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만 먹고 들어오면 소년을 때리던 아빠가 있었다. 아빠의 그 폭행에 작은 아이의 몸은 늘 퍼렇다 못해 까맣게 물들어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폭행의 매질에 무감각함을 느낄 정도였다. 이모는 아빠를 고발했고, 아빠는 산에서 목을 메어 자살을 했다. 몸이 허약한 엄마와 남은 소년, 결국 엄마마저 병으로 죽음을 맞게 되었고, 죽은 엄마의 시체 옆에서 허기에 말라진 모습으로 4개월만에 발견되었다. 신의 대리자인 교황이 있다. 파킨슨병과 결장에 생긴 종양이 악성으로 변하면서 육체의 고통을 겪고 있었던 교황, 그러나 그 모습을 숨기기보다는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그리고 아우슈비츠와 가까운 작은 마을 폴란드 바도비체에서 태어났던 교황도 있었다. 아우슈비츠의 매서운 눈바람을 마주서고 있었던 작은 아이가 고통을 감당하면서 교황으로 성장하기도 한 것이다. 방송국 연출자인 화자는 신의 대리자인 교황과 폭력에 시달리며 극빈의 삶을 살고 있는 한 소년의 두 생애가 가지고 있는 다른 고통에 대해 프로그램을 만들고자 한다. 한 사람은 신의 은총의 고통이었고, 한 사람은 무의미한 고통인 두 생애의 다른 고통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점차로 두 고통이 결국 같은 하나의 고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극과 극의 두 생애가 아닌 한 생애의 같은 고통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게 된다. 고통이라는 이름은 그 어떤 생애 속에서라도 같은 이름과 같은 색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빛바랜 사랑을 이제와서 다시 내뱉고 있는 한 여성이 있다. 20년도 더 흐른 세월이 걸음을 한 이 시점에서 그 옛날의 사랑이 그립다며, 그 옛날의 당신 사랑이 얼마나 절절했는지 알겠노라며 만나고 싶다는 전화를 한 빛바랜 사랑 속의 옛 여인의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왔다. 말없이 자신에게서 떠나버렸던 그 애써 덮어버린 추억 속의 여인이.. 하지만 약속 장소에는 그 여인이 아닌 그녀의 딸이 나와 있었다. 그리고 듣게 되는 그녀의 이야기, 여성은 여성이라는 존재만으로도 희생자의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그 이야기를 말이다. 그리고는 예수처럼 희생자적 삶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그녀의 숭고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한 여자가 있었다. 100킬로 이상의 몸무게를 가지고 있는 뚱뚱한 여성, 하지만 그녀 안에는 바비 인형같은 모습을 꿈 꾸는 자아도 있다. 먹으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 탐식녀와 먹은 것을 토하면서 바비 인형처럼 매말랐을 정도로 날씬한 여성이고 싶은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마른 여성, 이 두 여성은 모두 그녀 한 사람이다. 그녀 안에서 싸우고 있는 두 자아의 모습인 것이다.
이 책은 [두 생애], [그 남자는 왜 거기에 서 있었을까], [희생], [바비 인형], [강의 저쪽], [그는 누구인가], [폭력의 형식]이라는 7개의 이야기로 채워진 정찬씨의 소설집이다. 뒷편에는 문학평론가 홍정선씨의 저자와 소설집에 대한 해설을 적은 부분도 실려 있어, 이 책을 읽는 일에 도움을 덧되어주고 있다. 진지한 소설집이었으나 느리게 읽게 되지는 않으니 그 무게감에 겁낼 필요는 없을 듯 하다. 길지 않은 7편의 이야기들이 그 각각의 진지함을 담고 있지만 짧다는 장점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진지함이 싫다면 지금은 아무 생각없이 읽다가 나중에 되씹어 보아도 괜찮을 것 같다. |
|
나는 사람마다 모두 천착하는 주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예술로 표현할 것이고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정치로 드러내려 할 것이다. 정치도 예술도 하지 않는다면 일상을 사는 중에 드러날 것이고, 혹여라도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내내 머릿속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표현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나와 함께 살아간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찬 의 소설집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이승우가 떠올랐다. 책의 말미 '홍정선'의 해설을 읽노라면, 정찬은 국내 다른 소설가와는 다른 소설을 쓴다고 했는데, 나 역시 그 해설에 적극 동의한다. 내게는 그런 작가가 정찬으로 인해 둘이 생긴 셈이다. 국내의 여느 작가들과는 다른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나는 이승우만 생각해오고 있었는데 정찬 역시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르다'는 것은 내게는 좀 더 긍정적 평가다. 나는 이승우를 많이 읽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읽을 것인데, 이 작가는 다르다, 는 생각을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하기 때문이다. 정찬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이 작가는 다르다, 마치 이승우 같다, 했다. 글을 쓰는 것, 글에 담는 생각, 그것을 표현하려는 것이 모두 독보적인 것에서도 그렇지만, 이 둘이 뭔가 한가지에 천착하는 것도 그렇고 깊이 생각하고 공부하다보니 그것은 단순히 자기들이 먹고 사는 일에 관련된 문학 뿐만이 아닌 신앙까지 닿는 것, 들이 그렇다. 이승우야 신앙인이 되려고 했던 사람이지만 정찬의 약력을 보니 딱히 그렇진 않았다. 공부라는 건, 그것이 어떤 분야가 됐든 결국에는 철학에 닿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종교(신앙)도 지나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승우가 '아버지와 나'에 대해 천착하며 그것을 놓지 못하고 있다면 처음 읽는 정찬은 그것이 '폭력'이었다. 정찬은 계속해서 폭력에 대해 말한다. 폭력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계속해서 말한다. 내가 이 책에서 제일 처음 읽었던 단편 <희생>은 한 여성이 국가로부터 당한 폭력을 얘기하고 있다. 1980년대가 배경이고 사랑하는 남자가 수배중인데 경찰들은 여자를 잡아가 그 남자의 행방과 평소 태도를 묻고 잘 모른다고 대답하는 여자를 잔혹하게 고문하며 강간한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임신을 하는데, 그래서 사랑하는 남자에게 갑자기 자기 행방을 알리지 않은 채로 이별을 고한다. 그 아이를 낳기로 하고 의학을 공부하고 난민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이 당한 폭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많은 희생자와 피해자들의 곁에 서서 다른 사람들은 이런 아픔을 겪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담는다. 작품 속 여자는, 인간이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행동하는 거다.
내가 정찬이란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정희진' 선생님 때문이었다. 워낙 극찬을 하시고, 심지어 절판될까봐 같은 책을 몇 권씩 사둔다고 하셨던 바다. 도대체 그 작가가 왜? 하는 마음으로 정찬의 소설을 한 권 사두고 미루었다가, 이번에 이 《두 생애》를 사서 먼저 읽게 된 것. <희생>이란 작품을 읽으면서, 아, 이래서 정희진 쌤이 정찬을 좋아하는구나, 했다. <희생>은 세번째 단편이었는데 그 후에 바로 읽은 첫번째 단편 <두 생애>는 늙어가는 교황과 아무 이유없이 고통에 희생된 어린 소년의 삶을 대비시키며 고통에 대해 얘기한다. 와, 이 작가는 폭력과 고통을 놓지 않는구나. 그런 한편 어떤 '간절한 마음' 같은 것도 역시 놓지 않는다. 이해하려고 하고 받아들이려하고 깊이 보려고 하는 시선이 있구나, 했다. 그 뒤에 차례대로 읽은 다른 단편들은 좀 애매했고, 마지막에 읽은 <폭력의 형식> 에서 나는 너무나 끔찍함을 느끼고 만다 ㅠㅠ
<폭력의 형식>은 위의 인용문에서 지칭한 '분노가 다른 폭력으로 치닫게'된 경우를 썼다고 할 수 있다. 얼마전 뉴스에서 보았던 기사가 바로 오래전의 이 소설에 담겨 있었다. 보육원에 맡겨진 어린 손녀를 데려다 성폭행 한 사건이 뉴스에 나왔다면, 이 <폭력의 형식>에서는 보육원에 맡겨진 어린 남매들중에 여자 조카만 데려온 이모와 이모부가 있다. 그 뒤의 이야기는 기사에 대해 언급했으니 짐작 가능할 것이고, 보육원에 어린 여동생보다 좀 더 머물렀던 소년도 결국 이모부 집에 가게 되는데 그 사이에는 몇 년의 시간이 있었고, 낯선 이모부는 자신에게 검정고시로 교육을 좀 받으면 어떻겠느냐 제안한다. 어릴 적에 부모를 잃고 따뜻하게 감싸주는 어른들이 없던 소년에게 이건 너무나 감사한 제의였고 그는 눈물을 흘리며 이모부를 존경한다. 그러다 이모부가 어린 자신의 여동생에게 계속해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걸 알게 되는데, 이 때 그의 분노는 그 가해자인 이모부를 향하는 게 아니라 어린 희생자이자 피해자인 여동생을 향한다. 이 소년에게는 자신에게 따뜻하게 해줬던, 자신에게 공부를 하라고 해줬던 저 어른을 미워할 의지와 마음이 좀처럼 생겨나질 않는 거다. 미워해야 하는 건 저 가해자인데 그걸 알지만 미워할 수 없고, 그러나 일어난 이 일은 너무나 부조리하고 분노해야 할 일이고, 그렇게 소년 안에 자라게 된 폭력적인 성향은 절대 그렇게 나와서는 안되는 방향으로 나오게 된다.
나는 이 단편이 너무 읽기에 힘들었고, 와 이 책을 내 책장에 꽂아둬야 하나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앞의 <두 생애>를 두고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는데 이 <폭력의 형식>이 너무 힘든 거다. 자라나는 아이에게 폭력적인 환경이 주어지고 부당한 폭력이 그 아이에게 연속해 가해지고 그런 아이가 자라는 과정에서 그리고 어른이 되고 나서도 폭력을 제 안에서 숨길 수 없게 되는 이야기는, <희생>에서 용서하고 세상을 바꿔보려는 여자와는 다른 결로 흘러가지만, 그러나 폭력이 허용되는 안된다는 이야기의 맥락은 같다. 그렇지만 이건 읽기에 진짜 너무 힘들었다. 만약 정찬을 읽을 때 가장 먼저 읽는 단편이 <폭력의 형식>이었다면, 나는 다른 작품들을 읽지 않았을 것 같다. 이 단편을 읽고서는 '정희진 쌤은 어느 지점을 좋아한걸까' 하고 생각해보았지만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이 단편은, 읽을 때 주의를 요한다.
왜 우리가 천착하는 주제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살아오면서 어떤 일이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인건지 도대체 왜 어떤 것에 그렇게 집착하면서 파고 들어가고 계속 알아보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엔 어떤 말을 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인듯하다. 정찬에게 그것은 폭력이었던 것 같다.
읽기에 쉬운 소설은 아니다. 읽기 전에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소설이다.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권할 수도 없다.
|