있다"는 글을 보여주면서.
선우휘씨가 한국전쟁을 다룬 소설 <단독강화>에서 남한과 북한의 윗대가리들은 다른 생각을 해도 싸움터에서 만난 남과 북의 두 병사는 바보 같은 싸움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듯이, 유럽에서도 싸움을 일으킨 사람들과 달리 두 사람은 나라가 달라도 마음을 열고 사이좋게 살고 싶어한다.
6. 말이 적어도 이렇게나 마음에 와닿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니, 멋있는 감독이고 놀라운 영화다. 집에서 벌어지는 일을 많이 다룬 것이라 <암흑가의 세 사람>에 견주면 볼거리는 적지만, 잔잔함 속에서 큰 울림을 주는 영화라, 별 다섯 개를 주었다.
집에 있는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의 영화는 다 보았는데, (1) 말수가 적지만 할 말은 다 하는 솜씨를 지녔고, (2)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이 드러내놓고 감싸지는 않지만 은근하게 따뜻한 느낌을 주며, (3) 세상의 흐름을 꿰뚫어보고 이기든 지든 시대 정신이 살아 있어 좋았다. (4) 그러다 보니 마냥 즐거운 영화는 아니어서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많았다. 이 감독이 다룬 작품의 주인공은 죽거나 멀리 떠나거나 감옥에 가게 되어 헐리우드 영화와는 다르다.
영화 디브이디는 깨끗하지 못하다. 벌써 예순 해도 더 지난 영화라 화면은 가끔 번져 깔끔하지 못하다. 소리는 그런대로 괜찮고. 우리말로 옮긴 것도 좋지 않다. 써놓은 글자에 받침이 틀리거나 글자가 잘못된 곳이 있다. 보너스는 아예 없다. 예고편도. 영화만 좋다면 다 받아들여야 하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