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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과 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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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란 자유와 평등의 다른 이름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모두는 평등하며 나와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나와 같은 권리를 갖는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이 평등하다면 나와 대등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당연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유럽에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의 시초는 기독교로 올라갈 것이다. 인간은 신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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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란 자유와 평등의 다른 이름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모두는 평등하며 나와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나와 같은 권리를 갖는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 나와 같이 평등하다면 나와 대등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당연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유럽에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의 시초는 기독교로 올라갈 것이다. 인간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면 신의 창조물로서 인간은 평등할 수 밖에 없고 대등한 인격체로서 대등한 권리를 갖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인간은 모두 동등하다는 생각이 보편적이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이 오늘날과 비슷한 모양으로서 등장한 것은 계몽주의와 함께 였다. 그러나 학자들의 주장을 넘어 사람들의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이책의 저자는 계몽주의자들의 주장이 보편적이 된 것은 두가지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책에서 주장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첫번째 계기는 서간문학작품들이엇다. 편지의 형식으로 기술되는 서간문학은 1인칭 시점으로 기술될 수 밖에 없다. 작가의 시점이 아니라 주인공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풀어지는 서간문학은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의 내면을 더 실감나게 하는 특징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이 주인공과 자신을 더 쉽게 동일시하게 하는 ‘공감’의 힘이 더 강했다.

이책에선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 이전 수십년동안 유행했던 서간문학작품이 어떻게 수용되었는가를 분석하면서 자유와 평등이란 개념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실체로서 이해되게 되었는가를 보여준다.

당시 인기를 끈 서간문학작품 중 저자가 분석하는 3편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다. 하녀, 하급귀족의 딸을 다루는 3작품은 남성독자들에게 계급과 성의 차이를 떠나 그녀들도 자신과 같이 생각하고 느끼는 자율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는 것이다. 인간을 나누는 차이를 넘어 그들도 자신과 평등한 인간이며 자신과 같이 스스로 삶을 결정할 권리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게 한 것은 당시 유행한 문학의 힘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는 서간문학이 혁명 직전에 대대적으로 유행한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저자가 드는 다른 계기는 고문이다. 당시 형법에서 고문은 수사과정은 물론 집행과정에서 합법이엇다. 그러나 계몽주의가 득세하던 당시에 고문은 문제가 되었고 형법개정운동으로 발전한다. 저자는 고문에 대한 반대가 여론의 힘을 얻게 된 것이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이성이 아니라 감성으로 이해해가던 당시의 지적조류와 연결시킨다. 고통받는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사회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18세기 말 두개의 혁명이 일어나고 두 혁명에서 인권선언이 채택될 수 있었던 것을 이러한 공감의 능력이 고조되었던 사회적 분위기에서 찾는다.

이상이 이책에서 읽어야 할 내용이다. 이책의 후반은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 이후에도 인권은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았던 것을 자세하게 지적한다. 특히 프랑스혁명을 자세하게 분석하면서 구교도에 대해 신교도도 마찬가지로 시민권과 정치적 권리를 가지는가? 그러면 유대인은? 그리고 여자는? 노예는? 이런 식으로 인권의 의미에 대한 의문이 커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러나 인권이 보편적으로 생각되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과정이 아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을 때 영국의 버크는 사회적으로 집단의 정체성과 연결되지 않는 인권이란 추상적 원리는 비현실적일 수 밖에 없으며 그런 추상적 원리가 현실이 되려면 폭력으로 현실에 자신을 강요할 수 밖에 없다고 예언했다.

프랑스혁명의 무질서와 폭력은 실제 그러했다. 저자는 이후 인권의 역사는 버크가 지적한 추상적 원리가 가져야 할 현실적 토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고 지적한다. 처음에 그 토대가 된 것은 민족주의였다.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보다 더 평등하다. 그러한 주장은 인종주의와 성차별로 이어졌다. 저자는 19세기 이후 UN의 인권선언이 공표되기까지 인권의 역사를 그러한 현실화의 과정으로서 폭력의 과정으로서 그려나간다.

이상이 이책의 내용의 간추려 본 것이다. 이책은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인권이란 추상적 개념이 현실적으로 힘으로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공감’이란 개념을 통해 매우 설득력 있게 그리고 잇다. 그러나 문제는 공감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인권이란 개념을 퍼트렸는가를 말하면서 이책의 반 이상에서 말해지는 혁명과 민족주의, 인종차별, 성차별의 역사와 같은 거시적 맥락을 공감이란 미시적 토대에서 재구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책은 17세기 인권이란 추상적 개념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힘을 얻게 되는가를 묘사하는 앞부분만으로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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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부여되지 않는다, 다만 만들어질 뿐이다, 인권의 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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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다른 모습  1)불과 300년 전만 해도 프랑스에서는 잔인한 신체형이 자행되었다고 한다. 사형집행인은 형을 당하는 범죄자가 갑자기 죽지 않을 정도의 고통(근육을 자른다던가, 젖꼭지를 도려낸다던가)을 주며 그를 천천히 죽였고, 이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집행되었다. 다수의 사람들이 왕의 권위에 도전한 자의 비참한 죽음을 보게 되었으며, 이는 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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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다른 모습


 1)불과 300년 전만 해도 프랑스에서는 잔인한 신체형이 자행되었다고 한다. 사형집행인은 형을 당하는 범죄자가 갑자기 죽지 않을 정도의 고통(근육을 자른다던가, 젖꼭지를 도려낸다던가)을 주며 그를 천천히 죽였고, 이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집행되었다. 다수의 사람들이 왕의 권위에 도전한 자의 비참한 죽음을 보게 되었으며, 이는 왕권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2)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9·11테러 이후 마구잡이로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잡아들여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특히, 체포된 사람들의 인권이 문제가 되었었는데, 부시 전 대통령은 2002년 2월 7일 ‘알 카에다나 탈레반에게는 1949년 제네바 협약 공통 3조에 따라 적용되는 포로 자격이 없다’는 각서에 서명을 하며 그들을 ‘적 전투원(Enemy Combatants)’로 규정했다. 그들을 ‘포로’라고 부르는 순간 제네바 협약에 따라서 그들에게 고문이나 모욕, 굴욕적인 처우가 금지되기 때문이다.


 고작 300년 밖에 흐르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극단적인 대비다. 프랑스의 왕은 범죄자가 잔혹하게 죽어가는 광경을 군중들에게 보여주며 왕권을 강화시켰지만 오늘날 세계 최대의 군사력을 갖고 있는 미국의 대통령은 미국을 위협한 포로에게 고문하고, 모욕을 주고, 굴욕을 줄 수가 없다. 어떻게 이렇게나 짧은 시간동안 상황은 급변할 수 있었는가.


 저자인 린 헌트는 18세기 서구에서 인권이 발명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릴 적부터 교과서를 통해 ‘천부인권’이라는 말을 듣고 자라온 우리에게는 인권이 발명되었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갸웃할 지도 모르겠지만, 조금만 차분히 생각해보면 인권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권이라는 것이 하늘이 사람들에게 부여해준 것이었다면 수 백 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가면서 인권운동을 할 필요가 없었겠지 않겠는가. 인권이라는 것은 수많은 피 흘림을 통해서 쟁취해낸 사람들 사이의 약속이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18세기 무렵부터 시작되어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투쟁의 과정이다.

 

 

-어떻게 인권은 발명되었는가?

 

 그렇다면 어떤 계기로 그런 투쟁이 시작된 것일까. 조금 뜬금없어 보이지만 린 헌트는 서한소설이 인권의 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이야기한다. ‘파멜라’, ‘클라리사’, ‘신엘로이즈’로 대표되는 이들 서한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는 특징이 있는데 18세기 유럽의 독자들은 이러한 소설을 읽으며 작중의 여성과 함께 고통 받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체험을 한다. 이런 경험은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이 느낀다’라는 자명한 사실을 사람들에게 일깨워주었고, ‘상상적 동일시 과정―동정―은 관찰자에게 고문의 희생자와 공감하도록 한다’ 는 린 헌트의 말처럼 공감(empathy)의 경험은 고문반대운동을 이끌어낸다.


 커져가는 사람들의 인권에 대한 열망은 ‘미국 독립 선언문’(1776)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문’(1789)를 만들어 내었고 드디어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 그리고 권리에 있어 평등하게 태어나 존재’하게 되었다! 드디어 ‘자명하다고’ 여겨지는 권리들이 탄생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선언들은 폭발적으로 토론의 장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인간의 권리라는 것은 신교도에게 적용이 되는 것인가? 신교도에게 적용이 된다면 유대인들에게 적용이 안 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식으로 가다보면 어라라? 흑인들과 여자들마저도 인간의 권리의 적용을 받게 되지 않은가! 이럴 수가. 신교도, 유대인, 그리고 흑인과 여자들마저 인간으로 분류하는 급진적(!!)인 생각에 대항해서 인권 자체를 깡그리 무시하는 주장들이 생겨났지만 린 헌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권리’라는 관념은, 혁명 그 자체처럼 토론과 갈등 그리고 변화를 위한 예측할 수 없는 공간을 열었다. 그러한 권리의 약속은 부정되고 탄압받거나, 혹은 충족되지 못한 채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결코 사그라들지 않았다.”

 

 

-인권은 언제나 승리했는가?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에서 제기된 인권은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며 ‘자명한’ 위치를 얻어나갔지만, 그 자리를 민족주의에게 내어주었을 때 인류는 유대인 학살이라는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는 참극을 경험하고 만다. 불행 중 다행히도(그 불행이 너무나도 끔찍해서 ‘다행’이라는 말이 죄송할 따름이지만) 인류는 UN과 ‘세계인권선언문’(1948)을 만들어냈다. 전 세계적으로 맺어진 최초의 인권에 대한 약속인 세계인권선언문은 58개의 가입국가들이 문서의 모든 단어와 조항에 대해 총 1,400번 이상의 투표를 하며 만들어졌고, 앰네스티, 국경없는의사회 등과 같은 NGO들은 세계인권선언문에 의거해 조직을 운영해나가고 있다. 여러가지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세계인권선언문이 ‘50년 이상이나 인권에 대한 국제적 토론과 실행의 기준을 마련해’왔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이 더 아름다울 수 있게


 

 ‘당신은 인권의 의미를 안다. 왜냐하면 그들이 불의를 겪을 때 당신은 괴로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인권의 진리는 이러한 점에서 역설적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명하다.’는 린 헌트의 말은 인권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규정되어야 하는, 설천을 통해 얻어나가는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렇기 때문에 18세기 서구에서 서한소설이 인기를 끌던 시점부터 2차 세계대전과 세계인권선언문의 등장까지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는 이 책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곳’에도 유효하다.


 나는 사형제 존폐 여부, 양심적 병역 거부자, 이주노동자를 둘러싼 네티즌들의 공방에서 유대인에 대한 나치즘의 맹목적인 분노를 보곤 한다. 저자 린 헌트가 한국의 이러한 모습을 본다면 한국 사람들에게는 공감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을까? 일례로 몇 해 전 한 남성이 여자아이를 잔인하게 성폭행한 사건을 예로 들자면,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성폭행 당한 아이의 가족을 위해서라도 그 남성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 ‘아니다. 한 번에 죽이면 안 되고 고통을 주며 천천히 죽여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이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이 될 것인가?’라는 식의 논의가 오고 갔었는데, (이러한 논의가 너무 격렬해서 앰네스티 한국 지부에서는 원래 발표하기로 계획되었던 사형제 폐지에 관한 성명 발표를 미뤘다고 들었다.) 정작 성폭행 당한 아이의 아버지는 네티즌들의 과도한 관심이 부담스럽다는 말을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피해자를 위한다.’는 것과 ‘가해자에게 잔인한 고통을 가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한국 사람들은 ‘피해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출처가 불분명한 자신의 분노를 토해내는데, 이것은 다른 사례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양심적 병역 거부자와 이주노동자 및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은 쉽사리 출처가 불분명한 분노의 표적이 되고 만다. 나는 한국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조금만 공감했더라면 이렇듯 폭력적이고 맹목적인 분노가 생겨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한국 인권의 현실이고, 지금까지 얻어낸 인권의 한계이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지만 그렇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다. 유럽을 지배했던 나폴레옹도, 2차 세계대전까지 불러일으킨 히틀러도 역사의 시계바늘을 뒤로 돌리는 데에는 실패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인권은 승리해왔고 승리할 것이다. 그 사실에 용기를 얻으며 우리 대학생들부터가 ‘인간의 권리’와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이야기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권리’라는 말은, 그리고 ‘인간답게’라는 말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정의해나가야 하니까 말이다.

 

 



YES마니아 : 로얄 m********8 2010.11.1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