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추석에 심양,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있는 집안, 백두산 천지를 다녀왔다. 그러면서 이 책을 길라잡이로 했다. 저자가 10년간을 고구려 유적답사를 하고 쓴 책인데 며칠간의 여행으로 많이 알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그것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이번 여행은 민족의 성지를 순례하는 답사여행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짧은 기간 동안 주마간산 격으로 다닌 것이지만 나름대로 많은 것을 보려고 노력을 했다. 첫날 심양에 도착하여 고궁과 북릉을 둘러보았다. 심양에서 밤늦게 열차를 타고 밤새 자고 나니 통화에 도착했다. 밤 10시 16분에 열차를 타서 새벽 5시 55분에 도착한 것이다. 통화에서 버스를 타고 집안으로 간다. 가다가 집안에 있는 장수왕릉 등의 유적에 사용된 돌을 캐낸 곳을 올라다 보았다. 중국에서는 고대채석장이라는 표지를 해 두었다. 이곳에서 장수왕릉 까지는 약 18킬로미터나 된다는데 어떻게 그 큰 돌들을 옮겼는지 궁금해진다. 일부에서는 겨울철에 얼음 위로 밀고 갔다고 하기도 한다(433쪽). 이 길은 고구려의 옛 북쪽 길이라고 한다. 전에는 비포장이어서 고생을 했다고 하는데 이제는 아스팔트로 깨끗하게 포장되어 있다. 집안 시내로 들어서자 왼쪽으로 장수왕릉이 멀리 보였다. 집안의 인구는 24만 명 정도이고 조선족은 1만 7천 명 정도라고 했다. 박물관에 갔다. 이곳은 실제 무덤에 가면 유물이 없어 벽화만 보고 오지만 박물관에는 갖가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189쪽). 특히 박물관의 탁본은 글씨도 잘 보이고 규모도 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유물이 생각보다 적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도 많이 듣고 사진으로 보던 광개토태왕비를 본다. 감격적이다. 어느 소설에서 읽은 그 느낌이 전해 오는 것 같다. 6미터 39센티미터. 쳐다보기가 힘이 든다. 이 큰 돌이 채석장에서 캐서 다듬은 것이 아니고 자연돌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궁금해 하기도 한다(189쪽). 광개토태왕비를 보면 생각나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임나일본부설이다. 일본 관학자들은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제)과 신라를 쳐부숴 신민으로 삼았다고 하고, 정인보 등 한국 학자들은 왜가 신묘년에 침입해 왔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가서 쳐부쉈다. 백잔(제)이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321쪽). 나의 상식으로는 우선 이렇다. 논란이 있는 문제가 되긴 하지만 도대체 왕권을 강화하고자 아버지의 송덕비를 세우는 장수왕이 하필이면 왜의 성과를 이렇게 써 두었을까. 왜를 주어로 해서 말이다. 이건 상식 이하이다. 그리고 왜 일본이 초기에 군대에서 그런 연구를 했나. 그것도 문제이다. 북한 학자의 연구가 타당한 것 같다. 과연 왜라는 집단이 고구려를 상대할 정도로 규모가 되는가. 과연 왜라는 집단이 백제를 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 당시 백제와 왜와의 관계가 적국으로 싸울 수 있는지 의문이다. 어찌 되었든 임나일본부설은 정설이 아닌 것으로 역사학계가 받아들이고 있다니 다행이다. 소설 같은 일본의 역사서를 근거로 삼고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해서 명분을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일부에서는 광개토태왕비와 능이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있다고 한다. 이 점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 당시 능의 영역이 나름대로 더 클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꼭 능비여야 하는지 의문이다. 그냥 송덕비면 안 되나. 평양천도 문제도 그렇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장수왕이 광개토태왕비를 세울 때는 아마도 귀족과 왕의 권력이 8 : 2 정도가 아니었을까.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것은 교과서에서 말하는 남진정책이 아니라 왕권강화일 것이다. 이러한 왕권강화를 하고도 귀족과 왕의 권력은 6 : 4 정도가 아니었을까. 비판은 이제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개념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시대가 달라지면 새로운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다. 처음에는 새로운 관점이 욕을 먹을지도 모른다. 광개토태왕비를 보는 눈은 달라져야 한다. 강단사학자들도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스승이 가르친 바를 비판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 잘못된 것은 비록 스승이라 할지라도 비판해야 한다. 참된 스승은 스승보다 더 나은 제자를 바라지 않겠는가. 벽화하면 춤무덤(이전에는 무용총이라고 불렀다)의 수렵도가 가장 떠오른다. 특히 뒤를 돌아보면서 화살을 쏘는 장면을 보면 주몽의 자손답다는 생각이 든다. 이전에는 공개되었던 다섯무덤의 5호무덤도 지금은 공개하지 않는다. 보려는 사람들에게 아쉬움을 남기지만 민족의 보석과 같은 벽화가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한다. 몇 가지 벽화들을 화면으로만 보고 나서 몇 곳의 무덤들을 구경한다. 들어가 보지 못하고 입구 쪽에서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잔디에 나면 잡초가 될 클로버가 무덤 옆을 뒤덮고 있다. 이제 장수왕릉으로 향한다. 중국의 책자도 장수왕릉으로 인정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장군총이 아닌 장수왕릉으로 불러야 한다. 무덤을 발견한 사람이 이 지방의 장군의 무덤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장군총이 되었고 그 이름을 그대로 부른다니 우리 선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만한 능의 규모가 어느 장군의 묘가 될 수가 있겠는가. 장수왕릉의 높이는 12.4미터나 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성 성벽은 많이 재건되기는 했지만 지난 시절의 영화보다는 초라해 보인다. 텔레비전에서 많이 보던 모습이다. 아파트의 정원 수준으로 전락한 국내성 성벽이 못내 가슴을 찔러 온다. 현대의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오래 전 우리 조상들의 성벽 쌓기 기술에는 어림도 없다. 물론 정성도 없이 급히 복원한 까닭도 있으리라. 환도산성을 오르면서 입구에 안내판이 너무 엉터리다. 일본말로는 그런대로 써놓고는 한글로는 왜 이렇게 엉터리가 많은지. 건설을 시작했다는 일본말 그래도 시건(始建)이란 말을 쓰는 것을 보니 좀 한심해진다. 왕성을 왕릉이라고 하지를 않나. 환도산성에서 옛날 기왓장을 주웠다. 마치 고인돌을 보면서 그 당시를 생각하는 것처럼 가슴에 와 닿는다. 왕궁 터는 아래쪽에서만 볼 수 있고 전부를 볼 수는 없었다. 통구하로 내려와 무덤떼를 살펴본다. 여러 시대에 걸친 것인지 무덤의 특징들이 다르다. 통구하의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포도를 먹으면서 옛 선인들의 마음을 읽으려 한다. 국내성을 장수왕릉에서 내려다보면 몇 해 전에 공룡발자국을 보고 나서 고인돌 마을 갔을 때와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아늑한 곳이다. 그러니 고성에 오래 전에 사람이 살지 않았을까. 환도산성은 내장산을 떠올리게 했고. 조중철도를 중간까지 가보았다. 북한을 더 가까이 서서 본다는 매력이 있었다. 중국 군인이 같이 기념촬영도 하고 많이 달라진 것 같다. 밤에 북한 쪽으로 별을 보려고 했지만 날씨 탓에 보지 못해 안타깝다. 밤이 되면 불을 모두 꺼서 어두운 북한을 보니 안 된 생각도 든다. 처음에는 북한 쪽의 산을 모두 깎아서 벌거숭이가 된 것이 좋지 않게 보였다. 농사를 열심히 지으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기야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벌거숭이가 되어야 탈출하는 사람들을 잡기가 쉬울 수도 있으리라. 보트를 타고 북한에 가까이 가 보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가깝게 보인다. 너무 가까운 거리지만 그 곳은 너무나 먼 북한인 것이다. 이 여행에서 아쉬운 점은 환인에 있는 오녀산성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음에는 일정을 잘 잡고 교통이 좋아지면 그곳도 답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백두산 천지와 연길 쪽의 여행은 양이 많아서 생략한다. 좀 힘들고 위생문제로 신경이 쓰이긴 했어도 즐겁고 보람된 여행이었다. 해외여행을 꽤 다녔어도 배탈 한 번 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여행은 너무 쉬운 것보다는 힘든 것이 기억에 많이 남는 것 같다. 민족의 성지를 다녀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하다. 책을 소개하면서 답사 이야기로 채웠다. 이 책을 한 번 읽고 성지를 순례하니 너무나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여행 내내 들고 다녔다. 고구려 성지를 여행하려면 꼭 먼저 읽어보고 참고하면 좋은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