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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무스타파'는 '올펄레즈'를 사랑했고, '올펄레즈'도 '알무스타파를' 사랑했다.
이따금 어딘가의 '오늘의 명언'에서 보곤하던 칼릴 지브란이라는 이름이 왠지 익숙하게 들리긴 하지만 실제로 아는 것이 없다는 괴리감을 메꾸어 보고자 구입했다. '칼릴 지브란'은 화가이며 시인이고 철학자였다고 한다. 어쩐지. 책 속 그림은 그가 그린 것일까?
'예언자'라는 제목에서 종교 서적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겠으나 이 책은 특별히 특정한 종교의 포교 목적으로 쓰여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순수하게 '시'라고 할까? 잘은 모르겠지만 이렇게 긴 시도 산문시의 일종이라면 그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의 삶에서 화두가 되는 것들에 대한 순수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시. 어떤 종교적 분위기의 장엄함이라든가 숭고함이 은은히 풍기기는 하지만 그것이 이 책의 색깔을 변형시킨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제목인 '예언자'는 아마 이 이야기의 맨 마지막 이야기인 "머지않아 바람 위에서 잠시 쉰 뒤에, 또 한 사람의 여자가 나를 낳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부분을 의미하지 않나 싶다. 부활을 한다는 것인지 혹은 어떤 다른 이의 손에 의해 혹은 말을 통해 자신의 가르침이 되살아날 것이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후반부를 보면 "다시 오겠다."라는 의미의 말이 몇 번 나오는데 그것이 예언이라면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인 '알무스타파'는 예언자이리라.
이 이야기는 '알무스타파'가 12년간 머물던 '올펄레즈'시에서 떠나는 날에 그 시민들에게 전한 가르침을 적고 있다. 사랑, 결혼, 자녀, 자선, 음식, 노동, 기쁨과 슬픔, 집, 옷, 사고 파는 일, 죄와 벌, 법률, 자유, 이성과 정열, 괴로움, 자아인식, 가르침, 우정, 대화, 시간, 선과 악, 기도, 쾌락, 아름다움, 종교, 죽음. 하나같이 인간의 삶에서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거대하고 심오한 '화두'들이다. 그러한 '화두'들에 대해 사제, 무녀, 시민들이 질문을 하고 '알무스타파'는 자신의 사상을, 가르침을 하나하나 물음에 답하는 식으로 전한다. 중간의 ~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본래부터 붙어있던 것인지 후에 출판하는 이에의해 임의적으로 붙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걸리적 거린다. 그런 제목이 왜 필요한 걸까 싶었다. 더더군다나 이 이야기가 한편의 시라면 분명 '쓸데없는 짓'이다.
12년간 어떤 의미로 '알무스타파'는 어쩔 수 없이 '올펄레즈'시에 머물렀던 것 같다. 하지만 '올펄레즈'시민들이 너무나 순수하게 자신에게 가르침을 구하고 따랐기에 깊은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머물렀던 12년간처럼 오늘은 '반드시' 떠나야 하는 날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깊이 사랑하고 아끼는 시민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하나 하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 담아 전하고 떠나가는 것이다.
시대적 배경이나, 작가의 상황을 조금 더 안다면 이게 무슨 소릴까? 하는 근원적인 의문에 대한 답이 될 것도 같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쓰여진 글만을 읽고 그 배경을 상상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알무스타파'는 '올펄레즈'를 사랑했고, '올펄레즈'도 '알무스타파를' 사랑했다.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 이었다. 이번에는 통독했는데 다음에는 정독해보고 싶다.
사랑은 사랑 자체말고는 아무것도 주지 못하고 사랑 자체말고는 받지 못합니다. 사랑은 소유하지 않고 또한 사랑은 소유당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에는 사랑만으로 충분합니다. 25p
자기가 가진 것을 자선한다고 해도 그 자선은 결국 보잘것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자선해야 비로소 진정한 자선이 됩니다. 35p
당신의 목소리 깊숙한 곳에 있는 목소리로 하여금 당신 친구 귀의 깊숙한 곳에 있는 귀에 말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그의 영혼은, 마치 포도주 맛이 언제까지나 혀에 남아 있듯이 그 빛깔을 잊고 그것을 담은 잔을 잊어버린 뒤까지도 당신 마음의 진리는 받아들입니다. 99p 하지만 만일 아득히 높은 곳에서 멀리 거리를 두지 않고서 어떻게 그대들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 만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면 어떻게 진실로 가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142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