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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한
책 한 권을 읽었다. [시선들 : 자연과 나눈 대화]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우리가 일상에서 지나치기 쉬운 자연들에 대한 시선을 기록한 에세이다. 그럼에도 그 시선들이 어디를 향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린다. 읽고서 한참이 지난 후 비로소 저자가 바라본
것들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다. 아니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과연
그것들이 자연을 향한 것인지조차 애매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자의 글들을 읽어가다
보면 자연이란 것은, 무엇인가 말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함께해야 할 것들이란 느낌을 받기도 한다.
오로라, 병리학자의 해부실, 선사시대의 유적발굴지, 가넷 서식지, 자연사박물관, 선사시대의
동굴, 그리고 빛이나 달과 같은 자연물 등 14가지 소재에
대한 저자의 글은 우리가 왜 자연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곳들은 육아와 세상일에
지친 저자가 휴식을 취하고, 위안을 얻기에 항상 꿈꾸고 갈망하는 장소들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쳐버리기 쉬운 외딴 섬에서 자연을 만나는 저자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자연이 무엇이고, 우리가 말하는 자연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빙산을
헤쳐 나가는 배 안에서 깜깜한 밤이 되자 은은한 청록색의 북극광이 걸려 있는 하늘을 바라보는 저자는 자신이 세상의 끝에 서있음을 느낀다. 새와 바람만이 있는 무인도에서 바라보는 자연은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풍부함과 사치를 맛보게 만들기 충분하다. 뭉게구름이 깔린 높은 하늘아래 펼쳐진 바다, 폭포처럼 연이어 쏟아지는
빛, 수천마리의 바닷새가 떠들어대는 소리는 자연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경계가 어디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바로 그 경계에서 저자는 자연을 바라보며 과거와 현재 속에서 자연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있다.
병리학실험실에서
암이나 종양에 걸린 장기들을 떼어내고, 그것들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면서 저자는 자연을 관찰하는 기분을
느낀다. 부검하는 장면을 참관하면서 인체의 경이로움을 보기도 한다. 그리고
장기들에서 나는 냄새가 한동안 자신을 따라다녔지만 실험실 밖으로 나와 신선한 3월의 산들바람을 맞으면
그것들 모두가 자연의 일부임을 느끼기도 한다. 선사시대의 스톤헨지를 발굴하는 현장에서 석관을 개봉하자
나타난 여자의 두개골과 사발은 당시에도 경이로웠지만, 세월이 흐른 후 그 들판을 다시 찾아 청동기시대의
여자가 누웠던 흙과 그 흙으로 만든 사발을 상상하게 만드는 것도 자연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사박물관에
빽빽하게 들어찬 고래의 턱뼈 아래에서 고래들이 살았던 바다를 생각하고, 그 바다에서 인간의 포경을 피해
달아나던 고래들을 생각하는 것도 자연의 일부였다. 아니 자연과 인공의 경계였다. 그래서 저자가 서 있는 곳, 저자가 가는 곳 모두는 자연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에 다름없다. 그곳에서 저자의 사유는 시작된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자연과 인간적인 것 모두를..
저자가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목적이 담겨있지 않다. 자연을 걱정하는 환경운동가의 시선도, 자연의 신비를 파헤치는 과학자의 시선도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지만, 그냥 지나쳐가는 것들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바라본다.
공원에 설치된 아치의 중앙에 자리잡은 고래의 턱뼈를 보면서 포경선에 쫓기던 고래와 어머니의 죽음을 생각하고, 무인도에서 죽은 조그만 새의 다리에 붙어 있던 고리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생각하고, 선사시대 동굴벽화에서 머나먼 과거부터 지속되어온 인간과 동물의 조화를 생각한다. 그저 자신이 자연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쓰고, 우리에게 그것들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물을 뿐이다.
하늘이 우중충하다. 눈이라도 한바탕 쏟아질 것만 같은 날씨이다. 내 눈에 보이는 저것들은 자연인가? 땅바닥부터 시작하여 주위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들이다.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와 하늘만이 애초에 있던 것 그대로인 것 같다. 자연을 찾으면서도 자연을 보지 않으려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내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내 눈에 보이는 자연과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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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필집은 캐서린 제이미의 두 번째 모음집이며, 영어권에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니 영어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자연사(自然史)와 연관된 경험들을 바탕으로 쓰여진 글들은 그녀가 시인이었음을 잊게 한다. 도리어 자연과학 다큐멘터리 작가이거나 이와 연관된 직업을 가진 건 아닌가 하는. 그리고 이런 소재/주제로 근사한 수필을 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상당히 전문적인 내용까지 언급되면서 시인 특유의 감수성이나 그 시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글로 된 이런 수필들도 만났으면 좋겠는데, 그러기엔 독자 층도 적고 오로지 글만 써서 살아가기엔 순수 문학과 관련된 시장은 너무 협소하기만 하다. (그런데 원고료는 아직도 그대로이겠지.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책을 읽으면서 괜찮았던 문장들을 옮긴다. 나도 글쓴이처럼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나는 항상 가넷의 삶을 부러워했다. 해안이나 배 위에서 보면 우리와 완전히 다른 삶처럼 보인다. 소박하고 엄격한 대기, 빛, 파도와 더불어 사는 삶, 먹구름을 배경으로 반짝거리거나 단검처럼 몸을 접어 물고기를 향해 돌진할 때 가넷은 몸이 아니라 마음처럼, 동물이 아니라 광물처럼 보였다. 나는 한 마리 가넷이 외로이 바다를 탐문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좋다. 나이 지긋한 귀족 시인이 고뇌하며 시상을 떠올리는 모습 같다. (94쪽~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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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슬린 제이미(Kathleen Jamie)는 1962년 스코틀랜드 서쪽 지방에서 태어나 에든버러대학교 철학과에서 공부했다.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이다. 스코틀랜드의 풍경과 문화에 뿌리를 두면서도 여행, 여성문제, 고고학과 시각예술 등을 아우르는 작품을 쓰고 있다. 자연과 풍경을 다룬 에세이집 『발견들』에 저명한 평론가 존 버거는 ‘에세이 형식을 마술처럼 주무르는 여자 마법사’라는 찬사를 보냈다. 두 번째 에세이 『시선들』은 존 버로스 메달과 함께 오리온 북 어워드를 수상했으며 우리나라 유일의 번역본이다. 책날개가 아닌 본문에 캐슬린의 사진이 있다. 흑백으로 담긴 다부진 골격의 그녀는 벽에 기대어 비뚜름하게 약간 낮은 곳을 응시하고 있다. 그녀의 아래에는 석관의 해골이 사발을 바라보고 있다.
1979년 5월의 어느 날, 아마 캐슬린 제이미의 열일곱 번째 생일이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마지막 시험을 대충 치르고 미래에 대한 별 생각 없이 아무렇지 않게 학교를 떠났다. 하루나 이틀 뒤에 어머니가 30마일을 운전해서 퍼스셔의 시골로 데려갔다. 전에 어머니는 도서관 사서를 해보라고 했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날 어머니는 비서를 양성하는 전문대학을 추천했다. 그 순간 적의에 찬 실망의 눈물이 눈가를 적셨다. 캐슬린에게 대학 진학을 권하는 사람은 없었다. 캐슬린이 그때 찾아간 곳은 발굴터였다. 신석기시대 기념물이 4천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고, 그것을 재빠르고 세심하게 해체하는 곳이었다. 일꾼으로 참여한 일곱곱 살의 캐술린이 본 것은 그 뒤 캐슬린 삶의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 같다.
모종삽 끝에서 올라오는 충격과 흙의 감촉이 좋았다. 물론 마음속으로 온통 휴식 시간만 기다리고 얼굴에 자꾸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에 짜증날 때가 많았다. 그러나 가끔은 그 미세한 풍경, 한참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축소판 사하라 사막에 정신이 팔리기도 했다. 가끔 허리를 펴고 주위를 둘러보고는 내가 와 있는 곳이 퍼스셔의 한 들판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변하지 않고 굳건하게 서 있는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모종삽을 들고 허리를 숙인 우리가 저 넓은 세상의 중심인 것만 같아서 좋았다. 허황된 상상만은 아니었다. 울타리를 치고 의식을 올린 이옷이 바로 여기에 지어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테니 말이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비행기가 있어서 지구의 표면을 살펴보지는 않았겠지만, 그들은 확실히 풍경을 읽을 줄 았았다. (69쪽)
캐슬린이 본 것은 풍경과 시간이었다. 우리는 풍경 속에 위치하고 시간 속에 놓이는 존재라는 것을 보았다. 석관에 누워있는 여자의 뼈는 시간에 놓이는 우리의 존재를 정확히 알려주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풍경과 시간을 본 캐슬린이 자주 서는 풍경은 시간의 끝이다. 빙하가 온 천지를 뒤덮고 있기에 황홀한 초록빛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북극,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운명을 보여주는 자연의 증거를 볼 수 있는 병리학자의 해부실, 야생적이고 넓은 지역에 걸쳐 있지만 가정적이고 야비하고 요한하며 계절의 영향을 받는 가넷 서식지, 다양한 종의 고래 스물네 마리 뼈가 전시되어 있는 고래박물관, 빛과 달, 무인도의 동굴벽화, 줄노랑얼룩가지나방, 바다, 쇠바다제비, 바람.
매일매일 우리의 시간 감각은 느렸다. 해가 가장 높을 때여서 낮이 날개를 펼친 듯 길게 늘어났다. 밤이면 오두막 창문에 덧문을 쳐서 어둡게 해야 잘 수 있었다. 지나가는 구름, 갑자기 쏟아지는 스콜, 바람의 변화가 시간이었다. 이런 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이렇게 좁은 범위에서 지내면 어떻게 될까 궁금했다. 하늘이나 무지개에서 이름을 짓고, 계속해서 바다가 보이고 들리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나는 그곳에 고작 2주 있었는데도 마치 뼈가 피리가 된 것처럼 몸 안이 더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216 - 217쪽)
우리가 날았던 바다가 한때는 땅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그렇게 오래전은 아니었을 때, 나무들로 들어찬 숲이었는데 해수면이 상승하여 바다가 덮어버린 것이다. 바람과 바다. 그것 말고는 모두 임시적이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날갯짓 한 번이면 사라진다. (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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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숲책 숲책 읽기 161 - 눈길이 닿는 곳에서 피어난 삶길 《시선들》 캐슬린 제이미 장호연 옮김 에이도스 2016.12.15. 조용히 해,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침묵을 들어. 큰까마귀에게서 잠시 눈을 뗐고, 다시 보았을 때는 녀석이 사라지고 없었다. (15쪽) 나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바로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은 초록색 오로라를 입속에 넣으면 혀에서 거품이 탁 터지면서 크렘 데 멘테의 맛이 날 것 같다는 것이다. (25쪽) 애 키우는 시절은 끝났다. 내 아들은 이제 휴대폰을 갖고 농담을 할 만큼 컸다. 나중에 아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범고래 다섯 마리 보았음!” 그는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하루 일한 것치고 나쁘지 않네!” (97쪽) 매년 2월 셋째 주만 되면 빛이 돌아왔음을 실감하게 되는 날이 있다. 하루로 그칠 때도 있고, 며칠 이어질 때가 더 많다. (107쪽) “고래 본 적 있어요?” 내가 마리엘레에게 물었다. “살아 있는 고래 말이에요.” “아니요! 우리들 중 누구도 보지 못했어요. 안 그래도 며칠 전에 그 이야기를 했어요. 하루 종일 여기(박물관)서 (박제나 뼈로 남은) 고래를 대하면서…….” (136쪽) “그들(군인)은 마을을 불도저로 밀려고 그곳에 도로를 건설했어요. 당신도 그들의 심중을 짐작하겠죠. 더 이상 아무도 그곳에 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결국은 계획이 꺾였군요.” “그리고 이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고요.” (166쪽) “어때요?” “나쁘지 않아요.” “뭐 하고 있었어요?” “그냥 구경했어요.” “그리고?” “세가락갈매기가 새끼를 낳았더군요. 가끔 두 마리도 보이고.” “괜찮네요.” (205쪽) 큰아이를 낳고서 곁님이 저한테 들려준 숱한 말 가운데 하나는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워야 해요.”입니다. 이 말은 달리 나타내자면 ‘아이 생각날개를 꺾지 말자’입니다. 작은아이를 낳고서 곁님 말을 언제나 되새깁니다. 두 갈래로 다 생각하지요. 처음에는 ‘생각날개를 꺾지 말자’고 생각하는데, ‘꺾지 말자’는 생각을 하면 아무래도 ‘이렇게 하면 꺾는 셈 아닌가?’ 쪽으로 흐르더군요. 바로 멈추고서 다시 생각합니다. ‘꺾지 말자고 생각하니 자꾸 꺾는 쪽으로 가는구나 싶네. 그래, 생각날개를 마음껏 펴도록 북돋우고 이야기하는 길로 가자’ 하고요. 이처럼 생각하며 “언제나 모두 너희 마음에 있단다. 너희가 스스로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알아내지 못하겠다면 아버지나 어머니가 알려줄 수 있는데, 아버지나 어머니는 아버지랑 어머니 스스로 오래도록 생각하고 찾아본 끝에 알아낸 길일 뿐이야. 옳거나 맞는 길이 아닌, 그저 아버지하고 어머니가 살아오며 스스로 배운 길이거든. 그러니까 너희가 무엇을 생각해서 알아내고 보고 깨닫더라도, 너희가 스스로 찾아내고 생각하면 돼. 틀리거나 맞거나 따지지 않아도 돼. 틀렸으면 어떠니? ‘어라, 틀렸네?’ 하고 여기고서 지나가면 되지. 너희 마음으로 생각을 하면 다 알아낼 수 있어.” 하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물어보기에 이렇게 대꾸를 하느냐 하면, “아버지, 별은 왜 떠요?”라든지 “아버지, 이 꽃은 이름이 뭐야?”라든지 “아버지, 이 풀 먹어도 돼?”라든지 “아버지, 저 새가 뭐라고 얘기했어?”라든지 “아버지, 저 길고양이가 아프데? 배고프데?”라든지 “아버지, 여름은 왜 덥고 겨울은 왜 추워?”라든지 “아버지, 제비는 어떻게 저렇게 잘 날까?”처럼 묻거든요. 이제는 언제나 “응, 궁금하구나. 넌 어떻게 생각해?” 하고 되묻습니다. 영어로는 ‘sightlines’란 이름으로 나온 《시선들》(캐슬린 제이미/장호연 옮김, 에이도스, 2016)을 읽었습니다. 영어로는 ‘-s’를 붙일 테지만, 한국말로는 ‘-들’을 안 붙입니다. 한국말로는 목소리면 ‘목소리’요, 노래이면 ‘노래’요, 글이면 ‘글’이요, 눈길이면 ‘눈길’이에요. 눈길이란, 눈으로 짓는 길입니다. 눈길이란, 눈으로 가는 나아가는 뻗어가는 지나가는 거쳐가는 길입니다. 눈길이란, 눈으로 마주하는 길입니다. 눈길이란, 이 눈하고 저 눈이 어우러지는 길이지요. 글쓴님이 이녁 아이하고 주고받은 말처럼, 저도 아이들하고 수수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수컷 직박구리가 잠자리를 잡고서 암컷 직박구리한테 다가가더라.” “그래? 둘이 뭘 했어?” “암컷 직박구리는 수컷 직박구리를 안 쳐다보데.” “왜?” “응, 딴 데 보느라고.” “이러다가 수컷이 자꾸 뒤에 붙는다고 여겨 귀찮아 하다가 돌아보니, 어라 수컷 직박구리 입에 잠자리가 있잖아?” “그래서?” “암컷 직박구리가 수컷 직박구리더러 ‘응? 나 주려고 불렀구나?’ 했지.” “그리고?” “그런데 암컷 직박구리가 저를 한참 안 쳐다보고 딴청만 했다고 토라져서 날름 삼키고 날아가더라.” “하하하.” “암컷 직박구리가 따라 날아가면서 ‘너, 나 놀리는구나!’ 하면서 끄악끄악대고.” 우리는 모두 아기로 태어나 아이로 자라나며 푸른 눈망울로 꿈을 키우고는 어른이라는 자리에 서서 철이 듭니다. 《시선들》은 이러한 삶길 한켠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마음에 담는 사람으로 오늘 이곳에 있는가 하고 찬찬히 짚는구나 싶습니다. 자, 오늘 우리는 무엇을 보았나요? 새벽을 맞이하면서, 아침을 열면서, 낮에 해가 하늘 높이 뜨는 동안, 차츰차츰 기우는 해가 고개 너머로 사라질 무렵, 바야흐로 깜깜한 밤을 맞이한 때에, 무엇을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가요? 그리고 이렇게 바라본 눈썰미로 아이들하고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요? 지식이나 정보도 대수롭다고 여깁니다만, 지식이나 정보만으로는 가르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책이나 교과서나 학교만으로는 아이들이 슬기롭거나 사랑스럽거나 아름답거나 즐겁게 피어나는 길을 알려주지는 못하겠다고 느낍니다. 지식이며 정보이며 책이며 학교도 나쁘지 않습니다만, 아이가 스스로 생각에 날개를 달고서 마음을 틔우는 눈길이 되어 사랑으로 삶을 짓는 길을 북돋울 적에 참으로 즐거운 배움살림이 되지 않을까요? 우리 살림살이는 돈만 넉넉하다고 해서 즐거웁지 않아요. 간장 종지 하나 덩그러니 놓은 밥자리라 하더라도, 이야기꽃이 활짝 피어나도록 둘러앉았으면, 배부르고 즐거우며 아름답기 마련입니다. 갖은 잔치밥을 차린 자리라 하더라도, 으스스하거나 무섭거나 닦달이 판친다면, 속이 더부룩하고 아무 맛도 없기 마련이에요. 어른으로서 어떤 눈길인지 같이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사람으로서 어떤 마음길인지 함께 헤아리면 좋겠습니다. 풀꽃나무하고 매한가지인 이 푸른별 아름다운 숨결로서 어떤 사랑길인지 나란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눈길이 빛나는 꽃길이 되도록 하루를 가꾸면 좋겠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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