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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회사에 계신 분이 읽어보라고 건낸 책이다.
나는 '박수근'이라는 이름을 신문이나 TV에서 가끔 봤다. 이 사람의 그림이 유명하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그 그림을 보고 조금 실망했다. 단순한 구성, 흐릿한 표면, 특별히 뛰어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크게 흥미가 없어졌었다.
그러다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왔다. 이 책을 쓰신 분은 '박수근'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박사학위를 받았다면 상당히 박수근과 그의 그림에 대하여 깊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내 느낌은 이렇다.
'박수근 화가는 가난했고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았고 그림그리기를 사랑했던 사람이다.'
솔직히, 내 느낌을 딱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박수근은 불쌍하다!'
자고로, 예술은 고난과 역경, 가난과 불행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것 같다. 이 책에도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여전히 수근은 가난한 화가였지만 가난을 먹고 자란 예술은 포동포동 살이 오르고 있었다.
박수근은 결혼을 했고 아이가 있는 가장이었다. 박수근도 가난을 벗어나려고 노력을 안 한 건 아니다. 미술선생님으로, 미군 부대 초상화 그리는 일 등을 했다. 그리고 국전에 그림을 출품하기도 한다. 그림이 팔리기만을 기다린 건 아니다.
하지만 이래저래 박수근의 인생은 잘 풀리지 않는다. 게다가 박수근이 살던 시대는 1910~1960년대이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 그리고 6.25로 격변의 시기였다. 이런 시대일수록 없는 사람들은 더 고통받게 마련이다.
하지만 박수근은 절망하지 않은 것 같다. 왜냐면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박수근 자신이 가난했고 가난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쳤지만, 그는 주위의 가난한 사람을 바라볼 줄 아는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누구보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했고 그들을 응원했던 것 같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어머니, 아이들, 할아버지, 아저씨 등이다. 그의 그림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상류층 사람은 없다. 그는 이들을 그리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난을 꿋꿋이 이겨내며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지 않았을까?
박수근이 가난을 벗어나기 힘들었던 이유는 시대적인 상황 말고 그 자신에게도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그는 비오는 밤에 집으로 돌아갈 때, 일부러 과일 가게 세 군데에서 똑같이 과일을 조금씩 샀다고 한다. 비오는 밤에는 손님이 적을테고 한 군데서 다 사면 다른 과일가게에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수근의 후원자인 밀러부인이 그림을 판 돈을 송금해줬다고 한다. 그 돈을 환전하려고 맡겼는데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더랜다. 박수근의 부인은 가보자고 보채지만 박수근은 오죽하면 못오겠냐며 좀 더 기다려보자고 한다. 결국 그 환전하려고 맡긴 사람은 연락이 없었다. 박수근은 화를 내지 않고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만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박수근은 혼자서 가난을 면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욕심이 없어도 너무 없다. 자신도 가난한데,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고, 자신의 돈을 갖고 도망친 환전상을 이해한다. 자신의 이익보다 '필요해서 가져갔겠지'라고 생각하고 만 것이다.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정으로서 무능해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욕심없는 박수근의 시선이 그의 그림의 밑바탕인 것이다.
그가 욕심낸 것이 있다면 그림그리기이다. 그림을 반복적으로 계속 그리면서 불필요한 선들을 제거하고 결국 간결한 선들만 남게 된다. 반복하면서 본질에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채를 거를수록 쭉정이는 날라가고 알맹이만 남는 것과 비슷하다. 박수근의 그림은 간결하고 단순하다. 하지만 오래봐도 질리지 않고 포근하다. 마르티에라는 박수근만의 거칠거칠한 독특한 느낌을 만들어낸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그는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리고 한 분야에 오래동안 전념한 결과 그는 그 만의 그림을 완성시켰다. 그는 이 거칠거칠한 표면을 만들기 위해 여러 물감층을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박수근이 불쌍하다. 가난한 사람들을 주로 그리고 그림속에 있는 나무는 앙상한 가지만 있다. 그의 그림속 사람들중에 웃는 사람을 한 명도 못봤다. 쓸쓸한 뒷모습, 삶을 달관한 듯한 모습, 활기를 찾아볼 수 없는 표정. 하지만 따뜻한 인간애는 느낄 수 있다. 아이 보는 소녀, 초가집, 나물 깨는 여자들, 아이들, 어머니 손 잡은 아이들. 그는 가난했지만 진정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박수근은 정이 많았던 것 같다. 박수근이 그림을 그리고 부인이 글을 써서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만들어줬다고 한다. 아이와 아내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밤 늦게 오는 아내를 위해 먼 거리를 마중나가고 아랫목에 있던 따뜻한 밥을 먹으라고 챙켜줬다고 한다. 박수근이 다음과 같이 청혼했다고 한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파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멋진 청혼인가! 하지만 요즘같이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는 회의적이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화가, 가난을 벗어나려고 한 화가. 하지만 그는 정말 가난을 벗어나려고 했을까? 그는 가난한 사람을 사랑했던 것 같다. 가난한 사람을 그리려면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들속에 섞여서 바로 옆에서 바라봐야 한다. 그래서 박수근은 가난했지만 가난때문에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 같다. 가난하다고 모든 것이 불행한 것은 아니다. 부자도 나름대로 고민이 있고 불행한 경우도 있다. 가난한 자든 부자든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불행하게 바라보면 정말 그 자신은 불행한 것이다. 하지만 박수근은 가난한 자신을 불행하게 바라본 게 아닌 것 같다. 가난한 자신을 이해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그의 조용한 열정은 결실을 맺었고 지금 그는 유명해졌다. 하지만 고흐처럼 그가 살아있었을 때는 인정을 못받았다는 것이 아쉽다. 하긴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 사람들은 그림에 관심이 적었을 것이다. 그의 고객들은 주로 미국인들이었다고 한다.
박수근은 가난한 사람을 이해했고 사랑했다. 그들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지 않았다. 사람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그리고 자신의 일을 천천히 꾸준히 조용히 열정을 불태웠다. 요즘 박수근다운 사람을 점점 보기 힘든 것 같다.
이 책안에는 박수근의 그림이 상당히 많다. 저자는 그림을 비교하고 분석하면서 박수근의 그림에 대한 이해를 넓혀준다. 그림만 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5월 6일이 그의 기일이다. 이제 박수근의 그림이 달라보인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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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탄생 100주년 전시를 다녀왔다.전시를 보러 가기 전에는 화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생각 했다.그런데 오롯하게 한자리에 모아놓은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그동안 내가 좋아했던 것은 머리로 이해한 것을 마치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다는 착각의 발견이었다.해서 화가에 대해 다시 찬찬히 찾아볼 책들이 필요했다.몇해전 생일선물로 받아 두었던 화집도 다시 챙겨 보았지만,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이론에 대한 갈증이었다.<착한 그림 선한 화가 박수근>책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어렵지 않은 설명과 전시에서 눈독(?)들였던 그림들이 실려있었다는 이유때문이었다.
"수근 그림에서 부단한 반복은 보다 적절한 형태와 안정적인 구도 그리고 궁극적으로 보다 효과적인 표현을 얻기 위한 나름의 여정이었다.이 과정을 통해 수근은 그리고자 하는 소재의 구조를 파악하고 화면에 질서를 만들고 특유의 호흡이 긴 예술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130
닮은 듯한 그림을 반복적으로 그린 이유가 궁금했다.전시를 함께 본 지인들과의 대화 속에서 우린 그런 비슷한 그림들 때문에 위작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것은 아니였을까? 라는 이야기까지 했을 정도이니.궁금했다.책을 읽기 얼마전 방송에 출연한 아들 성남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하나의 그림을 그린후 또 그와 같은 그림을 요청하는 일이 많아,비슷한 그림을 그렸다는 말을 들었다.그럴수도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화가를 연구한 저자의 의견에도 왠지 공감이 간다.그러니까 얼핏 보면 같은 그림 같겠지만 조금씩 그림에는 변화가 있었을게다.눈을 크게 뜨고도 발견할 수 없을...오로지 화가 자신만이 알지 않았을까? 일반인들이 보았을때는 그저 같은 그림,혹은 닮은 그림이었을 그 속에 화가의 깊은 창작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니,다시 그림 하나하나를 찬찬히 들여다 보고 싶어진다. 화가에 대한 연구로 박사논문을 받은 저자의 글은 어렵지 않게 읽힌다.객관적 균형으로 화가에 대한 사실을 전하려고 애쓴 흔적이 엿보인다.화가에 대한 저자의 애정까지 숨길수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도록으로 만나는 것보다 더 쉬운 설명을 들었다.화가의 그림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할수 있었다. 나목이 상징하는 바,그림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 계기,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기 까지의 노력.그리고 이런 천재화가의 열정을 제대로 알아봐 주었던 밀러와 같은 후원자의 힘까지.<착한 그림,선한 화가>를 읽은 덕분에 화가에 대해 이제야 조금은 바로 이해를 하게 된 것 같아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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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형의 ‘착한 그림, 선한 화가 박수근’은 박수근이 아내가 된 김복순씨에게 한 청혼을 착한 청혼이라고 표현하는 대목으로부터 시작된다. 공주형은 박수근론으로 박사가 되었고 일간지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자로 미술평론을 하고 출강하고 있다.
박수근 화백은 1965년 52세로 “천국이 가까운 줄 알았는대 멀어, 멀어..”란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박수근은 경기도 포천 교회 묘지에 묻혔다가 고향 양구로 옮겨졌다. 박수근은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고 싶어 한 화가였다. 박수근은 미군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고 모은 돈으로 어렵게 창신동 집을 마련했다.
타계할 때까지 박수근의 그림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한 색은 흰색이었다. 박수근은 미국인 후원자였던 마거릿 밀러(Margaret Miller; 주한 미 대사관 문정관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흰색을 자주 언급했다. 박수근의 그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나무다. 석가에게 보리수가 있었고 뉴턴에게 사과나무가 있었듯 박수근에게는 느릅나무가 있었다.
화가를 꿈꾸었지만 어린 수근에게는 마땅한 화구가 없었다. 그래서 수근은 뽕나무 가지를 태워 직접 목탄을 만들기도 했다. 양구 보통학교 언덕에 있던 느릅나무를 보고 박수근은 훌륭한 화가를 꿈꾸었다. 초등학교가 학력의 전부인 박수근은 상심의 나날을 보냈다. 그런 박수근의 상심을 달래준 사람들이 해외의 인물들이었다.
밀러 부인은 박수근에게 “서울 화단에서 작가들과 경쟁하는 일이 힘들다는 사정은 알고 있지만 당신이 결국 앞서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낙심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언젠가 유명한 인물이 되리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썼다.
박수근은 후에 국전 심사위원이 되어 자신이 국전에서 정실(情實) 인사 때문에 떨어졌음을 알았다. 박수근은 국전 심사를 맡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생존의 전쟁이 시작된 그해 수근은 혜화동에서 화방을 운영하던 이상우의 주선으로 미군 범죄수사대에서 일을 시작했다.
수근은 페인트칠하는 노무자 대우를 받고 일했다. 178cm의 키에 건장한 체구를 가진 수근은 부두 노동을 하기도 했다. 이후 수근은 신세계 백화점의 미군 피엑스로 일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수근은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렸다. 아내는 박수근에게는 흰쌀로 정성껏 지은 밥을 내놓았지만 나머지 가족들에게는 피난민에게 배급되는 옥수수와 보리쌀로 지은 밥을 내놓았다.
박수근이 태어난 1914년은 최초의 근대식 미술교육을 받은 이들이 외국 유학에서 돌아와 서양화를 처음 소개하고 한국 최초의 미술단체인 서화협회가 발족하는 등 서양화가 이 땅에 뿌리 내리던 때였다. 12살 소년 박수근은 밀레(장프랑수아 밀레; 1814 - 1875)의 '만종(1857 - 1859년 사이 그림)'을 본 뒤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살바도르 달리(1904 - 1969)는 평화롭고 경건한 분위기의 그림 '만종'이 실은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농민 부부가 눈물의 기도를 올리는 슬프고도 무서운 그림이라고 주장했다. 1932년 만종을 관람하던 한 정신이상자가 갑자기 칼로 그림을 찢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후 미술관에서는 그림 복원작업을 계획하고 그림의 훼손 전 상태를 알기 위해 X선 촬영을 시도했다.
그 결과 감자 바구니 아래 관으로 추정되는 작은 나무상자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밀레 생존 당시 프랑스는 1840년대의 대기근, 1857년에서 1858년까지 이어진 경제공황 탓에 도심 노동자와 농민들의 삶이 매우 어려웠다.)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로 오해받으면서까지 피폐한 농촌의 모습을 그대로 담으려 했던 밀레가 장례식 장면을 그리려 했지만 사회적 반향을 고려해 감자바구니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추측했다. 나무관 하나만으로는 그림 전체에 대한 해석을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해석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다.
1940년대 박수근은 평양에 있었다. 춘천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미요시(三吉)가 평남도청 사회과장으로 이직하면서 마련해준 일자리 때문이었다. 그즈음 박수근은 흠모하던 이중섭도 만났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한 관심이 촉발된 것도 그때였다.
박수근은 받을 돈을 재촉하지 못하고 남에게 받은 것은 버스표 한 장이라도 꼭 갚았다. 가난한 화가 박수근의 그림 속 주인공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박수근은 생전에 인정받지 못한 화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타계 직전까지 그림을 단 한 점도 팔지 못한 것은 아니다.
박수근 그림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외국인들이었다. 마거릿 밀러, 마리아 핸더슨, 실리아 짐머맨 등이 박수근의 후원인들이었다. 박수근 그림은 생전에 이해받지 못했다. 박수근은 “나더러 똑같은 소재만 그린다고 평하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의 생활이 그런데 왜 그걸 모두 외면하려 하는가“라고 말했다. 박수근은 소도 그렸다.
1957년 박수근은 국전 낙선을 계기로 시작된 음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반복은 세상과 타협할 줄 몰랐던 수근이 세상의 이해를 구하기 위한 가장 떳떳한 수단이었고 수근이 그리고자 했던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에 다가가기 위한 가장 그다운 방법이었다.
수근은 이렇게 청혼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고는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박수근의 아내는 춘천여고를 졸업한 후 철원무진공사의 직원과 금화군의 수의사에게서 청혼이 들어왔지만 가난한 화가를 택했다. 수근은 종종 예술적 한계에 부딪혔다. 두 살 아래의 이중섭을 존경의 의미를 담아 형이라 불렀다. 수근은 바탕칠도 대충 하지 않았다. 수근이 처음부터 그림에 특유의 마티에르를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박수근의 바위 질감을 느끼게 하는 화강암의 효과를 나타내는 두꺼운 마티에르는 거칠지만 소박하다.
이 화풍의 시작은 박수근이 경주 남산의 자연풍경에 심취되어 화강암 속 마애불과 석탑에서 본인만의 작품 기법을 연구한 후 완성한 일명 ‘화강암 표면 같은 우툴두툴한 질감’의 마티에르'였다.(이코노미톡 뉴스 수록 기사 ‘박수근의 우툴두툴한 마티에르, 알고 보니 경주 마애불과 석탑이 원천’) 고향 양구의 화강암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