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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 삶의 희미한 배경이나 애매한 현상들로 힘겨운 적이 있었다면.
그리하여 설명되지 않는 불운한 현실을 행복한 척하며 살아가거나,
행운을 기웃거리며 강박적으로 나를 기만해왔다면,
그리하여
잠든 플라톤 선생님을 깨워, 이데아를 설파해달라고 조르면서
멀지만,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나의 행로를 의심 없이 결정하고 싶었다면..
이 책은 부드럽고 간단하게, 현재를 해체하고 그 모습을 드러낸다. 벼르듯 적확한 언어는 냉정하여 따뜻하고 드러난 모습은 뚜렷해서 선하다. 엄밀하고 냉정한 세계를 조망해냄으로써, 진실로 절망하게 하는 따뜻함이다.
철학의 패턴을 싸고도는 막을 걷어낸 명증함과 유기적 관계는, 결국 우리의 삶과 그것의 관계를 드러내면서, 나를 육박해 들어와 노예의 내 삶을 펼쳐놓았다. 이상한 일이다... 마치 서사시를 읽어나가듯, 부드러운 운율로 소곤소곤 말을 건네는 글들은 가벼운 듯, 무겁게..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그들의 세계로 나를 끌어가고, 그들과 내면을 일치시켜 갈 수 있게끔 안내한다. 그러면서도, 궁극에는 현실의 나, 현존하는 나의 삶에 데려다 놓는다.
읽고 나서, 순간 드는 생각은 사소하고, 분주한 지식들은 간단하고 간결한 더 큰 지식을 만나면, 망설일 것 없이 밀려나는구나 하는 것이었다. 다시 저자의 다음책을 기다린다. 점점 간단해진다는 건, 얼마나 좋은가...
이제,,플라톤 선생님, 편히 주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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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시절부터 철학적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는 나의 강박은 서른을 훌쩍 넘은 지금도 철학책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만든다.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나의 일은 항상 철학적 자질을 나 자신에게 요구하게 되고, 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내 자신을 보게 된다. 지인의 소개로 접하게 된 이 책의 독특한 구성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지금까지 인식론과 존재론을 구분해서 쓰여진 철학사는 없었다. 보통은 서양철학사로 제목 붙여지고, 철학자들을 단순 나열하는 식이다. 나의 책장에 꽂혀져서 가끔 들쳐볼 수 있는 기쁨을 선사하는 사무엘 E. 스텀프의 철학사마저도 철학자들의 평범한 열거식 서술을 할뿐이다.「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는 철학사를 인식론과 존재론으로 구분하여 인식론편을 먼저 다루겠다고 밝힌다. 나는 이렇게 구분하는데 전적으로 동의하며 철학에 대한 이해를 기존의 다른 책들에 비해 훨씬 쉽게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철학사를 적극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서양 철학사의 인식론적 측면에서 William Ockham, David Hume, 그리고 Wittgenstein(철학자들이 철학사에서 동일한 비중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에게 더 큰 비중을 둔 것으로 보여 진다. 기존의 철학사들이 실재론적 관념론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실재론적 관념론이 서양 철학사에 있어서 주류처럼 다루어졌던 것과 다르게, 이 책의 저자는 Ockham이 불러들인 유명론이 철학사에서 인식론적 전환을 가져오는 중요한 사실로써 다루고 있다. 보편개념은 이름뿐이며 존재하는 것은 개별자뿐이라는 유명론의 대두와 함께 근대에 길이 열렸으며 이후 Hume에게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나는 다른 철학사들을 읽을 때 ‘보편논쟁’부분은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세 보편논쟁이 마치 철학사의 한 ‘섬’처럼(앞뒤 사상가들과 유기적 연계도 없고 이 논쟁의 철학사적 중요성도 다루어지지 않은 채) 기술되어 있다.「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에선 이 논쟁을 Ockham이전의 Aquinas의 실재론과 Ockham이후의 Hume의 경험론과 관련 속에서 설명해준다. 비로소 나는 보편논쟁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이다.
「유명론적 전제에 입각하면 교회는 모든 개별적인 신앙인들의 이름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더 중요한 것은, 개별자들만이 존재한다면 신과 개별자들을 매개해주는 역할의 교회조직은 불필요한 것이다. “존재는 쓸모없이 증가해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하며 오컴은 보편개념으로서의 교회를 부정해 나간다. 개별자로서의 각각의 신자들이 보편개념으로서의 교회보다 신에 더 가깝다. … 유명론은 개별자를 강조함으로써 개별적 인간을 부각시키고 개별적 인간의 개체성을 강조하며 그들의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활동을 강조한다. 유명론에 의해 중세인들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자각하게 되었다.」
「유명론자들은 실재론을 분쇄함에 의해 교황청의 손으로부터 신을 구해낼 수 있었다. 이제 지성적 우월이 신에 대한 우월성을 보장받을 수는 없게 되었다. … 지상으로부터의 신의 퇴거는 다시 한 번 세계의 통합성을 해체한다. 신을 정점으로 구출되어 있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는 유명론의 공격에 의해 궁극적으로 와해될 것이었다. 」
이 책의 Hume 부분은 나 자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인상으로부터 관념이 왔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떤 관념이 떠오르면 그 이전의 어떤 인상으로부터 그 관념이 왔는지를 명확히 하라는 Hume의 주장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Hume의 언명이 전체 철학사에서 어떤 입지와 중요성을 차지하는지는 몰랐었다. 모든 것을 감각과 인상으로 수렴시킬 때, 우리에겐 객관적 세계의 실체도 자아의 존재도 필연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 다만 상식적인 삶만이 가능했을 때 새로운 회의주의를 부른다는 것, 과학혁명을 통해 통합된 세계가 다시 한 번 해체를 겪고 향락적이고 자포자기적인 슬픔을 부른다는 것, 이것이 현대의 세계관까지 물들인다는 저자의 설명으로 나는 ‘지금의 나’를 해명 받았다. 개체의 탄생이 종의 진화를 겪듯이, 신념과 독단이 붕괴되었을 때 인류가 겪은 불안과 절망이 나의 젊은 시절(자신감에 차서 여러 신념들로 나를 무장시켰던) 이래 계속 겪은 좌절과 유사한 과정일까? 절묘하게 해명된다.
새로운 통합을 시도한 철학자로 Wittgenstein을 제시한다. 나에게 Wittgenstein은 하나의 장애였다. 여러 철학책을 읽어봐도 이해가 되지 않고 혼란만 가중시켰다. Wittgenstein이 직접 쓴「논리철학논고」는 더 심하게 어려웠다.「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는 책 분량의 1/3정도를 Wittgenstein에게 할애할 정도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Kant의 ‘우리인식구조의 선험성’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의 선험성’이라는 것, 그러나 Kant가 선험성은 경험과 더불어 의미를 갖는다고 했듯이 Wittgenstein의 명제는 경험적 검증을 갖는다는 저자의 설명에서 나의 눈이 반짝거렸다. Wittgenstein을 이해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는 순간이다.
또한 경험비판론자들을 이해해야지만 Wittgenstein의 논리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경험비판론자들이 객관적 사실과 무관하게 우리 감각의 상에 맺히는 사실을 가장 적합하게 표현한 것만이 우리에게 가능한 지식이라고 했듯이, Wittgenstein은 그 가능한 지식이 언어라는 수단으로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의 한계는 언어의 한계’인 것이다. 언어는 객관적 사실의 관계 지움이 아니라, 우리감각의 관계 지움이라는 것이다. Hume이래 경험론의 계보는 더 이상 객관적 세계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경험비판론과 연관시켜 Wittgenstein을 설명했다는 점, Kant가 인간이 가진 직관감성과 분석적 선험성으로 인식 가능한 세계는 물자체의 세계가 아니라 ‘현상의 세계’라고 한 것을 비트겐슈타인이 다시 인식의 영역을 축소시켜 ‘언어의 세계’로 한정시켰다는 설명은 전체 철학사에 대한 통찰 없이는 능란하게 구사하지 못할 설명이다.
저자는 세 개의 정확한 사례를 들면서(아마도 저자의 독창적인 사례 같다) Wittgenstein의 ‘단순자에 대한 요청’을 설명해준다. 최초의 생명체에 대한 해명은 지금까지 불가능하지만 현재 우리 존재로부터 최초의 생명체는 요청된다는 것, 기하학에서 증명 불가능한(자명한) 최초의 공리와 공준은 요청된다는 것, 10층에 사는 사람이 자신의 안전성을 확인해보길 원하지만 아래층이 안개에 쌓여 있을 때 1층의 안전성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Wittgenstein이 세계의 사실에 닿는 가장 단순한 요소명제와 세계의 사물에 닿는 이름을 가정하나 그 사례를 현실에서 찾을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을 이제 나는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언어의 구조상 요청되었던 것이다.
일찍이 모든 철학사는 이 책과 같아야 했었다. 나는 학창시절부터 철학을 알고자 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부하려 했다. 그러나 이전의 철학사들은 개별 철학사들에 대해선 자세히 설명하나, 철학자들 간의 유기적 설명도 없고 철학자가 전체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도 다루어주질 않았다. 철학자들 간의 유기적 연관과 비교가 없다면 개별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철학사의 놀라운 점은 철학자 한사람에 대한 설명에 매몰되지 않고 거대한 흐름 속에서-저자가 통합과 해체라고 표현한- 각 철학자들이 갖는 의의와 과거 철학자들이 다음 시대에 철학자들에게 어떤 점에서 영향을 미쳤는지가 유기적으로 설명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과학과 예술에 대해서도 뛰어난 통찰을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니콜라스 쿠자누스의 등거리론을 신앙적 체계와 연결시켜 설명한 점,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궤도가 완벽한 원이어야 한다는 운동에 대한 고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 케플러의 타원궤도 발견에 의해 근세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열게 되었다는 설명을 나는 어느 철학책에서도 볼 수 없었다. 과학적 사실을 철학의 세계에 도입하여 당시의 세계관과 연계시켰다는 시도는 놀라울 뿐만 아니라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더군다나 르네상스 회화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느껴지는 괴리를 유명론과 플라톤적 실재론의 모순적 통합으로 설명한 부분에선 감탄이 나왔다. 나는 르네상스시기 작품을 좋아한다. 그런데 그 시대 작품을 보면서 느꼈던 놀라움과 행복감과는 별도로, 자유분방한 내용과 묘사가 경직된 고전적 틀 속에 갇혀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철학사 책이 이런 궁금증을 해결해 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철학이 과학과 예술의 해명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 철학은 그야말로 세계관에 대한 해명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이 책에 대해선 다만 경이로울 뿐이다. 더불어 이런 대단한 책이 우리나라 학자에 의해 써졌다는 점이 뿌듯함을 갖게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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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와 중세의 철학이 '세계의 총체성에 대한 탐구'에서 근세와 현대철학이 다분히 '우리의 인식 능력과 그 한계에 대한 탐구'로 변화하게 된 계기가 12세기의 일군의 철학자였듯이, 대다수의 현대인들이 가지는 의심병은 실은 데이비드 흄을 위시한 영국 경험론 철학자들과 그 후예들과 동일한 지평에 있음에 관심 기울이는 이는 몇 명쯤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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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 서른을 넘기던 어느 날 나는 갑자기 인생무상을 느꼈다.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생각을 하다보니, ‘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자연스레 이어졌고, 그 즈음, 막연히 과학과 예술과 철학이 한통속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던 그때 한 권의 책을 만났다.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이 책은 충격 그 자체였다. 분명 예술사인데, 분명 나름 역사서인데, 나를 둘러보고 반성을 하게 만드는 책. 이건 예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철학에 대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책이었다.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아보게끔, 그것도 아주 냉렬히 비판적으로 반성하게끔 만드는 저자의 능력에 감탄하며 저자의 또 다른 책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던 중 새로운 책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출간 소식을 접했다. 돌이켜보면, 나에게 있어 철학이란.... 고등학생때 대학생때 배운 철학은 말 그대로 철.학. 문자로서의 철.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였다. ‘다음 중 풀라톤이 한 말이 아닌 것은?’ 으로 시작되는 시험문제와 하나라도 더 찍고 맞추기 위해 무작정 외워야 했던 내 모습이 ‘철학’에 대한 내 기억의 전부다. 한 철학자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또 그 말이 지금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한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던 수업이기에 악숙하지 않은 철학자들의 이름과 전문용어는 철학은 참으로 지루하고 지겨운 학문으로, 그렇게 철학은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문자로만 존재해왔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에 대한 신뢰덕에 책 출간 소문에 덜컥 사버린다. 열어보지도 않고. 얇은 책이지만, 철학책은 철학책이다. 즉, 철학이라는 단어가 주는 중압감에 쉽게 첫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다. 다만 책표지에 있는 제목의 문체가 이런 두려움을 넘어서게 해 준다. 마치 철학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그렇게 다가온 책,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플비).
역시 이 책도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단순히 열거한 책처럼 보이는 제목이지만, 머리말을 읽는 순간 갑자기 눈이 환해짐을 느낀다. 그동안의 답답함이 왠지 이 책에서 풀릴 것 같은 느낌. 목차를 열면 기존의 철학사 책들과는 접근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된다.
책을 읽은 후 1 인류의 30,000년 역사에서 “인간의 생각“이라는 부분을 200여페이지에 압축해 놓은 책. 다 읽고 나니 책에서 인용된 오캄의 면도날과 같은 깔끔함이 그대로 묻어나 있음을 알게 된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이만큼만으로 우리의 생각과 관념이 어떤 변화를 겪어왔는지를 설명하는 책.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를 읽는 동안에 나를 알아가고, 나를 만나는 즐거움을 맛보았듯, 나는 “플비”를 읽으면서 우리 인류가 만들어온 인식의 흐름을 보며 나 자신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1. '실재론, 관념론, 합리론, 경험론, 유물론. 관념적 독단, 유물론적 회의'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단어들로 알고 있었는데, 내 머릿속에 혹은 내 마음 안에 들어있는 실재론적 생각들, 관념론적 생각들, 합리론적 생각들, 경험론적, 유물론적 생각들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이젠 알게 되었고, 끝없이 관념적 독단과 유물론적 회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나를 발견했다. 세상은 망하게 되는 게 아닌가, 인류는 종말을 고하게 되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나의 두려움과 현대를 살아가면서 겪는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 이제는 감이 온다. 2. 철학사로 보는 지금, 현대, 21세기,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남긴 것. 그간의 철학으로는 누가 먼저 활동한 철학자인지도 모르는 판에, 그동안 누가 어떤말을 했네... 라는 설명만 들어왔으니, 각각의 사조(? 생각)들이 어찌 연결되어 있고, 또 어떻게 철학이 발전해 왔는가를 한 눈에 꿰뚫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 책을 읽어 가면서 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가 문화 활동을 시작한 구석기시대부터 끝없는 혼돈과 방황속에서 살고 있는 지금,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어떤 세계관 아래에서 우리의 생각과 문화 활동이 가능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왜 우리의 역사를 유명론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는지, 근대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데카르트가 왜 근대의 문을 그리고 어떻게 열었는가에 대해, 이제 수학과 과학이 가지는 위치에 대해 새로이 알게 되었고, 위대한 철학자라 불리우는 임마누엘 칸트가 흄의 경험론을 접한 후에 내뱉은 비장한 고백과 흄으로 인해 무너진 세상에 대한 절망감, 그리고 이를 극복하고자 칸트가 시도한 구원, 즉 세계의 대통합에 대한 열망에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냉정하게 계속 해체되고 파산되어 가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내가 느끼는 막연한 불안감일지 모르겠다. 그리고, 철학이 존재론과 인식론으로 구분될 수 있다는 것. 존재론과 인식론에서 다루는 주제가 어떻게 다른지 또, 각각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 즉, 세계에 대한 총체적 설명을 하기 위해 인류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세계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과연 인간은 그 무엇인가를 알수있는가에 대한 물음과 그 답들이 철학의 주요 과제였다. 인간은 본래 원인과 결과를 엮는데에 천부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아무런 정보가 없던, 동굴 생활을 하던 시절부터 우리는 어떤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묶어 어떤 법칙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개발해 왔을 것이다. 당연히 이런 능력은 우리의 생명력을 높이는 데에 많은 기여를 했을 것이다. 이제 이러한 법칙은 각 시대별로, 혹은 각 철학자 나름대로 이름을 달리 해왔음을 알게 되었다. 즉, 살아가는데 있어 이렇게 유용한(또는 생존에 유리한) 정보들이 때로는 이데아로(플라톤), 때로는 엔텔레케이아로(아리스토텔레스), 때로는 함수로(데카르트), 때로는 인과율로(흄), 때로는 종합적 선험지식으로(칸트), 때로는 언어(비트겐슈타인)으로, 그리고 현대에서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달리 불려온 것이다. 이제 우리가 알고 있는 세게, 즉 천국이나 신이나 지옥 같은 상상의 세계가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는 감각인식을 통해 접수되는 객관적 정보에 의해 과학이라는 언어로 표현되는 세상으로 한정지어 진다. 즉, 세상을 안다는 것은 과학을 통해 세상을 알게 된다는 뜻이 된다.(비트겐쉬타인) 이제 세상은 과학으로만 설명되어야 한다. 과학이 아닌 것은 존재하지만 보여져야 하는 것들이라고 비트겐슈타인이 설명하였다. 아직 내 몸과 마음이 100%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무슨 뜻으로 그러한 말을 했는지, 그 언어는 이해가 된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고리타분했던 철학시간에서 조차도 언급이 되었던 적이 없던, 인물의 진가를 이제야 발견하게 된다. 이제 세상은 과학이라는 객관적 언어로 말해질 수 있는 부분만이 언급되어야 하며, 말하지 말아야 하는 부분(에술, 철학, 논리, 형이상학 등)은 이제 스스로의 존재가 증명되기 위해선 보여져야 한다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3. 반복되는 세계의 통합과 파산. 그 구성과 해체. 먼 과거 우리 인류가 가졌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존경으로 우리 세계는 통합되었었고, 개별자의 존재와 가치에 눈을 뜨는 순간 우리 세계는 해체되었다. 인류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엇에 관심을 가졌는지, 무엇이 진리라고 느꼈는지는 이러한 통합과 파산, 또는 구성과 해체를 반복해온 역사다. 나는 관념론자로서 또 인본주의자로서 우리 세계가 통합되고 구성되길 희망하는 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비록 세계의 파산과 해체의 시기임은 인정하지만, 또다른 구성과 통합을 바라보는(또는 기다리는) '파산과 해체'의 시기, 그 말미에 살고 있기를 나는 희망한다.
절망의 시대. 상실의 시대. 이 시대에 내가 살아가야 하는 올바른 방법, 시대착오적이지 않게 최대한 잘 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아니, 이것은 욕심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이 현대를 가장 현대스럽게 사는 삶의 방식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망해가는 것 같은 세계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이 파산과 해체라는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 와중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로 눈을 돌리고자 한다. 내게 남은 것은 이제 그것밖엔 없기에. 그래도 여전히 나는 그립다. 우리 다음의 세계가. 누군가 이 세계를 통합해 주길바라는 희망의 끈은 놓을 수가 없다. 꿈이라도 꾸고 싶다. 4. 현대인으로서의 나 나는 어찌하다보니 과학기술이라는 데에 발을 담그고 살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왜 과학적 기질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조차 시도한 적이 없다. 그러나 “플비”를 읽는 동안 내가 왜 과학과 수학을 좋아했고, 그리고 또 얼마나 그 학문이 가지는 선험성과 보편성에 무한한 신뢰를 해 왔는지, 그러한 신뢰가 알게 모르게 붕괴되는 현실에서 느끼는 자괴감과 혼돈이 내 삶에 어떻게 녹아 있었는지를 보았다. 즉,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최신의 기술을 다루는 직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의식은 뉴턴이 세상을 뒤집어 놓았던 전근대적 사고를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고, 그래서 나의 삼십년 인생은 어떤 보편개념을 찾기위해 헤매고 다닌 시간들이었다는 것도 깨닳았다. 최근 공부를 더 하면서 알게된 우연의 세계, 과학이 우연이라니!! 필연이나 보편원칙이 아닌, 그 우연성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겪는 갈등. 현실과 내 이상과의 괴리가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상당부분이 비스겐슈타인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결국 이 책이 말하고자 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현대 라는 것을 뜻하리라. 현대물리, 현대화학, 현대미술, 현대음악... 현대라는 말이 붙을때마다 경험하는 그 난해함의 기원을 이 책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이제 나는 과학이 지닌 태생적 한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과학이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과학이 지닌 의무감의 무게를, 마음의 짐을 서서히 내려 놓는다. 진실은 없고, 진실을 추구하는 나 자신만의 소중함을 깨닳는다. 현재에 충실하는 나 자신이 이제 내 삶의 목표가 되고 있다.
책을 읽은 후 2 어려운 말들이나 전문용어로 사람의 기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 삶의 태도를 생각하게 하는 정말 친절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철학을 이제 바로 내 곁으로 아니 내 삷속 깊숙이 들어오게 되었다. 철학을 죽은 학문이 아닌 살아있는 학문으로 설명해 주신 저자에게 감사드린다. 새로 나오게 될 책, 플라톤에서 데리아까지.(역시 데리아는 누군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이 나오면 역시 열심히 읽고 공부할거다) 이 책이 벌써부터 기다려 지는 것은 무언가를 또 알아가는 즐거움, 특히 나 자신을 알게 되는 즐거움이 미리 기대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살아있는 철학을 느끼고 싶은 분들게 권한다. 혼란스럽고 어렵다고만 느껴지는 철학이 한 줄에 꿰어질 것이다. 전혀 과학을 업으로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직관에 의해 “등거리 이론”을 만들어 낸 니꼴라우스 쿠자누스에게 경외감을 보내며... 과학기술에 몸 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하는 바이다. 과학을 하는 올바른 자세를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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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관심을 갖거나 공부하고자 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지금 어디에 위치하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그 어떤 이유들에 앞서는 공통의 것일 테다. 돌아보면 나 또한 그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으려 고민하고 아파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고민을 안고 우리가 접해야 했던 유수의 철학자들의 책들은 숨이 턱턱 막힐 만큼 어려웠고, 어떻게 정의해야할지 모를 그 어려운 단어들 앞에서 질문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어떤 열패감을 맛보게 되었던 게 사실이다. 이런 와중에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사실 만났다기보다는 고대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이 책의 저자인 조중걸 선생의 전작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를 읽어 본 분들은 알겠지만, ‘현대’라는 시대적 성격과 이 시대의 예술적 양식에 대해 ‘키치’라는 양태를 빌어 그렇게 쉽고 재미나고 유려하게 풀어나간 책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저자의 새로운 책을 고대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고, 이번에는 인식론적으로 해명한 서양철학사라니 안 읽어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가 고작 220여 페이지라니. 처음엔 의아했다. 그러나 읽어나갈수록 그 의구심은 풀렸다. 의구심이 다 뭔가. 나 같은 초심자의 입에서 “옳거니!”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한 마디로 인식론적 서양철학사의 처음이자 끝이었다. 입문하는 자에게는 지도가 되어줄 것이며, 전문가에게는 요약본이 되어줄 터이다. 그렇다면 몸통이 빠진 것은 아닌가 할 텐데 그것도 아니다. 저자의 한 문장 한 문장은 오롯이 몸통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 어렵다는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이 쉽게 이해되고, 이름만 들어본 데이비드 흄이라는 철학자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두 번째 읽을 때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그리고 깨달음에 이른다. 결국 인식론적 철학사는 인간이 스스로 겸허해질 수밖에 없는 과정이었구나 하는... 어허, 이것 참 보배일세. 에필로그에 저자는 현재 집필 중인 <플라톤에서 데리다까지 - 서양철학사 존재론적 탐구>라는 책에 대해서 언급했다. 나는 또, 어느덧 이 책을 고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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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에세이의 목적은 인식론적 측면에서의 서양철학의 이해이다.”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철학서를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내가 철학서를 편다. 그 시작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에세이’라는 말에 매료되었음이다. 이 책은 마치 철학자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같다. 그들이 구축한 사유의 세계, 통찰, 분투와 수고로움, 안타까울 정도의 솔직한 자기 고백, 폭로, 반전, 이후 시대의 철학자에 의한 공격과 협박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우리는 누구나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 깊은 통찰을 통해 ‘그럴듯한’ 누군가가 되기를 꿈꾼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방법을 몰랐고 그렇게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철학적 사유의 방식과 철학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지금보다는 한 층위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철학, 철학자란 그저 교과서 속에서 화석처럼 존재하던 것이었다. 학창시절, 도덕이나 국민윤리 교과서의 몇 페이지에 수많은 고대중세근세 철학사상과 철학자들이 아무런 교육적 고려 없이 열거되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철학과 내 삶을 연관 지을 수 없었다. 저자는 이전의 저작 <열정적 고전읽기> 시리즈를 통해 철학에 대한 방대한 이해를 우리에게 선사한 적이 있다. 물론 나는 그 방대함에 따른 지적 열패감-인간의 지성이 여기까지 이를 수 있구나 하는-으로 시리즈 중 세 권밖에 읽지 못했다.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는 ‘이’ 철학과 ‘저’ 철학의 넘나듦을 통해 철학사의 맥락을 한 눈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통쾌하고 경이롭다. 우리 인식 상에 따로국밥으로 자리 잡고 있는 철학자와 주요 개념을 한 자리에 정렬해 준다. 특히 데이비드 흄, 칸트, 비트겐슈타인은 아마도 저자가 가장 사랑하는 철학자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 통찰이 돋보인다. 넘나듦의 또 한 측면은, 군데군데 보여주는 철학과 예술의 대응을 통해 독자들을 또 다른 세계로 친절히 안내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만약 우리가 우리 언어를 하나의 체계로 인정하고 인식을 그 안으로 후퇴시킨다면 적어도 ‘만들어진’ 인식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플라톤의 우화를 뒤집어 놓은 것이다. 플라톤은 사슬을 풀고 동굴을 벗어나 이제 더 이상 그림자를 보기를 그치기를, 빛에 의해 밝혀진 실체를 볼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그림자밖에 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고 이데아를 본다는 우리의 신념이야말로 오도된 착각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림자만이 ‘말해질 수 있는’ 세계의 전부인 것이다."(p213~214) “칸트가 어떻게 종합적 선험지식이 가능한가를 물을 때,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에 대해 기술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How is it possible to make statements about the world?)"를 묻는다.”(p162) "경험비판론자들이, 대상이 존재하고 그것을 따라 개념이 만들어졌다는 주장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거부하듯이,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의 모습을 따라 언어가 만들어졌다는 가설을 뿌리친다. 우리에게 인식 가능한 것은 오로지 우리의 감각뿐이라고 흄이 주장했던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에게 인식 가능한 것은 오로지 우리 언어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흄과 다른 점은, 흄이 우리 감각의 기원을 경험이라고 말하는 데에 반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기원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언어는 선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p165) “고대와 중세는 존재론적 통합에 의해 세계를 구성했지만, 이 정당성은 존재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유명론에 의해 붕괴된다. 근세는 우주의 운동법칙의 포착에 의해 단일하고 이해 가능한 세계를 얻어 낸다. 이것이 과학혁명과 데카르트의 철학이 얻어 낸 가장 커다란 성과이고 그 가장 빛나는 성취는 뉴턴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이제 이해 가능한 운동법칙이 삼라만상을 지배하게 되고 변화와 운동이 삶의 본질이 되었다. 이러한 세계관은 예술에 있어서는 바로크 이념으로 드러난다. 헨델과 바흐에서 보이는 끝없이 변주되어 나갈 것 같은 모음곡들이나 대규모의 변주곡들은 음악이 하나의 건축적 구도를 가진 닫힌 구조물이라기보다는 영원히 계속 운동해 나가는 열린 체계라는 것을 말한다.”(p87~88) “흄은 보편적 지식에 대한 강박증을 벗으라고 우리에게 권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보편적 지식의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흄은 상식에 입각하여, 우리 삶을 좀 더 현실적이고 즐겁게 살아가라고 권한다.(중략) 흄 철학의 이러한 측면이 예술에 있어서는 세속적이고 향락적인 로코코의 유미주의를 부른다. 삶이 그렇게 근엄하고 진지할 이유도 없고 삶에서 추구해야 할 성스러움도 없는 것이다”(p128)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는 매우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있게 쓰여 졌다. 문체가 우아하고 유려하다. 그리고 간결하다. 참다운 학문, 참다운 글은 그 안에 내가 보인다고 했던가? 나는 책 안에 저자가 녹아들어 있으며, 책 속의 저자는 철학자들과 깊은 교류-심정적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이런 측면이, 철학적 지식 기반이 전무한 내가 단숨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저자와, 그리고 책 속의 많은 철학자와 심정적 일치를 하고 싶었고 그들을 닮고 싶은 바람을 가져보았다. 저자는 이 책이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이기를’ ‘어떤 흔들림, 울림이기를’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독자들이 ‘좀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배움을 통해 세계를 향해, 나를 향해 거침없이 밀어붙일 것을 당부하는 것 같다. “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진실의 추구였다. 이 점에 있어 흄은 가차 없었다. 그 진실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흄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단지 그에게 제시되는 분명한 것을 말하고자 했고 그 폐허 위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는 그의 책임은 아니었다. 그는 철학자였지 거짓 예언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p130) “.....의미가 박탈된 세계에서 인간은 무의미를 잊기 위한 향락에 몰두한다. 그들은 해골이 그들의 무도회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안다. 향락이 무의미를 해소시킬 수는 없지만 무의미 속에 처한 자신의 상황을 잊게 할 수는 있다. 우리는 향락에 잠겨 자신의 무의미를 잊으려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보여 준 것은 이러한 세계이다”(p215)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의 에필로그는 -패턴으로서의 철학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저자는 서양철학의 구성과 해체의 증거들을 이미 책 전반에 펼쳐 놓았고, 우리는 저자의 통찰을 통해, 그리고 우리의 학습과 깨달음을 통해 현존하는 세계와 미래에 대한 철학의 패턴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와 중세는 존재론적 통합에 의해 세계를 구성했지만, 이 정당성은 존재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유명론에 의해 붕괴된다."(p88~89) "경험비판론의 철학적 의의는 다시 한번 세계를 해체시켰다는 데에 있다. 그들은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신념을 그 마지막까지 붕괴시킨다. 이제 누구도 선험성이라거나 실재나 형이상학에 대해서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세계를 지배하는 보편성이나 필연성은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것은 객관적 세계에도 우리에게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확실성은 남김없이 사라졌다. 그들은 신화를 일소했다. 인간은 자신을 보호해 줄 어떠한 방어막도 박탈된 채로 다시 한 번 세계의 붕괴를 지켜봐야 했다."(p156) “철학이라는 학문은 자기가 품었던 의문 자체에 의문을 품는다는 독특성을 가진다. 존재의 제1원리, 자아, 신 등이 철학이 제기하는 주요 질문이다. 그러나 어떤 철학은 이러한 질문 자체가 물을 수 있는 질문인가를 묻는다, 중세의 말에 오컴은 이미 이러한 문제가 인간 지성의 영역 안에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는다. 흄은 단호하게 이러한 영역을 인간 이성의 영역 밖으로 구축해 낸다. 그는 심지어 지성의 존재 자체를 의심한다. 칸트는 이러한 영역이 순수이성의 영역에 들어오기 때문에 수용하기보다는 실천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수용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언어철학에 입각해서 이러한 영역들을 언어의 세계에서 구축해 낸다. 이것이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질문은 물어지지 말아야 했다,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 역시도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p199)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는 앎과 삶에 대한 나의 태도를 반성하게 한다. 내가 아무런 의심 없이 말해왔던 것들을 회의하게 했고, 진실한 탐구가 무엇일까 고민하게 해주었으며, 내 안에 통찰과 인식 그리고 자기완성에의 희구가 있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말해질 수 없는 것(What cannot be said)'과 보여질 수 있는 것(What can be shown)'에 대한 통찰은 나를 초죽음의 지경으로 몰아간다. 어쭙지않은 이 글 또한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자는 “철학은 진공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철학은 하나의 세계를 의미한다. 철학은 그러므로 우리 삶 위에 착륙한다. 우리 삶의 해명자로서의 철학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바, 작년 가을 가명으로 출간된 저자의 소설을 통해서 그의 철학적 통찰이 삶과 어떻게 맺어지는가를 보여준다. (소설에서 깊은 철학적 사유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멋진 글을 만난 건 지금까지 내 인생의 가장 큰 이벤트였다!) “지식은 만약 그것이 의미 있는 것이라면 완전히 알거나 전혀 모르거나 이다. 적당히 아는 것은 사실은 모른다는 것이다.” “사랑은 이성과 논리로 상대를 파악하지 않는다. 사랑은 분석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감과 일치이다. 당신 마음이 내 마음을 파고들어서 내 마음에 공감의 반향을 일으킨다. 이때 둘 사이의 거리는 존재하지 않게 되고, 마음의 벽은 일거에 허물어진다. 언어는 마음을 드러내기에는 부적절한 도구이다. 언어가 끝나는 데에서 사랑이 시작된다. 사랑은 보여지는 것이지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 “무지는 지식의 결여는 아니다. 무지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이다. 무지는 기질과 성향과 태도의 문제이다. 성향과 기질과 세계관에 있어서 무지한 사람들이 있다. 실천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노력이나 지성이나 예술을 경멸하고 비웃는 오만함이 본질적 무지이다. 이것은 단지 학위와 직업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영역에서의 문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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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기다리던 조중걸님의 책이 나왔다는 소식에 두번 생각할 것도 없이 책을 주문했다. 이제는 인문교양 베스트셀러가 돼버린<우리들의 행복한 키치>이후에 거의 3년만의 신간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서양철학사라니. 서구 지성사 전반을 아우르는 저자의 해박함은 이미 <열정적 고전읽기>, <키치>를 통해서 느끼고 있었지만, 그의 다음 행보가 서양철학사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부제처럼 붙어있는 '인식론적 해명'이란 말은 또 뭘까? 도착한 책을 받아들고 더욱 놀란 것은 문고본 수준의 아담한 책 사이즈 때문이었다. 이렇게 작은 책에 어떻게 그 방대한 서양철학사를 담았다는 건지. 책을 펼쳤다. 첫 문장부터 심상치가 않다.
철학, 관념적 독단과 유물론적 회의주의 사이 철학은 관념적 독단과 유물론적 회의주의를 양 끝으로 하는 스펙트럼이다. 인간은 관념론자가 되거나 유물론자가 된다. <중략> 신으로부터 비롯된 독단적인 관념의 시대로부터 합리론적 관념론과 유물론적 경험론을 거쳐 유물론적 회의주의에 이르는 하나의 패턴이 형성된다. 철학사는 이러한 스펙트럼을 반복해서 보여 왔다.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책의 첫 장에,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이야기하려는 모든 것이 담겨있다. 그가 힘주어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패턴이다. 철학자로서, 예술사가로서의 통찰이 패턴과 스펙트럼이라는 말 속에 담겨 있다. 나는 이제까지 어떤 책에서도 철학사를 이처럼 하나의 패턴 속에서 읽어낸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그것은 결코 간단한 작업이 아니거니와 어설픈 지식으로 꿰어낼 수 있는 주제 또한 아니다. 한 마디로 저자는 시작부터 세게 선포하는 것이다. "내가 그 동안 공부를 하다보니까, 이런 결론이 나왔어. 이건 명석판명한 사실이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잘 들어. 그리고 어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한번 해 봐."
책을 읽으면서 감탄하고 또 탄복했던 것은, 목차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안에 담겨 있는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의 내용들이 최소한의 문장들로 해결되고 있는 점이었다.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 번의 엇나감 없이, 잡설 없이, 첫 문장부터 본론으로 파고들어 명쾌하게 철학사를 훑어 나간다. 정말 에세이처럼, 한 자리에 앉아 가만히 머리속을 정리하면서 술술 써 내려간 글이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너무 논리적이어서 글이 딱딱하고 읽기 어렵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논리적인 글은 읽기 편하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는 글이 읽기 어려운 것이지, 충분히 아는 것을 정돈된 논리로 말하면 제 아무리 어려운 주제도 쉽게 읽힌다.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물론 그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지만, 저자는 그걸 해낸다. 놀라울 따름이다. 데이비드 흄에 대한 장에서는 그 논리의 전개가 너무 아름다워서 거의 눈물이 날 뻔했다.(과장이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유명론은 플라톤의 이데아, 즉 보편개념들을 한낱 '이름'으로 치부하는 인식론의 중요한 이름이다. 유명론자들은 개념의 실재성을 부정한다. <중략> 우리가 보편개념으로 알고 있는 이데아들은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사물을 쉽게 다루기 위한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인식상의 편의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철학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도 유명론이란 것은 조금 낯설었는데, 저자의 철학에서는 이 개념이 상당히 중요하다. 철학은 둘로 나뉜다. 관념이 실재한다. 아니다. 관념은 이름에 불과하다. 후자가 유명론을 대표한다. 그러한 사람들의 계보가 있다. 소피스트들 -> 로스켈리누스와 오컴 -> 로크와 버클리 등의 경험론자들 -> 비크겐슈타인 물론 관념론의 계보도 있다.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 ->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 데카르트 -> 칸트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거대한 흐름이 서로의 발목을 잡으며, 낮과 밤처럼 세계를 비춘다. 저자의 사고를 따라, 논리를 따라 그 과정을 살피는 것은 정말이지 흥미로운 일이었다.
독단이란 용어에 독선, 아집, 편협 등의 선입견을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독단은 도그마(Dogma)를 의미한다. 그것은 데카르트식 정의로는 철학의 최초의 전제- 명석하고 판명한 정신에 떠오르는-이고 흄의 정의로는 수와 양에 관한 지식과 직접적인 경험적 지식 이외의 모든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며, 칸트식 용어로는 정언명제를 말하는 것이다. '독단'을 이와 같이 정의할 때 모든 관념적 지식은 독단으로 이를 수밖에 없다. 우리의 감각경험 외에 어디에 독단이 아닌 지식이 있겠는가.
철학의 역사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존재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근대에 이르러 철학은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를 밝히는 과정이었고 현대에 와서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언어뿐이다.'라는 아직까지 깨지지 않은 최종의 독단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것이 부제에서 인식론적 해명이라고 밝힌 큰 줄거리일 것이다. 그는 과거의 시대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그것이 어떠한 철학 속에서 가능했던 것인지 인식론적 줄기 아래 '해명'한다. 철학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비추고 있고, 그 빛살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의 패턴을 읽어낸다. 책을 덮으면서 나는 저자의 이러한 주장 역시도 하나의 독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처럼, 독단이 아닌 지식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독단은 또 다른 독단에 의해 격파되기 전에는 진리로서 군림한다. 이 책속의 독단 역시도 언젠가 자신만의 논리로 단련된 용감무모한 누군가에 의해 도전받게 될 것이다. 그 용자는 반드시, 이 책이 품고 있는 요새처럼 굳건한 논리를 파고들 수 있을 만큼 날카롭고 치밀해야 할 것이다.
간혹 어려운 용어들이 나오긴 하지만 저자가 충분히 설명하고 있고 또 네이버에 검색도 해가며 읽었기에 반나절 만에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다. 이 책 한 권만 여러 번 독파해도 서양 철학사의 큰 흐름을 읽는데 문제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주어진 한 점의 정교한 지도 같다. 과거의 훌륭한 지도 제작자들이 사명을 다해 한 걸음 한 걸음 옮겨가며 만들어낸 지도처럼, 한 천재적인 학자가 오랜 세월에 걸친 탐구로써 밝혀낸 철학적 통찰을 한 권의 책으로 만난 것이다. 저자에게 감사했다. 읽을수록 빚을 지는 기분이었다. 누구도 갚으라고 독촉하지 않는 빚 말이다. 프롤로그에 쓰여 있는 말처럼 ‘존재론적 해명’에 대한 책도 빨리 만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책속에 단서처럼 던져진 몇몇 예술사적, 문화사적 고찰들을 좀 더 상세하게 다른 저작을 통해서 만나고 싶다. 조금만 더 자주 책을 내주셨으면. 아, 이 갈증을 몰아내 주셨으면. 하고 그저 바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