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문학은 '사소설'이라 불리우는, 개인적인 일상사를 주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크나큰 에피소드도 없고, 어제가 오늘과 다를바없고, 내일도 그럴것 같은, 수업이 끝난 오후의 학교 운동장같은 고요함을 갖고 있다. (물론, 무라카미 류의 화려한 SM 플레이는 예외로 친다.) 때문에, 세심한 감정변화와 주변에 대한 촘촘한 정경묘사에 비중을 둘수밖에 없는데, 이런 특징을 가진 가장 대표적인 작가로는 '나스메 소세끼'이고 젊은 작가로는 '요시다 슈이치'를 들 수 있겠다. 파크라이프. - 일본 도심공원을 중심으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인물들을 관찰하는 주인공은 전형적인 현대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회사 동료와 가벼운 농담을 주고 받으면서도, 정해진 선을 넘지 않는 벽을 짓고 있으며, 우연한 만남에 대해서도 어떤 기대감을 갖기 보다는 무표정한 시선을 던질 뿐이다. 상대방이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과연 그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에 몰두한다.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몇번이고 고쳐 생각한 자신만의 결론에 이르렀을때야 비로소 움직이는 주인공의 모습은 독립적이면서도 고립된 자아를 투영하고 있다. 플라워스. - 동경에 입성한 새내기 부부는 익숙치 않은 생활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알수없는 설레임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연히 목격하게 된 회사동료의 불륜현장을 필두로 벌어지는 이해할수 없는 어긋남은 그의 가치관을 순식간에 흔들어 놓게 된다. 분명히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돌리고 선 사람들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마음은 낯선 감정으로 가득차 있다. 어렸을적 할머니의 소일거리이던 꽂꽂이를 따라 했던 주인공에게 있어 자신의 삶은 이와 마찬가지로 조금씩 아름다움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고 여겼기에, 이러한 무형의 질서를 무참히 짓밟는 자에 대한 분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보호본능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여진다. 타인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한 현대인들에게 침을 뱉는 주인공의 후련한 몸짓에 내 속이 다 시원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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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벤치에서 지금처럼 뉴욕의 스타*스 매장이나 몇년 전에 히카루에게 키스했던 차 안의 광경을 머리속에 그리고 있을 때, 지나가는 사람들에겐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까. 내 시선이 닿는 자리에 있는 연못이나 석탑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꼭 그렇게만 보였을까. 이렇게 멍한 상태에서 나로 돌아올때, 가끔씩 전율 비슷한 느낌이 온몸을 타고 지나간다."
남의 시선, 남의 생각을 신경쓰고 사는건 쓸쓸한 일이고,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쓸쓸하게 살아가고 있다.
아닌 척 하기위해 애쓰지만 나도 그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건 어쩐지 외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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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이다. 일전에 퍼레이드란 책을 읽었다. 이 사람의 장점은 역시 묘사에 있는 것 같다. 줄거리 위주의 샤이닝을 보다가 이 책을 읽으니 적응이 안되서 처음 몇페이지 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한줄한줄, 한마디한마디, 곧이 넘길 수 없으니, 이런게 섣불리 판단하기에 요즘 일본소설의 특징인 것 같기도 하다. 재밌다. 역시~ 특별한 사건 없이 잔잔히 흘러가는~ 그래서 뭐가뭔지 무엇을 전달하려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주인공-이사람은 일인칭을 좋아하는 것 같다.-의 시선을 따라 포착되는 주변 사람들의 묘사가 재밌다. 파크라이프, 플라워스 두 단편이 실려있다. 나도 주인공처럼 나만의 특별한 공간-나만이 알고 있는 공간이라는 뜻이 아니라 나만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공간-에서 나만의 습관- 슬금슬금 기어가서 자리를 잡은 다음 한번에 눈을 떠 동공에 맺히는 어지러운 풍경을 감상하는 것-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저냥 지나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등장인물 모두가 우리 옆을 지나가는 보통사람들이다.- 자기 진술의 기회를 주는 것이 좋다. '플라워스'에서 박봉을 쪼개면 한달에 한번 비싼 호텔에서 묶는 이해못할 행동을 포함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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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 파크라이프와 수록작 플라워스의 온도차가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그건, 마치.. 잔잔하게 흐르는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선정적인 영화로 넘어간 느낌이랄까..
하지만 결국, 두 이야기 모두 일본이었다. 란 결론..
개인적으로 내가 일본영화에 관심없는 이유가 이 책에 다 들어있다. 나는 별다른 사건없이 그냥 흘러가는 영화도, 현실적이라며 아무렇게나 집어넣는 야한 장면이 있는 영화도 좋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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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절판된 문고본(?)이 도서관에 있더라구요. 다른 출판사 발행인지 유독 사이즈가 다르고, 수상작인데 너무 얇아서 맥 빠지던... 좋은 소설은 장편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좋은 중편이나 단편에서 느껴지는 그 무언가의 부족함 때문이었겠지요. 좀 더, 지속되길 원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겠지요. 그 소설이 좋을 수록 더한 감정이 된달까요.. 그런 감정들을 거쳐 파크라이프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짧아요. '파크라이프'와 '플라워스' 2가지로 이루어져있습니다. '파크라이프' 혼자 살고 있는 주인공의 일상. 마치 가위로 싹뚝 잘라서 이 페이지에 쏟아 둔 것만 같은.. 도입도 없고 결말도 없는 느낌. 그리고 요시다 슈이치 특유의 묘사가 이어집니다. 사실 공원 얘기라고 하길래, 이사카 코타로 '종말의 바보' 같은 소설을 예상했거든요. 어디까지가 이 소설을 위해 계획된 묘사인지, 되는대로 쓴 것인지의 선도 알 수 없이.. 그저 원래 있던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채워둔 것만 같은... 그런 느낌. 그래서 더 사실적이고, 반대로 이런 글을 계획하고 썼다는 것에 더 놀라게 됩니다. 아마 그런 의미에서 수상하게 된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우연히 알게된 여자, 회사 선배, 아는 부부, 어머니, 그리고 닿아있지만 않지만 히비야 공원에서 간혹 보는 사람들. 그들의 일상이 마치 풍경처럼 펼쳐져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와의 관계가 가까워지는건지 아닌건지 잘 모를.. 이 관계가 발전할 것인지 아닌지도 모를, 결과따위 없는, 지금 이 상태의 한 일상. 가끔 요시다 슈이치 소설을 읽으면.. 뭘 말하고 싶을까? 하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확실한 메시지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저 현대의 인물은 이런 모습이야. 라는 정도를 보여주는 것일까? 너만 아니라 모두 그래. 라는 걸 알리고 싶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캐러멀 팝콘'에서도 그랬고, 다음 '플라워스'에서도 조금 그렇습니다. '플라워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참 기분이 안좋았는데 '나가사키'와 조금 닮아있습니다. 나가사키 보다가 너무 우울해서 덮었는데, 굳이 이런 소설은 쓰지 말아줘.. 라는 제 취향의 선을 넘어선 작품이랄까요. 그 소설의 불안함 덕분에 지속해서 보지 못했는데, 그 불안함이 닮은 것 같습니다. 나의 것이 아닌, 생활을 하면서 이것이 그저 나의 것인 일상이라고 생각하는.. 그러나 이것이 지속되지 못한달까.. 그것을 감각적으로 느낀다는 면이랄까.. 결국 그곳으로부터의 탈출이라던가 그런 것. 그러나 정작 실질적 탈출은 하지않고 그저 지금의 일상만을 잘라둔듯. 결말 따위는 없는 것. 잘못한 사람은 있지만 그것이 흑과 백으로 나뉘어서 당연한듯 그는 벌을 받아야하는 정당성에 대해 고민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또 내 일상과는 멀어졌기에 잊은 듯도 하고 앞으로 벌어질, 혹시 내게 같은 일이 일어나 나 자신이 피해자가 될지 모를 불안한 요소 또한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요시다 슈이치 소설을 읽으면 좀 불안한 느낌이 드는 면도 있습니다. 물론 좋아하지만....요시다 슈이치는 좀 에쿠니 가오리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마치 깨어질 듯한 아슬아슬한 마음이 깃들어있달까요.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잘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은 지속성도 보여준달까요. 오사키 요시오랑도 조금 닮은 것 같고.. 그래서 이사카 코타로의 과감한 유쾌함이 좋습니다. (비록 비도덕적이라고 해도) 간혹 아닌 작품도 있긴 하지만요. 아직 요시다 슈이치 소설을 전부 읽은 것은 아니라 이런 평가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좀 유쾌함을 얻어보고 싶네요. 이런 작가의 유쾌함은 어떨까.. 싶어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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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욕제와 향수를 주아이템으로 하는 회사의 상푸홍보 겸 영업을 담당하는 나는 어느날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바로 옆에 있던 선배 긴토가 내린 사실을 잊고, 옥외 광고판의 ‘죽은 다음에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의사(意思)입니다.’라는 문구를 읽다가 사람들로 가득한 지하철에서 그만 혼잣말처럼 이렇게 내뱉고 만다. “잠깐 저것 좀 봐요. 왠지 좀 으스스하지 않아요?” 일순 승객들이 자신을 일제히 쳐다보고 굉장히 창피할 수도 있는 위기의 순간 한 여자가 이렇게 대꾸한다. “정말 그렇네. 으스스해.” 그리고 나는 얼마 후 점심 시간이면 의례히 휴식을 취하는 공간인 히비야 공원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
나와 그녀, 선배인 긴토와 그 딸, 우타가와 부부, 옛 친구이자 첫사랑인 하나코, 공원의 기구 띄우는 사내 등 등장인물들은 특별한 구석이 그닥 보이지 않는 평범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딱히 치열한 갈등들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커다란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지만, 부정형의 추상적 인물들인 듯한 이들은 하나의 선이 빠져버린 사각형처럼 불안해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끈기 넘치는 관찰과 만화적인 장면 전환으로 이들 등장인물들은 물론 작품 전체에 독창성을 부여한다. 의미 없어 보이는 등장인물들의 행동은 자꾸만 읽는 이의 머리 속에 상상의 방, 이미지의 홍수를 낳도록 만든다. 소설이 아니라 만화를 읽을 때 간혹 느끼곤 하는, 작중의 스토리 전개와는 무관하게 발생하는 주관적인 액자 스토리가 발생하고 마는 것이다.
이쯤 되고 보면 혹시 만화와 영화 등 타장르의 장점이 적당히 결합된 젊은 작가의 스타일리쉬한 소설쯤인가 넘겨 짚게 되는데, 사실 소설은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이라는 아쿠다카와 상의 2002년도 수상작이다. 소설은 형식상의 독창성 이외에도 군데군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정곡을 찌르는 작가의 사회 인식이 의외로 튼튼하다.
“우타가와 부부의 집 거실에서 30분 정도 사운드를 꺼놓은 채 ‘뉴스 스테이션’을 본 다음 라거펠트를 목욕시켰다... 텔레비전의 볼륨을 높이자 빈 라덴도, 부시도, 파월도, 샤론도, 아라파트도, 뉴스해설자까지도 모두 심각한 말들을 쏟아내어, 마치 그 말들이 사고(思考)를 낳고 거기서 태어난 사고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사운드를 죽여 보면 인간의 사고 따위는 온데간데없고 다만 걷고 앉고 누워 있는 인간들의 몸뚱이만 보인다. 빈 라덴의 야윈 몸이 어떤 나쁜 짓을 할 것이라고도 생각되지 않았지만 반대로 건강한 부시의 몸이 어떤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소리 없는 뉴스 영상에서는 신기하게도 몸뚱이들만이 부당한 피해를 입고 있는 듯 보였다.”
마침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 이라크에서의 한국인 살해라는 극단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딱히 작가의 권유가 아니라 그 내용이 너무 끔찍하였기에 나는 사운드를 죽이고 뉴스 영상을 들여다보고는 했다. 빈 라덴이 빠진 자리에 알 카르자위가 끼어들고, 샤론이나 아라파트가 있어야 할 자리에 참으로 어이없게도(도무지 이들과 어떠한 인과관계도 찾을 수 없는, 단지 미국의 실질적 속국이라는, 이제는 전세계 만방에 알려져 새로울 것도 없게 되어버린) 대한민국 정부와 그 정부의 어설픈 고위관리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티비 모니터를 차지하고 있었다. 더불어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이라크 민중, 미국으로 인하여 양산되고 분화되고 네트워크화된 직업적 테러리스트와 토착 민병대, 그리고 착하디 착했을 것으로 보이는 한 청년의 살아생전 몸뚱이만이 서로 다른 메시지를 하염없이 뱉어내고 있었다.
좋은 소설이란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스스로 하나의 의지를 가지고 전파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난 책을 읽는 동안, 책을 읽은 후에도 위에 인용된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말로 인해 피해를 보는 몸뚱이들, 국가의 잘못된 사고와 결정으로 인해 피해를 본 개인이라는 설정이 너무나도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져 섬뜩하기까지 했다. 가볍디 가벼운 소설처럼 보이지만 상의 수상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ps. 「플라워스」. 책에는 「파크 라이프」외에 한 편의 소설이 더 실려 있다. 사실은 이 소설을 읽을 때 작가의 작풍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에는 극명하게 드러나는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딱히 어떠한 갈등의 구조 같은 것이 없다. 그런데도 소설은 잘 읽히기만 하고, 스토리 전개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갈등의 구조가 없는 소설이라... 그런데 이 문장을 읽게 되면서 무릎을 딱 치고 만다. “...그런데 보통 이중인격이라는 건 좋은 사람하고 나쁜 사람으로 딱 안팎이 구분되잖아. 좋은 사람과 좋은 사람으로 묶인 이중인격이란 건 없을까? 겉이나 안이나 좋은 사람.” 그러니까 요시다 슈이치의 등장인물들은 선과 악으로 나뉘지도 않고, 그 캐릭터 내부에서도 선과 악의 갈등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 선과 선 악과 악이라는 같은 형질의 지층 안에서 분열하는 현대인의 정신 구조를 그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우타가와 부부의 집 거실에서 30분 정도 사운드를 꺼놓은 채 ‘뉴스 스테이션’을 본 다음 라거펠트를 목욕시켰다... 텔레비전의 볼륨을 높이자 빈 라덴도, 부시도, 파월도, 샤론도, 아라파트도, 뉴스해설자까지도 모두 심각한 말들을 쏟아내어, 마치 그 말들이 사고(思考)를 낳고 거기서 태어난 사고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사운드를 죽여 보면 인간의 사고 따위는 온데간데없고 다만 걷고 앉고 누워 있는 인간들의 몸뚱이만 보인다. 빈 라덴의 야윈 몸이 어떤 나쁜 짓을 할 것이라고도 생각되지 않았지만 반대로 건강한 부시의 몸이 어떤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소리 없는 뉴스 영상에서는 신기하게도 몸뚱이들만이 부당한 피해를 입고 있는 듯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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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일본소설을 두고 사(私)소설이라며 폄하했던 적이 있었다. 일본소설만이 갖고있는 독특한 비유의 문체와 자기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서만 적어내려가기 때문에 끝에 이르러서는 어떠한 결론도 내지 않고 자기 속으로 다시 침잠하여 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는게 폄하의 요지였다.
책 뒤편에 붙어있는 평론에서는 ‘언뜻 보면 아무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듯 읽을 수 있으나, 그것이야말로 현실의 진면목을 사실적으로 실현하는데 작가가 성공했다‘며 칭찬하지만 글쎄. 그렇다고 그것이 리얼리즘의 성공이란 말인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또 ‘현실은 때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라는 얘기를 떠올려본다면 정말 그렇게 써도 된단 말인가?
물론 단편적인 사건만을 제시하는 것으로 훌륭한 이야기를 끌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파크라이프’의 아쉬운 점은 그 단편적인 사건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얽히는데 실패해 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어졌다는 것이다. 내가 읽어낼 수 있었던건 오직 파크라이프도 한 삶의 방편일 수도 있겠다는 것. 재미있는 삶의 방식일 수도 있고, 좋은 소설의 배경일 수도, 흥미로운 책 제목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뿐이었다.
‘파크라이프’를 두고 사소설 운운하면서 깎아내리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재미이기 때문에, 사소설이든 사소설이 아니든 재미가 없는 소설에 대해서는 혹평할 수 밖에 없다. 일본소설 특유의 잔잔한 문체를 바탕으로 마음을 흔드는 소설 하나를 기대한다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 [인상깊은구절] “그쪽, 애인 있어?” “네?” 그녀의 질문은 상당히 당돌한 것이었지만, 벚꽃잎이 연못수면 위로 살포시 떨어져 앉은 것 같은 아주 자연스런 당돌함이었다. “애인은 없어요.” “딱 잘라 말하네.” “척해봐야 소용없잖아요.” “혼자 지낸 지 꽤 오래 됐지?” “딱 잘라 말하네요.” “척해봐야 소용없는 거 알잖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