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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십 년 전에 KBS 1TV에서 <낭독의 발견>이란 프로그램을 주중 밤 시간대에 방영한 적 있다. '낭독'은 새삼스럽게 누구에 의해 '발견'될 대상은 아니고, 대개 귀족이나 식자층의 모임, 문화에서 '독서'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지던 절차, 의식, 그리고 교양의 본체였다. 프랑스어가 그토록이나 유럽 전역에서 발화와 구사와 감상(...)의 목적으로 선망되던 건, 이 언어로 쓰여진 명작이라야 낭독의 쾌감에 최적화된 소재라는 데에 거의 컨센서스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물론 해당 언어로 이뤄지는 낭독이란, 청해(즉 output)의 단계뿐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타인에게 유효한(그를 넘어 상쾌한) 퍼포먼스(즉 input)을 해 줄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그 참된 가치를 운위할 자격이 있는 거지, 어디서 주워 들은 풍문이나 속은 텅 빈 채 허황되고 과장(대부분 다 틀린, 근본 없이 제멋대로 재구성되기까지)된 자기과시에 그친다면 그건 합리화를 일삼는 모집인에나 어울리는 끔찍하고 비천한 광란일 뿐이다.
아무튼 '낭독'이란 그저 훈련이나, 잦은 문화적 '노출'만으로는 갖춰질 수 없는 자질, 자격이라든가, 아예 천부적 재능의 영역으로까지 격상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어느 독일 작가의 머리에 느닷 찾아들기라도 했는지, 한때 '해리 포터 시리즈를 계승하는 발랄한 판타지'라며 한국의 규모 큰 출판사 몇 군데에서 엄청 띄워대던 프랜차이즈가 있었다. 예스에서 '코넬리아 푼케'로 찾아 보면 여러 작품들이 검색될 텐데, 다들 현재 품절, 절판이다. 여튼 판타지 장르라는 게 대개는, 순수한 마음을 갖고(대부분 애 키우는 학부형들 입장에서) 읽어 보면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재미는 있으므로, 흥미가 생겨 찾아 읽고 그 세계에 몰입해 보겠다면 말릴 이유는 조금도 없다. 그야말로, 독자의 선한 마음이 이해하는 수준에 그 텍스트의 깊이가 의존된다거나, 새로이 재규정되는 셈이다(쉽게 말해, 읽는 독자가 감동을 받았다거나 마음이 깨끗해지면 원 텍스트의 완성도에 무관하게 이 장르에서는 그게 명작이라는 뜻).
'잉크하트'는 자기지시적으로 구축된 픽션 구조이다. 이 작 제목이 '잉크하트'일 뿐 아니라, 이 작품 속에서 그 모든 재앙과 소동을 유발한 걸로 설정된, '실패한 3류 판타지'의 제목이 또한 '잉크하트'인데, 문제는 그 작중작에 등장한 많은 캐릭터들이 작품 밖(우리가 보는 이 영화, 혹은 소설 속에서는 '여전히 작품 안')으로 불려나옴으로써, 액자가 허물어지고 메타와 원판이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다. 낭독이 정말 이 판타지에서 설정한(혹은 원작자 푼케가 과대평가한) 만큼이나 '마력'을 가진 행위, 의식이라면, 극 밖에서 지켜보는 우리들도 화면 안으로 뛰어들어가선 '저기... 이 대목에선 이 책을 읽(어서 그 안의 캐릭터들과 상황을 밖으로 빼오)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겠는데요?'라며 전술적 컨설팅을 해 주겠건만 말이다(이게 안 되는 걸 보니, '낭독'은 생각보다 별 것 아닌 뻘짓인가 봄. 안 되잖아? 킁).
'잉크하트'는 작중에서 정말로 실패한 3류 판타지가 맞다. 그 증거로, 이 작이 성공했다면 주인공 모티머(브랜든 프레이저 扮)가, 실종된 아내를 찾아 그 소설을 물경 9년 동안이나 찾아헤맬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베스트셀러라면 현재까지도 절판되지 않고 팔리며, 중박만 쳤더라도 헌책방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 그 자체가 삼류 작가에 대한 자체 풍자이다(실패한 회사원, 실패한 치킨집 사장이 많은 것보다도 더, 그 집단 안에서 실패한 작가들의 비중이 성공한 극소수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기 마련이다. 비교 자체가 성립되질 않는다).
애써 찾아낸 그 작가 페놀리오라는 영감도, 곤궁하게 사는 걸로 보일 뿐 아니라 성취한 문인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정신적 여유가 전혀 안 보이고, 조급하며 (아무도 인정 안 하는) 자기 도취에 빠졌을 뿐 아니라 입이 싸기까지 하다. '입이 싼 것'은 진짜 문제인데, 첫째 더스트핑거(자기가 만든 피조물 중 하나)에게 그의 비극적 운명을 알려주기까지 했고, 둘째 카프리콘 등 못된 캐릭터(를 넘어 실존의 악당으로 진화)에게 매기의 비밀을 누설해 큰 위험(이 영감이 입만 다물었으면 일이 그렇게까지 번지지 않았을 듯)을 초래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창조한 세계였건만, 성숙한 정신적 자질을 전혀 못 갖춘 탓에 그 세계를 망치고, 심지어 자신이 창조하지 않은, 원 소속의 세계(여기서 자신은 아주 미미한 위상일 뿐)까지도 망치기 일보 직전이다. '미숙한 창조주'의 모티브에 대해서는 그간 여러 작품이 이를 다룬 바 있다. 페놀리오가 실패한 작가, 아니 실패한 인간이라는 점은, 결말에 가서 '실버텅' 매기에게 '나도 함께 보내 줘!'라고 부탁하는 대목에서도 확인된다. 사람은 현재가 행복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자신이 원래 소속된 세상에 융화되어야 하고, 그곳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얼마나 실패한 인생이었으면, 낭독의 마법으로 다른 세계에 곧장 꽂혀 소속되기까지 했겠는가? (어딘지는 모름. 잉크하트 작품 속 우주는 아니었을 듯 - 거기 가면 바로 죽을)
이 감독이 옛날 사람이라서, 감성이 꽤 낡은 탓에 군더더기가 많고 진행이 느리다. 그래서 어린 관객들이 보기엔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만하다. 이분은 자신이 채 이해하지 못한 소재에 대해 여러 장광설로 무지를 보충하며, 대신 꽤 세련되긴 한 비주얼 구현 센스로 그 느린 템포를 커버(가 되긴 하나 근데?)하려 든다는 점은, 작년 12월 27일에 쓴 <해커스> 리뷰에서도 언급한 적 있다. 각본도 엉성한데(원작과는 큰 차이가 남. 그렇다고 원작이 치밀한 구성이라는 뜻은 아님) 예컨대 모티머가 왜 처음부터 원작자 페놀리오를 다시 찾을 생각을 안 하고 9년 동안이나 훨씬 가망없는 헌책 물색에 나섰는지는 진정 영문을 모를 뿐이다(낭독만 잘했지 머리가 바보라서?). 오히려 그 딸내미 매기가 진상을 다 알고 나선, '헌책 찾으러 다닌다고 무슨 희망이 있었나요? 9년이나 지났으면 엄마가 그 세계에서 과연 살아나 있을지 어떻게 장담하나요?'라고 쏘아붙이는 장면은, 진짜 문제의 핵심은 비껴갔어도 이 꼬마가 그 아버지보다야 훨씬 현실감각을 갖췄음을 드러낸다. 어쩌면 영화(원작 말고)는 매기의 성장 소설로 읽어야 그나마 건설적인 의미가 갖춰질지도 모르겠다(캐릭터들이고 이모할머니고 엄마고 아빠고 모두 환상!).

알리바바는 아니고 40인의 도적떼 멤버 중 한 분(ㅋ)이라는 파리드 역의 라피 개브론은 예전 <스타더스트>에 나온 제이 데이빗슨하고 좀 닮지 않았나? 이분은 이국적인 용모(분장도 한몫함) 때문에 진짜 저기 메소포타미아 태생이기라도 한가 오해를 부르겠지만 전혀 아니고, 영국 유대계 초 명문가 자제분임. 마지막에 더스트핑거를 쫓아가는 대목이 왠지 이상한 연상(폴 베터니는 예전 <뷰티풀 마인드>에서 '그런 역'도 맡은 적 있음)을 부르기도 하지만, 감독이 그런 점에서는 꽤나 섬세한 듯, 품에 매기의 사진을 간직했다고 쓸데없이 주석을 달고 있음. 그런 걸 떠나, 이 작은 차라리 파리드가 '자신의 성장을 위해' 영원한 모험을 떠난다는 쪽으로 결말을 지었어야 여운이 남는 거임. 마지막에 소녀와 주저앉으면 지금까지의 이 소동이 다 뭐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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