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회 수상작 편혜영의 첫 장편소설인 『재와 빨강』의 압축 버전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동안 읽은 편혜영의 많은 단편 중 단연 최고라고는 할 수 없을 텐데, 『재와 빨강』을 읽고 있으니 이 작품이 더욱 새삼스럽다. 개인적으로는 『재와 빨강』보다는 이 작품이 더 마음에 든다. 칭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편혜영은 아직까지는 장편보다는 단편에 탁월한 것 같다. 수상작가 자선작 이 작품 역시 『서울, 어느 날 소설이 되다』에서 이미 읽었던 작품이다. 편혜영의 여느 단편들과 비슷한(혹은 동일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작품인데, 『아오이 가든』보다는『사육장 쪽으로』에 가깝다. 기수상작가 자선작 인생을 계절로 표현하자면 아마도 2-30대는 인생의 ‘여름’이라고 할 수 있을 거다. 가장 뜨겁고 열정적인 계절. 돌아보면 그런데 그 당시에는 절대로 그걸 모르는 시절. 왜 그렇게 남루하게만 느껴지는지. 그 시절을 살아올 땐. ‘누리기’보다는 ‘견뎌야’할 것이 많다고 여겨지는. 찬란함이 사라진, 퇴색함만 있는, 너무 일찍 쓸쓸함을 알아버린 ‘여름’을 사는 당신에게 선물하고 싶은 작품. 아마 아련한 추억 한 조각이 당신의 심장을 지필 것이다. 김애란은… 항상 20대일 것 같다. 그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다른 여성작가들과 달리 공감의 폭이 큰. 어느 한 곳에 한정되거나 얽매이지 않고. 그래서 좋은. - 그래, 그래. 넌 참으로 좋은 아이구나. 단단히 묶인 신발 끈 같은 좋은 아이란 말이다. 여자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세상은 이어달리기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는 것을 함께 믿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똑같이 생각하는 거란다. 왠지 알지? 나무 안이나 자동차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몰라도 우리는 겉만 보고도 저것이 나무인지 또 자동차인지를 알 수 있잖니? 그러니 안을 몰라도 잘 살 수 있단다. 삶은 그런 거란다. 너는 그저 다른 사람들이 주는 바통을 받아 다른 사람에게 건네주면 되는 거란다. 왜 그럴까? 하는 네 생각은 버리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살면 된단다. 그리고 넌 바통만 전해주면 된단다. 바통이 무언지 알 필요가 없단다. 그냥 전해주면 된단다. 그게 삶이란다. - 누구나 한번쯤은 길을 잃겠지. 더군다나 이렇게 큰 도시라면 말이야. 네 잘못이 아니란다, 얘야. 누구나 한번쯤 길을 잃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란다, 얘야(96-97).
‘웃는 동안’ 네 친구들에게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작은 소파 하나로도 이렇게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임순례 감독의 <세친구>를 떠오르게 하는. 나는 그 영화를 비오는 날 조조로 종로에서 봤었는데, 그 날의 분위기와 그 영화가 너무 걸맞아서 오래도록 잊어지지가 않는다. 윤성희의 ‘웃는 동안’도 그렇다.
이장욱의 ‘고백의 제왕’은 여러 루트를 통해서 적어도 세 번 이상 읽은 것 같다. 이런 저런 단편집에 많이 실린다는 건 작가의 역량이나 작품의 수준이 인정받는 증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즐거운 나의 집’은 노래 속에나 있다는 걸 알게 될 즈음, 사람은 철이 드는 걸까? 하지만 지긋지긋해하면서도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명제에서 스스로 쉽게 벗어나지도 못하는 것도 인간이다.
모녀지간의 애증은 내가 잘 공감하지 못하는 주제 중 하나이다. 내가 안 그러고 살았기 때문인지. 언젠가 백화점에서 정말 미친 듯이 욕까지 하면서 싸우는 모녀를 봤는데(엄마가 딸에게 “미친년” 같은 육두문자를 망설임없이 날렸다. 정말 증오하듯이. 딸 역시 마찬가지였고. 참으로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풍경), 이 작품 속 모녀도 그렇다. 엄마가 아끼던 식기세트를 거침없이 집어던지는 딸.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그렇듯 딸 역시 이런 방식 외에는 엄마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그렇지만 문제는 ‘증’의 이면엔 ‘애’가 있다는 것. 따라서 모녀관계 역시 ‘칼로 물베기’인 걸까. 이 명제에서 스스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게 역시 인간인가 보다.
이 작가는 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했다는데, 그걸 모르고 작품을 읽었더라도 그럴 거라 짐작할 수 있을 만하다. 바늘로 우물을 파듯 궁구하기. 이 단편집의 경우 ‘내가 만난 편혜영’이 무척 돋보인다. 작가들이 바라본 작가라는 컨셉도 맘에 들거니와 애정하는 작가에 대해 독자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호기심도 일정 부분 해결할 수 있다. 두 글을 읽고 보면 편혜영이라는 작가가 한결 가깝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거기에 대해 김애란이라는 작가에 대해 반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친밀하고 가깝게 한 인간을 묘사할 수 있다는 건 그 사람뿐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졌다는 것이니깐. 김애란이 쓴 ‘내가 만난 편혜영 1’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아주 멋진 작품이다. |
|
토끼의 묘는 현대 인간의 무료한 일상사의 반복과 의미없는 인간관계, 대량 복제된 것 같은 사람과 사물의 모습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무게감 없는 존재인지를 이 소설은 아주 조용하면서도 공포스럽게 말한다. 주목할만한 주인공의 행동과 대사도 없고 배경에 대한 치밀한 묘사도 없는, 그렇다고 불가분의 갈등구조가 첨예하게 대립된 소설도 아니다. '그'라는 인물을 통해 현대인의 복제되고 의미없는 삶을 조명한다.
우연히 상사로부터 인사명령을 받아 어느 도시로 파견업무를 나가고, 집 주변의 공원에서 버려진 토끼 한 마리를 데려다가 키우기 시작한다. 야성을 잃은 집토끼는 사육된 애완용이다. 그의 업무는 지극히 단순하다. 그 도시의 정보를 탐색하고 약간의 가공과 편집을 거쳐 report로 만들고 제출한다.
서식을 작성할 때면 그는 자신이 교무실에 남아 반성문을 쓰는 학생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매일 반복하는 자료를 검색하는 일이나 서식을 작성하는 일은 똑같은 말을 종이 가득 적으면서 진심이 담기지 않은 사과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의 업무 담당자는 하루의 생산물인 report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단지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는 담당자가 기분이나 서류 상태에 상관없이 매번 똑같이 웃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조차 정해진 업무 매뉴얼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했다. 담당자는 그가 돌아서기만 하면 책상 오른쪽에 높게 쌓인 서류더미 위에 방금 그에게서 받은 서류를 툭 올려 놓았다.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검은색 수트와 흰색 셔츠를 동일하게 입은 복제된 인간군상들.
직원들은 기본적으로 검정색 재킷에 흰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재킷을 입고 있거나 벗고 있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흑백의 바둑알처럼 보였다.
그들은 서로간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 묵묵히 자신의 공간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며 묵묵히 일만 할 뿐이다. 서로간에 주고받는 대사도 없다. 그들 대부분은 이 도시에 파견된 인간들이다. 어느 날 그가 살고 있는 도시에 폭력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일순 긴장감이 돈다. 그러나 그 폭력은 이웃에 대한 의심이라는 또다른 폭력을 낳고 현대인의 단절을 부추긴다. 그 도시에서 의미없는 업무를 보던 그는 상사에게 묻고 싶은 애기가 많지만 그 상사는 무단결근상태이고 접촉할 수 없다. 결국 그는 6개월이라는 파견업무가 끝나고 후배에게 업무를 인숙인계하고 떠날 준비를 한다. 그러나 후임자가 오는 첫날 그는 결근을 한다. 이미 기계화된 그는 방 안에서 직장에서와 했던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그것이 그의 존재방식인 셈이다. 그의 상사와 같이 무단 결석을 해도 급여날에는 월급이 이체되어 있다.
그는 책상에 앉아 회사에서 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도시에 관한 정보를 찾았고 검색한 정보를 정리하여 서식을 만들었다.
사무실에 있던 습관를 버리지 못하고 하루에 다섯 번씩 벌떡 일어났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후배도 자신의 방문앞에서 노크를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상대방과 관계를 형성해야되는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본인의 업무만 처리하면 될 뿐이다.
이 소설은 현대 인간의 존엄에 대한 무가치성과 언제든지 기계부품처럼 대체되고 폐기되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토끼의 상징성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점이다. 길들여지고 귀찮아지면 버려지는 일회용의 목숨이 우리들인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토끼털이 묻은 손을 탁탁 턴 후 덜덜거리는 트렁크를 끌고 공원을 빠져나가면서 생각했다. 세상에 널린 게 버려진 애완동물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