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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한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반야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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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한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반야의 길불가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것은 어느날 라디오를 통해 교양불교대학 학생모집 광고를 통해서라고 봐야겠다. 전부터 마음으론 친숙한 절집과 그 분위기에 사로잡혀 자주 찾았던 인연이 있어서 그랬는지 그날 이후 2년을 꼬박 일주일에 두 번씩 다녔다. 그 과정에서 불교교리를 비롯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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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한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반야의 길
불가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것은 어느날 라디오를 통해 교양불교대학 학생모집 광고를 통해서라고 봐야겠다. 전부터 마음으론 친숙한 절집과 그 분위기에 사로잡혀 자주 찾았던 인연이 있어서 그랬는지 그날 이후 2년을 꼬박 일주일에 두 번씩 다녔다. 그 과정에서 불교교리를 비롯하여 스님들과의 교류도 하게 되었다. 불교는 그렇게 종교로 보다는 학문적 호기심이 더 강하게 작용하여 나와 인연이 되었다. 여러 경전을 접하고 절집예절을 익히는 동안 늘 함께한 의문이 있었다. 스님들의 수행과 그 수행과정에 늘 함께하는 스승에 대한 관심이 그것이다. 그 영향이라고 해야 맞겠지만 그 후 지금까지 스승을 찾는 내 행보는 계속된다.

선불교의 1700공안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그때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은 말장난 같은 이야기를 듣고 뭔지 모를 이끌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부처님 열반 후 이천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자신 안에 내재해 있는 불성을 찾아 도를 이루려는 수행의 과정은 시대를 거쳐 오며 조금씩 모양세가 변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유효한 것은 자신의 깨달음이 아닐까 한다.
수행의 길을 걸어갔던, 지금도 용맹정진하고 있는 구도자들에게 깨달음을 얻게도 하고 곤란을 겪게도 했던 화두는 출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수행의 길에 있는 누구에게나 의미심장한 문제라 할 수 있다. 불립문자이라고 했던가? 어떻게 보면 1700공안의 세계는 나와는 다른 차원의 세상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깨달음의 고단한 길을 가는데 길잡이가 될 스승일수도 있지만 문자가 주는 한계에 갇혀 헤어나지 못할 깊은 수렁 같은 것이다.

원철 스님의 [할로 죽이고 방으로 살리고]는 출가 수행자가 아닌 일반인에게 선불교의 진수를 1700공안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수행의 길로 안내하는 도구로써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겠다. 할은 큰 고함소리로 꾸짖어 무명을 죽이고 방은 몽둥이질로 깨달음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똥막대기니, 무(無)자니, 이뭣고니 나로서는 무의미 할 것 같고,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공안을 통한 수행의 세계를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무소유로 세상에 걸리는 것 하나 없이 살아갈 것 같은 스님들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불가의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도 곁들인다.
생사불이라는 불가의 도리에 수행자가 임종했을 때 치르는 장례지치에 대한 이야기나 방편이라는 미명하에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는 모습, 중도라는 명분으로 원칙을 적당히 포기하는 모습 등은 제가 수행자의 눈으로 볼 때 방망이질이 적당한 처방이 아닐까 싶다.

[할로 죽이고 방으로 살리고]는 현실에 발 딛고 살아가는 중생들에겐 로망 같은 선불교의 1700 공안을 매개로 선불교의 역사와 더불어 수행의 길에 대해 친절한 안내서 역할을 하는 책이다. 적절한 비유와 대목대목 웃음이 나는 이야기로 어렵기만 한 화두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말한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반야의 길, 그 수행의 길에 발을 내 딛을까 말까 망설이고만 있는 중생에게 공안 하나하나 수행의 길에 스승의 역할이 얼마나 큰 존재인지 알게 하는 내용은 부럽기만 하다.

 

 



m*****8 2009.09.0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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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밖으로 나온 선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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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을 읽다보니 예전에 친구와 함께 본 영화가 떠오른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그당시에는 공안이니 화두니 알 턱이 없었고, 다만 메스컴에 아름다운 영상미와 감독의 칭찬이 연일 보도 되길래 시대의 흐름에 이영화를 안보면 자칭 문화인이라 는 자부심에 흠집이라도 날까 싶어 내내 졸음과 싸워가며 보고 극장믈 나오면서도 정작 왜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갔는지는 고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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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을 읽다보니 예전에 친구와 함께 본 영화가 떠오른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그당시에는 공안이니 화두니 알 턱이 없었고, 다만 메스컴에 아름다운 영상미와 감독의 칭찬이 연일 보도 되길래 시대의 흐름에 이영화를 안보면 자칭 문화인이라 는 자부심에 흠집이라도 날까 싶어 내내 졸음과 싸워가며 보고 극장믈 나오면서도 정작 왜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갔는지는 고사하고 그 뜻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어렵고 난해한 영화로 내머릿속에 여지껏 자리하고 있다.

 

우연히 접한 원철스님의 『할로 죽이고 방으로 살리고』를 통해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선불교에서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공안(화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달마가 이가 없기에 이를 보이기 싫어 꽉다문 입에 무서운 서양인을 닮은 달마도만이 남아 있는 이유란다. 그런 달마가 서양에서 선불교를 깨치러 동쪽으로 왔는데 왜 또 서쪽으로 돌아 갔을까? 이화두에 대한 답을 조주는 "뜰앞의 잣나무"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겐 "앞니에 털이 돋았다"라고도 대답 하였으며, 운문 선사께서는 "마른 똥 막대기"라하고 또 어떤 선사는 "신주 앞에 놓인 술잔"이라 하였다. 그 뿐아니라 아예 "서쪽에서 온 뜻이 없다"고 답하신 선사 마져 있으니 어느것이 정답인지 알길이 없으며, 당체 무슨 소리인지 선문답이란 것이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나 그 뜻을 헤아릴수 있고 보통 조차도 안되는 사람에게는 헤아릴 길이 없음인지, 영화의 내용 만큼이나 난해하고 어렵긴 매한 가지다.

 

선불교의 어렵다는 선입관을 조금이나마 누그려 뜨릴수 있었던건 명성과 권위로 이미 신화가 되어버린 화두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원철 스님의 저서『할로 죽이고 방으로 살리고』를 읽어 봄으로써, 선불교의 가르침에 쉽게 다가갈 수 있었고

선어록 중에서 핵심이 되는 중요한 공안을 골라, 재미있게 풀이하고 자칫 지루하기 쉽고 어려운 부분들은 자세한 그 시대의 배경까지 꼼꼼하게 설명하고, 스님 특유의 맛깔스런 입담과 한컷의 만화로 대중들이 쉽게 선문답, 선지식과 접할수 있도록한 배려한 덕이라 하겠다.

 

 어록 해설에 의한 공안은 이미 사구(死句)이며 수행자 자신의 사무침에 의하여 드는 화두가 진정 활구(活句)이다. 조주를 찿아간 수행자에게 '뜰앞의 잣나무'가 활구였다면 '조주록'을 펼쳐 수행하는 다른이에겐 사구일 것이다. '뜰앞의 잣나무'가 조주를 찿아간 어느 수행자의 눈에 비친 잣나무처럼 그렇게 누군가에게 다가올때 비로서 활구로 여전히 생명력을 간직할 것이다. "앞니에 털이 났다 (板齒生毛)"라 하신 말씀 또한 달마대사가 늘 벽만 바라보고 양치질하는것 조차 잊고 수행하니 치아가 지져분해 이빨에 곰팡이가 필 지경이라는 말일게다. 얼마나 치열하게 수행하였는지 '벽관 바라문'으로 뜻을 깨칠수 있었겠는가?

 

성철 선사께서 "문자를 보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서 사구가 되느냐 활구가 되느냐 하는것은 문자 자체의 허물이 아니라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문제라 하심이 십분 이해가 됨이다.  

 

평소 어렵다고 펼쳐 보기는것 자체가 엄두가 나지 않는 선어록들. 속세와는 멀게 여겨졌던 선문답들, 갑자기 고함을 치고 (할) 몽둥이를 날려(방) 깨우침을 주시던 선사들의 기이한 행동들 조차 친근해졌다. 그들의 엉뚱하고 황당함 속에 감추어진 치열한 고민과 탁월한 안목이 이룬 지혜의 깨침을 한마디 함축된 말에 보여준다. 그들의 선지식들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한발 앞으로 다가옴을 느낄수 있었다.

이책이 선불교의 세계에 일상의 생명을 불어 넣어 경전속의 선불교가 일상으로 나와 대중과 한층 가까이 할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k******2 2009.08.18. 신고 공감 0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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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써 번뇌를 죽이고 방으로써 반야를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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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써 번뇌를 죽이고 방으로써 반야를 살린다. 파이립破而立이라고 했다. 낡은 틀을 허물지 않으면 도를 세울 수 없다. 집착이 깨지고 번뇌가 사라지고 지식이 무너지는 순간에야 한 소식 들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소식 깨쳤다고 당장 천하통이 되는 것은 아니며, 깨침의 경지도 절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돈오돈수보다는 돈오점수쪽에 수행의 가치를 둔다. 왜냐, 돈오돈수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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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로써 번뇌를 죽이고 방으로써 반야를 살린다. 파이립破而立이라고 했다. 낡은 틀을 허물지 않으면 도를 세울 수 없다. 집착이 깨지고 번뇌가 사라지고 지식이 무너지는 순간에야 한 소식 들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소식 깨쳤다고 당장 천하통이 되는 것은 아니며, 깨침의 경지도 절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돈오돈수보다는 돈오점수쪽에 수행의 가치를 둔다. 왜냐, 돈오돈수의 이후의 삶은 생각조차 하기 싫기 때문이다. 단 한번의 깨침으로 만사를 해결하려는 그런 고약한 심보 자체도 문제다. 「도고일척道高一尺 마고일장魔高一丈이라 했다. 내가 깨친 경지만큼 상대적으로 방해하는 장애물도 커지고 깊어진다. 깨쳤다고 당장에 고해苦海를 벗어나는 법도 아니다. 새로운 버전의 고해가 기다리고 있기에.

선불교는 법문을 통해 탐진치를 버리고 지혜를 깨치는 것을 중시한다. 분별심이 없다면 지식이 쌓이지 않는데 분별심을 버리라 한다. 문자가 없으면 이해가 쉽지 않은데 문자에 얽매이지 말라 한다. 선악, 시비, 분별과 죽은 문자에 집착할 때가 바로 할과 방이 필요한 때다. 활자중독증이란 말 그대로 책에 중독된 나에게「심불반조心不返照 간경무익看經無益」이라는 옥언이 유난히 눈에 밟힌다. 얽매이지 않은 본마음이 공부의 기틀이자 결과임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 싶다.

선불교는 성속을 구분하지 않고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는다. 차를 마시는 것과 참선이 다르지않다는 「다선일여」라는 말처럼, 선불교는 일상의 삶에 녹아든 일상日常의 종교요, 시시각각 왜라는 의심을 참구하는 무상無常의 종교다. 저자의 말처럼, 의심이 클수록 깨달음도 깊어지는 법이다. 학문의 시작은 언제나 의문법이다. 범람하는 정보 홍수 속에 파묻힌 현대인에게 참선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무념무상무아의 시작이 의심에 있기 때문이다.

부처, 가섭, 달마, 혜능 등 33조사의 법맥을 통해 선종의 1.700개 공안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오랫동안 선어록을 연구해온 원철 스님은 선불교의 공안 중에서 가급적이면 오늘날에도 유용한 대표적인 활공안을 소개한다. 공안이 선사와 선자나 선승과 세속인의 문답법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동문서답식의 화두선은 당사자 이외의 사람에겐 수수께끼와 같다. 부처란 마른 똥 막대기라는 답변처럼 시니컬한 냉소마저 깃들어 있다. 공안이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맥락의 부재다. 그 때 그 장소에서 그러한 인물을 앞두고 그런 말이 나온 맥락이 사라져 버려 공안이 더 애매하게 느껴지기 쉽다. 때문에 그러한 공안의 사라진 맥락을 오늘날 다시 재구성하여 되살리려는 시도는 언제나 환영할 만한 일이며 그 작업 자체가 하나의 수행일 것이다.

z***a 2009.08.16.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