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대에나 좌파와 우파가 있다. 좌파는 일반적으로 위험하게 여겨진다. 좌파는 이상만을 이야기하고 현실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안주하는 사람들에게는 현실이 잘못되었다고 고발하기에 좌파는 늘 위험한 대상으로 인식된다. 엘륄은 말하자면 좌파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잊혀진 소망”은 엘륄의 신학의 색깔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소위 좌파신학자로서) 그래서 아마도 이 책을 제대로 읽지 않으면 아주 불온한 서적으로 비쳐줄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항한다든지, 이 세상은 하나님과 단절되었다는 표현은 ‘존재함의 신학’에 익숙한, 익숙하다못해 푹빠져있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단적인 표현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엘륄의 외치는 소망의 신학은,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자면,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맹렬한 외침이다. 사실은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없이 너무나 잘 살고 있다. 이것은 처절한 아이러니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냥 무시해 버리는 성경의 선언과 실제 삶의 괴리에서 오는 극단적인 딜레마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부르짖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응당 주셔야할 ‘것’이라고 기대되는 것의 부재이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 대해 소망한다. 엘륄은 이것이 바로 우상 숭배라고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을 원하기를 소원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등을 돌리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그리고 그 뼈저린 단절이 우리를 소망으로 이끈다. 엘륄이 말하는 소망은 바로 ‘맹렬하게 하나님만을 추구함’이다. ‘약속의 신학’이 위험성은 ‘약속’이 ‘실현’될 때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륄은 약속은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엘륄의 소망을 보면서 요나의 기도가 생각났다.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우리는 하나님만을 소원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살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현실의 풍요로움 속에 안주하길 원하시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내버려 두신다면 그것은 가장 큰 하나님의 심판이요 저주이다. 우리는 현실의 풍요로움에 안주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과의 단절을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번역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역자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엘륄의 원의를 전달하고자 했을 법하지만, 지나친 문자적인 번역으로 인해 의미 전달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느낌이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엘륄의 의도를 파악해, 문자에 얽매이기 보다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과감한 번역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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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인간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 뿐이었다. 인간은 그분 한분만으로 만족하였고, 더 필요한 것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친히 책임져 주셨기에 인간은 다른 아무 것도 걱정 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만이 소망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자 소망이 변하게 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책임지게 되었다. 이제 인간의 소망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입을 것, 먹을 것, 할 것이 되었다. 오늘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할까라는 자기 자신에 소망이 집중 되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단절이 이루어졌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과의 막힌 담을 허물고, 가까워지는 것을 원하신다. 다시 모든 것을 당신이 책임져 주실테니 그 앞으로 나올 것을 원하신다. 하나님의 소망은 인간과의 소통과 접촉, 화해와 교제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소망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유이다. 스스로를 책임지게 된 인간은, 자유를 맛본 인간은 하나님과의 접촉을 성가시게 여겼다. 그분과의 하나됨은 제한과 구속으로 여기게 되었다. 서로 간에 어긋난 소망이 둘 사이에 허물 수 없는 담을 만들었다.
자끄 엘룰은 1912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법률학자, 신학자, 환경운동가 등 다방면으로 활동한 정력가이다. 그는 많은 저서와 기고물을 남겼고, 특히나 신학자로서 기독교인의 소명과 책무를 강조 했다.
잊혀진 소망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인간이 왜 소망을 상실했고, 그것의 회복 가능성 등을 다룬다. 이렇게 보면 내용이 간단해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사회적, 종교적, 철학적으로 소망을 다루고 있기에 소망을 잃어가고 있는 현대 기독교인이라면 분명히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게서 돌아서지 않으신다. 오히려 인간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마주보고 싶어 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자꾸만 돌아선다. 자신이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면서도 하나님에게 왜 나를 향해 돌아서냐고 따진다. 소망을 다른데 두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교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최후의 보루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다리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다리를 놓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없애는 존재로 변해가고 있다.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줄어들고 있다. 교회마저 인간의 입을 것, 먹을 것, 할 것에 집중하고 있다. 나의(우리의) 하나님이 아니라 너의 하나님, 아니 단지 내가 이용해야 할 이로 전락시키고 있다. 하나님과의 단절에 앞장서고 있다. 교회마저 하나님과의 단절로 나아간다면 인간에게 더 이상 소망은 없다. 희망은 없다. 남은 것은 멸망이요. 무(無)일 뿐이다.
하나님이 돌아섰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돌아선 나를 봐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다시 향해야 한다. 하나님께 왜 침묵하시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귀를 열어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것이 곧 소망이고, 교통이다. 문제의 원인을 타자에게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찾을 때 소망은 금세 회복하게 될 것이다. |
소망이 없다는 것 그것이 잊혀진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우리들에게 내세의 소망이 없다면 ,구원의 소망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기도 하지만 더 큰 소망은 저 위에 있는 것이다.소망이 상실된 시대에 , 몇십년 전에 실았던 자끄 엘륄은 이미 소망이 사라졌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법학박사이면서 사회학자,신학자,철학자로 널리 알려진 그가 소망에 대해 심오한 진리를 예견했었다. <세상과 복음 사이에서 사유하기>라는 추천사가 말하듯이 이 책에서는 소망에 대해 세상과 복음의 양자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현상과 징조들을 파헤치며 우리의 현실 속에서 너무 쉽게 하나님 나라의 계시가 인간제도상의 한 종교로 전락하여 그 본질이 근본적으로 전도되는 것을 보게 된다고 우려한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 책은 소망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그 소망이 왜 잊혀진 소망이 될 수 밖에 없는지를 말 하고 있다. 현 시대 '단절의 시대'에 하나님이 침묵하며 우리와 단절된 상태에 있다고 역설 하면서 그 현상과 징조들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엘륄은 하나님이 우리로 부터 돌아섰지만 모두가 아닌 단체,즉 사회와 교회로 부터 돌아 섰 으며 개인의 삶 속에는 존재해 있다고 한다. 인간의 마음 속에서는 여전히 말을 하고 있지만 다른 부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하나님은 말을 하 지 않고 자신의 침묵과 어둠 속에 칩거했다. 이렇게 단절된 시대에서는 비합리적,뒤바뀜,가치의 변질,말의 죽음,경멸,의심,조롱등의 현상이 나 타나게 된다. 교회 안에서의 단절의 현상으로서는 교회의 평범함과 메마름,세상에 대한 추종,교회제도 등이 있다 . 하나님의 말과의 관계가 단절될 때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은 반대의 뜻과 오해가 된다.인간이 하나님의 말을 인정치 않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사람을 짓누르는 의심이 이 시대의 현상중 하나인데 의심으로 가득차 있는 현대인은 모든 것이 거 짓이라 판단한다. 교회 안에서의 '하나님과의 단절'의 징조중에서 미지근함과 무력함으로 나타나는 평범함이 있다. 교화가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에 협력할 뿐 아니라 양심과 타협하는 온갖 핸동들을 받아 들이는 데 서 기인한다. 엘륄은 오늘날 같은 '하나님과의 단절'시대에는 기독교적인 메세지의 중심이 소망임을 강조한다.소 망이 존재 이유를 가지는 것은 상황이 절망적이기 때문이고 상황이 절망적일 때이다. 그러나 신앙을 생겨나게 하고 신앙을 결정짓는 오늘날 신앙에다 내용을 부여하게끔 되어 있는것은 소망이다. 사람들이 신앙의 뿌리 내림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거기 에서이다. 이 시대에 인간에게 소망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침묵하는 시대에 자유와 소망의 선포 외에 가능한 것은 없다. 소망은 하 나님의 침묵에 대한 인간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소망은 기다림이나 확신만이 아니라 요구이다. 하나님이 침묵할 때 하나님이 말하도록 강요해야 하고 하나님이 죽은 듯이 보일 때 하나님이 존재하도록 강요해야 한다. 소망은 하나님의 거부와 침 묵과 돌아섬 앞에서, 확고한 인간의 전적이고 완전하며 힘찬 대답이자 하나님에게 전해지는 도발이 다. 소망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게 하기 위한 맹렬함이므로,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인간 적이고 영적인 맹렬함이 없는 곳에는 소망이 없다. 소망은 절대 충족 되지도 않고 구현 되지도 않는 활동하는 힘이다. 이런 소망이 근거하는 세가지 태도는 심리적이 태도에서의 '기다림'이고 다른 하나는 지적인 태도 인 '현실주의'이며 세번째는 영적 태도인 '기도'이다. 소망의 인간은 기다림의 인간으로서 기다림의 인간은 아무것에 의해서도 자신의 마음 이 딴 데로 돌려지지 않는다. 기도가 없이는 최소한의 소망도 없다.기도에 대한 포기와 무관심은 우리에게 어떤 소망도 없다는 영적인 시험이다. 기도는 수단과 표현인 동시에 소망의 유일한 이유이다. 우리가 기도를 시작 하는 그때 소망이 생 겨난다. 우리가 소망을 체험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기도 속에서 표현할 수만 있다. 현실주의는 확고한 방식으로 소망에 연결되어 있고 소망은 현실주의 안에서만 존속할 수 있다. 현 실을 자양분으로 삼는 소망은 그 실체를 현실주의 안에서 발견하고 현실주의가 그 가능성을 소망안 에서 발견한다.
첵을 읽으며 느낀것은, 현 시대에 소망이 없다는 것이 비단 오늘날의 현실만은 아니라 하나님 부재와 맞물린 현상이 오래 전 창세기로 부터 사사기를 거쳐서 오늘 까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역사는 동일하고 그 분의 현현하심도 동일한데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이유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번복해서 죄를 짓고 불신하며 불평하며 자신의 의를 쌓아가고 있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 고 하나님의 사랑은 끊임없이 영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에 영속성의 고리가 없다면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신의 의만 내세우는 우리들에게서 벌써 멀리 떠나셨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그 이름 하나로 사람과 하나님이 연결돼서 기도하고 소망을 가지게 된다. 기도가 없었다면 그 어떤 소망도 기다림도 우리에겐 없었을 것이다. 벌써 소멸 되었을 것이다. 기 도 안에서 우리가 소망을 발견하게 되고 그 소망을 붙잡게 된다. 이런 절망적인 시대에도 단체가 아닌 개인에게 그나마 작은 소망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개인에게 남아 있는 소망의 작은 씨앗 그것이 불처럼 확산되어서 단체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본질을 잃어 버린 평범함 속에, 교회 안에서의 미지근함과 무력함이 평범함으로 변장해서 나타날 때 그것을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부재의 현상 때문이란 것을 알아 차 리지 못하기 때문에 평범함은 그냥 평범함 속에 묻혀 버리고 만다. 하나님 없음의 부재가 너무 평 범함으로 다가와서 그것 조차도 알아 차릴 수 없을 때,이런 때일수록 더 소망의 메세지가 필요하다 . 그것은 신앙을 뿌리 내릴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인간의 대답이기 때문이다. 소망을 갖고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을 깨뜨릴 수 있게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을 하게 하는 요구로서 미래에 관한 것이 아닌 바로 오늘 이 자리 현실에서의 소망을 말하는 것이다. 미래 의 소망은 이미 소망답지 않은 것이다. 미래는 가질 수 없고 아직 도래 하지 않았기에 완전한 의미 의 소망은 아니다. 소망이 소망다우려면 바로 현실 에서 가능해야 한다. 바로 이 소망을 붙잡으라 고 엘륄은 말하고 있다.
<잊혀진 소망>은 신학과 철학과 사회학을 접목한 소망에 관한 진리의 선포지만 나름 소망에 관한 포괄적인 지식을 접할 수 있었다. 현 시대를 반영한 좋은 메시지임에 틀림이 없다. 소망이 없는 시대에 하나님과의 단절을 이야기 한 다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지식적으로 혼돈 가운데 있었 다면 이 책은 '소망에 관한 분명한 이유'를 제시해 줄 것이다. 우리에게 잊혀진 소망이란 하나님을 잃어 버리는 일이다. 하나님을 잃어 버린 가운데 진행되는 그 어떤 일도 헛수고만 될 뿐이다. 교회 와 지도자들이 이 사실을 기억 했으면 한다. 지도자들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소망의 이유와 근거'를 제시해 주지 않는다면 그를 따르는 모 든 사람들도 소망이 없는 미래를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소망이 미래를 만들고 그래서 현재 이 자리에 있는 소망을 붙잡을 수 있도록 선견자의 지명을 갖기를 바란다. 소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 이면에 소망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에 우리에게 이젠 소망이 없다고 더 이상 말을 하지 말자. 하나님이 존재하는 한 소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현실에서 기다림으로 기도 하는 가운데 잃어 버린 소망을, 침묵하고 계신 하나님의 시선을 우리에게 되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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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이 세상은 아름다웠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의 모습으로 창조하신 이 세계는 완벽했지만, 하나님이 원치 않았던 죄된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모습에서 점차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시대를 자끄 엘륄은 하나님이 뒤돌아 서버린 시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끄 엘륄의 잊혀진 소망은 하나님과의 단절한 현 시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는 하나님과 단절된 시대의 현상들을 이야기 할 때 저는 솔직히 제가 모르고 또는 느끼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 상세히 진단하는 것을 놀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상실하고 하나님과 단절한 상태인 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끔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이 있다고 느낄 때 이 문제가 나 개인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문제라는 것이 가슴아프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단절이 개인의 단절과는 다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끄 엘륄은 프랑스의 법률학, 신학, 철학, 사회학자여서 그런지 이 책은 그렇게 쉽게 읽혀지지는 않았습니다. 이해력을 많이 요구하는 책입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수 있었습니다. 단절한 시대인 만큼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욱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재를 느낄수록 더욱 소망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양심과는 타협할려는 교회와 은혜가 메말라 있는 말씀선포 속에서도 잃어버린 소망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등 돌린 듯 하지만 우리는 더욱 흔들리지않는 소망을 붙잡고 하나님께 나아가 요구를 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너무 절망적입니다. 현대사회는 문명이 발달할수록 타락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흐름에 아무런 징조도 느끼지 못한 채 그리스도인들도 동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삶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과 종말론적 신앙관은 잊혀진지 오래입니다. 기독교는 본래의 모습과 힘을 잃어버리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자Rm 엘륄을 통해 현 시대의 타락의 징후를 읽는 것은 넓은 시야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상태에 계속 안주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더욱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요구해야 합니다. 더 이상은 방광하는 자세로 이 시대를 향해 무관심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문제들에 대해 나와는 상관없다는 방식으로 일관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요구해야만 합니다. 자끄 엘륄의 책은 쉽지 않지만 이 책을 통해 현시대의 죄악상과 하나님의 부재가 얼마나 악영향을 미치는지 우리가 하나님과 회복해야 함을 다시한번 깨닫고 우리가 붙잡아야 할 소망을 현 시대를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
잊혀진 소망
자끄 엘륄의 잊혀진 소망은 하나님께 등을 돌려 버린 인류의 타락의 단상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랜 시간 동안 피조물인 인류에게 여러 가지 형태로 다가오셨지만, 인류는 자신의 지적인 교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말았다. 비단 인류가 하나님의 복음을 믿고 교회를 세웠지만 인류의 오랜 타락은 하나님과 단절인 상태의 시대로 접어들게 만들었다고 이야기 한다. 조금은 난해한 이야기지만 하나님과의 단절은 현시점에 일어난 이야기가 아니다. 잊혀진 소망의 자끄 엘륄은 프랑스인으로 법류학, 사회학, 철학, 신학등의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 학자이다. 또한 가톨릭 신자가 많은 프랑스에서 개신교 위원으로 활동하며 50여권의 저서를 남긴 인물이다. 자끄 엘륄은 본래의 모습을 망각하고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이기를 거부하는 많은 개신교인들에게 개신교의 고찰과 신랄한 비판을 한다. 또한 기독교의 윤리관에 대해서 소망과 자유를 제시하고, 개신교인의 소명과 책무에 대해서 역설한 인물이다. 자끄 엘륄은 잊혀진 소망에서 가장 크게 이야기 하고자 하는 주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돌아선 하나님과의 단절의 시대에 대해서 설명한다. 또한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현상 및 징조들을 자세하고 섬세하게 설명한다. 더 이상의 소망을 가지지 못하는 인류에게 부르짖어야 하는 소망에 대해서 그리고 다시금 하나님과의 단절을 회복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한다. 자끄 엘륄은 하나님과의 단절은 하나님의 부재에서 온다고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는 개인적인 체험보다 집단적인 체험으로 나타나며 우리의 역사, 문화, 정치, 과학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다고 이야기 한다. 그것은 제도화된 교회와 지배적인 국가에서 나타난다. 또한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현상과 징조를 제시한다. 그것은 예가 닫힌 세상, 비합리의 폭발, 뒤바뀜, 가치들의 변질, 말의 죽음, 마법으로의 회구, 경멸, 의심, 조롱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이다. 또한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발생하는 징조는 교회의 평범함, 메마름, 세상에 대한 추종, 교회 제도라고 이야기 한다. 하나님과 단절된 지금의 시대는 가장 절망적인 시기라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 그렇기에 절대적인 소망의 필요가 더욱 중요시 되고 있다. 주 예수를 믿고 그이 재림에 대해 소망하는 것. 이 소망은 우리의 신앙이 신앙으로써의 역할을 나타내게 가장 중요한 척도이다. 인간의 지적은 만족은 하나님에 대한 복음의 만족을 필요로 하지 않다고 이야기 한다. 또한 이 시대 인류에게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침묵하며 대답이 없으실 때는 하나님께서 이야기하고 대답하실 수 있도록 강요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돌아서실 때 다시 돌아서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죽은 듯 보일 때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존재하도록 강요해야 한다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 이러한 소망의 형태이자 태도는 세 가지라 저자는 이야기 한다. 그것은 심리적 태도인 기다림이고, 지적인 태도인 현실주의, 영적인 태도인 기도를 이야기 한다. 최근 들어 기독교인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 증폭이 되고 있다. 100년이라는 시간동안 폭발적인 교인증가를 자랑하는 한국교계가 더욱 고심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소망을 잃어버린 하나님과 단절되어 버린 교회에서 발생하고 파생되는 여러 가지 고질적 문제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원인과 이유에 대해서 쉽사리 판단하거나 문제의 해결에 대해서 명확한 해답을 내어 놓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와 복음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실로 어려워지고 있는 고도의 전략에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러한 우리에게 자끄 엘륄의 잊혀진 소망은 어려운 부분을 해소 시켜주는 명답이 되어 줄 것이다. 하나님과의 단절의 시대에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 회복하는 방법에 대한 제시. 자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자끄 엘륄의 잊혀진 소망은 쉽지 않은 책이다. 상당한 수준의 이해력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갈급해 하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적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다. 잊혀진 소망. 우리는 그 소망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여야 하며, 그것을 회복하고자 일어서야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