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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출간된 책 치고는 책 표지나 편집이 굉장히 옛스럽다. 다른 말로 하면 좀 촌스럽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에쿠우스'연극을 보고 와서 희곡집을 검색했을 때 그나마 범우사에서 희곡집을 발간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매우 기뻤다. 희곡이 출간 날짜는 최근이지만 아마 번역은 꽤 오래 전에 되었던 듯 싶다. 남편을 지칭하는 '주인'이라는 말을 비롯해 좀 거슬리는 표현들이 좀 있어서 편집에서 별을 뺐다. 알런이 다이샤트에게 말을 할 때 반말과 존댓말이 섞여 쓰이는데 이해 안 되게 혼란스럽게 쓰인 경우도 많아 이 상황에 이 문체가 맞는 것인지 의문스러운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래도 읽는 데 큰 무리는 없었고, 말투나 어휘의 부분은 연극에서는 거슬리지 않았던 걸로 기억나는 게 아마 실제 연극 대본에서는 교정해서 사용한 듯 하다.
사실 희곡은 읽기가 나쁘다. 대화체로만 구성되어 있는 글은 읽을 때 속도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연극을 보고 난 후에 희곡을 읽으니 연극의 장면과 희곡의 전개가 겹쳐서 아주 스릴있고 속도감 있게 읽어내려갈 수 있었지만, 역시 연극 무대의 생동감을 희곡을 통해 느끼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희곡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은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해 내는 작업만큼이나 창조적인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희곡을 읽으면서 그것을 살아있는 인물로 재창조하는 능력이 경이롭기 까지 하다.
'에쿠우스' , 알런이 숭배하는 말은 그의 신이자 내면의 욕정이자 윤리적 기준을 의미한다. 자신의 신을 창조하고 그 신에 최대한의 경배와 존경을 표현하는 알런의 행위에 대해 다이샤트 박사는 강한 질투심을 느낀다. 알런을 일신론적이고 평범한 현대인으로 바꾸는 것이 과연 알런을 치료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다.
희곡을 읽으면서 다이샤트의 내면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았다. 왜 그가 자신의 진찰을 감옥으로 느끼고 있는 건지, 환자들을 치유하는 그의 결혼 생활 왜 그렇게 삭막한 건지... 그는 가치 있는 일을 유능하게 해 낸다. 하지만 그의 일상에 그가 숭배하는 '신'은 스며 있지 않다. 발을 사회가 강요하는 현실에 디뎌놓은 채, 멀고 먼 고대 그리스 신화 속을 헤매는 그의 이원적인 자아에서 대부분의 현대인의 모습을 본다. 자신의 신을 배반하는 삶을 살고 있는 평범한 정상인들 속에 당연스레 포함되어 가는 나의 모습이 지겨워진다. 그가 소년을 질투하는 이유가 이해가 된다. 나는 무엇인가를 저렇게 미칠 정도로 숭배해 본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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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신입생 때 읽은 책 중 가장 내 뇌리에 깊게 남은 것은 두 편의 희곡작품이다. 에쿠우스와 고도를 기다리며.
희곡 작품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괴테의 작품들도, 입센의 작품들도 나는 그저 읽느라 읽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항상 희곡은 그저 대본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 전까지 공연 관람을 해보지 못했던 탓이 클 수도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 전에도 읽은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가장 기억에 남는 독서년도는 내 대학 1학년이다. 처음 에쿠우스를 읽었을 때 느꼈던 것은 전율과 강렬함이었다. 소년의 광기어린 종교적인 열정과 정열, 시들어가는 다이사트의 갈구. 그 무엇 하나 나를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없었다.
이 희곡을 읽고 있자면 눈 앞에 무대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등장인물들이 형체도 없는 얼굴로,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듯 윤곽만 드러낸 얼굴로 내 귀에 대사를 쏟아낸다. 낡고 바스라질 듯한 이미지의 다이사트의 속삭임에 나는 깊이 빠져들곤 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알런에게 감정이입을 하기 힘들다. 그것은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느끼는 낯설음이다. 어떻게 하면 그토록 강렬하게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고, 자신만의 종교를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책을 처음 접하는 그 순간부터 알런이 구축한 세계는 경이로웠으나 내게 만지면 데이는 불과 같은 세상이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몰았을까를 생각하기도 하면서 나는 점점 더 깊이 다이사트에게 빠져들어갔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 비슷한 감정과 동경, 그리고 이질감 속을 부유하면서 나는 다이사트의 마지막 단발마의 외침에 빠져든다. 대체 무엇에 굴복하는 것인가? 대상마저 흐릿한 그 굴복. 에쿠우스는 절대 다이사트에게 신의 위치를 허락하지 않을 것인데, 아니 다이사트가 에쿠우스라는 신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노려보는 말의 머리를 두고 굴복한다니.
여전한 동경의 발로인것일까? 두 시간이 채 못되어 오래간만에 펼친 책이 끝났다. 각색된 연극을 보았지만 그 연극의 각색이란 것이 몇 부분에 불과할 따름이라 이미 나올 대사들을 다 알고 있지만 책으로 펼쳐보는 것은 굉장히 다른 느낌을 선사한다. 특히 무대 지시사항등을 읽자면 다른 모습의 무대가 내 눈앞에 펼쳐진다.
이제 처음 이 희곡을 읽었을 때의 강렬함은 없지만 여전히 여운은 남아있고 나는 점점 더 다이사트에게 빠져들어 글 속의 알런을 바라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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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관람후 희곡집을 주문했다. 지문과 대사들을 하나하나 읽어 나가다 보면 봤던 연극 장면이 생생히 떠오른다. 글로만 읽어도 너무 벅차오른다, 좋다. 연극을 처음봤을때 정말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극 막을내린지 한달가량 되었지만 당장이라도 보러가고싶다. 읽으면서 공연과의 차이점을 알아가는것도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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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셰퍼의 희곡 『에쿠우스』는 말을 뜻하는 에쿠우스와 한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지닌 소년의 충격적인 행위를 주춧돌 삼아 극을 이끌어간다. 인간 그 자체와 고대 신화, 그리고 종교가 혼재된 황홀한 태피스트리에서 짜낸 것 같은 이야기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위를 넘어 엇박자의 지그재그 춤을 추듯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태로 남는다. 바라보는 행위의 주체가 자신의 눈을 찌른다는 것에 있어 오이디푸스가 떠오르기도 하며, 여타 다른 다양한 레퍼런스를 끌고 온 듯한 내용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건 역시 주체인 소년이다. 그의 행위를 탐구하고 추측하는 건 무척 흥미로운 일인데, 잘 짜인 극 자체가 항시 그러하듯 그런 면을 유도하고 있기도 하다. 인간 본성의 여러 모습과 심연을 마주할 수 있다는 점에 있어 『에쿠우스』는 특기할 만한 희곡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