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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자들의 도시 나에게도 그런 상황이 닥쳐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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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하면 생각나는 것은 왈츠, 비엔나, 모짜르트, 도나우 강, 사운드 오브 뮤직의 멋지다 못해 푹 빠져버리고 싶은 경관들...모든 것이 아름답고 즐겁고 유쾌한 것들 뿐입니다. 동양인들에 있어 오스트리아는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나라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미스테리 소설은 사람이 2명이상 있는 곳은 어디에서든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려줍니다. 그토록 아름답게만 보였던 비엔나에도 사람들이 살고, 세상의 어느 곳이 그렇듯 추악한 단면, 부패하고 모순되는 사회의 비뚤어진 모습이 있음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소설...바로 패배자들의 도시입니다.
릴리안 파싱거는 오스트리아의 여류 소설가인데 솔직히 굉장히 생소한 작가입니다. 그녀의 이 작품은 독일추리작가협회가 선정하는 프리드리히 글라우저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솔직히 독일어권 미스테리에는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는지라 작가는 물론 프리드리히 글라우저가 어떤 사람인지도 도통 알수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공부를 더 해야할 듯 합니다.
작품의 분위기를 보면 릴리안 파싱거라는 작가의 시각은 대단히 현실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치부를 드러내는데 없어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냉소적인 시각을 가진 듯 합니다. 미스테리이 지만 후더닛으로 대표되는 영국 미스테리와는 완전 다르고, 미국식 크라임 픽션과도 완전 틀린 상당히 독자적인 형식입니다.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순수한 문학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그만큼 미스테리의 면은 상대적이로 축소되어 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무엇인가가 한방 크게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견고히 유지하고 있는 측면에서는 분명 미스테리 소설이 맞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 마티아스의 1인칭 시점, 그리고 정말 현실적인 유부녀 탐정 엠마의 3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의 구조는 미묘하게 닿으면서도 또 어떻게 보면 평행선을 긋는 별도의 스토리처럼 전개가 되며, 결국에는 사건이 해결되어가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어차피 범인이 누구냐를 밝히는 이런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제 생각에는 마티아스의 이야기와 엠마의 이야기를 별도로 음미하는 것이 책 읽는데 좀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용은 상당히 충격적이며 무겁습니다. 입양가족의 성폭력, 노인문제, 흔들리는 성정체성,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 여기에 나치에 대한 과거의식 등등. 작가는 미스테리 소설의 형식을 빌어 자기가 하고 싶은 모든 말들을 쏟아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간 상당히 힘들 수가 있으니 차분히 음미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읽어나가면 의외로 재미있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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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추리작가협회 '프리드리히 글라우저 상'이라는 조금은 생소한 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해서 언제 사건이 일어나고 어떻게 전개되는지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사건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 다소 황당하지만 나름 독특한 작품이다. 독일 추리작가협회라는 말에 나는 자꾸 배경인 비엔나를 독일로 착각을 했다. 오스트리아인데도. 이렇게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마티아스가 여자친구 트릭시와 싸우고 벌거벗은 채 나오면서 시작된다. 그는 기타도 잘 치지 못하면서 기타를 소중히 여기고 늘 노래를 부른다. 여자에 대한 아쉬움이 없는 마티아스는 기타를 던진 것에 화가 나 정처없이 돌아다니다가 동물원에 들르는데 거기에서 자살 시도를 한 벨라를 발견하고 그녀의 생명의 은인이 된다. 그리고 벨라는 마티아스를 찾아와서 그들은 연인이 된다.
이렇게 마티아스가 일인칭 화자로 등장해서 하나의 이야기를 끌고 가는 한편에서 박사 학위까지 있는, 하지만 대학에서 학생수 미달로 잘린 역사학자 엠마가 앞에 새로운 미용실이 생기는 바람에 망한 미용사 믹과 함께 탐정 사무소를 차린다. 그들이 하는 일은 그저 아프다고 병가를 낸 노동자가 그 기간에 일을 하는 건 아닌지 감시하는 일, 바람 피우는 남편의 현장 잡기, 등 소소한 일들이다. 물론 이마저도 꽃가루 알러지에 뚱뚱한 몸에 힘겨워하며 놓치기 일수인 조수 믹에의해 지지부진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때 한 의뢰인이 입양을 보낸 아들을 찾는 의뢰를 하는데 그가 바로 마티아스다. 이렇게 그들 사이에는 접점을 갖게 된다.
끈적끈적한 더위가 달라붙어 찜찜한 기분을 털어버릴 수 없는 그런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비라도 한바탕 퍼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 딱히 추리소설이라고 정해서 말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추리 소설, 범죄소설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경계가 무너진 것도 아니다. 이 작품은 어떻게 보면 카뮈의 <이방인>이 연상되는 작품이다. 카뮈의 <이방인>을 추리소설이라고 본다면 볼 수도 있다. 살인이 있고 범죄자를 잡고 재판을 하니까. 이런 내 관점에서 보면 살인과 범죄가 등장하는 모든 작품은 추리소설이다. 경계가 무너지고 모호해진 것이 아니라 원래 그렇게도 있었던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독특한 것은 작품이 마치 두 가지 별 개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지게 쓰였다는 점이다. 마티아스를 중심으로 한 조마조마하게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같은 이야기 전개가 한편있고, 그 변두리에 그 이야기와 스쳐 지나가면서 무심하게 자신들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엠마와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로 엇갈려 진행된다. 마티아스의 이야기를 접하면 답답하고 서글프고 찜찜하고 엠마의 이야기가 나오면 웃기고 풀어지고 사건의 중심에서 벗어난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대신 인간의 무심함에 죄책감이 더 들게 되지만. 마지막 엔딩도 두 가지로 나뉜다. 그들의 스침은 거대했지만 누구도 인식하지 못하고 각자의 길을 가는 두 이방인의 이야기로. 현대인은 이방인들일 뿐이다. 관계는 한정적이고 소통은 일방적이다. 결국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것이었던 것 같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면 누구나 삐딱한 시선으로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가끔 욕도 나오고 화도 나고 폭력적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만 그런 '나'가 객관성을 띄게 되면 그런 것이 조금 완화된다. 그런 이유로 마티아스는 '나'로 등장하고 '엠마'는 나로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엠마도 '나'가 되면 마티아스처럼 불만이 생길 거리는 많다. 믹도 그렇고 필립도 그렇고 엠마의 주변인 누구나 마찬가지다. '나'만 봐도 이 도시 비엔나는 패배자 마티아스의 도시다. 엠마의 망령난 나치 시대를 살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 또한 나치의 패배한 도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엠마의 탐정으로서의 자질 부족으로 목숨을 잃게 되는 할머니에게도 패배한 도시다. 누구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산다는 게 결국 그런 패배에 익숙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패배에 길들여지는 것이야말로 진짜 패배자들의 도시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의미심장한 제목과 함께 나른한 여름 또 다른 뫼르소를 본 느낌을 준 작품이었다. 조금은 나약하고 지금의 시대에 맞게 패배한 젊은이가 등장하는. 뫼르소는 아랍인을 살해하지만 믹은 무슬림이 되고자 하는 그런 시대의 이야기.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 있던 시대와 부조리에 대한 이야기조차 버겁게 되어 버린 시대의 모습을 담은 작품. 하지만 여전히 태양이 뜨겁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