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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 사회 김민하 현암사/2016.12.20. sanbaram 세계는 미국대통령 당선인 도널드 트럼프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으며, 우리는 최순실 게이트로 혼돈에 빠져있다. 힐러리 클린턴이 우세할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선거가 막바지에서 뒤집혀진 이유가 바로 기성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말만 앞세우고 현실적으로 문제 해결을 하지 못하는데 대한 실망이 기성정치인에 대한 불신과 새로운 정치인에 대한 기대 때문이라고 한다. 비록 트럼프가 막말과 자기의 말을 번복하는 뻔뻔함을 갖고 있지만 자기의 생각을 숨기지 않은 것이 신뢰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정치적 냉소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냉소사회> 저자는 말한다. 최순실 게이트 또한 우리 정치인들의 전형적인 사고방식과 문제 해결 방식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진단하고 있다. 주말마다 열린 촛불집회 또한 냉소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시각이다. <냉소사회>는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열등감,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현상들, 냉소주의로 전화하는 열등감, 냉소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정치, 탈출구는 무엇인가. 등의 5가지 주제로 냉소사회를 설명하고 있다. <냉소사회>의 저자는 온라인상에서 ‘이상한 모자’라는 필명으로 알려졌으며 홈페이지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를 운영 하고 있다. 2002년 민주노동당 입당하여 2008년 탈당하고 진보신당에 입당한 뒤 2011-2012년 진보신당 기획실 국장으로 일했다. 현재 <미디어스>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을 지었고 여러 권의 공저자로 참여하고 있다. ‘세상 오만 것들에 다 속고 있다’는 인식은 결국 냉소주의로 부른다. 세상이 다 나를 속이는데 나라고 남을 속이면 안 된다는 법이 어디 있는가? 그래서 냉소주의자의 어법은 ‘진정한 무엇은 있다’와 ‘진정한 무엇은 없다’사이를 불규칙하게 오고 간다고 저자는 서문에서 말한다. “냉소주의와 소비주의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열등감’의 문제를 만나게 된다는 점 역시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p.14)”고 말하며 열등감이 냉소사회의 근본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보통 온라인 게임에서 준비된 콘텐츠의 심층적 부분까지 모두 즐기기 위해서는 효율적으로 키워진 캐릭터가 필요하다. 다양한 기능을 가진 잡캐는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는 게임 시스템에서 연유한다. 그런데 학문에서 통섭이니 융합이니 하는 것을 주장하는 교수들을 전문성이 떨어지는 잡캐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의 아이들은 애초에 초, 중등 교육에서 엘리트 코스에 합류하지 못한 경우 자기가 무슨 큰일을 하는 사람이 될 거라는 희망을 자연스럽게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학벌주의가 유치원 수준까지 심화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이들이 ‘효율성’에 대한 직관을 일찍부터 얻을 수 있도록 이 사회가 배려(?)해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p.56)”고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우리 교육현실을 비평한다. 요즘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유행처럼 진행된다. 음악뿐 아니라, 춤과 요리를 비롯한 여러 방면에서 각종 이벤트 형식을 빌어 행해지고 있다. “시청자가 오디션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여러 유형의 출연자 중 몇몇을 골라 감정을 이입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청자들은 자신과 유사한 처지의 출연자들이 겪는 성공에 기뻐하고 실패에 눈물 흘리면서 이 프로그램을 즐긴다.(p.139)” 대다수 사람들은 매우 주관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열등감을 해소하려고 한다. 즉, 자신이 열등감을 느끼는 이유는 자신이 가진 실제 능력보다 부당하게 저평가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 잘못한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냉소주의의 일종이다. 오늘날 언론에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인 ‘기레기’라 불리며 제대로 된 사실을 왜곡하고 자기 이득을 챙기는 대표적 존재처럼 치부되고 있다. “인터넷의 시대에 특히 이런 식의 개념은 더욱 강하게 확산됐다. 이제는 잘 훈련된 기자들이 만든 일간지의 기사 내용보다 SNS에서 전달되는 ‘일반인’의 정제되지 않은 정보가 더욱 믿을 만한 것으로 여겨진다.(p.161)” 이와 함께 갑질 논란이 사회의 저변에 깔려있다. “조현아 전 부사장의 로열패밀리라는 지위, ‘라면 상무’의 대기업 상무라는 직책과 비즈니스석 이용, 백화점 모녀의 600-700만 원에 이르는 소비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갑질의 전제로 작용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p.175)” 이런 형태의 갑질 논란 공통점은 ‘개념 없는 소비자’이며 이들의 행위는 앞에서 살펴본 바 있는 과시적 소비에 해당하는 것이다. 위의 사건들은 개념 없는 ‘소비자’가 서비스 ‘노동자’와 대립해 우위를 점하고 감정적으로 착취한 사례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의 노동계급으로 묶일 수 있었던 피지배 대중이 소비자와 서비스 노동자로 양분돼 서로 대립하게 됐다는 것이다. 정치인이 신뢰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일반대중 사이에 정치적 냉소주의의 논리가 너무 강력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적 냉소주의의 가장 흔한 예는 정치인이 겉과 속이 다르며, 겉으로는 공적 임무를 주장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사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2012년 대선의 결과로 등장한 박근혜 정권은 정치적 냉소주의가 정치를 집어삼켰을 때 벌어지는 파국이 어떤 것인지를 너무나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정치적 냉소는 박근혜정권의 시작과 끝을 모두 지배했고, 정치는 그 결과 자기 이익을 주장하고 손해에 항의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 전락했다.(p.303)” 박근혜 정권이 습관적으로 동원한 어휘와 논리의 형태를 여기서 상기하면 ‘최순실 게이트’란 결국 사적 이익을 위해 공적 명분을 활용한 사례의 대표 격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일가가 애국, 진실한 정치, 창조경제, 문화융성 등의 명분을 동원하여 자기 배를 불리는 데에만 골몰 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은 박근혜 정권을 ‘불매’하기로 결심했다. 촛불집회는 바로 이의 표현이다. “냉소주의적 현실 인식 속에서 북한붕괴론은 최순실 일가가 미국의 방위산업체 록히드 마틴 사와 결탁해 그들이 만든 무기를 수입하도록 하고 리베이트를 받는 등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개성공단 폐쇄 등 대북 강경책은 오로지 이를 위해 기만적으로 추진됐다. 이런 인식 속에서는 북한 붕괴론 자체가 아니라 북한붕괴론이 이용당한 맥락만이 문제다. 북한붕괴론 자체에 대한 평가는 자연스럽게 유예된다.(p.315)” 지금 문제는 좌클릭이냐 중도냐, 또는 급진이냐 온건이냐의 차원에 있지 않다. 어떻게 냉소주의를 이길 것인가, 또 어떻게 소비의 대상에 머무르고 있는 정치를 구원해낼 것인가, 이를 위해서 전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열등감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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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 사회 김민하 현암사/2016.12.20.
세계는 미국대통령 당선인 도널드 트럼프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으며, 우리는 최순실 게이트로 혼돈에 빠져있다. 힐러리 클린턴이 우세할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선거가 막바지에서 뒤집혀진 이유가 바로 기성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말만 앞세우고 현실적으로 문제 해결을 하지 못하는데 대한 실망이 기성정치인에 대한 불신과 새로운 정치인에 대한 기대 때문이라고 한다. 비록 트럼프가 막말과 자기의 말을 번복하는 뻔뻔함을 갖고 있지만 자기의 생각을 숨기지 않은 것이 신뢰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정치적 냉소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냉소사회> 저자는 말한다. 최순실 게이트 또한 우리 정치인들의 전형적인 사고방식과 문제 해결 방식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진단하고 있다. 주말마다 열린 촛불집회 또한 냉소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시각이다.
<냉소사회>는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열등감,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현상들, 냉소주의로 전화하는 열등감, 냉소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정치, 탈출구는 무엇인가. 등의 5가지 주제로 냉소사회를 설명하고 있다. <냉소사회>의 저자는 온라인상에서 ‘이상한 모자’라는 필명으로 알려졌으며 홈페이지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를 운영 하고 있다. 2002년 민주노동당 입당하여 2008년 탈당하고 진보신당에 입당한 뒤 2011-2012년 진보신당 기획실 국장으로 일했다. 현재 <미디어스>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돼지의 왕>을 지었고 여러 권의 공저자로 참여하고 있다.
‘세상 오만 것들에 다 속고 있다’는 인식은 결국 냉소주의로 부른다. 세상이 다 나를 속이는데 나라고 남을 속이면 안 된다는 법이 어디 있는가? 그래서 냉소주의자의 어법은 ‘진정한 무엇은 있다’와 ‘진정한 무엇은 없다’사이를 불규칙하게 오고 간다고 저자는 서문에서 말한다. “냉소주의와 소비주의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열등감’의 문제를 만나게 된다는 점 역시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p.14)”고 말하며 열등감이 냉소사회의 근본 원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보통 온라인 게임에서 준비된 콘텐츠의 심층적 부분까지 모두 즐기기 위해서는 효율적으로 키워진 캐릭터가 필요하다. 다양한 기능을 가진 잡캐는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는 게임 시스템에서 연유한다. 그런데 학문에서 통섭이니 융합이니 하는 것을 주장하는 교수들을 전문성이 떨어지는 잡캐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의 아이들은 애초에 초, 중등 교육에서 엘리트 코스에 합류하지 못한 경우 자기가 무슨 큰일을 하는 사람이 될 거라는 희망을 자연스럽게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학벌주의가 유치원 수준까지 심화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이들이 ‘효율성’에 대한 직관을 일찍부터 얻을 수 있도록 이 사회가 배려(?)해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p.56)”고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우리 교육현실을 비평한다.
요즘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유행처럼 진행된다. 음악뿐 아니라, 춤과 요리를 비롯한 여러 방면에서 각종 이벤트 형식을 빌어 행해지고 있다. “시청자가 오디션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여러 유형의 출연자 중 몇몇을 골라 감정을 이입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청자들은 자신과 유사한 처지의 출연자들이 겪는 성공에 기뻐하고 실패에 눈물 흘리면서 이 프로그램을 즐긴다.(p.139)” 대다수 사람들은 매우 주관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열등감을 해소하려고 한다. 즉, 자신이 열등감을 느끼는 이유는 자신이 가진 실제 능력보다 부당하게 저평가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 잘못한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냉소주의의 일종이다.
오늘날 언론에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인 ‘기레기’라 불리며 제대로 된 사실을 왜곡하고 자기 이득을 챙기는 대표적 존재처럼 치부되고 있다. “인터넷의 시대에 특히 이런 식의 개념은 더욱 강하게 확산됐다. 이제는 잘 훈련된 기자들이 만든 일간지의 기사 내용보다 SNS에서 전달되는 ‘일반인’의 정제되지 않은 정보가 더욱 믿을 만한 것으로 여겨진다.(p.161)” 이와 함께 갑질 논란이 사회의 저변에 깔려있다. “조현아 전 부사장의 로열패밀리라는 지위, ‘라면 상무’의 대기업 상무라는 직책과 비즈니스석 이용, 백화점 모녀의 600-700만 원에 이르는 소비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갑질의 전제로 작용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p.175)” 이런 형태의 갑질 논란 공통점은 ‘개념 없는 소비자’이며 이들의 행위는 앞에서 살펴본 바 있는 과시적 소비에 해당하는 것이다. 위의 사건들은 개념 없는 ‘소비자’가 서비스 ‘노동자’와 대립해 우위를 점하고 감정적으로 착취한 사례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의 노동계급으로 묶일 수 있었던 피지배 대중이 소비자와 서비스 노동자로 양분돼 서로 대립하게 됐다는 것이다.
정치인이 신뢰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일반대중 사이에 정치적 냉소주의의 논리가 너무 강력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적 냉소주의의 가장 흔한 예는 정치인이 겉과 속이 다르며, 겉으로는 공적 임무를 주장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사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2012년 대선의 결과로 등장한 박근혜 정권은 정치적 냉소주의가 정치를 집어삼켰을 때 벌어지는 파국이 어떤 것인지를 너무나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정치적 냉소는 박근혜정권의 시작과 끝을 모두 지배했고, 정치는 그 결과 자기 이익을 주장하고 손해에 항의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 전락했다.(p.303)” 박근혜 정권이 습관적으로 동원한 어휘와 논리의 형태를 여기서 상기하면 ‘최순실 게이트’란 결국 사적 이익을 위해 공적 명분을 활용한 사례의 대표 격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일가가 애국, 진실한 정치, 창조경제, 문화융성 등의 명분을 동원하여 자기 배를 불리는 데에만 골몰 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은 박근혜 정권을 ‘불매’하기로 결심했다. 촛불집회는 바로 이의 표현이다.
“냉소주의적 현실 인식 속에서 북한붕괴론은 최순실 일가가 미국의 방위산업체 록히드 마틴 사와 결탁해 그들이 만든 무기를 수입하도록 하고 리베이트를 받는 등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개성공단 폐쇄 등 대북 강경책은 오로지 이를 위해 기만적으로 추진됐다. 이런 인식 속에서는 북한 붕괴론 자체가 아니라 북한붕괴론이 이용당한 맥락만이 문제다. 북한붕괴론 자체에 대한 평가는 자연스럽게 유예된다.(p.315)” 지금 문제는 좌클릭이냐 중도냐, 또는 급진이냐 온건이냐의 차원에 있지 않다. 어떻게 냉소주의를 이길 것인가, 또 어떻게 소비의 대상에 머무르고 있는 정치를 구원해낼 것인가, 이를 위해서 전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열등감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저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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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아들면 제일 먼저 표지의 뒤쪽을 본다. 거기에는 저자의 약력이 쓰여있다. 인문서적이라면 저자가 SKY정도는 되어야 안심이 되고, 소설이라면 작가가 유명한 상을 수상했거나 히트작이 있어야 인정할 준비가 된다. 거기에 별 내용이 안 쓰여 있으면 별볼일 없는 작가라고 생각하고 일단은 의심하는 맘이 든다. 저자는 이런 것이 사람들이 이제 어떤 것에도 '속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무장하고 있는 현상이라고 한다. 이러한 생각은 바로 '냉소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회적 차별이나 자본으로부터 소외는 결국 현대인이 스스로의 잘못이 아닌 것으로 인해 지위가 격하되었다고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그 시작에서 '열등감'이라는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하게 진화한 감정을 만나게 된다. 열등감을 이 책의 첫 장에 넣은 이유는 바로 열등의식이 냉소사회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가깝게는 친구에서부터 엄친아, 멀게는 티브이 속에 나오는 동갑내기의 성공에까지 우리는 모든 것을 비교하고 스스로의 지위를 확인한 후 좌절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취하는 방법은 소비를 하는 것이다. 명품을 사는 부류는 진짜 상류층이거나 상류층처럼 보이고 싶은 두 가지이다. 명품을 살 수 없는 부류는 어떨까. 그들이라고 해서 남들보다 나아지려는 욕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달성하기는 매우 어려운 여건이다. 그들은 명품 소비 같은 허황된 가치가 아닌 진짜 필요한 곳에 현명하게 소비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우월하게 하는 방법으로 우회한다. 우리가 대화를 할 때 내가 잘 아는 분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신나지만, 잘 모르는 분야가 나오면 다소 기가 죽기 마련이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든 내가 잘 아는 소재로 이야기를 끌어오려고 한다. 하지만 과정이 자연스럽지 못하면 오히려 상대의 말을 끊고 자기쪽으로 대화를 유도하려는 인식을 주게 되어 반감을 사게 된다. 열등감을 해소하는 과정은 소비의 문제를 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것에서, 합리적이고 현명하게 소비하는 것의 가치를 강조하는 쪽으로 새로운 담론을 형성한다. 소비에서의 열등의식이 문제를 일으키는 지점은 소비에서의 결핍을 최소 비용의 최대 효과라는 '효율성'의 측면에서 접근하려 할 때이다. 돈이 많은 사람은 어떤 물건을 사더라도 가장 비싼 것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반면에 돈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면 비슷한 물건도 수십가지 비교하면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을 선택한다. '가성비'라는 단어는 이러한 맥락에서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성비는 엄밀히 따지면 돈의 결핍을 방대한 자료를 통한 이성적 판단으로 치환하는 개념이다. 나는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적절하고 현명하게 사용했다는 의미로 어필하지만, 말했다시피 엄청난 부자는 그런 고민 자체를 하지 않는다. 이렇게 효율성의 개념이 등장하면서 소비 뿐 아니라 사회전체적으로 어떻게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지에 대한 관심도가 커졌다. 저자는 세월호야말로 이러한 효율성이 가져온 최악의 비극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사고가 '사람 목숨에 관한 문제만 빼면 재난이 체제의 일부로서 효율성의 이름 아래 무리 없이 소화되고 있다는 현실(p.80)' 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한다. 당연히 이는 현 박근혜 정권의 추한 모습으로 연결된다. 이 정권의 대부분의 공약은 어차피 불가능 했던 것이라며 좌초되었고, 세월호 또한 이게 무슨 나의 잘못이냐는 대통령의 인식으로 사고 후 1000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책임지는 사람은 나오지 않고 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에게 무조건 배신자나 빨갱이의 낙인을 씌우는 것은 냉소주의의 단면을 잘 드러내 준다. 저자는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 냉소주의가 어떻 결과를 냈는지 네 개의 장에서 보여주고 마지막 장에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지 모색해 본다. 냉소가 사회의 각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점에 대해 다소 비약된 면도 없지 않지만, 어디부터 잘못됐을까를 생각할 때 한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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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을 향한 냉소주의적 관점의 핵심은 박근혜정권의 모든 실정이 바로 이 자격 없는 ‘강남 아주머니’에 의해 아무런 공적 맥락이 없이 이루어졌다고 믿는 것이다. 이 ‘강남 아주머니’는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기 위한 어떤 의지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오로지 자신과 딸의 성공만을 위해 국정을 농단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러한 국정 농단 행위의 적극적인 협력자였는데, 냉소주의의 관점에서 그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권력을 손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협력자로서의 역할을 떠맡은 이유는 최순실 일가가 만든 사이비 종교에 빠졌기 때문이거나 미르 재단 K스포츠 재단을 통해 최순실 일가가 빼돌린 이익을 공유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p.312 박근혜 정권이 습관적으로 동원한 어휘와 논리의 형태를 여기서 상기하면 ‘최순실 게이트’란 결국 사적 이익을 위해 공적 명분을 활용한 사례의 대표 격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일가가 애국, 진실한 정치, 창조경제, 문화융성 등의 번지르르한 명분을 동원하여 자기 배를 불리는 데에만 골몰 했다는 것이다. 즉, 박근혜 정권은 그럴듯한 명분으로 국민을 속이고 실제로는 사익을 추구했다. 이 사실이 이렇게 어이없는 방식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국민은 박근혜 정권을 ‘불매’하기로 결심했다. 촛불집회는 바로 이의 표현이다. p.312 냉소주의적 현실 인식 속에서 북한붕괴론은 최순실 일가가 미국의 방위산업체 록히드 마틴 사와 결탁해 그들이 만든 무기를 수입하도록 하고 리베이트를 받는 등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개성공단 폐쇄 등 대북 강경책은 오로지 이를 위해 기만적으로 추진됐다. 이런 인식 속에서는 북한 붕괴론 자체가 아니라 북한붕괴론이 이용당한 맥락만이 문제다. 북한붕괴론 자체에 대한 평가는 자연스럽게 유예된다. p.315 지금 문제는 좌클릭이냐 중도냐, 또는 급진이냐 온건이냐의 차원에 있지 않다. 어떻게 냉소주의를 이길 것인가, 또 어떻게 소비의 대상에 머무르고 있는 정치를 구원해낼 것인가, 이를 위해서 전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열등감들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우리는 이제 정치의 근본 문제들과 대결해야 하는 운명에 놓인 것이다. 이게 오늘날 우리가 열등감과 냉소주의의 문제를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p.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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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은 신청글을 올려 서평단에 뽑혔다. 결과적으로 '이 좋은 책이 지금 나에게 와서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책을 읽은 후 엄기호 샘 신작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를 읽기 시작했고 북토크에도 참석했는데 표현만 다르다 뿐이지 맥락 상 비슷한 내용이 많아 흥미로웠다. 그리고 이 내용을 구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영화 "잉투기"도 시의적절하게 적용하며 재미있게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강추다. 지금 꼭 읽어야할 만큼 시의적절하며 공감가는 책이다. 심지어 구체적인 사례와 비유를 잘 나열하고 있어 빵빵 터지기까지 한다. 지식인처럼 젠체 하지 않고 툭툭 제시하는 사례들을 너무 잘 이해할 수 있는 점이 신기해서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1982년생 우리 또래다. 우리 세대가 이런 좋은 책으로 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정도 나이가 되었나 싶어 괜히 내가 다 뿌듯했다. 우리 사회에서 잉여, 오덕 문화와 결부되어 열등감, 냉소주의, 소비주의가 어떻게 자리잡았는지 과정을 설명하면서 디시인사이드를 둘러싼 사건을 풀어주는데 정말 적용이 잘 되었다. 책을 읽은 후 우연히 쟁여두었던 영화 "잉투기"를 보는데 책을 그대로 영화로 다시 보는 듯했다. 책의 흐름이 궁금하면 차례를 참고하라. 차례에서부터 이미 '잡캐', '쿨게이'와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를 가감 없이 차용하고 있다.
그런데 책 내용과 서술이 가볍기만 하냐면 그렇지도 않다. 문체 자체는 학술 서적과 겨루어도 뒤쳐지지 않을 듯 논리적이어서 신뢰가 생기고 납득이 간다. 이는 아마 저자가 노동운동 업계에서 당원(정책위원)이자 기자로 글밥을 먹으며 정치 평론에 있어 잔뼈가 굵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듯하다. 글로 배워 '그렇다고 하더라'는 주장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듣고 고민하고, 실패할 때마다 좌절하고 한숨 쉬고 눈물 흘리며 자신의 몸으로 직접 배워온 경험들을 바탕으로 쓴 책이기 때문일 테다. 아마도 저자 자신이 오랜 공부를 통해 배워온 내용을 깊이 있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공존하고 있는 우리가 보편적 경험으로 읽어낼 수 있는 지점도 있는데 이를테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까지 수 십 년 전부터 우리나라 경제 분야에서, 혹은 박근혜 국정농단 사태가 벌어지기까지 우리나라 정치 분야에서 어떤 일들이(부패와 속임들이) 누적되어 왔는지를 '팩트'를 바탕으로 제시하고 있다.
* 속았다, 속지말자/ 진정한 정치는 없다, 있다?/ 열등의식+냉소주의+소비주의 디시인사이드 갤러나 리니지 게이머들, 일베들이 서로에게 '혐오감'을 담은 악플을 달기 시작한 이유는 '속았음'에 대한 분노였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일베 활동을 하는 청년들 중에는 경제적으로 사회가 자신을 속이고 있기 때문에 스펙을 쌓았는데도 그에 상응하는 일자리를 얻을 수 없음에 분노하고 있을 수 있다. 백화점 등 서비스 업계에 만연해진 갑질은 자기 안의 열등감을 소비라는 형태로 만회해보려는 시도로 읽을 수도 있다. 수 십년 간 투입한 노력에 대한 산출이 정직하게 나오지 않는 경험이 누적되어 우리는 냉소하게 되었다. 사실상 우리 삶의 모든 분야를 움직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정치'가 우리를 속이고 있다는 결론에 따라 '진정한 정치'는 없다며 정치 가능성 자체에 대해 냉소하게 되었다.
* 거대 담론(이데올로기 혹은 종교)이라는 준거를 잃어버린 시대에 정치하는 방법 내 공부를 위해 옮겨 적어두고 싶은 부분이 엄청 많지만 한 부분만 옮겨온다. 정치인이 대신 정치해주는 방식에서 벗어나 평범한 소시민인 우리가 정치에 참여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데 공감한다.
이 책이 가진 매력은 위에 나열한 지점에서 그치지 않는다. 국정농단이 밝혀지고 있고 어쩌면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를 극복한 시민들이 주말마다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뛰쳐나오는 지금은 '진정한 정치'를 되찾을 수 있는 결정적 시기일 수 있다. 저자는 우리가 우왕좌왕하다가 죽쒀서 개주지 않고, 이 사태의 의미를 잘 읽어내고 대선 국면에서 어떤 기획과 전략으로 속지 않고도 시민 스스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을지 방향성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책 전반부에 차곡차곡 납득시켰던 우리 사회에 만연한 병폐 열등감, 냉소주의, 소비주의와 화해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성찰하고 직시해야한다. 정치 기득권들이 그런 심리를 이용하고 있다면 속지 말고 속아주지도 말아야 한다. 교육계에서 세밀한(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고 왜곡된) '통치'가 교육 본질 훼손과 혁신 시도 저해에 미치는 악영향에 관심이 있어서 푸코의 통치성 이론을 바탕으로 개인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중이라, 저자가 제대로된 '통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격하게 동의했다. 교육이 추구해야할 본질, 저자의 표현 대로라면 진정한 정치를 위한 당위와 명분이 있음을 믿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계속 냉소할 수밖에 없을 테다. 순진하고 낭만적이어보이더라도 추구해야할 방향이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그를 이루기 위한 현실적이면서도 실현 가능한 통치 기획과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1인이다.
* 진정한 정치를 되찾고 구원을 이룰 수 있을까?? 최근 "냉소사회"와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를 거의 같은 시기에 읽어나가면서 두 저자 간 서술 방식은 매우 다른데도 문제 원인에 대한 진단이 비슷한 지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분야에 대한 냉소가 만연해진 이유는 냉전이 끝나고 거대 담론을 버린?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붙들 기준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난 주에 '기독교세계관학교'에서 비슷한 맥락을 읽을 수 있었다. 유한한 인간 세계에서 고통은 필연적이고 모든 인간은 고통을 줄이기를 원한다. 이 고통을 없애는 일을 구원이라고 생각해보자. 다소 시대에 뒤떨어져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유일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아직 '구원'을 말할 수 있다. 요즘은 일상에서도 구원을 얻기 위해 성경이라는 준거를 사용하는 흐름이 있다.
그런데 일반 사회나 정치에서는 유사종교적으로 작동했던 이념을 잃어버렸다(지난 여름 맑시즘2016에 참석하면서 마르크스가 제시한 이념적 언어가 종교적 언어와 매우 비슷하게 들렸다). 냉소라는 양비론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된 이유는 당위와 명분을 취할 준거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구 사회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비슷하게 작동하고 있는 가치는 '인간 존엄성'이나 '자유', '평등'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하도 속다보니 무기력해져서 그러한 (거의) 절대 가치마저 믿지 않고 냉소하게 되었다. 그나마 믿을 만한 건 실물 경제(돈)이었는데 2008년(우리나라는 1997년) 이후에는 그마저도 어려워졌다.
이런 사회 안에 살고 있는 자로서 나는 매우 냉소적이게도 조만간 '진정한 정치'를 되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빠지지 않게 하게 위해 여전히 내가 속한 분야와 내가 살고 있는 가까운 현실 세계 안에서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저자의 말처럼 투표보다는 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작은 교사 단체에서 교육정책 평가와 공약분석과 대안 제시 등 교육운동에 참여하고 있고, 힘도 발언권도 없는 평교사로서 학교에서 불합리한 일이 있을 때 피로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용기 내어 발언하려고 노력한다. 기성세대는 청년들이 sns에서 손가락 정치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지만 온라인, 오프라인(촛불 등)에서 힘을 보태야할 일이 있을 때 보태고 싶다. 무엇보다도 내 안의 열등감(-> 혐오), 냉소주의, 소비주의를 직시할 수 있는 눈을 갖기 위해 공부하고 싶다. 이 책은 그러한 맥락에서 공부하기에 너무 많은 도움이 된 책이다. 이 글을 보는 모든 이에게 지금 당장 일독을 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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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오만 것들에 다 속고 있다'는 인식은 결국 냉소주의로 부를 수 있을 거다. 냉소주의는 늘 자신과 타자에 대한 기만을 대동한다. 세상이 나를 속이는데 나라고 남을 속이면 안 된다는 말이 어디 있는가? 또, 내가 남을 속이는데 다시 내가 나를 속이면 안 된다는 법은 또 어디에 있나. 냉소주의 어법은 그래서 '진정한 무엇은 있다'와 '진정한 무엇은 없다' 사이를 불규칙하게 오고 간다. - '책머리에' 중에서
냉소주의는 우리 사회를 어떻게 무너뜨리고 있나?
현재 한국 사회는 냉소주의라는 함정에 빠져있다. 냉소 반응으로 인해 진보 정치는 외면받았고, 냉소적 정서를 바탕으로 움직인 권력은 정치적 리스크를 줄이는 데에만 급급해 무능과 실패를 반복했다. 지금도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 역시 이런 정치적 배경에서 탄생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무한경쟁 체제 속에서 남들과 비교되며 끝없이 열등감을 강요받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러한 열등감은 일상생활과 사회, 정치적 영역에서 다양한 형태의 냉소주의로 표출된다. 이 책은 매체 비평지 <미디어스> 기자이자 사회평론가인 김민하가 우리들의 일상에서부터 정치적 상황까지 다양한 문제들을 '냉소주의'라는 관점에서 총체적 난국에 빠진 한국 사회와 정치 상황의 원인을 분석한다.
주요한 사안들에 대한 '판단 중지' 태도, 손해 보지 않겠다는 효율성의 신화,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한 정치 등은 냉소주의의 대표적 모습들이다. 이에 책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냉소주의는 왜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낳는지 여러 사례를 통해 진단하면서, 나아가 열등감, 냉소주의, 소비주의와의 화해를 통해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열등감 폭발
인터넷상에서 자주 쓰이는 은어로 '열폭'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열등감 폭발'의 줄임말이다. 하지만 본래 의미보다는 '화가 많이 나는 상태'를 이렇게 오용誤用한다. 왜 우리 사회는 이런 말이 유행하게 되었을까? 이는 무한경쟁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열등감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국가, 어느 사회든 사람들은 열등감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 잘 생겼고,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 날씬하며,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하면서 그들보다 더 나은 점을 찾느라 여념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더 나은 게 없을 때는 그 상대를 '재수없다'고 생각한다. 상대의 모든 것을 꼬투리 잡는 일련의 행위들이 바로 '열등감 폭발'인 것이다.
세월호의 참사 발발 후 선장과 선원은 승객의 구조보다는 어디엔가 전화 통화를 하며 시간 끌기에만 급급했다. 아마도 회사측의 손실을 최소화하고 보험금의 수령과 유가족의 배상 문제에서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려던 의도였을 것이다. 구조 당국도 신속하게 언딘 마린 인더스트리라는 구난업체가 구조 작업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후속 보험 처리를 무리 없이 조치하려던 시도였을 것이다.
글로벌 경제에서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체제적 열등감으로 인한 위기의식이 국제구난협회 정회원 자격을 가진 업체가 탄생하는 배경이 됐고, 자신감을 잃은 국가가 당연히 맡았어야 할 구조 작업을 시장에 떠넘기면서 사고 뒷수습에만 관심이 집중됐으며, 결국 '인명의 구조'는 뒷전이고 오직 돈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만 남게 된 것이다. 이는 바로 '효율성'만 강조된 일처리가 아니겠는가.
인터넷이 만든 현상
인터넷에서는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으며 또 그 모든 것이 평가의 대상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주체의 입장에서 남들의 모든 감정 표현을 언제든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를 다시 뒤집으면 애초에 인터넷을 통한 표현을 할 때에 남의 평가 대상이 되리라는 것을 미리 전제하고 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이 인터넷에서의 모든 활동이 자기 전시로 귀결되는 원리다.
이런 형태의 열등감을 해소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냉소'하는 것이다. 스스로 냉소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타인의 잘난 능력을 고의로 평가해주지 않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열광'하는 방식이다. 잘난 이의 우수한 능력을 적극 수용하면서 열광함과 동시에 못난 이들에게는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게이머 커뮤니티도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에 시사성 이슈에 관한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마다 게임을 잘하는 사람의 의견에 일부 사람들이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현상이 일어났다. 게임을 잘한다고 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제에도 뛰어난 것이 아닐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지자들은 긍정적으로 호응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게임 고수의 지지자들을 앞서 말한 부류로 나눈다면 '열광하는 자들'로 규정할 수 있을 텐데, 이 열광의 정체는 앞서 살펴본 열등감의 문법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능력'에 대한 환호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의견'이라는 것에 대한 냉소다. '게임 고수'와 한편이 되느냐 '사회적 의견'에 대한 생각의 차이를 따지느냐에서 전자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사회적 의견에 대한 열광하는 자들의 태도는 '판단 중지'라고 요약할 수 있다. 열광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문제에 대한 판단을 중지한 것이다.
가상공간에서의 '열등감'이 다뤄지는 방식을 한번 정리해보자. 첫째, 사람들은 가상공간에서 '자기 전시' 중심으로 한 활동을 통해 일상의 열등감을 극복한다. 둘째, 가상공간에서의 경쟁적 활동은 결국 이용자 간의 우열을 만들어내며 우위에 있는 이용자는 열광이나 냉소의 대상이 된다. 셋째, 열광의 대상이 된 사람은 능력주의적 프레임에 의해 인터넷 권력을 획득하는데, 이 권력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열광을 유지하기 위해 종종 핵심 문제에 대한 '판단 중지'를 선택한다. 넷째, 가상공간에서의 활동이 현실의 구체적 이득으로 연결되면 열광의 대상이었던 사람에 대한 질투가 커진다. 다섯째, SNS의 발달은 인터넷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어 앞의 현상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냉소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정치
선거전에서 진보 정당 몫의 표를 흡수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실제 제 1야당이 충분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급진적인 구호까지 내세우는 데 망설임이 없고, 이 때문에 중도층을 잃었다는 비판이 나오면 다시 거리낄 것 없이 중도적 태도로 복귀하는 데 한 점의 의심도 갖지 않는다. 정치 세력이 그들 스스로 주장하는 이념과 가치에 동의하는 더 많은 대중을 조직하기보다, 더 많은 대중이 원하는 쪽으로 자신의 존재 의의를 바꾸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
민생 문제라든가 국민의 진정한 뜻을 받들어 모신다는 것보다는 득표수라는 산술적 계산에만 휘둘리는 이런 정치 현상을 책의 저자는 '보따리장수'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오늘날의 정치인은 이념과 사상의 보따랄를 싸 들고 장이 서는 곳이면 그곳으로 이동해 거기에 맞는 상품을 펼쳐놓고 판매하는 장사치와 비슷한 처지가 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매번의 선거에서 진보냐 보수냐의 노선을 선택하는 게 아니다. 우파냐 아니냐, 보다 정확하게는 기득권이냐 아니냐의 단순한 선택을 강제당하는 것이다. 이런 선택은 재차 설명할 필요도 없이, '재구매 의사 있음' 또는 '재구매 의사 없음'이라는 효율적 소비주의의 형식에 지배당하고 있다. 유권자들은 더 이상 기존의 좌우관념에 따라 투표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과 효율성이 가장 우선시된다. 미국에서 트럼프의 당선도 결국 냉소주의가 반영된 결과로 보아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와 버니 샌더스의 등장은 단순한 극우와 극좌의 싸움으로만 묘사 할 수 없다. '백인 남성들의 분노'라는 설명도 상황을 모두 드러내기에는 부족하다. 오히려 이것은 기득권 정치에 냉소주의가 반응하는 두 가지 양상이 고스란히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양상은 명확히 분리된 독립된 정치 기획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더 큰 묶음으로서의 냉소주의에 좌우되며 '속아 넘어가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 '진정한 무엇은 없다'와 '진정한 무엇은 있다'의 사이를 오가는 대중의 현재를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문 243~244쪽)
저자는 냉소 사회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우선 냉소주의를 인정하고, 경쟁에서 지더라도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열등의식과 화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극복이 아닌 화해를 통해 정치적 냉소주의를 무력화할 때,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비로소 풀어낼 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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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연대와소통> 43호(2017년.3월), 노동사회교육원
책담(冊談)
‘냉소사회’와의 화해, 정치를 구출하자
《냉소사회》/김민하/현암사/2016년12월/15,000원
양솔규(편집위원장)
헌법재판소가 박근혜를 파면한 지 약 9일이 지났다. 돌이켜보면, 통진당 해산, 세월호 사건, 메르스 사태, 개성공단 철수, 사드 배치 등 얼마나 많은 시대착오적 행태와 무능력을 보아왔던가. 과거회귀를 넘어 공동체 사회와 국가의 통치능력을 붕괴시키는 정권의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짓으로 인해 위기는 증폭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 정부의 임기를 1년 단축시킨 것은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압도적 다수의 분노와 흔들림 없는 행동으로 사상 초유의 탄핵 인용을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동안 우리 사회에 넓고 깊게 드리워져 있던 ‘비관주의’의 장막이 전부 거둬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촛불항쟁의 자신감의 근거는 ‘조직되고 교육된 시민의 힘’에서 나오기보다는 ‘박근혜 정부의 비상식’에 기인하던 바가 컸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이전을 돌이켜보면,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그리고 진보정당운동의 자신감은 그 어느 때보다 떨어져 있었다.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할 거라는 자괴감과 패배주의는 활동가들의 마음을 짓눌렀다.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 지 이틀이 지나 한진중공업 최강서 열사가 유서를 쓰고 자결했다. 그리고 세월호 사건은 아이들을 우리 사회가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더불어 앞으로도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진상을 규명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자괴감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민중총궐기 과정에서 백남기 농민이 숨졌다. 저자 김민하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등 진보정당과 덤프연대 등 노조에서도 활동했고, 지금은 <미디어스 medius>라는 인터넷 언론비평지에서 일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분석 대상이 고리타분(?)한 운동권만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넷 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현상들(오타쿠, ‘오유’와 ‘일베’ 사이트에서의 논쟁, 된장녀 담론과 인터넷 게임, PC통신, 트위터, 페이스북, SNS 분석, 아프리카 TV, 메갈리아, 오디션 프로그램, 한화 이글스 김성근 감독, 팟캐스트, 브렉시트, 미국 대선, 유럽 극우정치의 부상) 등 무궁무진하다. 어쨌든 저자가 보기에 개인이든, 체제 차원이든, On, Off를 떠나, 우리 사회를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열등감이다. 열등감을 해소하는 방식은 ①‘냉소’하는 방법 ②‘열광’하는 방법이다. 첫 번째는 ‘거기엔 아무 것도 없다’는 논리로 이어지며, 두 번째는 ‘진정한 무엇은 있다’로 이어진다. ‘냉담자’와 ‘열광적 신도’는 온라인 게임 커뮤니티 속에서도 생겨나고, PC통신 시절에도(귀여니 논쟁) 벌어졌으며, SNS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속에서 ‘깜’과 ‘실드’의 논리가 만들어진다. 모든 사람들은 ‘냉소’와 ‘열광’ 사이를 반복하며 핵심 쟁점(근본적 질문)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기도 한다. (지젝과 비포 등의 철학적 개념을 통해 저자가 설명하는 것은 어려우니 넘어가자.) 냉소의 두 가지 버전 이러한 ‘냉소’는 ‘소비자적 태도’를 강화한다. 소비에 기반한 사회에서 소비자의 지위는 그야말로 절대적인데, 예를 들어 문화 비평에 대해 소비자들은 ①‘비평이 잘못됐다고 지적’하거나 ②‘보고 즐기면 되지 뭐하러 비평을 하느냐’며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곤 비평가들을 잘난 척 하고 싶어 하는 족속들로 평가절하 해버린다. 이를 노동조합운동에 비유해서 설명해 보자면, ‘노선’과 ‘사회적 전망’을 가진 노동운동의 모색에 대해 조합원들은 ①단사 내 실용적인 노선이 맞다고 주장하거나 ②쓸데 없는 거 신경쓰지 말고,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익을 방어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이 사회에서 거대한 소비자군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중적 존재는 현실에서는 “노동계급으로서의 정체성” 보다는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으로 기득권에 대항하는 손쉬운 길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손쉬운 방법은 “안 산다”는 선언이다. 어쩌면 노동조합 내 선거, 또는 정치적 선거에서 많은 투표 행위들이 이러한 논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등감과 냉소주의에 빠진 진보정치, 진보정치를 냉소하는 대중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을 통해 진보적 원외 정치는 기득권 정치와 접촉면을 형성했다. 그리고 저자가 보기에 이 속에서 ‘진보적 원외 정치론자’였던 사람들은 기득권 정치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심리적 방어기제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보적 원외 정치에 대한 냉소’이다. 저자의 이러한 심리적 분석은 진보신당 창당에도 대입해 볼 수 있을 거 같다. 예를 들면 민주노동당 주류가 된 NL세력에 대한 좌파의 열등감은 ‘진정한 진보정치는 있다’ 노선으로 발현되었으며 진보신당 창당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어쨌든 저자가 보기에 기득권 정치에 대한 열등감에 대한 방어기제를 통해, ‘운동’이 아닌 ‘정치’를 해야 한다는 논리(부당하게 대립시키며)가 진보정당 내(정확히는 정의당 내)에서 득세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저자가 보기엔 ‘제공’이라기 보다는 ‘약탈’ 당한 것)한 것이 최장집, 박상훈 선생이다.(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현실에서는 막혀버렸다. 안철수가 제3당 노선을 빼앗았고, 노동자정치세력화와 사회운동정당론은 현실의 진보정당에서 부차화되었다.) 과거 독재 vs 민주 공식은 우파 vs 반우파로 대체되었다. 이를 진보정당은 우파 vs 좌파의 대결로 대체해야 했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사태는 진보 진영이 도덕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 그리고 진보 정치가 유권자를 속이고 이용한다는 점 등 진보정치의 부끄러운 민낯을 대중들에게 가감없이 드러내 보였고, 진보정치에 대한 냉소주의는 사회에 대한 냉소주의를 더욱 심화시켰다. 냉소주의와 화해하기 위하여 저자가 보기에 만연한 열등감과 냉소주의, 그에 기반한 소비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정치가 이와 싸우면서 스스로를 정립하고 작동시켜야 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요소(열등감, 냉소주의, 소비주의)는 ‘극복’이나 ‘파괴’가 아니라 ‘화해’해야 할 요소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개념과 완전히 결별할 수 없다는 말이다. 열등감을 극복하자는 말이 자칫 능력주의로 귀결될 수도 있고, ‘정신승리’로 귀결될 수도 있다. “열등감을 극복하려다 오히려 열등감을 만나는 악무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또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경쟁에 몰입하는 것 역시 답은 아니다. 경쟁에서 배제되면 ‘죽음’ 뿐이다. 이를 넘어서는 ‘기술’이 필요한데, 바로 이 기술이 한정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분배하기 위한 합의의 모색, 즉 ‘정치’이다. ‘정치’라는 수단을 통해 다른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냉소주의 때문에 망하는 것은 ‘당위’와 ‘명분’의 정치이다. 그런데, 대중들의 냉소주의는 실제로 ‘믿었던 존재로부터 배신당하거나 이용된 경험’으로 인해 갖게 된다. 그런 사람들에게 냉소주의의 한계를 말하는 것은 별 소용이 없다. 차라리 냉소주의자들에게 우리는 ‘지금 여기에는 없지만, 진정한 무엇은 어딘가에 분명히 있다’고 설득해야 한다. “냉소주의자의 의문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한 새로운 대답을 제출하고 쟁점을 제기해야” 하는 것이다. ‘실패의 퇴적’ 속에서 다시 ‘냉소의 논리를 재전유’하는 대답을 시작해야 한다. 소비주의는 모든 것을 자본주의의 구매 논리로 평가한다. 소비주의를 활용한 저항 방식은 결국 정치적 맥락은 제거하고 대안 모색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들에게는 판매자가 아닌 생산자의 존재를 고취시켜야 한다. 생산 과정을 단지 상품을 기준으로 상상하는 게 아니라 생산자를 기준으로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저자는 “노동자가 자신의 작업장을 벗어난 이후의 시간대에 노동자의 정체성을 상기하고 유지하도록 할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산별노조의 지역화, 민중의 집 운동, 협동조합운동이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을 파훼(破毁)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운동의 현실에서의 효과에 대해서는 평가가 다양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위의 운동들이 효과적으로 잘 작동했다고는 볼 수 없을 거 같다.) 정치를 복원하자 수많은 사례를 들며 종횡무진 하는 저자가 결국 얘기하고 싶은 것은 ‘체제’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를 예외적인 권력으로 볼수록 냉소주의의 수렁은 더욱 깊어진다. 삼성에 특혜를 줬던 것은 박근혜 정부뿐만이 아니라 역대 모든 정권이 그러했다. 우리는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당위’와 ‘명분’의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 그래야만 ‘정상화된 박근혜 정권을 다시 한번 반복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책 머리에 이 책에 대한 세 가지 반응을 예상했다. 첫째는 무관심, 둘째는 미미한 조롱과 조소, 마지막은 무난한 호평이다. 글쎄, 무관심했다면 서평 자체를 쓰지 않았을 테고, 조롱과 조소를 보내기엔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다. 특히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담론들에 대해 정통하지 않는 평자로서는, 매체비평뿐만 아니라 문화비평에도 한 수준하는 저자의 방대한 분석대상을 꿰는 담대함이 놀라울 뿐이다. 서평자가 《냉소사회》에 대해 ‘냉소’할 수는 없고, 마지막 선택지로는 ‘무난한 호평’만이 남았는데, 이는 더 많은 사람들이 독자의 대열로 들어선 후 책담(冊談)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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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냉소주의의 근저에는 열등감이 있다는 저자의 분석에서부터 시작한다. 책머리에 '세상 오만 것들에 다 속고 있다'는 인식, 이것을 냉소주의라 부르겠다고 선언한다. 실제 이러한 인식은 내면에 열등감이 존재한다는 방증이 될 수 있기에 공감이 간다. 소비의 행태와 블로그에 소위 '재방문 의사 있음'에 대한 것, 그리고 게임 캐릭터를 통한 잡캐 개념에 대한 것들에 대한 주장은 사례를 통한 단순 분석에 그치는 것이긴 하지만 나름의 공감대는 형성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냉소의 근저에는 열등감보다는 체념, 자괴감, 그리고 무관심한 척하는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터라 백퍼센트 공감은 사실 어려울 듯하다.
그리고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냉소주의 현상들을 제시하며, 열등감이 냉소주의로 전화하는 사례들을 소개하는데, 인터넷과 SNS 환경에서의 현상들 그리고 게임에서 나타나는 열등감 혹은 냉소주의에 대해서 말한다. 그런데, 사실을 말하면 열등감과 냉소주의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고, 어떤 사례에서는 구분되어 있던 것이 또 어떤 사례에서는 동일시 되어 있어 이해하는데 애로사항이 있었다. 또한 열등감에서 전화한 냉소주의를 이데올로기의 프레임에 가두어 놓고 분석하였는데, 냉소주의라는 것이 이념적 테두리를 벗어난 심리적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예견된 것이기는 하지만, 결국 이야기는 한국의 사회 정치상황으로 귀착된다. 사실 정치상황를 빼고 어디서 쉽사리 냉소주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냉소주의 매체의 최고봉인 '나는 꼼수다'를 사례로 든 것은 가장 현실적이면서 가장 공감가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고 '나꼼수'가 열등감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기에 책 전반부에서 말하는 '냉소주의 열등감 기저론(?)'에 한 번 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수렁에 빠진 한국 사회를 건져내기 위해서는 열등의식, 냉소주의, 소비주의라는 세가지 차원에서의 화해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극복이나 파괴가 아닌 '화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유는 우리 사회와 정치가 이 세가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어서라고 말한다. 온건론적 방법이긴 하지만 적극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다. 대립과 갈등으로 해결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광범위한 사회적 개혁만이 구체적인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여백에 메모를 했는데, 다시 들추어보면 대체로 생각의 차이에 관한 것이었다. 저자가 어떤 말을 하고자 하는지는 이해가 가고 공감이 간다. 그러나 개념적인 문제로 들어가보면 마냥 공감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가령 가장 중요한 개념인 '냉소주의'에 대한 정의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달라서 곤란을 겪었다. 그리고 냉소주의 주체와 객체(대상)에 관하여서도 사고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나는 정치라는 것이 냉소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저자는 그것을 주체로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냉소라는 것이 어떤 행위이지 개념만인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 모든 것이 냉소주의의 정의에 대한 사고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떠하든 사회를 바라보는 신선하고 깊이 있는 시각을 엿보게 되어서 무엇보다 좋은 읽기였고, 저자의 날카로운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었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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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의 발달 그 이후의 온,오프라인에서 벌어졌던 이런저런 사건들을 냉소주의의 시선으로 이야기한 책이다. 열등감의 발전이 냉소주의로 변화하고 점차 확대되어 냉소적인 사회가 되고 그렇게 곪고 문드러지다가 종국에는 수습할 수 없이 펑 하고 터져 버렸던 아픈 사건들. 그것이 냉소주의의 그늘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다. 다양한 상황의 열등감을 구체적으로 알기 쉽게 건드린 점이 책의 몰입을 더했다. 엄친아의 역습이나 동창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자격지심에 빠진 프리랜서 촬영 기사의 이야기...등등. 책장을 넘기며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는 어떤 열등감으로 삶을 살아가고 점점 메마른 감성으로 버티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내가 타인보다 급료도 적고 안정적이지 못한 직장에 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불안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서른 후반의 또래들은 연비도 좋고 외관도 출중한 멋진 차를 몰고 주말이며 캠핑이다 맛집이 있는 곳을 열심히 찾아 다니지만 나는 전세대출의 이자를 메꾸기에 급급한 삶을 살고 있다. 하루 세 끼 중 한 끼는 부득불 뜨거운 라면 국물을 후후 불어가며 삼각김밥의 김이 제대로 붙어서 나오길 빌며 조심스럽게 개봉한 후 우적우적 씹어 먹는다. 이렇게 한 끼를 채우면 터무니없이 맛없는 회사 구내 식당의 밥값을 절반 아낄 수 있고 그것이 쌓이면 한 달 교통비도 덩달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이러한 가난과 구차함이어떤 냉소를 낳았는지 생각해보니 무척 가슴이 아픈데, 그것은 내게 빵 한 조각 사주지 않는 동료에 대한 불신과 원망과 몰인정함이 아닐 까 싶다. 한 편으론 나 또한 주위 사람들에게 한턱 쏘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지만 다음 달 카드값을 생각해보면 주머니 속에 들어갔던 손이 힘없이 스르륵 올라오기 마련이다. 냉소주의로 일관된 냉소사회에 대한 타개책은 냉소주의의 '냉'이 찰 랭(冷)이니까 아무래도 따뜻한 뭔가가 답이 아닌가 싶다. 바로 '정'(情)말이다. 나의 잘남과 뽐내기가 타인에게 고통을 유발하진 않는 지 성숙한 차원에서 배려해 가며 자신을 드러내고 타인 또한 따뜻한 마음에서 우러나와 박수를 쳐 주는, 서로서로가 선의와 온정을 베풀면 우리 주위를 꽁꽁 얼게 만드는 냉소 사회는 따뜻한 햇살에 사르르 녹는 눈처럼 되어 버리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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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해 인터넷을 달군 뜨거운 이슈를 보면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네요. 갑과 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소위 '갑질' 사건들, 강남역 인근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 이후 더욱 본격화된 남혐 / 여혐 논란,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건이 밝혀지면서 박근혜의 하야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쟁 등 과연 이 나라가 살만한 나라인지, 언제부터 이렇게 문제가 많아졌는지 회의가 드네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건에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하다가 너무 많아 더이상 어찌할 수 없는 수준이 되면 방관자로 돌아서면서 우리는 원래 이렇다고 냉소적이 되는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를 '헬조선' 이라고 스스럼 없이 부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네요. '냉소사회' 는 우리사회가 언제부터 어떻게 왜 냉소적이 되었는지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최근 십여년 동안 있었던 사건들을 예로 들면서 설명하고 있어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고, 그동안 우리에게 영향을 미쳤던 큰 사건들에 대해서도 되돌아 볼 수 있었네요. 책에서는 사람들이 냉소적이 되는 이유로 열등감을 꼽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릴때부터 끝없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되면서 자랍니다. 실체가 있는지도 모르는 가상의 엄마 친구 아들은 모든 것을 갖추고 살아가는데 비해서 나는 그렇지 않고, 동창회에 나가보면 예전에는 나보다 공부를 못했지만 지금은 훨씬 더 잘사는 것을 보며 열등감을 느낍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그렇게 느끼는 것 같네요. 인터넷이 도입 이후 우리 삶도 크게 바뀌었는데 그전에는 PC 통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완벽하게 익명성이 보장되거나 각종 글이 쏟아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집 안에서도 각자 휴대폰을 보면서 인터넷을 할 정도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접속할 수 있으며 누구나 손쉽게 글을 올릴 수 있네요. 이렇다보니 인터넷을 통해 성공한 사람들도 나오게 되는데 역시 자신과는 별로 다를 것도 없는데 저 사람은 왜 성공했는지 열등감을 느끼면서 사회에 책임을 돌리네요. 또 냉소는 합리적인 토론을 방해합니다. 정치적으로 서로 다른 의견이 있으면 대화와 토론을 통해 생각의 차이를 좁혀야 하는데 한국 사회에서는 나는 옳고 상대방은 틀렸으며, 상대방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말하네요. 그러면서 지지하는 정치인이나 당이 다르면 인격적인 발언으로 본질을 흐리거나 아예 발을 빼고 둘 다 잘못이라는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사회는 전반적으로 서로에 대한 불신 정도가 높습니다. 정부과 국민, 기업과 국민이 서로를 신뢰할 수 없다면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비용도 높아지고 지금처럼 냉소적인 사회가 지속될 수 있습니다. 책에서는 냉소사회가 되는 이유로 열등감을 꼽고 있는데 열등감 외에도 다양한 요소들이 있을 것 같네요. 책 마지막에는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몇 가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쪽이 바뀐다고 해서 바뀌는게 아니라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쪽에서 먼저 내려놓으며 바뀔 수 있는데 과연 가능할지 '냉소'적이 되기는 하지만 우리 앞에 과제도 산적한 만큼 지금 상태에서는 대안이 없네요. 현재 우리 사회의 문제점과 그 원인에 대해서 차분히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