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의 미국이 있기 까지, 여러 중요한 요인들을 꼽을 수 있겠지만 뭐니뭐니해도 그들의 교육 시스템을 간과할 수 없다. 미국 교육의 시스템에 중요한 토대로 이 저자는 인문학으로 보고 있다. 결국 수천년전에 그리스를 통하여 태동하였던 인문학교육이 수천년이 지난 지금의 강대국인 미국에게도 동일하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니 인문학인 죽는다는 것은 무얼 모르고 하는 소리다. |
|
정의란 무엇인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 교수는 앤서니 T.크론먼 교수가 쓴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은 추천사를 썼다. “우리에게 인문학이 절실했던 때, 인문학은 교양교육의 핵심 역할에서 손을 뗐다. 학생들이 삶의 의미에 관해 답을 찾도록 도와주던 일을 그만둔 것이다. 앤서니 크론먼은 인문학이 길을 잃어버린 이유를 이 책에서 열성적이고 명쾌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인문학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삶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에 학문의 초점을 맞췄던 대학의 전통을 부활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일 대학의 법과대학 학장을 지냈고 현재는 동 대학 석좌교수로 재직 중인 앤서니 T. 크론먼은『교육의 종말』(원제: Education's End)을 통해 왜 대학이 삶의 의미를 찾는 공부를 변방으로 밀어냈는지에 대해 다각도로 분석한다. 저자는 서두에서 ‘삶의 목적을 찾는 일,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답은 개인이 내리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시험 문제의 답을 구하는 일이나 수학 문제를 풀이하는 것은 타인이 한 것을 참고해도 상관없지만 나의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삶의 목적을 찾는 일 만큼은 지극히 개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인이 말하는 삶의 목적과 이유는 참고할지언정 나의 삶의 목적과 이유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내려야 한다고 연거푸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대학이 ‘삶의 목적을 찾는 일’을 개인에게만 미뤄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저자는 오늘날의 대학에서는 ‘삶의 목적’에 관한 물음을 찾는 과정을 회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삶의 목적을 찾는 일이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고 할지라도 대학의 교육과정에서 무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대학 교수들, 특히 인문학부 교수들은 학생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질문을 체계적으로 검토할 수 있게 지도할 책임이 있다고 믿었고, 학생 스스로 해답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했었다고 설명한다. 만일 그런 도움이 없다면 학생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홀로 직면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대학에서는 이러한 과정들이 생략되고 있다고 있다면서, 삶의 의무를 찾는 인문학의 부활을 촉구하고 있다. ‘삶의 목적을 찾는 일’에 대한 과정이 생략되고 변방으로 밀려나는 이유에 대해 저자는, 자연과학이나 여타 다른 학문보다 명확한 결과를 내리기 어렵다는 인문학의 특성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객관적인 데이터를 도출해 내기 어려우므로 자연스럽게 자연과학보다 덜 전문적인 것처럼 비춰지게 되었고, 점차 인문학이 축소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실질적으로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지만 체계적인 학술적 연구 결과를 내기 어렵고, 수치화되는 데이터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삶의 목적’이라는 주제를 대학에서 묻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미국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대학의 실정은 어떤가. 우리의 대학들 역시 어느 새 취업을 위한 ‘학원’처럼 변질되어 취업률을 공개하고 학생들에게 구애(?)를 하지 않던가. 지성의 전당이고 지식의 상아탑이었던 대학은 취업을 위한 징검다리 역할 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저자의 결론은 대학이 인문학을 부활시키고,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그의 주장이 현실에 얼마나 반영될지, 대학들이 과연 자발적으로 인문학을 부활시킬지는 미지수라는 게 안타깝다. 대학의 변화를 기대한다는 내용을 제외하고서라도 ‘삶의 목적’을 개인이 찾아야 한다고 서술한 1장은 삶의 태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가까이 두고 천천히 곱씹어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