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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본디 상당히 진지한 배우였다. 진지하다는 형용의 카테고리로는 표현이 부족하고, 모범생과 클래식 연주자의 두 써클 사이를 부지런히 넘나든 예술가였다고 봐 줘도 된다. 문제는, 어느날 그가 세상의 리얼리티에 대한 돌연 각성을 보여, 액션과 오락, 그리고 타락한 소통 쪽으로 스탠스를 전환했다는 데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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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결정론을 믿는냐 비결정론을 믿느냐는 개인의 취향이지만 많은 미디어매체들은 교묘하게 자신들의 믿음 쪽으로 사람들을 끌고 가려는 경향이 있다. 나는 비결정론을 믿는 쪽이고, 우리의 삶은 많은 우연의 순간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종교의 믿음에도 나는 아직 가까이 다가가 보지 못했다. 신보다는 인간이 중심이고, 미래보다는 현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 맹신주의보다는 신비주의 경향이 많긴 하지만 신이나 구원 따위에 마음을 뺏겨 본 적이 없다. 더군다나 아담의 사과에 깃들어 있는 죄의식 따위는 원래부터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깟 사과 하나 따먹었다고 전 인류가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죄의식이라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원초적인 죄의식이라는건 원천적인 인간의 억압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신화의 거대화가 종교라고 생각하므로 현재의 삶이 아닌 내세의 삶을 강조하는 견해는 적어도 내 취향으로는 참 웃기는 일 중의 하나다. 그러나 미래가 예정되어 있다면? 인간의 운명도 모두 결정되어 있어 그대로 되는 수밖에 없다면? 영화 <노잉(knowing)>은 바로 이 미래의 예언을 그린 영화다. 시골 어느 초등학교에서 타임캡슐을 묻는데 그 학교의 한 소녀가 숫자를 가득 적은 종이 하나를 넣는다. 50년 후, 그 학교에서는 타임캡슐을 캐내는데 숫자를 적은 종이는 천체물리학자 존의 아들 캘럽의 손에 들어간다. 우연히 그 숫자를 해독해 본 존은 그 숫자가 지난 50년동안 지구에서 일어났던 각종 재앙의 날짜와 위치, 사망자수를 적은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몇 개의 예언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나 인간의 힘으로 그 예언을 막을 수가 없다. 그 숫자의 마지막에 쓰여진 EE라는 글자가 전 인류의 멸망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된 존은 자신의 전공인 천체의 변화를 통해 태양 폭발을 알게 되고 그 여파로 지구가 불타 버릴 것을 알게 된다. 지금까지의 모든 예언이 실행되었기 때문에 그 예언 역시 실행될 것을 의심하지 않는 존 앞에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캘럽이 메신저라 부르는 그들은 캘럽의 주위를 떠돌면서 캘럽과 그의 여자친구를 데려가려 한다. 지구가 점점 더워지고 숫자판에 쓰여진 예언에 따라 지구의 재난이 가까워지자 존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마지막 남은 숫자를 해독하는데 그 숫자에 쓰여진 좌표가 그들의 구원의 장소가 됨을 알게 된다. 메신저들이 나타나 캘럽과 여자친구를 그 장소로 데려가고 곧바로 따라간 존은 메신저들에게 선택된 사람은 자신을 제외한 아들 캘럽과 여자친구임을 알고 아들 캘럽을 보낸다. 곧이어 불로 전 지구는 멸망하고 캘럽과 여자친구는 다른 별에 내려 새로운 삶을 이어간다. 영화는 뻔한 스토리이긴 하지만 재미있고, 화면을 가득채우는 스펙터클은 웅장하다. 과연 어떤 식으로 영화의 끝을 마무리할지 궁금해서 스토리를 따라갔는데 결국 미국식 결론이 내려졌다. 선택된 사람에게 구원이 내려지고, 나머지 사람은 멸망하게 된다는 것, 마치 성경의 노아의 방주처럼 그때는 물로 망했지만 영화에서는 불로 망한다는 것만 다를뿐 스토리는 같다. 하늘에서 비행체가 내려오는 영상은 마치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구원의 손을 뻗치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종교, 특히 기독교계통의 종교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내가 볼때 이 영화의 결말은 그래서 좀 불쾌하다. 경험한 것만을 믿고 검증 가능한 것만을 인정하는 과학자가 예언을 믿으며 구원에 손을 내미는 것은 지금의 모든 과학적인 가치를 뒤집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다른 종교였다면, 어떤 형식의 결말을 내렸을까를 생각한다. 미국은 과학지상주의이면서 감정보다 이성이 더 지배하는 나라이지만 아직도 학교에서는 진화론을 가르칠지 창조론을 가르칠지를 주마다 선택하게 하는 나라다. 순환적인 시간을 믿느냐, 아니면 직선적인 시간을 믿는가는 종교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난다. 불교는 순환적인 시간을 믿지만 기독교는 직선적인 시간을 믿는다. 기독교에서는 구원이 이루어지는 그 날을 시간의 끝으로 본다. 철저히 신 중심적인 시간좌표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불교는 윤회설에 따라 순환적인 시간을 믿으며 인간중심적이다. 기독교를 거부한 니체는 영원회귀를 주장하며 순환적인 시간에 자신의 정신을 맡겼다. 신의 죽음을 외친 니체의 목소리는 중세적인 신 중심사회에서 근대적인 인간인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근대인으로서의 우리 인간은 아직도 자신을 주체로 세우지 못하고 신에 종속된 인간, 신의 명령에 따르고 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몸은 근대에 있으면서 정신은 중세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유일신을 주장한 기독교의 교리는 다신을 믿는 그리스 로마의 입장에서 봤을때 교만하기 짝이 없다. 니체 역시 기독교에 대해 오만하다고 말했으며, 마치 노예가 주인을 섬기듯이 종교는 사람이라는 노예가 신이라는 주인을 섬기는 꼴이라고 비웃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처음에는 흥미 있게 보다가 마지막은 역시나 하는 블쾌함이 있었지만 그것은 순전히 내 취향 탓이다. 내가 어떤 종교에 선입견을 가지는 것은 내 속의 트라우마가 작동하였기 때문이고 그 트라우마의 깊이는 점점 확대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나와 취향이 다른 사람이라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종교적인 감동까지 더해 흥미를 배가시킬 것이다. 모든 삶의 다름은 다만 취향의 차이라는 것을, 타인의 취향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