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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은 무기력하고, 회의는 고독하며, 분노는 치명적이다. - 김도언, 『랑의 사태』
1. 지극히 사소한 자들의 읊조림
어떤 면에서 권태는 이 세상에서 가장 품위 있는 방식으로 내 가소로움과 무기력함을 드러내는 기술이다. - 「권태주의자」, 132쪽.
김도언의 소설을 읽는 것은 차가운 권태로 점철된 세계로의 입사와 같다. 김도언의 최근작 『랑의 사태』(문학과 지성, 2009, 이하 개별작품과 쪽수만 표시)에 수록된 소설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의 화자와 주제는 언제나 동일하다.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모두 일인칭 '나'이다. 그 안에서 '나'는 지속적으로 허무를, 궁극적으로 이 세계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모멸감을 얘기한다. 9개의 소설들에 등장하는 '나'는 어떤 인물들인가.
「전무후무한 퍼스트베이스맨」의 화자는 은퇴하는 프로야구선수이다. '나'는 21년째 프로야구선수로 뛰었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프로'의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다. 프로세계에서의 생존을 위하여 끊임없이 경쟁을 벌여야 하는 직업적인 운명을 '나'는 거부한다. 1루수인 '나'는 선수생활 내내 1루에 진루한 다른 팀 선수들에게 도루 타이밍을 알려주는가 하면, 사인을 알려주고 고의적인 실책으로 도와주기까지 한다. 상대편의 모든 선수를 돕는 것은 아니다. 1루에 진출한 선수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 개인적인 사정을 감안하여 돕는다. 신인 선수라거나, 집안 사정이 어렵다거나, 팀 내에 입지가 불안한 선수들, 즉 약자를 중점적으로 돕는다. '나'는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팀에 대한 배반이 아니라 비정의 그라운드에서 "휴머니즘을 실천"(71쪽) 하는 행위라고 명명한다.
세계의 규율과 상식을 위반하는 '나'의 진술들은 계속 이어진다. 어느 날 고양이가 뺨을 할퀴고 지나간 열 세 살의 여름부터 철저한 '권태주의자'가 되기로 한 「권태주의자」의 '나'는 열정과 집착을 거세한 자신의 삶을 이렇게 말한다. "조금 따뜻하며 우울하고 느린 공상 속에 도시의 생활을 견디게 하는 힘"(118쪽)이 들어 있으며 "가능한 한 불확실하고 어렵고 불편하고 희미한 생각"(119쪽)들을 떠올린다고. 상식적인 삶을 살아가는 형은 '나'에게 삶을 "목적도 없이 소비"(126쪽)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이 충고에 대한 '나'의 반박은 김도언의 대다수 소설에 등장하는 '나'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형. 내가 신봉하는 것은 도덕이 아니에요. 다만 다투지 않고 경쟁하지 않는 절제죠. 겸양과 배려 같은 것 말이에요. 그것은 당신들의 도덕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구요. 심오한 관찰과 열정과 재능의 일치, 자신에 대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때에야 가능한 것이죠. - 「권태주의자」, 126쪽(강조는 인용자)
도덕과 상식과 규율로 유지되는 세계 안에서 이런 발언은 무력하기만 하다. 도덕과 상식과 규율을 신봉하는 자들은 언제나 '판단'과 고정된 '해석'을 중시한다. 이러한 인식은 소설을 육하원칙에 의거한 '완결된 이야기'(사건)로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김도언의 소설은 완결된 이야기를 지향하지 않는다. 다만 '권태주의자'가 되기 위해 골몰하는 화자의 일상이나, '전무후무한 퍼스트베이스맨'이 되기까지의 '나'의 두서없는 서술이 있을 뿐이다. 욕망의 지향점이 없으므로 김도언의 '나'들을 지켜보는 것은 비주류 일상을 영위하는 개인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과 같다. 사건이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어떤 사실을 전달하거나 설득하는 것을 지향한다면 '사태'는 일종의 상황이 흘러가는 경향, 그 자체를 의미한다. 사태에는 화자의 관찰, 설득, 계몽, 전달의 목적이 합치되지 않으며 다만 경향성을 지닐 뿐이다.
이를테면「다큐멘터리 가족극장」 부모와 형에 대한 '나'의 진술만이 작품의 전부를 차지한다. '나'의 진술에는 해석이나 개입의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바라보고 기록할 뿐이다. 표제작 「랑의 사태」에서 '나'는 삼촌이 펴낸 시집을 읽고 있는 랑을 만난다. 랑은 할머니가 운영하는 모텔 맨 꼭대기 666호에 살고 있다. 가끔씩 랑은 모텔에 투숙한 손님에게 몸을 팔기도 한다. 그리고 랑은 자신을 버린 부모들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었다고 믿고 있으며 권태와 염세에 젖어 있는 여자이다. 어느 날 랑은 실종되고, 화자는 666호에 있는 커다란 냉장고 안에서 랑을 찾아낸다.「랑의 사태」는 일반적인 연애소설의 문법을 벗어나 있다. '나'는 랑을 사랑하지만 랑과 어떠한 사건도 만들지 않는다. 연애 소설의 문법이 '나'와 '그(그녀)'가 만나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반하여 「랑의 사태」에서는 비상식적인 랑과 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만이 존재한다. '나'는 랑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읊조린다. 역시 권태로운 어조이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괴물의 죽음을 기록하는 광인이 될 수 없고 수많은 격렬한 사랑의 자료를 수집하는 아키비스트도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다만 걸인의 빵에 꽂는 양초처럼. 지금처럼 랑을 보며 살 것이다. - 「랑의 사태」, 162쪽
실종된 랑은 냉장고에 들어가 있다. 랑의 행위는 아무런 의미 없이 그저 권태롭고 불안하기만 한 현실의 삶을 버리고, 스스로 냉장고로 상징되는 세상 밖으로 도피한 것으로 읽힌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세계의 '안'이며, '안'으로 들어가도 그것은 또 다른 '밖'일 뿐이라는 역설적인 상황은 「안으로 나가고 밖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이라는 소설에서 반복된다. 랑이 숨어들어간 냉장고라는 '밖'이 폐쇄된 내부에 불과했듯이, 이 소설에서도 '나'를 둘러싼 '밖'과 '안'은 구분되지 않는다. 남는 것은 반복되는 질문과 회의이다.
나는 질문과 답을 통해 안과 밖의 경계를 바꾸어보았다. 그러므로 나는 안으로 나가고 밖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자유인가? 이것이 내게 어떤 위안을 줄 수 있을까. - 「안으로 나가고 밖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 223쪽.
건조하고 권태로운 시선은 안과 밖을 돌아서 결국 '나'에게로 귀착된다. '나'는 바로 작가 자신이다. 『랑의 사태』에 수록된 작품들이 모두 1인칭인 것도 작가 자신에게도 귀착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작가 자신은 여러 단편 속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2. 다자이 오사무적인 독백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不信)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에서.
작가가 작품 속에서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자기 자신을 타자로 바라보는 방식에 우리는 이미 익숙하다. 『랑의 사태』의 소설들에서 공통적으로 담겨있는 비극적인 세계인식과 권태와 허무의 목소리도 낯설지 않다. 김도언의 수많은 '나'들이 내는 목소리는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나'의 그것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군국주의 시기와 세계대전, 전후 일본의 혼란기에 걸쳐서 짧은 삶을 살았던 비운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들도 모두 1인칭 화자인 '나'의 독백과 진술로 이어진다. 그리고 소설 속의 '나'와 다자이 오사무의 자신의 목소리는 작품과 실제의 경계를 넘나들며 겹쳐진다. 다자이 오사무가 군국주의와 세계대전의 시대를 관통하면서 응시한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나약함이었다. 인간은 나약함을 은폐하기 위해서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는 존재가 아닌가. 게다가 좌익 활동으로 인한 탄압을 겪었으며, 연인 다나베 아쓰미와의 동반 자살이 실패로 끝난 후에 엄습한 죄책감은 암울한 시대와 맞물려 그의 문학은 철저한 염세주의로 일관되었다. 인간과 삶, 인간이 만든 사회제도와 규율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은 곧바로 '공포'로 이어지고, '공포'는 체념과 불안의 동력이 되기 마련이다. 체념과 불안에 직면한 다자이 오사무가 택한 방식은 철저한 개인의 정서로의 도피였다. 다자이 오사무의 대표작 『인간 실격』은 특유의 요설체를 통해, 인간의 나약함과 인간들이 구성한 사회에 대한 환멸에 이른 한 작가가 '일탈'과 '개인'으로 도피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고(그것에서는 한없는 강인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도저히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 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저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음지의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비참한 패자, 또는 악덕한 자를 지칭하는 말 같습니다만, 저는 태어날 때부터 음지의 존재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 세상에서 떳떳하지 못한 놈으로 손가락질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다정한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민음사, 2004, 51쪽. (강조는 인용자)
'개연성'으로 명명되는 일정한 구조가 결여된, 철저하게 사적인 독백으로 이루어진 다자이 오사무 소설의 진화과정이 압축된 문장이다. 세계의 합법이 지닌 폭력성에 대한 혐오로 비합법의 세계로 도주하고자 하는 작가는 비상식의 세계, 즉 '음지'로 향한다. 음지의 세계 속에서 작가가 애정을 가지고 응시하는 존재는 당연히 비주류, 비상식적인 인간들일 수밖에 없다.
김도언 소설에 나타나는 비극적 세계인식과 음지로 도피하는 시선들은 다자이 오사무의 그것과 상당부분 흡사하다. 「전무후무한 퍼스트베이스맨」의 '나'와 맹목적으로 권태를 지향하는 「권태주의자」의 '나', 「랑의 사태」의 랑과 '나'는 모두 음지의 인물들이 아닌가. 이처럼 김도언은 다자이 오사무와 마찬가지로 비주류의 삶을 사는 자들을 그리고 있다. 전작『이토록 사소한 멜랑꼴리』(2008)와 단편집『악취미들』(2006), 『철제계단이 있는 천변풍경』(2004)에서도 음지의 인간들을 지속적으로 응시하는 시선은 일관되게 나타난다. 『악취미들』과『철제 계단이 있는 천변풍경』에서 주로 비주류 인간들이 행하는 '비합법' 적인 행위를 다루었다면 『랑의 사태』에 이르러서는 비주류 인간들의 비합법 행위가 아니라 그들의 개인적인 권태를 응시한다. 이는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이 변모되는 과정과 흡사하다. '
안'과 '밖'을 사유를 통해 뒤집어 보아도 여전히 세계는 비극적이라는 것, 인간이 만든 체계와 합법적인 행위 따위도 결국 비합리의 변형이며 구원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사실, 이런 세계 속에서 사건을 통해 타인을 설득하려는 행위의 무력감. 세계는 개인이 도피할 영역은 권태를 통해서 형성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라는 자각이 김도언의 최근 소설의 뼈대를 이룬다. 따라서 김도언의 인물들은 자신들의 권태와 비합리적인 행위들을 타인에게 이해받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김도언 소설의 '나'들은 다만, 관찰하고 살아갈 따름이다. 표제작「랑의 사태」의 도입부의 문장들은 권태롭게 대상을 바라보는, 합리적인 사건이 아닌 다만 흘러가는 '사태'를 바라보는 자의 무색무취한 시선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다자이 오사무의 세계와 비슷한.
이것은 랑과 나의 이야기이다.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랑이라는 '불합리'를 바라보면서 내가 느낀 '불안'과 '권태'에 대한 이야기이다. 랑은 나에게는 일종의 사태(事態)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당신들이 이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할 이유는 없다. 그것이 무엇이건 이 이야기로부터 당신들이 바라는 걸 얻을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나로서는 단지 불가피한 것일 뿐이다. - 「랑의 사태」, 137쪽. (강조는 인용자)
3. 그래도, 살아남아서 질문한다는 것
사람들은 사랑도, 행복도, 아니 혐오나 불행조차도 자기 맘대로 소유할 수가 없어. 그 모두가 상대방과 반씩 나누어 먹는 음식이야. 그런 식으로 사는 한 우리들은 이것들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게 돼. 내가 노력하는 일은, 바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고백한다는 것 한 가지 뿐이야. - 고바야시 히데오, 「X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자이 오사무와 김도언의 시선이 지닌 공통점은 합법적인 것들에 대한 회의와 '친절하고 따뜻한 삶'을 지향하는 환상의 무기력함, 개인의 사소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분노이다. 이들은 모두 나약함과 불신, 절망을 그리고 있지만, 다자이 오사무와 김도언의 공통적인 시선은 제한된 영역에 머문다. 사소설적인 특징을 지닌 1인칭 형식을 취하는 점과 세계에 대한 인식이 닮아 있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공통분모를 따지는 것이 아니리라. 사실 많은 문학이 세계를 비극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시작되지 않는가. 다자이 오사무와 김도언을 동일선상에서 바라본 것은, 표면적인 일치점을 모색하려는 시도에 머물지 않는다.
인간들의 위선과 약점, 합리라는 이름의 폭력성을 집요하게 탐구했던 다자이 오사무의 삶과 작품은 격렬하게 뒤섞인다. 전 생애에 걸쳐서 시대와 불화했던 그는 다섯 번째 자살 시도를 '마침내' 성공시킨다. 멸망해야 된다고 믿었던 옛 가치들 속에 존재하는 스스로를, 에토 준의 표현처럼 "멸망의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파멸" 시키고자 했던 다자이 오사무의 문학은 그 파멸의 징후로써 읽혀진다.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실존에 부딪혔던 그에게 파멸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적인 실존적이며 직접적인 파멸은 일본 전후세대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상징으로 작용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많은 작가들이, 여전히 부조리한 세계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여기에서 멸망의 계보를 형성하기는 가능한가. 세계대전이라는 가시적인 폐허 속에서 국가가 미군에 '점령' 당했다는 인식 아래 당시 일본 사회의 일그러진 현실을 비판했던 일본의 '무뢰파 작가'들이 행했던 '온 몸으로 저항하기'는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활자의 힘이 약화된 현재에서 작가들의 실존적이며 성실한 반영으로써의 저항은 아직도 소중하다. 허나, 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다. 멸망하는 세계에 파멸로 저항하는 것은 다만 상징일 뿐이 아닌가. 살아남아서, 계속 질문하고 바라보는 것 자체가 저항의 방식인 시대를 우리는 건너고 있기 때문이다. 다자이 오사무와 흡사한 시선과 형식을 취하고 있는 김도언이 다자이와 다르게 택한 방식은 여기서 드러난다. 바로 '멸망'이 아닌 '권태'이다. 그에게 있어서 권태란, 논리를 신봉하는 자들이 형성한 세계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형식이자 세계의 질서에 순응하면서 일부로 전락하지 않겠다는 거리두기의 우회적 표현이다. 이러한 권태는 일종의 자폐로 전환되기 쉽다.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권태주의자들의 거리 두기가 대화와 연민으로 확장되지 못할 때, 권태는 느린 형태의 파멸과 다름없다.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사보타주를 감행했던 '악취미들' 과 부박한 현실을 힘겹게 통과하는 '사소한 멜랑꼴리'를 넘은 김도언은 현재 '사건'의 고정된 시선이 주는 폭력을 부정하고 관조로써의 '사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변화는 '진화'일까. 진화가 아닌 변형된 반복은 아닐까. '권태주의자'들의 무력한 독백들은 그렇게 다가오지만 대화와 연민으로 확장될 단서들이 엿보인다. 「백하동 가는 길」과 「어느 위대한 소설가의 자술 연보」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백하동 가는 길」에서는 3명의 비주류 인생이 등장한다. 학생을 체벌하다가 파면된 고등학교 교사인 '나', 교수가 될 가능성이 희박한 시간강사, 글을 못 쓰고 있는 소설가. 이 3명은 친구이다. 아내와 별거 중인 '나'의 집에서 이들은 하릴없이 술을 마시며 지낸다. 이들은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탈피하기 위해 '백하동'이라는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들이 찾던 아름다운 계곡은 없다. 부서진 예배당과 전쟁 중에 죽은 자들에 대한 음산한 옛이야기만이 존재할 뿐이다. 다시, 지리멸렬한 일상으로 복귀하던 중 '나'는 친구들의 잠든 옆모습을 보면서 독백한다.
그 얼굴들이 참으로 애틋하고 살갑게 느껴졌다. 무엇이 이 얼굴들을 절망으로 내모는가. 누가 이들의 삶을 모욕하고 고단하게 하는가. 친구들은 운전자가 딴전을 피우는 것도 모르고 서로의 어깨를 의지하여 곤하게 자고 있었다. - 「백하동 가는 길」, 285쪽.
미래에 대한 희망이 결여된 자들이 감행한 여행이 끝나는 찰나에 '나'는 '권태'가 아닌 '연민'을 느낀다. '나'는 그날 밤 아내에게 화해를 신청하는 전화를 하고 자신이 가혹한 손찌검을 했던 아이에게 용서를 비는 메일을 전송한다. 권태가 장악했던 소설집『랑의 사태』의 마지막에 이 작품이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김도언의 인물들이 계속 자기 영역을 사수하기 위한 권태 안에만 머물지는 않을 것이라는 미약한 단서로 읽히기 때문이다.
「어느 위대한 소설가의 자술연보」은 한국과 일본이 1945년 이후에도 병합되어 있다는 가상의 현실을 바탕으로 어느 소설가의 연보가 등장한다. 주인공인 작가 '나'는 유부남과 미성년의 섹스행각을 소재로 한 자신의 작품에 쏟아지는 비판에 대해 "나의 '주적'은 바로 도덕의 허위입니다"라고 정면으로 반발하며 제자와 불륜을 저지르는 등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간다. 파격적인 연애를 하고, 문학적으로도 성공한 삶을 살고 있지만 '나'는 민족, 국가, 공동체라는 개념에 대해 무관심하다. 신분적인 안정이 보장된 교수직과 문학상 수상조차 거부하는 '나'는 다만 "모든 예술은 허가를 필요로 하지 않다"(93쪽)는 신념을 지닌 채 72세가 된 2007년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연보를 기록한다. 가상현실에 존재하는 '나'의 기록을 통해서 김도언은 예술에 대한 작가 자신의 신념을 피력하고 있는 듯하다. '나'의 자술연보는 규제와 허가, 논리와 상식이라는 틀을 혐오하는 '권태주의자'들의 진술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소설 속 '나'가 노년에 이르러서 적는 마지막 연보에는 권태가 자폐로 굳어지지 않으리라는 일종의 '선언'이 등장한다.
나는 누굴 미워했고, 충분히 고통 받았는가? 나는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는가? 나는 한순간이라도 나로부터 벗어났는가? 나는 아직 죽지 않았고 그리고, 질문을 하는 동안은 계속 살아 있을 것이다. - 「어느 위대한 소설가의 자술연보」, 104쪽. (강조는 인용자)
「어느 위대한 소설가의 자술연보」에 등장하는 작가 '나'의 마지막 독백은 실제의 작가의 발언과 뫼비우스의 띠처럼 교차된다. 「백하동 가는 길」과「어느 소설가의 위대한 자술연보」는 권태에 침잠된 자가 시선을 돌려 타인을 응시하기 시작했다는 단서로 다가온다. 권태주의자들의 지독한 모멸과 경계짓기는 연민과 타인에 대한 이해의 기원으로 확장될 수 있을까. 이 의문에 답하는 과정이 앞으로 김도언의 글쓰기에 지속적인 화두가 되리라.
우리는 나르시시즘을 벗고 타자를 만날 수는 없다.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는 반복되는 실천과 긴 응시의 시간을 통해서 확장되는 과정이므로. 그러므로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바라보는 건조한 시선은 언제나 불행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타자로 바라보는 과정에서 파생될 지도 모르는 맹목적인 합리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세계와 맞설 수 있다. 니체의 경고처럼,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자신마저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멸망을 향해 질주하는 세계와 파멸로써 부딪혔던 다자이 오사무의 비극이 아닌, 죽지 않았으므로 계속 질문을 던지는 자의 지속성이 인간이 세계에 맞서는 최후의 전투여야 할 것이다. '나'의 세계 안에서 권태에 젖어 있는 자들의 목소리가 느린 파멸의 과정이 아닌 지속성을 담보한 전투의 한 방식이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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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사소한 멜랑꼴리> 씬 번호와 함께 정말이지 사소한 일상들의 멜랑꼴리한 (그런 느낌이 확실했다) 이야기로 김도언이라는 작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번째로 읽게 된 그의 소설집 <랑의 사태> 마찬가지로 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책에서도 가장 많이 나오는 듯한 단어인 권태에 젖어있는 사람들이다.
책 전반에 흐르는 이 권태로움과 불안 그리고 약간의 느적거림이라고 해야하나 그리 명쾌한 코드는 아닌 듯 하다 해설자는 그의 글을 '비정상인들의 진실과 대화주의'라는 제목으로 해설을 해 놓았다. 자신의 관점인 1인칭의 시점에서 쓰여진 이야기들은 마치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 듯했고 <다큐멘타리 가족극장>이나 <다크블루, 시간의 풍경>등은 실제로 자신의 이야기를 써놓은 듯 했다.
작가별로 자신의 색깔과 세계가 확고하다면 아직 많은 글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도 나름대로의 색을 가지고 있는 작가임에는 분명한 듯 하다. 불투명한 무채색 같은 색깔 하지만 그것이 그리 탁하고 어두워만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교류하려는 모습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보여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앞으로 그를 떠올리면 <멜랑꼴리><권태><사태> 이러한 단어가 먼저 떠오를 듯 하다. 그리 낯설지도 하지만 웬지 부담되는 그렇지만 약간의 동경내지는 관조하게되는 그런 단어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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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작가의 소설은 마치 누군가를 처음 만나는 것처럼 궁금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두렵기도 하다.이 한편으로 앞으로 더 그 작가를 만날 것인가 아님 그만 둘 것인가 생각하기 때문인다. 요즘 알게된 작가 김숨의 남편이고, 얼마전 시크릿가든의 김주언 책장에 있었던 ' 이처럼 사소한 멜랑콜리'의 작가라서약간의 기대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사실 이 책을 먼저 읽고 싶었는데 개인적으로 단편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우선 입질 부터해보자였다
소설의 내용이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그 기반에는 자신의 경험이 단단하게 마치고 있다. 그의 소설은 상상력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보태서 말하고 있지않나 하는 생각을 들게한다. 9편의 소설 중 다큐멘터리 가족극장,다크블루, 백하동 가는 길은 자신의 이야기와 허구의 경계가 모호해 읽는 이에게 자꾸 작가의 모습을 찾아보려는마음을 동하게 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자신을 들어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한다. 그저 묻혀지고 싶고 자신의 색칠하고 지우고 싶다고. 이건 또 무슨소리인지... 나에게 소설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 다면 나는 당신 앞에서 당신이 알아 볼 수 없도록 끊임없이 나를 색칠하고 지우는 작업이라고 대답하겠다. p304
김도언이 말하는 삶의 일상은 권태롭고 따분하고 그저 그렇다. 다이다믹하지도 그렇다고 소소한 재미가 있지도 않다. 하지만 그가 그리는 무채색의 일상의 색깔도 과이 나쁘지도 심심하지도 않다. 그것이 우리의 일상의 삶과 닮아있기 때문에그의 소설속 주인공들의 삶이 공감가고 받아들여진다.
9편의 소설중 두편 정도는 읽다가 그냥 지나쳤다. 아마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 쉽지 않았지만 처음만나는 작가의 소설이 다 나랑 맞기를 기대하는 것도 너무 욕심이지 싶어서다. 하지만 처음 ' 내생애 최고의 연인'에서 보여주었던 반전과 뒤에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듯한 4편의 소설은 재미있게 읽었다.
이 책의 9편의 단편소설은 주인공은 모두 '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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