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이 뭐 그리 재미가 있겠는가, 특히 물리부분을 배울 때 아이들은 '재미없다'를 연발하면서 시계를 쳐다보거나 멍하니 앉아있곤 했다. 그럴 때마다 '춤이라도 출까, 랩이라도 배워서 재미있게 해야 되나'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칠판이 주가 되는 수업에서 언제부턴가 플랙스캠, OHP, 비디오, 실물화상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그 기계들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가 여부를 알아보려고 도에서 사람들이 내려오기도 했다. 요즘 학교는 전자칠판은 기본이고 수업시간에 대부분 영상을 이용하고 있다. 수업을 재미있게 하고, 아이들의 학습능력을 높이는데 영상매체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올 2월까지 다녔던 학교는 전교사에게 3월부터 태블리PC를 한대씩 지급해서 수업에 이용하고 있다. 갖가지 영상 매체들이 수업에 보조적인 수단이 되어 학습 효과를 높이는 데 일조하지만 그래도 수업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는 칠판이라고 생각했다.
닐 포스트먼은 오웰이 우려한 세계와 앨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중에서 오웰이 아니라 헉슬리가 옳았을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웨른 우리가 외부의 압제에 지배당할 것을 경고했다. 하지만 헉슬리의 미래상에선, 인간에게서 자율성과 분별력, 그리고 역사를 박탈하기 위한 빅 브라더는 필요 없다. 사람들은 스스로 압제를 환영하고, 자신들의 사고력을 무력화하는 테크놀로지를 떠받들 것이라고 내다봤다."(10쪽) 인쇄문화 시기의 미국인들은 무려 7시간 동안 진행되는 토론에 대단한 집중력을 드러내보였다. 텔레비전, 인터넷이 주요 매체가 된 오늘날 토론은 길어야 100분에 그친다. 그나마 토론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전부 펼치거나 반박할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는 '재미'가 없으면 채널을 돌린다. 인터넷이 수많은 정보를 전해주는 것 같지만 "전신의 시대에는 지성이란 '많은 것을 아는 것'을 뜻하지 '많은 것에 대해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7장의 <자, 다음 뉴스는...>에서는 텔레비전 뉴스를 볼 때 느끼는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울한 뉴스도 충격적인 뉴스도 "자, 다음 뉴스..."이라는 한 마디에 사라지고 우리는 그 뉴스에 대해 깊게 생각할 시간을 가지지 못한다. 텔레비전이 가진 '쇼 기능'때문에 우리는 그 뉴스에 대해 깊게 생각할 틈을 가지지 못한다. 데이터뉴스라는 것을 봤는데 한줄 짜리 뉴스가 자막에 계속 오르고 배경음악은 경쾌한 여자 가수의 노래였다. 그 뉴스 속에 아무리 심각한 내용이 있더라도 배경 노래 덕분에(?)에 우리는 심각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즐거움을 맛본다. 10장 <재미있어야 배운다>에서는 아이들 대상 프로그램인 <세서미 스트리트>와 <미미의 모험>이 교육의 역할에 대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텔레비전의 역할이 대한 것이라고 비평한다. 닐 포스트먼은 고등학교를 마칠 때가지 대략 6,000시간 정도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아이들에게 '텔레비전을 어떻게 봐야 할지, 언제 꺼야 할지, 그리고 어떤 비판적 능력을 갖추어야 할지를 학생들에게 누가 가르칠지'에 대해 교육부가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또한 닐 포스트먼은 이러한 학습 프로그램들에게 "학생들이 주로 배우는 것은, 학습은 오락과 다를 바 없으며,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이건 오락물로 변형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는 관념이다"라고 한다. 이런 관념을 가진 학생들은 교실에서 인쇄문화가 지배적인 역할을 어느 정도 하는 교실 수업은 재미없고 지루한 고역에 불과한 것이 된다. 닐 포스트먼은 "텔레비전에서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한 문제는 아닏. 문제는 우리가 늘 텔레비전을 본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따라서 해결책은 텔레비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닐 포스트먼은 절망적인 방법으로 '학교'에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청소년들이 자기시대의 문화적 상징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학습을 지도하는 일도 학교의 공인된 책무였다. 이제는 청소년드이 자기시대의 정보매체와 스스로 거리를 두도록 지도해야 하는 책무로 바꿔도 그리 낯설지 않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새로운 책무를 정규교육과정에 편입하길 기대할 수도 없고, 교육의 중심과제로 채택하길 희망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학교에서 인터넷 관련 교육을 그나마 하고 있긴 하지만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이 책은 헉슬리가 우리 모두에게 하고자 했던 마지막 메시지로 끝을 맺는다. "멋진 신세계에선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 없이 웃고만 있다는 사실 대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 웃는지, 왜 생각을 멈추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고통스러워 한다."
2005년 7월 4일 텔레비전을 버렸다. 그렇다고 텔레비전에서 멀어진 것은 아니다. 다른 경로를 통해서 프로그램을 볼 수도 있고, 텔레비전을 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다. 텔레비전을 버린다고 해서 텔레비전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다. 온통 재미로 가능한 텔레비전과 인터넷에서 주인이 될 방법을, 매체가 가진 메타포를 생각할 능력을 갖춘다면 어떠한 매체들이 새로이 등장한다 해도 재미의 바다에 허우적댈 일은 없을 것 같다.
|
|
“텔레비전의 ‘기능’을 상실해야 제 ‘기능’을 다할 것” “20세기 후반 가장 의미심장한 미국 문화적 사실에 대한 탐구와 탄식인 셈이다.” 저자가 말하는 이 책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 저자 말대로 탐구인 동시에 탄식이 함께 들어있는 책이다. 21세기를 시작한 지금에도 유효한 이야기이다.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말이다. “텔레비전은 기껏해야 하찮을 뿐인데, 주제넘게 과대 포장되어 스스로 중요한 문화적 의사소통의 전달자로 자처할 때가 가장 위험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여전히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다양한 미디어는 어느 것이 허구이고 진실인지 사람들을 종잡을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밀어넣고 있다. 이 때 ‘인식론’에 대한 관심을 갖고 텔레비전의 영향력을 바라보고 문제를 헤쳐온 닐 포스트먼의 책이 새로운 옷을 입고 재등장했다. 죽도록 즐기기. 텔레비전 속 세상은 모든 것을 재미로만 몰고 간다. 코미디나 개그는 재미있어야 한다. 웃겨야 한다. 그런데 뉴스조차도 재미있게 꾸미려 한다. 새로운 시도, ‘파격적인 편성’이라는 이름하에 말이다. 개그쇼만 있는게 아니라 뉴스쇼가 있다. 뉴스도 이제 쇼다. 종교방송 조차도 그렇다. 우리 삶의 의식을 지배하는 텔레비전의 폐해를 지적하고, 그 본질로의 복귀를 진단하고 있는 ‘책 죽도록 즐기기’는 텔레비전이 주는 유익한 가능성 또한 열어두고 있다는 메시지도 함께 담고 이야기한다. 깨어 있지 않는다면 지배당할 수 밖에 없다. 바르게 볼 줄 아는 ‘실력있는 인간’이 필요한 때다. 저자는 1부에서 텔레비전이 지금의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시작과 흐름을 설명하고, 1800년대 인쇄기술을 시작으로 하는 미국의 초기와 전신, 사진 등 그 후의 점진적인 미디어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다양한 인물과 그들의 책 내용이 언급되는데, 한 쪽 분야에 집중해 온 저자의 그 깊이가 놀라울 따름이다. 미묘한 방식으로 ‘지휘소’ 역할을 하는 텔레비전의 등장과 보급과 전파로 인한 환경변화에 따라 의심없이 그 모든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 속에서 지켜야 할 것들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을 인식하고 그를 풀어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독자들에게 던진다. “우리의 문화는 이제 텔레비전의 인식론에 거의 다 길들여졌다. 즉, 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 규정되는 진실, 지식, 사실을 너무도 철저하게 받아들이기에 쓸모 없는 것들이 중요한 것인 양, 그리고 모순된 것들이 대단히 합리적인 양 우리 안에 가득 들어앉게 되었다는 뜻이다.“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텔레비전이 무엇이지, 그 의미에 대해서 살펴본다. 공적 담론을 유지해야하는데 그렇지 못해 그 기능을 상실해가는 텔레비전, 그냥 단지 나쁘거나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문화현상과 흐름 속에서 살펴보고, 인식케 하는 저자의 통찰력과 지식의 깊이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미국의 종교와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살펴보고 글을 써간 그의 말, 여전히 유효한 그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뉴스조차도 오락으로 변질되어가는 것에 대한 지적이 강하다. 뉴스는 쇼다. 텔레비전이 쇼 비즈니적인 가치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순수성, 엄숙함 혹은 진정성 등이 필요한 현장, 교육이나 정치, 사회 분야가 이런 비즈니스에 몰두하고 있다. 단지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새로운 것을 원하는 사람들의 필요에 맞추어간다는 미명하에서. 이제 텔레비전의 ‘하찮음의 추구’를 멈추지 않는 텔레비전을 비롯한 다양한 정보환경 속으로 빠져가고 있는 사람들, 이들을 꺼내 제대로 된 길을 걷게하는 것은 무엇인가? 텔레비전이 지닌 편향성을 극복하는 것은 무엇인지도. 그 해답을 찾아 가는 것, 이 책을 읽는 우리 독자들의 몫이다. 저자는 텔레비전이 그 기능을 상실해갈 때 우리 삶이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텔레비전의 기능이라는 것이 쓰레기같은 오락물을 방영할 때 가장 쓸모있게 기능하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한 번 읽고 이해할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기회가 되면 몇 번 더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놓친 부분도 그렇거니와 그 깊이를 들여다 보기위해서는 말이다. 오늘날 미디어의 영향력과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생산하고 전파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어떤 것인가를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면 닐포스트먼과 그의 연구업적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런 의미에서 남들이 덜 신경쓰고 관심지역 밖에있는 매체비평과 이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노력에도 달리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죽도록 즐기기, 이 책은 미디어 비평분야에서 일하는 분이나 텔레비전의 활용과 그 기능에 대해 궁금하고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고 공부하는 분들에게도 좋은 교재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권해본다. 그냥 보지말라고, 끄라고 말하기 전에 이해하고 설득할 수 있는 말을 얻고자 한다면. 이 책은 더불어 순서대로 읽어가면 미국 중심의 문화적 탄생배경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오늘날 세계에 영향을 미친 다양한 매체의 역할과 역사, 그 시대를 잡았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다. |
|
뉴스도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도 재미는 뉴스의 소구력을 높이는 도구였다. 지금은 뉴스가 재밌어야 하는 게 아니라 재밌는 게 뉴스다. TV로 대표되는 21세기 매체환경의 허상을 거의 30년 전에 꿰뚫고 있는 저자의 혜안이 놀라울 뿐이다. 이 책을 꿰뚫고 있는 문제 의식은 초판 서문에 잘 나와 있다.
'1984년'을 쓴 조지 오웰과는 또다른 관점에서 암울한 미래상이 앨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처음 알았다.-다. 오웰은 (빅 브라더의) 정보 통제 상황을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지나친 정보 과잉으로 인해 우리가 수동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전락할까봐 두려워했다. 오웰은 진실이 은폐될 것을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진실이 압도당할 것을 두려워했다. '1984년'에서는 사람들을 고통을 가해 통제한다. '멋진 신세계'에선 즐길거리를 쏟아부어 사람들을 통제한다. 이 책은 오웰이 아니라 헉슬리가 옳았을 가능성에 대한 내용이다.
글-인쇄-에서 TV로 대체된 매스미디어가 문제의 근원이다. 의사소통 형식이 전달되는 내용을 통제하고 특히 텔레비전은 우리에게 이미지로 말을 건다. 하루의 뉴스는 우리의 기술적 상상력이 빚어낸 허구다. 교육과 지식, 진실과 정보에 관한 개념이 TV시대를 맞아 진지함과 명료함, 그리고 그 가치를 위험할 정도로 저하시킨다.
대중이 하찮은 일에 정신이 팔릴 때, 끊임없는 오락활동을 문화적 삶으로 착각할 때, 진지한 공적 대화가 허튼소리로 전락할 때, 한마디로 국민이 관객이 되고 모든 공적 활동이 가벼운 희가극과 같이 변할 때 국가는 위기를 맞는다.
공공담론을 가볍게 만드는 '문화의 공해' TV를 주 타깃으로 한 비판이나 외연을 넓히면 오늘날 매체 환경과 어긋남 없이 맞는다. 밑줄치며 읽은 부분들이 고스란히 생각으로 담긴다. 위에 적은 내용도 책의 내용이자 100% 공감한 부분들이다. 미디어가 거대산업으로 성장하고 계속 성장하려는 자기동력을 갖고 있는 한 옛날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도 알고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지금 저게 메트릭스인지 아닌지...
|
|
작년에 입었던 점퍼 속 주머니에서 10만원짜리 수표를 발견한 기분이다. 매 쪽 마다 밑줄 긋고, 질문 하고, 끄덕이면서 몰입한다. <미디어는 어떻게 신화가 되었는가?>처럼 한 줄 한 줄이 목에 걸리는 생선 가시 같은 관념적인 책이 아니고, <현대사회와 미디어 비판>처럼 거대기업과 미디어의 관계를 파헤치는 학술적이고 음모론적인 책도 아니다.(하나의 시각을 보여준 책으로 꽤 괜찮은 책) 어느 부분 하나 고개를 갸우뚱 하며 멈춰서지 않았을 만큼 균형잡힌 논조로, 게다가 적절한 메타포를 통해서, 그동안 가렵기는한데 어디인지 당췌 알 수 없었던 그 곳을 통쾌하게 긁어 주었다.
실로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많은 정치, 사회적 현상을 떠올리게 되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릴 만큼 저자의 통찰력이 탁월하다. 이 책은 1985년 초판 발행되었음에도 (이 한국어판은 20주년기념판을 번역본;번역이 깔끔하다), 오늘을 성찰하기에 손색이 없다. 세월의 풍파를 이겨낸 것을 고전이라 한다면 20년이 된 이 책이 아직도 독자를 이토록 감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고전이 될만한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음을 어느 정도 증명한 셈이다.
오늘날 미디어(TV, 인터넷으로 대표되는)를 이해하지 못 하고 사회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저자의 말마따나 "테크놀로지는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읽다보니 평소 취침 시간 보다 4시간이나 늦어졌다. 내일이 휴일이라 작정하기는 했지만...
|
|
사회학과 수업에서 우연히 교수님께 추천을 받았던 책이다. <죽도록 즐기기>라니....제목부터 심상치가 않은데... 죽을 때까지 즐기는 우리들을 살짝 비틀어 말한 것이더라 ㅎㅎㅎ 그렇게 숙제삼아 읽어내려가던 책에서 좀 충격을 받았다. 뭐...대략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알고는 있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문명의 이기에 대해서 찬찬히 살펴보고 곱씹어보고 되돌아보는 시간이 된 것 같다. 나는 디지털 세대이지만 아날로그가 좋다. 조금 불편하고 복잡하지만 사람냄새가 묻어나고 자연에 가까운 것이 조금 인간답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 역시도 컴퓨터, 터치폰, PMP 등을 사용한다. 최신기종을 선호하고 앞서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은 아니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서글푸기다 하다. 그리고 세상에 모든 것이 너무 편리해져만 가고 쇼와 오락이 난무하는 것이 정말 최종적으로는 이로움이 아니라 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아니...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이 책을 20년 전에 썼다고 하는데... 흠....꼭 지금 시대를 나와 함께 숨쉬며 살아가는 사회학자처럼 여겨졌다.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내려다 보는 눈이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 |
|
내가 이 책을 왜 구입했나? 자문을 해본다. 어린 시절 TV 보는 시간이 많았다. 한 주간 편성표는 거의 외우고 있을 정도록 TV 보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집에만 박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거의 매일 밖에서 놀다가 해가 저물어 어두워지면 집에 들어 왔는데, 집에 돌아오면 그때부터 밤늦도록 TV 앞에 붙어 있었다. 그래서 집은 쉬는 곳이지 책이나 공부를 하는 곳은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학창시절 집에서 공부했던 기억이 거의 없다. 학교, 도서관, 학원이 바로 책을 보고 공부하는 곳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학교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연히 TV 시청 시간이 줄었다. 그래도 꼭 밤 12시가 넘어 끝나는 오락프로를 본 후에 잠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TV와 아주 멀어지게 되었다. 그 때, 대학교를 막 졸업하고 첫 부임하여 오신 사회 선생님이 계셨다. 그 선생님, 그 어떤 선생님 보다 아는 것이 많아 보였다. 젊고, 똑똑하고, 언변도 뛰어나고, 유머 감각까지, 또 젊으신만큼 활기가 있어보였다. 그때 선생님께서 수업시간이면 하시는 이야기가 있었다. "책들 좀 읽어라." 시험도 평범하지 않았다. 교과서가 아닌 선생님께서 지정해준 책을 읽고 그 책과 관련된 문제가 시험에 나왔다. 책을 읽지 않을 수 없게 하셨던 것이다. 독서란 것을 생각하면 처음 그 사회 선생님이 떠 오르고, 그 다음으로 생각나는 분이 책 읽는 영어 선생님이다. 항상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책을 들고 계셨다. 비 오는 날 영어 수업 시간에 다들 운동장 집합해서 축구하는 걸 좋아하셨던 선생님이다. 그리고 시인 국어 선생님. 어느 날엔 수업 시간 동안 각자 읽고 싶은 책을 읽었다. 인터넷에서 선생님 성함을 검색해서 문단에 등록되어 있는 낯익은 얼굴과 이름 그리고 작품을 확인하고서는 선생님의 시집도 구입했다. 친필 사인이라도 받아둘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렸을 적부터 책 수집하는 것을 좋아해서 읽은 책 보다 읽지 않은 책이 더 많다는 또 다른 국어 선생님. "수업 시간에 공부하는 다른 친구 방해하지 말고 차라리 자라. 수업 듣기 싫으면 소설책이라도 읽어라. 떠들지만 마라." 하셨던 또 다른 국어 선생님. 그때부터 책과 독서가 나와 인연이 닿은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부족한 점 중에 하나가 발표력, 언변술 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라고 하시는 또 책을 읽으시는 선생님들은 모두 어딘가 달라보였다. 그 선생님들 말씀도 달리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그러면서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에게 모두다 공통점이 있는 듯 했다(그 당시엔). 모두들 말을 너무나 조리있게 논리적으로 잘 했다. 그렇다면 나도 책을 많이 읽으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그동안 책과 너무 두꺼운 담벼락을 쌓고 지내왔다는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한권 한권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TV는 의식적으로 멀리하려고 애썼다.
막상, 그 시절을 떠 올리니 글이 길어져 버렸다. 아무튼, 이 [죽도록 즐기기]는 내게 책과 독서에 관한 추억을 떠 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사실, 요즘에도 TV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때도 많은데, 이 책을 통해 다시금 스스로에게 자극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무조건적인 기술에 대한, 영상매체에 대한 그리고 TV 자체에 대한 비판만은 아니다. 기술은 자기에 맞는 역할을 해야하고 받아들이는 대중은 진실을 알아차려야할 필요성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내심, 작가가 밝혀가는 이야기 뒤에 그에 대한 해결 실마리가 궁금했는데, 작가도 그 부분에서는 속 시원한 답을 내기 어려웠던 것 같다. 불과 몇 페이지 되지 않은 분량에 그 부분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그만큼 TV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한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텔레비전은 쓰레기 같은 오락물을 방영할 때 가장 쓸모있게 기능한다. 반대로 심각한 담론 형식(뉴스, 정치, 과학, 교육, 종교)을 다룰 때는 최악으로 기능하여 이들 담론을 제멋대로 오락 프로그램으로 변질시킨다." (p.243)
앞에서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작가가 하나의 해결책으로 바로 학교의 역할을 말하고 있어서 이다. 나 역시 학교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현실의 학교의 모습을 보자면 학교가 최고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나마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는 곳이 학교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일단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들은 다 기록해두자.), 책의 겉 표지가 낯설지 않았다. 중절모와 장미. 중절모를 보면 항상 떠 오르는 소설 작품이 있다. 역시나 책 뒷 표지에 출판사는 친절하게 글로 남겨두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의 이 작품은 내 기억 속에서 잘 잊혀지지 않는 책이다. 고3 수능이 끝나고 같은 반 친구 중에 전교 1등하는 친구가 이 책을 들고 있었다. 호기심에, 공부 잘하는 친구는 어떤 책을 읽나하고 당장에 구입해서 읽었다. 그땐 그 책을 읽으면서 저 놈은 나랑은 다른 놈이구나 하고 느꼈던 것 같다. 근래에 책꽂이에서 눈에 띠어 다시 읽었는데, 여전히 잘 와닿지 않는다. 제목은 참 훌륭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휴~ 끝! |
|
제목 자체로만 보면 자기계발서의 냄새가 난다. 당신이 좋아하는 일에 미쳐서 죽도록 즐기는 방법으로 이해되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영상 매체가 만들어준 Show Biz에 현혹되어서 죽도록 즐긴 사람들에게 경고를 전달하는 내용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사비나와 테레사를 통해서 사랑의 이중적인 본질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이 책은 TV가 주는 양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출판사는 책의 표지에도 사비나가 들고 있던 모자와 장미를 통해서 그 이중성을 암시하려고 한 것 같다. Amazon에서 책을 찾아보니 머리 없는 몸이 그려진 표지가 있었다. 굿이포메이션에서 시도한 표지도 꽤 괜찮은 것 같다.
최근에 읽은 논문에 보면 독서를 진흥시키는 방법 중에 영상매체를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주의할 점이 언급된다. 영상은 호기심 유발을 위해서 최소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영상이 잘못 사용되면 독서로 연결이 안 되고 끝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영상이 가지고 있는 폐단은 이미지를 보기 때문에 그것이 부분일지라도 메시지 전체를 형상화하고 고착화시켜서 더 이상 사고 발전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매우 주의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책에 닐 포스트먼이 다루는 내용에도 이런 내용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어떤 메시지를 받았을 때, 스스로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져야 한다. 하지만 TV라는 메체는 점점더 그 능력을 제거하여 결국에는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만 양산해 낼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말 한 것처럼 우리의 사고력을 무력화 시키는 테크놀로지를 떠받들어서 스스로를 다스리기 편한 시민으로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닌가 심란하게 고민해 볼 수 있었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
멋진 신세계에서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 없이 웃고만 있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 웃는지, 왜 생각을 멈추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고통스러워 한다. (248페잊)
|
|
* 닐 포스트먼의 <죽도록 즐기기> 1985년에 씌여진 이 책은 성찰없이 '오락'으로 삶과 정신을 탕진하는 시대와 사람들에게 경고를 날리는 책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텔레비전'이 있다고 말한다.(아직 컴퓨터가 제대로 생활 속에 깊이 개입하기 이전에 씌여진 책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대한 그의 예언은 정확히 적중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지는 온갖 기기에 둘러쌓여 오락에 취해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리고있는지조차 신경쓰지 않을 때까지 '정보과식증'에 휘둘리고 있으니 말이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와 같은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단지 새로운 기술의 탄생이 아니다. 그것은 이전의 삶에 그저 새로운 긱기가 추가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방식과 생활 문화와 삶 그리고 세계를 전부 바꾸어 놓았다. 그런 기술은 정보를 더 빨리 더 멀리 전달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발전해 왔지만. 정작 그렇게 전달된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고 그 결과 우리들은 정보과식에 시달리고 있다. 단편적이고 자극적이며 단순히 재미를 추구하는, 숱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허위정보들 투성인 세상.도대체 믿을 만한 정보가 없다면 고도의 정보화가 무슨 소용이냐고 그는 묻고 있다.
초판 서문에 그는 우리들의 미래를 다룬 두 편의 소설을 비교한다. 조지 오웰의 <1984> 그리고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두 편은 모두 인간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조명한다. 조지 오웰은 빅브라더가 등장하는 외부의 세력이 정보를 장악하고 공포로 인간을 탄압하는 세계를 그렸다. 그에 비해 올더스 헐슬리는 자발적으로 테크놀로지를 떠받들고 스스로 사고력을 무력화시키는 나락에 스스로를 내맡긴 인간들의 모습으로 디스토피아를 그려냈다. 그는 지금 우리들의 현실이 후자 쪽으로 기울고 있음을 지적한다. 더 자극적이고 더 폭력적이고 더 선정적인, 인터넷과 게임과 텔레비전들. 그리고 점점 더 심해지는 자극들. 그런 미디어에 중독된 우리들의 현재는 올더스 헉슬리가 그려낸 미래와 너무나도 닮지 않았는지.
닐 포스트먼의 책 <죽도록 즐기기> 자극적인 제목이지만 우리의 현실을 일깨우기엔 딱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 미국의 상황에 맞추어 씌여져 여러모로 우리와는 맞지 않고 진부한 면도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와 닿았던 것은 우리가 두려워하고 우리가 증오하는 것들만이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좋아하고 즐기는 것들도 우리를 파괴할 수 있다고 아니 그러고 있다는 경고였다. 주위에 넘쳐나는 온갖 오락과 미디어들 속에서 제대로 중심을 세우지 않으면 미디어의 정보와 오락 속에 빠져 정말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닐 포스트먼 <죽도록 즐기기>였다. - 다락방서 허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